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
학사환생 146화
도제는 말없이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얼핏 듣기엔 솔깃한 제안이었다.
맹주 진무극이 비명횡사하지 않는 이상, 도제가 무림맹의 주인이 되기란 불가능했으니까.
현실성도 충분히 있었다.
아직 마교의 진정한 전력을 알진 못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만 봐도 마교의 저력이 대단한 것만은 확실했다.
‘거기에 내가 가진 힘이 더해진다면 승산은 충분하다. 마도천하도 꿈은 아니지.’
그렇게 결론을 내리는 순간.
도제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살아서 들어본 개소리 중엔 가장 그럴듯하군.”
“제안을 받아들이신다면 전폭적으로 지원해드리겠습니다. 약속의 증표로 무신을 제거해드리는 것도 가능합니다.”
“약속의 증표라.”
계약이란 결국 상호작용이다.
마교에서 무신을 제거해 준다면 도제 역시 뭔가를 해줘야 하는 것이다.
“네놈들은 내게 무엇을 요구할 텐가.”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천신우. 그자를 제거해 주시면 됩니다.”
“그런가.”
도제가 입가를 비틀었다.
“무신과 천신우. 아주 빌어먹을 놈들이지. 분명 그놈들이 죽는다면 더할 나위 없다. 무림맹의 전력도 격감할 테고. 분명 마교 네놈들이 무림을 장악하게 되겠지.”
“본교가 무림을 장악하더라도 무림맹의 주인은 영원히 도제 당신입니다. 본교의 마존들도 당신 앞에선 고개를 숙일 겁니다. 당신 위에 계신 분은 오직 천마 그분뿐. 일인지하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시게 되는 것이지요.”
아주 입에 발린 소리는 아니었다.
마교는 무림인들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전면에 나서기보다 대리인을 내세울 것이다.
표면적으론 도제가 무림맹주가 되는 것이다.
도제의 눈앞에 하나의 광경이 그려졌다.
무림맹 대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무림 전역의 실력자들.
그리고 태사의에 앉아 그들을 내려다보는 자신의 모습.
그러나 다음 순간.
도제는 종이를 구겨 찢어버리듯 상상을 떨쳐냈다.
“네놈들은 무림맹주가 뭐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맹주는 무림의 하늘이다! 하늘 위에 다른 것이 존재하는 것을 본 적이 있더냐!”
도제의 노성이 폭발하며 주변의 공기가 쩌렁쩌렁 울렸다.
“똑똑히 들어라! 나는 내 손으로 완전한 무림맹을 손에 거머쥘 것이다! 네놈들이 씹고 뜯고 남은 찌꺼기가 아니라!”
“……!”
이번만큼은 남자도 순간 멈칫했다.
도제의 기세가 예상을 뛰어넘었기 때문.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남자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아시잖습니까. 완전한 무림맹을 손에 얻기란 불가능하단 것을.”
“알지! 알고말고! 그래서 지금까지 웅크려왔던 것이 아니냐!”
도제가 노호성을 터뜨렸다.
“그런데 이제 네놈들에게까지 고개 숙이라고? 웃기는 소리!”
도제의 주먹이 허공을 찢었다.
찰나의 순간.
남자는 양팔을 교차시켜 얼굴과 가슴을 보호했다.
하지만 뒤쪽의 벽이 터져나가는 것만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꽈아앙!
먼지가 되어 사라진 벽을 돌아보며 남자가 침음을 흘렸다.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과연 도제라는 명성에 어울리는 무력입니다. 더더욱 당신을 모시고 싶군요. 마지막입니다. 본교의 제안을 받아들이십시오.”
도제는 대답 대신 진각으로 바닥을 내리찍었다.
콰앙!
바닥이 부서지며 찬연한 빛을 뿜어내는 도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도의 손잡이를 휘감고 올라간 용의 모습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줄곧 침착하던 남자의 눈이 커졌다.
“그것은 설마……!”
틀림없었다.
전설적인 보도로 알려진 광룡도였다.
“솔직히 놀랐습니다. 그렇게 애를 써도 찾아내지 못한 광룡도가 도제 당신의 손에 들어갔을 줄이야.”
망향곡에서 수많은 보물을 미끼로 내던진 마교다.
하지만 당시 미끼로 사용한 어떤 보물도 광룡도에 미치진 못했다.
애초에 광룡도 정도의 보물을 미끼로 내놓는 것은 미친 짓이기에.
지금 이 순간, 그 광룡도가 도제의 손에 쥐어졌다.
꿀꺽.
남자는 마른침을 삼켰다.
방금 전과 지금 도제의 모습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내가 완전한 무림맹을 갖지 못할 거라면 네놈들에게도 주지 않을 것이다!”
