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
학사환생 144화
틀림없었다.
맹주 진무극이 내어준 지도에 표시된 장소.
그곳은 망향곡에서 확보한 만상서고의 여섯 번째 단서와 정확히 일치했다.
‘이게 우연일까?’
우연이라고 넘기기엔 너무도 절묘했다.
‘지금까지 만상서고의 설계자가 누군지에 대해선 전혀 몰랐었는데. 어쩌면 무림맹과 관련된 인물일지도 모르겠군.’
물론 확인해 보기 전까진 어떤 가능성도 열어두어야 했다.
천신우는 지도를 품에 갈무리하고 맹주전으로 이동했다.
* * *
맹주전을 놓고 이런저런 소문이 많았다.
누군가는 황금과 보석으로 지어진 호화스러운 건물을.
누군가는 절대 뚫리지 않는 철옹성을 떠올렸다.
하지만 정작 맹주전을 찾은 천신우는 주위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면면 때문이었다.
장소 불문하고 술병을 입에 달고 사는 검신.
항상 그렇듯 서글서글한 인상의 무신.
아이들 생각에 다과를 주섬주섬 챙기는 독야행.
물론 백미는 무림맹주 진무극이었다.
별들의 별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릴 만큼 진무극의 존재감은 무명 일원들 중에서도 독보적이었다.
충격에 빠진 천신우를 부른 것은 무신이었다.
“왔느냐.”
정신을 차린 천신우가 모두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천신우뿐만 아니라 권왕과 검귀까지.
무명의 다음 세대를 이끌어나갈 신진고수들도 집결한 상황.
맹주 진무극이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옆으로 밀었다.
“항상 군사들에게 맡기다가 직접 검토하려니 눈이 아프군.”
벌컥벌컥!
그새 술병 하나를 통째로 비운 검신이 투덜거렸다.
“헛소리 말고 술이나 가져와.”
파천도가 진땀을 뻘뻘 흘리며 술을 가져왔다.
무림맹에서 손꼽히는 고수임에도 이곳에선 심부름꾼 취급이나 당하는 그였다.
“긴말하지 않겠네. 마교는 본격적으로 움직이기로 작정한 듯싶네. 당장 만수전장에서도 대규모 자금이 연일 빠져나가는 중일세. 확인된 바에 따르면 이중삼중으로 세탁해서 마교 지부들로 흘러간다더군.”
마교는 만금소의 금와전장뿐만 아니라 무림최대 전장인 만수전장에도 발을 걸쳤다.
전생에서 확인된 내역만 따져도 마교가 만수전장에서 빼내간 금액만 10억 냥을 훌쩍 넘겼다.
현재 금와전장까지 집어삼킨 천신우의 최대자금동원력을 가뿐히 넘어서는 규모.
거기에 밝혀지지 않은 지하자금들까지 합치면 마교의 군자금은 상상을 초월했다.
“자금을 동결하는 방법은?”
무신의 질문에 진무극이 고개를 저었다.
“그야말로 미봉책일 뿐이네. 의심스러운 계좌가 한둘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런 식으로 대처했다간 혼란만 야기할 걸세. 그거야말로 마교에서 바라는 바겠지.”
금와전장 다음 가는 규모를 자랑하던 서역전장의 사례만 생각해도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20년 전쯤 서역전장 경영진의 장부조작과 내부비리가 밝혀지면서 신뢰도가 급격히 추락했지. 전표를 돈으로 바꾸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일부 지점에선 압사하는 사고까지 발생했다.’
물론 만수전장은 서역전장보다 훨씬 견실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것이다.
천신우는 학사 시절 만수전장 파산을 염두에 두고 모의실험을 해본 적이 있었다.
‘혹시라도 만수전장이 파산하기라도 하면 걷잡기 힘든 혼란이 닥칠 것이다. 수습하는 데만 막대한 시간과 천문학적인 자금이 필요할 테고. 무엇보다 마교에서 혼란을 이용해 음모를 꾸미겠지.’
무신도 그걸 알기에 답답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다고 내버려 둘 수도 없잖나. 마교에서 계획대로 군자금을 확보하면 필시 몇몇 세력은 무림맹에 등을 돌릴 텐데.”
무신의 예상은 지극히 타당했다.
전생에도 마교는 막대한 자금을 토대로 수많은 세력을 끌어들였으니까.
“마교가 관련된 자금의 경우엔 철저히 응징할 생각이네.”
독야행이 검은 안대를 매만졌다.
“당연히 마교에서도 대비할 텐데. 무력뿐만 아니라 첩보전과 심리전도 치열하게 펼쳐지겠군.”
“그거야 파천도 저 친구가 잘해줄 걸세.”
“흥! 좋은 술이 뭔지도 모르는 놈이 무슨 큰일을 한다고.”
검신이 툴툴거렸지만 이곳에 없는 풍뢰권에 비하면 애교였다.
비교적 순조롭게 마교의 침공을 대비할 계획들이 논의됐다.
“가장 좋은 방법은 마교의 본거지를 찾아내 공격하는 것이네만. 아직까지 몇몇 지부들 말고는 전혀 단서를 찾지 못했네. 당분간은 영역을 나눠서 방어해야겠지.”
무림은 24개의 영역으로 분할되어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영역에 마교에 대항할 병력을 배치할 수는 없었다.
결국 무림맹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위에 걸쳐 병력을 주둔시키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남쪽은 천씨세가와 남악련이 주축이 되어 마교를 막아야 하네.”
