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
학사환생 147화
“끄아악!”
마교에서 자금은닉 실무를 맡은 전귀가 비명과 함께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의 몸엔 자운검에 베인 상처가 선명했다.
평형감각을 잃은 전귀의 귀에 환청처럼 부하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든 놈이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
전귀의 부하들이 천신우를 막기 위해 몸을 날린 것이다.
바닥에 쓰러진 채로 전귀는 보았다.
천신우의 자운검에 베인 부하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광경을.
부하는 몸을 지탱하고자 벽을 짚었지만 피가 묻은 손은 주르륵 미끄러졌다.
쓰러진 부하와 전귀의 시선이 짧은 순간 마주쳤다.
그 순간, 그들이 떠올린 생각은 정확히 일치했다.
‘우리가 상대를 잘못 만났구나.’
마교는 이번 작전을 위해 무림맹의 정예들과도 대적할 수 있는 전력을 준비했다.
하지만 눈앞의 천신우를 상대로는 바람 앞의 등불 신세였다.
물론 이제 와서 깨달아봐야 소용없었다.
콰아앙!
담벼락까지 날아간 마교 고수가 그대로 잔해 아래 파묻혔다.
“으아아아!”
급기야 공포에 사로잡혀 등을 보이는 마교 고수들이 속출했다.
몸을 가누기 힘든 와중에도 전귀가 역정을 냈다.
“한심한 놈들 같으니라고! 부끄럽지도 않으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원래라면 이번 작전의 책임자인 전귀가 막았을 것이다.
하지만 달아나는 마교 고수들을 응징한 것은 전귀가 아니었다.
처마 끝자락에 올라선 천신우가 달아나는 마교 고수들을 바라보았다.
굳이 직접 뒤쫓을 필요도 없었다.
쿵!
발을 구르자 기왓장들이 차례로 촤라라락 떠올랐다.
허공에 떠오른 기왓장들이 마치 암기처럼 마교 고수들을 덮치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벌써 저런 경지라니……!”
전귀조차 넋을 잃고 쳐다볼 정도였다.
하지만 이후 이어진 광경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파바박!
날아간 기왓장이 마교 고수들의 몸에 박혔다.
어지간한 도검 정도는 손쉽게 막아내는 호신강기마저도 그들을 보호해 주지 못했다.
“크윽!”
보다 못한 전귀는 필사적으로 일어나려 했지만 몸을 꿈틀거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결국 쓰러진 자세로 팔만 허우적거리며 그가 천신우를 노려보았다.
마교 고수들을 수도 없이 도륙했음에도 천신우는 무심하게 전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숨이 거칠어지지도, 옷에 피가 묻지도 않았다.
그런 천신우의 모습이 전귀에겐 너무도 두렵게 느껴졌다.
압도적인 기운이 천신우의 전신에 서려 있었다.
“네놈이…… 천신우인가.”
“그래.”
전귀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정말 대단하군.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내가 손끝 하나 건드릴 수도 없을 줄은. 하지만 본교를 저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운명의 수레바퀴는 거칠게 돌기 시작했음이니.”
“후후.”
천신우의 웃음은 불길하게까지 느껴졌다.
“어째서 웃는 것이지?”
“지금까지 내가 상대한 놈들 모두 그딴 소리를 지껄였거든. 하지만 보다시피 나는 아직 살아 있다. 지금쯤 그놈들 땅속에서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하군.”
어찌 보면 오만하게 느껴지는 발언.
하지만 전귀는 천신우의 자신감이 결코 오만이라 생각되지 않았다.
압도적인 힘을 갖춘 이에게 오만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기에.
“인정하지. 솔직히 마존들께도 지금의 너를 응징하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궁금해지는군. 어째서 그런 무력을 가지고도 나를 아직까지 살려두고 있는 것이지?”
전귀의 부하들은 모조리 단칼에 도륙했던 천신우다.
하지만 전귀는 중상을 입었을지언정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아직까지도 살아서 천신우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실이 그 증거였다.
“나를 협박하거나 회유할 생각이라면 포기해라.”
전귀는 각오를 다졌다.
어떤 고문을 당하더라도 마교를 배신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전귀의 비장한 각오가 무색하게 천신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알겠군. 이곳 말고도 마교에서 자금을 빼돌린 장소가 어디인지.”
“그게 무슨…….”
천신우가 대답 대신 한껏 펼친 손바닥을 서서히 위로 들어올렸다.
그 움직임에 반응하듯 장원 구석의 나무가 뿌리째 뽑혀져 나왔다.
“……!”
