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
학사환생 150화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
상산노군이라는 절대자가 존재했다.
그는 그야말로 하늘이었다.
사실 상산노군이 있기 전에도 무림이 존재했고 무공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등장으로 과거의 무림은 무의미한 것이 되었고, 예전의 무공은 낡은 것이 되었다.
당연히 기존의 강자들은 상산노군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살수를 보냈고 토벌대를 꾸려 그의 목숨을 노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상산노군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그러나 상산노군은 자신의 무공에 만족하지 않았다.
무공을 완성시키기 위해 그는 무림 전역을 떠돌며 제자들을 거뒀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쳤다.
하지만 시대를 초월하는 재능을 지닌 제자들조차 상산노군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진 못했다.
첫째 제자는 그의 의지를.
둘째 제자는 그의 욕망을.
셋째 제자는 그의 지혜를.
넷째 제자는 그의 연민을 빼닮았을 뿐이었다.
결국 상산노군은 자신이 꿈꾼 무공이 완성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무림의 역사를 완전히 바꿔놓은 그조차도 죽음만큼은 초월하지 못했던 것이다.
스승의 죽음 이후 남겨진 제자들은 저마다의 길을 걸었다.
첫째 제자는 스승의 의지를 받들어 무림맹을 세우고 초대 무림맹주가 되었다.
둘째 제자는 스스로를 천마라 칭하고 자신을 추종하는 이들을 모아 마교를 만들었다.
그리고 대사형에 반기를 들었다.
그들이 싸운 곳이 바로 이곳 설산이었다.
* * *
천신우는 비로소 이곳 설산에 가공할 싸움의 흔적이 남아 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곳에 흔적을 남긴 장본인이 바로 초대 무림맹주와 천마였군. 그럼 당시 누가 이긴 거지?’
* * *
역사에조차 기록되지 않은 혈투에서 승리한 것은 대사형인 무림맹주였다.
그러나 사제를 상대로 거둔 승리는 상처뿐일 수밖에 없었다.
무림맹주는 설산 아래로 추락하는 천마를 바라보며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결국 무림맹주는 남은 생애 내내 칩거했고 죽기 전에야 통천록을 남겼다.
사제가 그랬던 것처럼 악에 사로잡힌 재앙이 무림에 나타날지 모른다는 걱정에서였다.
* * *
천신우는 침음을 삼켰다.
무림맹주는 천마가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론 아니었다.
* * *
초대 무림맹주와 초대 천마가 싸웠던 그날.
설산 아래로 추락한 천마를 구한 것은 막내 사제였다.
사실 그날 패배한 쪽이 무림맹주였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막내 사제는 그저 사형들끼리 죽고 죽이는 것을 바라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게 사제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천마는 마교 본산으로 숨어들었다.
그곳에서 마공을 갈고 닦으며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무림맹주의 수명이 미처 다하기 전에 천마는 죽음을 직감했다.
결국 천마는 죽음을 앞두고 후계자에게 무림정복의 숙원을 이루라고 천명했다.
단, 충분한 힘을 증명한 후에 무림정복을 시작하라는 단서를 달았다.
천마는 후계자들이 자신의 실패를 되풀이하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본 인물이 있었다.
바로 상산노군의 셋째 제자 신기묘산이었다.
신기묘산은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는 다가올 미래를 예측했다.
“대사형은 무림맹을 세워 재앙을 막을 대비를 해두었다. 하지만 고인 물은 결국 썩게 마련.”
신기묘산은 언젠가는 부패한 무림맹이 마교에 의해 무너질 것이라 내다봤다.
마교가 무림을 짓밟게 두고 싶지 않았던 신기묘산은 여러 안배를 마련했다.
만상서고도 신기묘산이 준비한 것들 중의 하나였다.
네 명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신기묘산의 두뇌는 특히 뛰어났고, 무공 이해도 역시 발군이었다.
이론만 따지면 스승에게 가장 근접한 제자가 바로 신기묘산이었다.
그렇기에 신기묘산은 만상서고를 만들고, 그곳으로 이르는 단서들을 무림 전역에 분산시켜 놓았다.
