# 154
학사환생 154화
도제는 온천에 몸을 담근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권력을 손에 얻기 위해 많은 즐거움을 포기한 그에게 온천은 유일한 낙이었다.
무림맹 인근의 장원에도.
그리고 도제의 세력기반인 도천에도.
오로지 그만을 위한 온천이 존재했다.
특히 중요한 일을 앞둔 때면 도제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온천에 머물렀다.
‘지금까지와는 다르다. 마교는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도제의 정보망엔 시시각각으로 마교의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었다.
‘이미 수많은 세력이 궤멸당했으며 그 이상의 세력이 마교의 손을 잡았다.’
마교는 악성종양처럼 빠르게 무림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물론 무림맹의 대처가 미흡했던 것은 아니다.
‘무림맹 역시 전례 없는 선제대응에 나섰다. 하지만 열 사람이 도둑 하나 못 막는다고. 무림맹은 마교의 침투를 완벽히 방어해내지 못했다.’
도제는 확신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마교는 성공적으로 무림에 자리 잡을 거라고.
그전에 완전히 뿌리 뽑지 못한다면 무림의 세력구도는 완전히 뒤바뀔 것이다.
무림맹과 마교의 대결구도가 펼쳐지는 것은 필연.
‘이런 상황에서 중립을 유지하며 무리맹과 마교 사이에서 줄타기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미 마교는 몇몇 세력을 본보기로 삼았다.
마교에 협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준 것이다.
‘오랜 세월 중립을 유지한 철혈성도 선택을 내리겠군.’
아직 무림맹과 마교 중에 어떤 곳도 선택하지 않은 세력들은 철혈성 눈치를 보고 있을 터.
철혈성이 무림맹과 마교의 균형추라고 봐도 무방했다.
무림맹과 마교 역시 그걸 모를 리 없으니 다음 전장은 철혈성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변수는 철혈성뿐만이 아니다.’
최근 급성장한 천씨세가를 빼놓을 수 없었다.
천씨세가는 철혈성과는 경우가 조금 달랐다.
천신우를 필두로 천씨세가는 이미 마교와의 전면전에 뛰어들었다.
마교 입장에선 천씨세가를 가만히 놔뒀다간 대세를 그르칠 수 있었다.
‘마교의 최정예들이 천씨세가를 응징하기 위해 나서겠지. 어쩌면 이미 움직였을지도 모르겠군.’
전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도제의 선택뿐.
사실 이미 결정을 내린 도제였다.
원래라면 무림맹과 마교가 상잔하길 기다리며 힘을 비축했겠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나를 무시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도제는 누구보다 권력욕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것은 그만큼 그가 자존심이 강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자발적으로 자세를 낮출 수는 있을지언정.
남에 의해 강압적으로 무릎을 굽힌다는 것은 도제 인생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번쩍!
희뿌연 수증기 사이로 도제의 눈이 뜨였다.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도제의 눈빛은 정력적이었다.
첨벙.
온천 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시비들이 수건으로 도제의 몸을 닦고 무복을 입혔다.
푸른 무복을 걸친 도제가 위풍당당하게 복도를 걸었다.
저벅저벅.
귓가에 울리는 발소리가 오늘따라 유독 크게 느껴졌다.
‘나답지 않군.’
큰 결정엔 큰 책임이 따른다.
오늘 내린 결정으로 인해 도천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도제는 망설이지 않고 복도 끝자락의 문을 열어젖혔다.
눈부신 햇살이 머리 위로 쏟아졌지만, 도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단상에 올랐다.
단상 아래 연병장.
그곳엔 무려 2천 명이 넘는 도천의 고수들이 도제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중무장하고 열과 오를 맞춰 도열한 그들의 눈빛이 형형히 빛났다.
도제가 찬찬히 그들을 돌아보았다.
오랜 세월 공들여 키운 정예무인들이었다.
도제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그들이었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도제의 수염이 휘날렸다.
“전군! 출진이다!”
도천의 표적은 얼마 전에 소재를 파악한 마교의 거대지부.
도제는 마교를 선제공격하기로 결정했다.
* * *
마교 본산.
문사 차림에 염소수염을 기른 노인이 이동식 의자에 앉아 있었다.
척 봐도 거동이 불편해 보이는 그는 염마존. 마교 최고의 두뇌였다.
마교의 모든 전략이 염마존의 손을 거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천신우의 손에 죽은 진사명과는 일을 진행하는 방식이 달랐다.
진사명은 무림맹에 잠입해 작전을 수행한 반면.
염마존은 본인의 집무실을 떠나는 법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항상 무림 전역에서 일어나는 일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걸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바로 염마존이 거느린 정보조직 마해.