전귀의 동공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손끝 하나 대지 않고 거대한 나무를 뽑아내는 것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 비밀을 들켰다는 충격이 더했다.
“도대체 어떻게?”
“눈은 입과 달리 진실만을 말하지. 위급한 상황일수록 더더욱.”
천신우는 일부러 전귀를 살려뒀다.
그리고 은밀히 그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부하들이 죽어나가는 와중에도 전귀는 무의식적으로 장원에 심어진 나무를 바라보았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차례나.
그것은 그곳에 부하들보다 중요한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의미.
“전귀 조진서.”
천신우가 전귀의 이름을 불렀다.
무공도 뛰어났지만 무엇보다 자금관리에 일가견이 있어 전귀라 불리는 그였다.
전생에서 마교의 막대한 군자금을 조성한 주역이기도 했다.
당시 무림맹은 전귀를 제거하는데 성공했지만 이미 대세가 기운 후였다.
전귀가 사용한 수법들도 뒤늦게야 밝혀졌는데 하나같이 치밀하고 참신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때도 모든 자금을 은닉한 장소가 밝혀진 것은 아니었지.’
천신우가 마교의 자금을 전부 회수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전생의 기억과 새롭게 얻은 정보를 종합해도 마교의 자금을 전부 추적하기란 불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이곳에서 천신우는 우연히 전귀와 마주쳤고 하늘이 주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전귀의 눈빛이 흔들렸다.
“내가 전귀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지?”
검은 돈이 오가는 지하세계에서 전귀라는 이름은 너무나 유명했다.
하지만 전귀의 실체를 아는 전무했다.
오죽하면 누군가 내세운 가상의 인물이란 주장까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전귀는 실재했다.
그리고 천신우는 전귀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굳이 그 사실을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네놈에게서 돈 냄새가 풀풀 풍기더군.”
조롱당한 전귀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에겐 천신우를 응징할 방법이 없었다.
그저 날아드는 천신우의 검을 바라보는 것밖에는.
서걱!
목을 잘라낸 천신우가 전귀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전귀의 품에서 흘러나온 동전 하나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렇게나 많은 돈을 만졌지만 마지막 가는 길엔 동전 하나뿐이군.’
천신우는 이내 전귀의 시체에서 시선을 회수했다.
‘그나저나 나무 안에 자금을 은닉한 곳이 적힌 장부라도 숨겨둔 건가?’
나무를 찬찬히 훑던 천신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군. 어째서 보이지 않는 것이지?’
목걸이의 도움으로 나무를 쪼개지 않고도 내부를 들여다본 천신우다.
하지만 어디에도 장부책의 존재는 없었다.
물론 아직 실망하긴 일렀다.
이윽고 천신우는 나뭇가지에서 인위적인 흔적들을 발견했다.
만일 나무에 단서가 있다고 확신하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 정도로 세밀한 흔적이었다.
‘이건…… 암호로군.’
치밀하기로 알려진 전귀다웠다.
만일을 대비해 자금을 은닉한 장소를 장부로 남기지 않은 것이다.
‘과감하다 못해 무모한 방법이다. 문서로 기록을 남겨놓지 않으면 자칫하다간 마교에서도 자금의 행방을 모르게 되니까.’
위험부담을 감수하더라도 무림맹에 자금이 넘어가지 못하게 막으려는 의도라 봐야했다.
‘이러니 전생에서 전귀를 잡고도 은닉자금을 찾아내지 못했지.’
하지만 이번 생엔 다를 터였다.
천신우는 서있는 자리에서 암호를 해독한 걸로도 모자라 회수계획까지 짰다.
은닉자금 회수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알더라도 적기를 놓치면 회수가 불가능해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일정과 인원배치를 치밀하게 계획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물론 학사였던 천신우에게 이것만큼 쉬운 일도 없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나는 무림최대거부가 되겠군.’
물론 잠시 기분만 내는 정도다.
어차피 회수한 자금은 대부분 무림맹의 군자금으로 들어갈 예정이니까.
“운경.”
천신우가 권왕을 불렀다.
풍뢰권의 허락을 받아 본격적으로 권왕이 실전에 투입되기 시작한 상황.
천신우에게 있어 권왕은 가장 확실한 패였다.
물론 무력은 뛰어나도 머리가 장식이니 보조해 줄 인원은 필수.
“가줄 곳이 있다. 사람을 붙여줄 테니 함께 가도록.”
그새 마교 고수들을 전부 쓰러뜨리고 코를 후비던 권왕이 천신우를 돌아봤다.
마치 너는 어디 가냐고 묻는 눈빛으로.
“나는 지금부터…….”