* * *
천신우는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이 걸어온 길이 신기묘산의 안배에 따른 것임을.
만상서고는 처음부터 천마라는 재앙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도.
그런 신기묘산이 마지막으로 남긴 만상서고의 단서는.
‘천씨세가!’
바로 천씨세가에 존재했다.
그 사실을 확인한 천신우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돌고 돌아 천씨세가라니.’
물론 마른하늘에 날벼락과는 달랐다.
적어도 연관성은 충분했다.
천마의 목숨을 구했던 상산노군의 넷째 제자가 바로 천씨세가의 시조였으니까.
‘천사영.’
천신우는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천씨세가 사당에서 천사영이란 이름이 적힌 위패를 보긴 했었다.’
하지만 설마 천사영이 과거 초대 무림맹주와 천마와 어깨를 나란히 한 거물일 줄은 몰랐다.
‘그러고 보니 무림맹이 세워지고 이십여 년 후에, 천씨세가의 역사가 시작됐던가.’
무공에 대한 재능은 다른 사형들 이상으로 뛰어난 천사영이었다.
스승이 가장 공을 들였던 제자도 바로 천사영이었다.
만일 천사영이 끊임없이 정진했다면 스승의 오랜 꿈을 대신 이뤄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작 천사영은 무공에 뜻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검으로 사람을 죽이는 행위에 강한 거부감을 느끼던 그였다.
결국 천사영은 무림맹주와 천마의 싸움을 계기로 검을 내려놓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천사영의 결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병약한 아들이 건강하게 살아가게 하려면 무공을 가르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아들에게 무공을 가르친 것이 천씨세가의 시작이었다.
‘이제 알겠군. 천무검법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병약한 아들이 천사영에게 배운 검법을 정리해 만든 것이 바로 천무검법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도 있었다.
‘분명 천사영은 만상서고의 설계자인 신기묘산과 사형제지간이긴 하다. 하지만 굳이 천씨세가에 만상서고의 마지막 단서를 남길 필요가 있었을까?’
만상서고의 다른 단서들이 보관된 장소엔 모두 사연이 있었다.
그 장소들은 신기묘산 본인 혹은, 스승과 사형제들의 추억이 담긴 장소였다.
중요도를 따져보면 절대 천씨세가에 뒤처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신기묘산이 천씨세가에 마지막 단서를 남긴 이유는.
‘천사영의 재능이 후대에 이어지길 기대했던 거로군.’
신기묘산은 천사영의 핏줄만이 마교를 막아낼 수 있다고 보았다.
물론 원래대로라면 신기묘산의 기대가 무산됐다고 봐야 했다.
전생에서 천씨세가는 마교의 침공을 막아낼 인재를 배출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천신우는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과거로 돌아와 천씨세가 대공자로 환생한 게 과연 우연일까? 만일 필연이라면 그 또한 신기묘산의 안배는 아닐까?’
물론 근거 없는 추측일 뿐이었다.
무엇보다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죽음과 시간만큼은 인간이 절대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기에.
‘하긴 생각한다고 답이 나올 문제도 아니지.’
천신우는 고개를 돌렸다.
주위는 온통 쑥대밭이었다.
유적의 흔적은 찾아보기조차 힘들었다.
지금까지 만상서고의 단서들과는 달랐다.
‘특별한 보상은 없는 모양이군.’
조각상들의 시험을 통해 한 단계 발전했고 만상서고와 관련된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것은 아니었다.
조각상에게서 천신우에게로 중후한 음성이 전해졌다.
-나의 뜻을 이어받은 연자여. 그대가 상대한 조각상들은 알다시피 사형들과 나를 구현한 것이라네.
만상서고의 내막을 알게 되고 나서 짐작은 했다.
조각상들의 정체가 무림맹주와 천마일 거라고.
-물론 본신의 능력을 상당 부분 제한해두었지. 그래서 시험을 통과하긴 어렵지 않았을 거네.
“…….”
-이제 최소한의 자격을 갖추었으니 천씨세가로 가게. 그곳에 마지막 안배를 남겨두었다네.