도제의 광룡도가 공간을 휩쓸었다.
꽈아아아앙!
광룡도에서 시작된 강맹한 기운이 해일처럼 남자를 덮쳐갔다.
“이런 미친!”
그는 팔마존 바로 아랫줄의 실력자.
하지만 도제의 전력을 다한 공격을 감당해내기란 쉽지 않았다.
“흐아아아압!”
기합을 내지르며 남자가 하늘 높이 솟구쳤다.
간발 차이로 도제의 도강이 그가 있던 공간을 덮쳤다.
전각 상단은 그야말로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렸다.
상공에서 그 광경을 똑똑히 목격한 남자가 신음성을 흘렸다.
“도제가 이렇게 강했을 줄이야. 평가를 수정해야겠군.”
공중에 떠오른 채로 중얼거리던 그가 순간 멈칫했다.
반파된 전각 어디에도 도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이지?”
다음 순간.
도제의 억센 손이 남자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죽음의 위협을 느낀 남자가 다급하게 외쳤다.
“잠, 잠깐! 나를 죽이면 도제 당신도 곤란해져!”
“상관없다.”
도제의 목소리는 냉정하다 못해 싸늘했다.
꽈드드득!
도제의 손가락이 남자의 얼굴을 파고들었다.
살점이 움푹 들어가고 얼굴뼈가 함몰됐다.
급기야 퍼어어억! 소리를 내며 남자의 머리통이 터져나갔다.
촤아악!
핏물을 그대로 뒤집어쓴 도제가 머리가 날아간 남자를 아래로 내던졌다.
쿠웅!
갑작스러운 소란에 모여든 사람들 사이로 추락한 남자의 시체는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다.
반파된 전각 위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며 도제가 뇌까렸다.
“이만하면 마교 네놈들에게 보내는 대답으로 충분하겠지.”
* * *
“도제가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던 사내의 눈이 번뜩였다.
“크크큭. 그럴 거라 생각했지.”
“사마영도 죽었습니다. 도제가 직접 손을 썼다고.”
“당연히 그랬겠지. 도천에 사마영 그놈을 상대할 만한 강자는 많지 않을 테니.”
계획이 실패하고 마교의 고수가 죽었는데도 사내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앉아 있던 사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앉아 있을 때도 이미 보고하는 부하와 눈높이가 비슷했던 사내다.
완전히 몸을 일으키자 보고자가 고개를 한참 뒤로 젖혀야 눈높이가 비슷할 지경이었다.
물론 보고자가 사내와 눈높이를 맞추는 일은 없었다.
사내의 정체가 바로 마교 팔마존의 일인인 광마존이기 때문이었다.
팔마존 중에서도 가장 야만스럽고 포악하다고 알려진 그였다.
“그보다 먹이는? 가져왔느냐?”
“지금 바로 들여보내겠습니다.”
지시를 받은 마교 고수들이 제압당해 손발이 묶인 남녀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숫자는 일백 남짓.
그들은 제8영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문파의 무인들이었다.
“후후후. 아주 싱싱한 놈들이구나.”
광마존이 철창 우리로 다가갔다.
어둠에 뒤덮인 철창 속에서 커다란 눈동자만이 섬뜩하게 빛났다.
“크흐흐. 너무 보채지 말아라. 귀여운 녀석들.”
철창 우리 속에 들어있는 것은 광마존이 기르는 맹수들이었다.
철컹!
철창이 열리며 굶주린 맹수들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이윽고 그곳은 살육의 현장으로 변했다.
사지가 완전히 제압당한 무인들은 속수무책으로 맹수들에게 잡아먹혔다.
“크아아악!”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을 들으며 광마존은 고기를 뜯고 술을 들이부었다.
“크큭. 역시 고통에 몸부림치는 비명만 한 안주도 없는 법이지.”
무인들의 비명이 잦아들 무렵.
때마침 식사를 마친 광마존이 입가에 묻은 개기름을 닦아내며 물었다.
“황금은 어찌 됐다더냐?”
마교는 오래전부터 대리인을 내세워 무림에서 각종 사업을 벌여왔다.
그렇게 벌어들인 자금이 가장 많이 흘러 들어간 곳이 바로 만수전장이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전쟁에 앞서 마교는 만수전장에 보관한 자금을 한꺼번에 회수하는 중이었다.
군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혼란을 가중시키고 무림맹의 자금줄을 말리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그 계획은 시작부터 어그러지는 중이었다.
“그게…… 7할이 넘는 양을 강탈당했다고 합니다.”
“뭣이?”
광마존의 의문은 당연했다.
자금회수에는 마교 고수들이 대거 동원됐다.
무림맹에서 자금이 흘러 들어가는 경로를 추적할 것까지 예상해 역으로 함정까지 파놓았다.