그리고 집무실의 존재였다.
염마존의 집무실은 특이하다 못해 기괴했다.
벽과 천장엔 온갖 기관장치들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것들은 모두 정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장치였다.
철컹-!
지금 그 기관장치 가운데 하나가 작동하며 염마존의 손에 두루마리 하나가 툭하고 떨어졌다.
염마존은 능숙한 손길로 두루마리의 봉인을 뜯었다.
보고서 내용을 확인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제가 움직였군.”
어느 정도는 예상한 바였다.
도제는 마교의 전령을 죽임으로써 확실히 의사를 표현했었기에.
“그래도 선제타격에 나설 줄이야. 과감하군.”
도제라는 인물을 다면적으로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 없는 결정.
“그렇다면 본교에서도 맞불을 놔야겠지.”
이빨을 드러낸 늑대를 내버려 두면 산중의 질서가 무너진다.
도제를 처참히 짓밟아야 제2, 제3의 도제가 나타나지 않을 터.
‘하긴 제2의 도제라는 표현은 어찌 보면 어울리지 않을지도.’
오히려 도제가 제2의 천신우라고 봐야 했다.
마교에 가장 먼저 이를 드러낸 것은 천신우였으니까.
그의 치명적인 송곳니에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마교 고수들이 목숨을 잃었던가.
‘물론 그것도 오늘까지다.’
염마존의 시선이 방금 확인한 또 다른 보고서에 머물렀다.
염마존 직속 정보조직 마해의 정보원이 죽었다는 내용.
하지만 염마존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전해진 소식 때문이었다.
‘광마존! 그가 나선 이상 천신우 그놈은 반드시 죽는다.’
추측이 아닌 확신이었다.
팔마존은 정말이지 격이 다른 절대강자들이었으니까.
무림 전역을 전부 뒤지더라도 팔마존을 상대할 만한 고수는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물론 팔마존들 사이에도 격의 차이는 존재한다.
냉정히 평가해서 광마존은 팔마존 가운데 상위권이라고 보긴 힘들었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만큼은 마존들 가운데 최고였다.
‘광마존만큼 잔인하고 악랄한 존재도 없지.’
염마존은 확신했다.
천신우가 지금까지 살아 있었음을 후회하게 될 거라고.
광마존이 선사할 고통이 그만큼 고통스러울 거란 의미.
‘곧 소식이 들어오겠군.’
이윽고 보고서들은 염마존의 손바닥에서 재가 되어 사라졌다.
내공만으로 불길을 일으키는 지고한 경지에 오른 염마존이다.
이동식의자에 의지하는 신세임에도 그는 마교에서 손꼽히는 고수였다.
어린 시절 하반신을 잃었지만 특유의 천재성과 끝없는 노력으로 장애를 극복했던 것.
그 천재성이 지금 천신우의 죽음을 예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북해빙궁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염마존의 예상과는 차이가 있었다.
* * *
꽈아아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천신우와 광마존이 뒤로 밀려났다.
충격의 여파는 정말이지 엄청났다.
망루가 무너지고 주변의 지세가 바뀔 정도.
곳곳에 구덩이가 파이고 흙무더기가 생겨났다.
피를 탐하며 몰려들었던 맹수들로선 날벼락을 맞은 셈이었다.
끄응!
후폭풍에 휩쓸린 맹수들이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하지만 광마존은 맹수들을 돌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굉장하구나.”
어느새 광마존의 입가에선 비웃음이 사라졌다.
거들먹거리던 자세도 고치며 지면에 내려섰다.
조금 전에 자운검과 충돌한 주먹이 저릿저릿했다.
온몸에 무성한 털이 쭈뼛쭈뼛 서는 느낌.
“오랜만이군. 이런 기분은.”
수련을 게을리 하진 않았다.
하지만 마존의 자리에 오른 이후론 실전에서 멀어진 광마존이었다.
일방적인 학살이야 수도 없이 자행했지만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렇기에 천신우와의 격돌은 광마존에게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왔다.
“몸은 풀었으니 지금부턴 전력으로 가자고.”
광마존의 기세가 한층 강렬해졌다.
그의 주변으로 바위들이 떠올랐다. 모래바람이 인정사정없이 휘몰아쳤다.
지금 이 순간 광마존은 거대한 산악이었다.
크고 거칠었다.
반면 그에 맞서는 천신우의 전신엔 은은한 빛이 감돌았다.
거듭된 성취를 이루며 생긴 변화였다.
이미 벽을 넘어 세 번째 계단에 도달한 천신우였다.