조각상이 모래성처럼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럼 건투를 비네. 부디 무림에 닥쳐올 재앙을 막고…….
마침내 조각상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유적도. 조각상도.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천신우의 머릿속엔 그 모든 것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이제 내려가자.’
다음 순간, 천신우의 신형이 그곳에서 자취를 감췄다.
* * *
설산 초입에서 부하들의 복귀를 기다리던 마교 광마존의 오른팔 광령이다.
하지만 상황은 그가 기대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빌어먹을!”
설산에서 발생한 눈사태를 목격한 광령이 이를 갈았다.
아무리 고수들이라도 자연재해 앞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저만한 눈사태가 났다면 부하들은 전부 죽었다고 봐야 했다.
“잠깐. 천신우 그놈은 어떻게 됐지?”
광령의 부하들보다도 앞서 설산을 오른 천신우다.
부하들과 마찬가지로 천신우 역시 살아 있을 가능성이 희박했다.
“놈도 죽었겠군. 이제 어떻게 한다.”
원칙대로라면 시체라도 찾아야겠지만.
드넓은 설산에서 천신우의 시체를 찾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눈이라도 녹고 나면 모를까.
물론 무의미한 고민이었다.
뚝뚝…….
문득 들려온 소리에 광령은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봤다.
새하얀 눈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눈을 적시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광령 자신의 피였다.
‘뭐지?’
목소리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광령의 시선이 점점 위로 올라갔다.
피는 목에서부터 흘러내리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 어떤 놈이?’
광령이 손으로 목을 움켜쥐며 고꾸라졌다.
서서히 기울어지는 광령의 시야에 젊은 남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천신우……?’
그게 끝이었다.
눈에 머리를 처박은 광령은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 * *
광령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천신우가 자운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촤아악!
핏물이 순식간에 눈밭을 적셨고 다시 눈발이 핏물을 뒤덮었다.
새하얗게 변해가는 풍경 속에서 천신우는 생각했다.
‘나를 쫓아온 건가.’
그것만은 분명했다.
하지만 이들의 목적이 자신의 목숨인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고작 이 정도 숫자론 나를 죽이지 못한다는 것쯤은 마교에서도 알고 있을 텐데.’
당장 십인회를 앞세워 습격해 왔던 놈들만 해도 이것보다 숫자가 훨씬 많았다.
그렇다고 실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는 것은.’
천신우는 결론을 내렸다.
‘이놈들은 감시하는 역할이겠군. 칼잡이는 따로 있을 테고.’
함께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거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
물론 다른 작전을 수행 중이라 당장 이곳으로 달려오지 못한 것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북해빙궁이 여기서 그리 멀지 않던 거로 기억하는데.’
천신우가 바닥을 박찼다.
파앗!
순식간에 허공에 떠오른 천신우가 주위를 돌아보았다.
사실 지금 천신우가 있는 설산은 북해빙궁이 위치한 제23영역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천신우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멀리 설원을 가로지르는 검은 점들이 천신우의 시야에 들어왔다.
‘역시나.’
멀리서도 그들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음을 알아본 천신우였다.
‘마교의 정예들이겠군.’
이미 본격적인 침공을 시작한 마교다.
북해빙궁을 향해 진격하는 인원은 마교의 주력일 가능성이 높았다.
‘늦지 않아야 하는데.’
삼공녀가 궁주에 오르게 도와준 대가로 많은 것을 약속받은 천신우다.
명분으로 보나 실리로 보나 북해빙궁을 지켜내는 것은 중요했다.
‘북해빙궁에 파견한 병력이 얼마나 버텨줄지.’
마교의 본격적인 침공에 대비해 여러 곳에 걸쳐 병력을 배치했다.
우방인 북해빙궁 역시 마찬가지.
워낙 거리가 멀어 주력을 지원해주긴 힘들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인원은 보내놓은 상황.
그들이 얼마나 버텨주느냐에 따라 북해빙궁의 운명이 결정될 터였다.
다음 순간.
파앗!
천신우의 신형이 점이 되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