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
학사환생 153화
“헙!”
척사기는 헛바람을 삼키며 주저앉았다.
뭉텅이로 잘려 나간 머리카락이 척사기 얼굴 위로 떨어졌다.
만일 바로 피하지 않았다면?
잘려 나간 것은 머리카락이 아니라 목이었을 것이다.
물론 안도의 한숨을 내쉴 여유 따윈 없었다.
쉭쉭쉭!
숨을 돌릴 새도 없이 뿌려지는 공격에 척사기가 몸을 날렸다.
“적이다! 이놈부터 막아!”
물론 무의미한 외침이었다.
마교 고수들보다 천신우의 움직임이 빨랐던 것이다.
어느 틈에 척사기 앞에 나타난 천신우가 그대로 복부를 발로 걷어찼다.
퍼억!
“커헉!”
신음과 함께 허공에 떠오른 척사기의 눈동자에 천신우의 모습이 비쳐졌다.
뒤늦게 가세한 마교 고수들이 사방에서 천신우를 덮쳐오는 것도 보였다.
제발!
간절한 바람이 무색하게 천신우의 자운검은 척사기의 가슴을 반으로 쪼개놓았다.
전투에 나설 때마다 깨끗이 세탁한 순백색의 경장만을 고집해 온 척사기다.
하지만 지금 그의 순백색 경장은 검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척사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지막 기력을 쥐어짜내 저주를 퍼붓는 것이 고작.
‘나는 죽지만 천신우 네놈도 무사하진 못할 것이다.’
척사기의 간절한 바람에 호응하듯 마교 고수들의 검이 천신우를 향해 찔러졌다.
그러나 들려온 것은 바람 소리뿐이었다.
쉬익!
사방에서 천신우를 덮쳤음에도 그들의 검은 허공을 갈랐던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의문에 빠진 마교 고수의 목에 실선이 그어졌다.
그를 시작으로 마교 고수들의 목에서 동시에 피분수가 솟았다.
푸아아악!
“빌어먹을! 죽여!”
동료들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마교 고수들이 일제히 천신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발작하듯 달려드는 그들을 천신우는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가슴으로 날아드는 검을 몸을 뒤로 젖히며 피한 다음.
상대의 목을 잡아채 뒤로 던졌다.
뒤를 덮치려던 마교 고수가 함께 날아가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어진 마교 고수들의 합공 역시 천신우에게 타격을 주지 못했다.
천신우의 신형이 좌우로 흔들리는가 싶더니 날아드는 검을 모조리 피해냈다.
동시에 천신우의 자운검이 비수처럼 쏘아졌다.
푹푹푹!
마교 고수들의 목에 바람구멍을 뚫는 천신우의 움직임은 귀신이 따로 없었다.
자신만만하던 마교 고수들의 눈빛에 두려움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 * *
북해빙궁 궁주는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외곽을 방어하기 위해 달려가다가 척사기와 맞닥뜨려 죽음의 위기에 몰렸던 그녀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당장 그녀와 호위무인들 모두 이곳에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천 공자……?”
어디선가 날아온 창과 함께 등장한 것은 바로 천신우였다.
그리고 그의 등장과 함께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천신우를 저지하기 위해 적들 대부분이 투입됐지만 소용없었다.
그들 가운데 누구도 천신우를 막지 못했다.
심지어 방금까지 궁주를 어린아이처럼 다루던 척사기조차 천신우에게 당했다.
덕분에 북해빙궁 진영에도 한결 여유가 생겼다.
“궁주님!”
궁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다! 기회를 놓치지 말고 공격하라!”
궁주의 외침에 북해빙궁 고수들이 거센 반격을 펼쳤다.
“젠장! 이놈들이!”
마교 고수들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들 개개인의 실력은 북해빙궁 무인들 이상.
하지만 숫자에서 밀렸고 기세에서 밀렸다.
천신우의 등장으로 전세가 완전히 뒤집힌 것이다.
푹푹푹!
“커헉! 감히……!”
여러 자루의 검에 찔린 마교 고수의 모습은 고슴도치가 따로 없었다.
“이런다고 네놈들이 본교를 막을 수는…….”