그리고 그 경지는 절대강자를 가늠하는 기준이기도 했다.
마교에선 천마와 팔마존들만이 도달한 경지였다.
차아아앙-!
천신우의 자운검이 경쾌한 금속성을 토해냈다.
천신우와 함께 성장해 온 자운검은 광마존이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좋아! 시작해 볼까.”
광마존과 거의 동시에 천신우도 움직였다.
중간지점에서 정확히 맞닥뜨린 천신우와 광마존이 공방을 주고받았다.
쉬이이익!
천신우의 자운검이 기묘한 변화를 일으키며 광마존의 급소를 연거푸 노렸다.
광마존의 주먹은 정확히 원하는 지점을 타격하며 기세를 더해갔다.
이윽고 천신우와 광마존의 신형이 교차했다.
위치가 바뀐 천신우와 광마존은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권왕과 비슷하면서도 다르군.’
천신우가 광마존에게서 받은 느낌이었다.
권왕과 광마존 역시 야성적인 감에 의존해 싸웠지만.
광마존은 매순간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다시 가자고!”
광마존이 거칠게 돌아섰다.
천신우 역시 뒤돌았지만 움직임은 한결 부드러웠다.
천신우가 걸어온 무공의 길이 그러했다.
어느 한쪽으로 모나기보단 균형 잡힌 천신우였다.
검뿐만 아니라 암기와 박투술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보통 이런 경우 어중간하다는 평가를 받게 마련이지만.
천신우의 경우는 예외였다.
번쩍!
순식간에 광마존 코앞에 나타난 천신우가 자운검을 찔러갔다.
동시에 광마존도 주먹을 내질렀다.
자운검은 그야말로 아슬아슬하게 광마존의 뺨을 스쳤다.
보통 상대라면 스친 것만으로 얼굴이 찢겨져 나갔을 터.
하지만 광마존의 뺨엔 생채기 하나 없었다.
애초에 검의 궤도를 호신강기로 바꿔버린 광마존이었다.
반면 광마존의 주먹은 정확히 사선으로 맞닿은 지점에 멈춰 있었다.
천신우가 찰나의 움직임으로 공마존의 주먹을 흘려보낸 것이다.
간담이 서늘해질 상황이었지만 천신우는 침착했다.
반면 광마존은 더욱 흥분이 고조된 모습이었다.
“크하하하!”
광마존이 기분 좋게 웃었다.
그는 싸울수록 더욱 흥분하고 그만큼 더 힘을 발휘하는 부류였다.
지이이잉!
천신우의 자운검이 진동하며 시린 백광이 서렸다.
광마존의 주먹이 시퍼렇게 물들었다.
단지 내공을 흘려보내는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 두 사람이었다.
검강과 권강!
절대강자들만이 발하는 격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격전을 벌이던 마교와 북해빙궁의 고수들조차 잠시 멈추고 지켜볼 정도였다.
“가공할……!”
진면모를 드러낸 광마존도 엄청났지만.
그보다 놀라운 것은 천신우였다.
천신우의 강함을 익히 경험한 북해빙궁 무인들조차 지금의 모습은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들의 경악 어린 시선을 비웃기라도 하듯 천신우와 광마존이 더욱 기세를 끌어올렸다.
두 사람은 서로 느낄 수 있었다.
서로 전력을 다하고 있음을.
이번 격돌로 인해 서로 엄청난 피해를 입을 것임을.
어쩌면 둘 다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면서도 천신우와 광마존은 미소 지었다.
죽음의 위협마저 즐길 수 있는 강자의 품격이었다.
두 사람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지는 순간.
쐐애애애액!
후우우우욱!
천신우의 검강과 광마존의 권강이 허공을 찢어발겼다.
꽈아아아아앙!
귀를 찢는 폭음과 함께 천신우와 광마존의 신형이 아래로 추락했다.
엄청난 속도로 떨어지면서도 두 사람은 공방을 멈추지 않았다.
쏴아아아앙!
천신우의 자운검이 뱀처럼 광마존의 신형을 옭아맸다.
광마존의 주먹은 당장에라도 천신우의 머리를 터뜨려버릴 위력을 뿜어냈다.
서로 몸을 빼낼 새도 없이 천신우와 광마존이 함께 지면에 충돌했다.
쿵!
자욱한 분진이 사방을 뒤덮었다.
한발 늦게 천신우를 쫓아온 북해빙궁 궁주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일전을 지켜보던 모두가 눈을 떼지 못했다.
이윽고 흙먼지가 걷히며 우뚝 서 있는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먼저 그 광경을 확인한 궁주가 탄식을 내뱉었다.
“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