그런데도 실패한 것이다.
“대체 무엇 때문에?”
광마존의 송충이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교 수뇌부는 무림맹의 방해공작을 감안해도 7할 이상의 자금회수가 가능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런데 회수율이 7할은커녕 3할에도 미치지 못한다?
“예상 밖의 변수가 발생한 모양이군.”
“무림맹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천씨세가의 무인들이 제대로 훼방을 놓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회수한 자금을 세탁하는 경로가 새어 나간 듯합니다. 그러지 않고선 지금 상황은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천씨세가라면.”
광마존도 최근 무림의 신흥세력으로 떠오른 천씨세가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천신우가 있다는 것도.
“무림맹의 개들 주제에 밥상에 발을 올린단 말이지? 버릇을 고쳐줘야겠군.”
광마존이 이를 갈던 그때였다.
먹이로 주어진 무인들로는 부족했던 것일까.
굶주린 맹수가 광마존이 먹고 남긴 뼈다귀에 눈독을 들였다.
물론 그 대가는 참담했다.
꽈앙!
솥뚜껑처럼 거대한 손으로 맹수의 머리를 일격에 박살 낸 광마존이 일갈했다.
“주인 밥상에 눈독 들이는 개새끼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뿐. 어디냐. 그놈들이 있는 곳이.”
어둠 속에서 광마존의 눈동자가 섬뜩한 빛을 발했다.
* * *
“저곳이다.”
언덕 위에서 장원을 내려다보며 천신우가 말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옆에 서 있던 권왕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울타리를 뛰어넘을 생각도 없이 몸으로 밀어버리며 목장으로 난입한 권왕!
“침입자다! 막아라!”
순식간에 집결한 마교 고수들이 권왕에게 달려들었다.
장원의 실체는 마교의 자금은닉처 가운데 한 곳.
만수전장에서 회수한 자금이 거쳐 가는 곳이었다.
그런 이곳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전적으로 천신우의 공이었다.
‘전생에선 이곳을 통해서만 수천만 냥의 자금이 마교로 흘러들었지.’
당시 무림맹의 대처는 한발 늦었다.
무림맹 고수들이 목장을 급습했을 때는 이미 대부분의 자금이 마교로 흘러 들어간 후였다.
‘그 군자금을 이용해 마교는 세를 더욱 불렸다. 하지만 이번엔 다를 거야.’
천신우는 언덕 위에 계속 머무르면서 마교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천신우가 기억하는 것은 마교가 이곳에 자금을 은닉했었다는 사실뿐.
정확히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자금을 숨겨놨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일단 지켜보는 것이었다.
이곳을 지키기 힘들다는 판단이 들면 어떤 식으로든 움직임을 보일 테니까.
권왕이 수십 명의 마교 고수들을 묵사발로 만들었을 무렵.
드디어 천신우가 기다리던 마교의 움직임이 시작됐다.
마교 고수들이 마구간 문을 개방한 것이다.
두두두!
풀려난 말들이 사방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지 않았다면 혼란 중에 말들이 탈출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상황.
‘이유가 뭐지? 말을 풀어서 시선을 분산시키려는 건가?’
잠시 생각하던 천신우가 비수를 날렸다.
쐐애액!
벼락처럼 날아간 비수는 말의 안장을 정확히 반으로 쪼개놓았다.
말 근처엔 여러 명의 마교 고수가 있었지만, 그 누구도 천신우가 던진 비수에 반응하지 못했다.
쪼개진 안장에서 금괴가 와르르 쏟아졌다.
그 광경을 확인한 천신우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래. 그런 거였군.’
보통 금은보화는 비밀스러운 장소에 보관하는 것이 상식.
마교는 그 당연한 상식을 깨고 금괴를 안장 안에 숨겨둔 것이다.
혹여나 이곳이 함락당하더라도 금괴가 무림맹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무림맹 무인들이 도적 떼도 아니고 고작 달아나는 말들에 집착하진 않을 터. 제대로 허를 찔렀군.’
아마 근처에 마교의 다른 고수들이 숨어 있다가 말을 붙잡아 금괴를 회수할 계획이었을 것이다.
이젠 소용없게 됐지만.
다음 순간.
스륵.
천신우의 모습이 언덕 위에서 사라졌다.
* * *
“젠장! 빨리 주워 담아!”
쏟아진 금괴를 챙기는 마교 고수들의 움직임이 다급했다.
권왕 하나로 인해 자금은닉처 한곳이 박살 날 거라곤, 그들로서도 전혀 예상 못 한 바였다.
“그나마 다행이군. 저 괴물 같은 놈은 이쪽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니.”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지금 그들 등 뒤에 더 괴물 같은 존재가 나타났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