서걱!
그의 목을 잘라낸 궁주가 목소리를 높였다.
“본궁을 침략한 자들이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여세를 몰아 밀려드는 북해빙궁 무인들의 공세를 마교 고수들은 당해내지 못했다.
마침내 척사기가 이끄는 마교 고수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북해의 차가운 바닥에 나뒹굴었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며 궁주가 천신우를 바라보았다.
싸움에 집중하느라 머리가 산발이 되고 옷은 피투성이로 변했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마치 전장 한복판에 피어난 한 떨기 꽃처럼.
궁주의 입술이 달싹였다.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고 싶은 말도 많았다.
하지만 궁주는 그 모든 말을 삼켰다.
지금 해야 할 말은 하나뿐이었다.
“감사해요.”
“약속을 지켰을 뿐입니다. 다친 곳은 없습니까?”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이곳까진 어떻게…….”
천신우가 손을 들었다.
“그 대답은 일단 적들을 모두 쓰러뜨린 후에 하지요.”
천신우는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멀리 북해빙궁의 외곽지역을 바라보았다.
컹컹컹!
으르렁!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불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 * *
차가운 북해의 바람에 사내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사내 주변엔 정확히 급소를 찔려 절명한 무인들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사내가 있는 곳은 북해빙궁의 망루였다.
북해빙궁의 무인들이 외곽을 감시하는 그곳에서 사내는 북해빙궁 내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것은 바로 천신우의 모습이었다.
‘저자가 천씨세가 소가주란 말인가.’
자신도 모르게 사내의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사내는 마교 팔마존들 중에 일인인 염마존의 심복.
북해빙궁의 상황을 파악해 염마존에게 보고하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사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너무도 달랐다.
사내와 엇비슷한 실력을 지닌 척사기가 천신우에게 속수무책으로 제압당한 것이다.
경각심을 넘어 두려움을 느끼기에 충분한 상황.
‘이대로라면 본교의 북해빙궁 침공이 실패할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가세해야 하지 않을까.’
사내는 혼자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다.
수족처럼 부리는 부하들과 함께였다.
그들 역시 마교에서 내로라하는 고수들.
사내와 함께라면 제압하지 못할 상대가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이 순간, 사내는 확신할 수 없었다.
‘과연 내가 저자를 상대할 수 있을까?’
망설이는 사이.
크르릉!
맹수들 무리가 그곳에 나타났다.
입가에 피를 잔뜩 묻히고도 여전히 피에 목마른 맹수들.
바로 광마존이 기르는 놈들이었다.
사내가 다시 바닥에 쓰러진 마교 고수들을 돌아보았다.
목에 구멍이 뚫리고 가슴이 잘려나간 채로 절명한 그들의 몰골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역시 나로선 저자를 감당하기 힘들다. 무엇보다 내 임무는 북해빙궁의 상황을 염마존께 알리는 것. 굳이 나서 일을 그르치면 곤란하다. 무엇보다 광마존이 계시는데 굳이 내가 나설 필요는 없겠지.’
자기합리화를 마친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그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천신우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 것이다.
‘어디로 사라졌지? 대체 어느 틈에?’
일순 사내는 등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에 척사기가 당한 상황과 너무도 흡사하잖은가!
‘나는 다르다!’
사내가 벼락처럼 뒤돌아서며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등에 묵직한 충격이 전해졌다.
거의 동시에 가슴이 화끈거렸다.
익숙했다.
전에 마교의 다른 고수와 시비가 붙어 불의의 일격을 당했을 때, 느낌이 이랬으니까.
칼날이 피부를 찢고 들어오는 감각.
당시엔 그 즉시 상대의 머리를 날려줬던 사내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힘도, 생각도 들지 않았다.
‘설마…… 혼자가 아니었단 말인가?’
숨을 거두기 직전, 사내가 마지막으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이윽고 사내가 망루 아래로 추락했다.
쿠웅!
추락으로 인해 사지가 뒤틀린 사내의 마지막 모습은 너무도 처참했다.
그러나 사내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당사자들은 그 광경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동료도 서슴없이 죽이는 것이 마교의 율법인가.”