* * *
천신우는 눈앞에 펼쳐진 설경을 바라보았다.
‘북해빙궁 말고도 사시사철 내내 눈으로 뒤덮인 곳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군.’
설산은 바로 만상서고의 여섯 번째 단서가 있는 장소였다.
무림맹주 진무극이 언급한 장소도 바로 이곳이었다.
설산엔 길이 없었다.
설산은 짐승들마저 살지 못하는 척박한 땅이었다.
하지만 천신우에겐 길이 보였다.
만일 목걸이를 얻지 못했다면 절대 찾지 못했을 길이었다.
물론 눈에 보인다고 누구나 갈 수 있는 길도 아니었다.
다리도 놓여 있지 않은 빙벽과 빙벽 사이.
그것도 강풍이 휘몰아치는 곳을 혼자만의 힘으로 나아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지독한 한기와 매서운 칼바람도 천신우에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 또한 만상서고의 단서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얻은 힘 덕분.
천신우는 깨달았다.
‘그랬군.’
만상서고의 단서들을 찾아온 지금까지의 과정들이 이곳을 오르기 위한 초석이 되었음을.
그렇게 천신우는 두루마리에 표시된 장소에 이르렀다.
그곳은 설산 정상이었다.
눈보라가 걷히며 발밑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
천신우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설산 정상엔 공동으로 통하는 작은 구멍이 존재했다.
놀랍게도 공동 내부는 눈이 조금도 쌓여 있지 않았다.
오히려 초록의 생동감이 넘쳐났다.
푸르른 나무들과 흐드러지게 피어난 아름다운 꽃들은 마치 환상을 보는 듯했다.
‘확실히 평범한 곳은 아니군.’
구멍을 통해 공동으로 들어선 천신우는 다시금 놀랐다.
지천에 약초들이 깔려 있었다.
가치를 매기기조차 힘들 만큼 진귀한 영초들과 영약 재료들도 보였다.
천신우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거라면……!’
영약을 통한 내공증진은 한계에 다다랐다고 결론을 내렸건만.
이제 다시 상황이 달라진 것.
‘오랜만에 유가장에 들러야겠군.’
유가장은 전통의 의가.
새롭게 확보한 재료들로 영약을 만들어주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유설화…… 그녀는 잘 있을지 모르겠군.’
이미 유설화의 마음을 확인한 천신우다.
그리고 대답도 확실히 했다.
마음에 두고 있는 여인이 있다고.
당시 유설화의 진심이 어땠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녀가 기다리겠다고 대답한 것만 기억난다.
‘내게는 너무 과분한 여인이다. 부디 좋은 사람 만나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감상은 거기까지.
천신우는 신중하게 영초들을 채집하기 시작했다.
모두 가져갈 수는 없기에 진귀한 영초들만을 품에 갈무리했다.
‘그러고 보면 맹주님은 마음만 먹으면 이곳의 영초들을 싹쓸이할 수도 있었을 텐데.’
무명의 일원들은 재물에 딱히 욕심이 없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반면 천신우는 챙길 수 있는 것은 모두 챙기자는 주의였다.
그렇게 영초들을 채집하는 동안 어느덧 보름달이 떠올랐다.
만상서고의 여섯 번째 단서를 곧장 찾아 나서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보름달이 떠오른 날이 아니면 이곳을 찾아와봐야 의미가 없기에.
이윽고 만월이 정확히 중천에 떠오르자 신비한 현상이 일어났다.
달빛은 벽면에 반사되며 지금껏 천신우가 보지 못한 광경들을 만들어냈다.
달빛이 만들어낸 점과 선과 공간.
천신우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보고 충격에 빠졌다.
‘이건 도대체……!’
그것은 무공들 간의 충돌이었다.
그것도 하나같이 최고 수준의 무공들이었다.
마치 지금 이 순간, 눈앞에서 절대강자들이 합을 겨루는 착각마저 들었다.
‘어쩌면 무신과 독야행 어르신 이상, 아니, 맹주님 이상일지도……!’
물론 맹주 진무극의 진정한 실력을 경험하지 못했기에 추측일 뿐이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지금껏 천신우가 경험하지 못한 수준이라는 사실.
‘하늘 위에 하늘이라더니…….’
마음 같아선 모조리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천신우의 능력으론 눈으로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머리로 이해할 수도 없었고 몸으로 재현할 수도 없었다.
그야말로 천외천의 경지.
천신우는 궁금해졌다.
‘내게 이런 광경을 보여주는 이유가 뭐지?’
천신우의 의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공동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발밑의 지반이 갈라지며 오랜 세월 잠들어 있던 광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신우의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맙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