순식간에 날아와 사내의 가슴을 베어낸 천신우가 내뱉은 말이었다.
사내의 등을 짓이겨놓은 거한이 조소했다.
“저런 버러지가 이 몸의 동료로 불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같은 인간인지 의심될 정도의 거대한 체구.
온몸을 뒤덮은 수북한 털들.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지막지한 기세!
그는 바로 마교 팔마존의 일인 광마존이었다.
물론 천신우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광마존은 다른 마교 고수들과 달리 표식을 달고 다니지 않았기에.
알몸에 맹수들의 털가죽만을 걸친 광마존이었다.
그러나 표식이 없다고 해서 상대의 실력마저 숨겨지는 것은 아니다.
천신우는 광마존에게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격을 느꼈다.
무림맹주나 무신과는 다른 종류의 강함.
천신우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설마 네놈은…….”
바로 그 순간.
꽈앙!
광마존의 주먹이 허공을 격했다.
“!”
천신우는 가까스로 몸을 날려 광마존의 기습을 피해냈다.
콰콰쾅!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곳에서 한참 떨어진 망루가 무너진 것이다.
물론 광마존 역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대수롭지 않게 날린 기습이지만 그래도 적잖은 타격을 입힐 거라 생각했거늘.
완벽하게 피해낼 줄이야.
“확실히 보통 놈은 아니구나. 북해빙궁에 너 같은 놈이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거늘.”
광마존이 코를 킁킁거렸다.
“어디 보자. 이 냄새는……!”
코를 벌름거리던 광마존이 눈을 빛냈다.
“그렇군! 네놈이 바로 천신우라는 놈이구나!”
광마존은 마교에서 만든 천신우의 용모파기를 보지 않았다.
대신 천신우가 죽인 마교 고수의 시체에서 냄새를 맡았을 뿐이다.
야성에 가까운 광마존의 후각은 피비린내 사이에 섞인 천신우의 체취를 정확히 기억했다.
크르르!
어느새 광마존이 기르는 맹수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입에 팔다리를 물고 있는 놈들을 확인한 천신우가 입술을 깨물었다.
“네놈…… 설마 광마존인가.”
전생에서 팔마존들에 대한 정보는 천신우의 권한을 넘어선 기밀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광마존만큼은 굳이 무림맹 기밀문서를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맹수들을 끌고 다니며 사람시체를 먹이로 던져주는 광마존은 무림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기에.
사실 소문은 대개 과장되기 마련.
하지만 직접 마주한 광마존은 천신우가 전생에 접한 소문 그 이상이었다.
광마존이 뿜어내는 광기에 몸이 저릿저릿해질 정도였다.
“크크크큭. 오냐. 이 몸이 바로 광마존이시다. 그나저나 용케도 알아서 찾아왔구나.”
광마존이 광소를 터뜨렸다.
천신우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그의 행방을 쫓던 광령의 죽음을 의미했다.
그럼에도 광마존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부하들의 죽음은 그에게 아무런 느낌을 주지 못했다.
짐승 같은 야성을 간직한 대신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대부분 상실한 광마존이었다.
“네놈의 살점을 갈기갈기 찢어 저기 보이는 귀여운 녀석들에게 던져주마. 죽어도 편히 잠들지 못할 것이야. 크하하하!”
광기에 사로잡힌 광마존과 달리 천신우의 눈빛은 차분했다.
숨을 고르며 광마존과의 싸움을 상상했다.
지금껏 이 순간만을 위해 한시도 쉬지 않고 달려왔다.
이제 그 첫 열매를 수확할 때.
천신우의 신형이 천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독야행의 가르침을 통해 습득한 보법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 몸 앞에서 감히 잔재주를 부리다니!”
성난 외침과 함께 광마존이 주먹을 내질렀다.
꽈아앙-!
대기를 떨어 울리는 위력에도 천신우는 서두르지 않았다.
끝까지 광마존의 움직임을. 기의 흐름을 눈에 담고 감각으로 느꼈다.
다음 순간.
날아드는 광마존의 주먹을 향해 천신우의 몸이 빛살처럼 쏘아졌다.
파아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