진무극의 제안에 천신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전생엔 그저 마교의 준동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무림맹의 주축으로 마교와의 전쟁을 준비하는 입장.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남악련은 현재 천씨세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여전히 무시하지 못할 전력.
남악련과 공동전선을 구축하는 것이 천신우에게 주어진 하나의 과제였다.
더불어 마교의 자금줄을 틀어막고 만상서고의 여섯 번째 단서를 확인하는 것까지.
‘한동안 다시 바빠지겠군.’
바로 그때.
진무극의 다른 심복이 심각한 얼굴로 맹주전에 나타났다.
“맹주님. 긴급 사안입니다!”
파천도가 진무극의 곁을 항상 지키면서 손발처럼 움직인다면.
그는 주로 외부에서 활동하는 심복이었다.
진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하라.”
맹주에게 직접 올라올 정도의 사안이면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진무극은 이곳에서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그만큼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믿는다는 의미였다.
“제9지부가 습격을 받았다는 보고입니다!”
진무극이 눈매를 좁혔다.
“마교가 움직이기 시작했군.”
무림맹에 대항하는 크고 작은 세력들은 생각보다 많다.
하지만 대놓고 지부를 습격할 정도로 과감한 세력은 마교 말고는 떠올리기 힘들었다.
독야행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제9지부지?”
제9지부가 위치한 제9영역은 황무지.
그곳이 함락당한다고 해서 무림맹이 심각한 타격을 입진 않는다.
선제타격의 유리함을 백분 활용할 만한 표적은 아닌 것이다.
물론 천신우는 답을 알고 있었다.
“무림맹의 전력을 분산시키려는 의도일 겁니다.”
“그럼 최소한의 지원 병력만 보내면 되잖느냐.”
독야행은 확실히 무공에 비해 정치적 감각은 부족한 편이었다.
반면 진무극은 맹주답게 정치적인 문제에도 능숙했다.
“그럴 수는 없다네. 중요도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최소한의 병력만 보낸다면 다른 영역에서 어떻게 생각하겠나.”
평시라면 서운한 감정을 표현하고 끝날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마교와의 전면전이 코앞에 닥친 시기.
이런 때에 소속문파들의 신뢰를 잃기라도 한다면 이탈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결국 모두가 납득할 만한 규모의 병력을 보내야 한다는 소린데. 마교에서 선수를 제대로 뒀군.”
전쟁은 바둑과 같다.
처음 돌을 어디에 놓느냐에 따라 국면 자체가 달라진다.
마교는 제9지부를 선제공격함으로써 무림맹의 다음 수를 강요한 것이다.
“이러다간 계속 끌려 다닐 판이군.”
사실 이번만큼은 천신우도 뾰족한 대책이 없었다.
이미 마교의 본격적인 침공은 전생보다 5년 가까이 앞당겨졌다.
전생의 기억에 의존했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
“어쩌겠나.”
진무극이 상황을 정리했다.
“우리는 우리 계획대로 움직여야지. 파천도.”
“하명하십시오!”
“무림맹 대회의를 소집하게.”
* * *
밤이 깊어도 무림맹 제9지부 집무실의 불은 꺼질 줄을 몰랐다.
“이번엔 동천방이 당했군.”
등불에 의지해 보고서를 읽어 내려가는 중년인은 천신우와도 친분이 있는 제9지부 지부장 공덕.
원래 천씨세가가 위치한 제16지부 부지부장이었던 그는 얼마 전에 이곳으로 발령받았다.
사실 제9지부는 무림맹 무인들의 무덤이나 마찬가지다.
제9지부에 발령받으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
늙어 죽거나 지쳐서 그만 두기 전에는.
전임 지부장도 마찬가지.
어떻게든 버텨서 다시 무림맹으로 복귀하겠다며 이를 갈았건만.
3년을 채우지 못하고 결국 사직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공덕은 오히려 제9영역 근무를 자원한 경우였다.
본디 제9영역 출신인 그였다.
황무지인 고향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사명감 하나로 이곳에 지원한 것이다.
그런 공덕의 진심이 통했을까.
무력감에 빠져 지내던 제9지부 무인들도 공덕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뻐할 겨를도 없이 위기가 찾아왔다.
“확실히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오전엔 삼육파가 당하더니. 저녁엔 동천방까지.”
삼육파와 동천방은 제9영역을 대표하는 문파들이었다.
“제9영역은 워낙 이권이 적어 문파들끼리 충돌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피를 흘려 이권을 따내봐야 손해 보는 장사니까.”
그런데 제9영역을 대표하는 삼육파와 동천방이 차례로 습격을 당한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
“설마 마교가…….”
공덕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마교가 무슨 얻을 것이 있어 이런 황무지를 노리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
바깥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불이야!”
공덕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과연 사방으로 불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공덕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누군가 불을 질렀다.’
그렇지 않고선 동시다발적으로 사방에서 불길이 피워 오를 리가 없었다.
“모두 습격에 대비해라!”
공덕이 외치는 순간이었다.
서걱! 서걱!
“크헉!”
불을 끄러 나왔던 제9지부 무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감히!”
분노한 공덕이 검을 뽑아 들고 달려 나갔다.
솨아악!
공덕이 휘두른 검이 뜨거운 열기와 함께 습격자의 몸뚱이를 갈랐다.
“대열을 무너뜨리지 마라!”
그러나 공덕의 바람대로 되진 않았다.
늦은 시각.
거기에 갑작스런 화재까지.
제9지부 무인들은 평상시의 전투력의 절반도 발휘하지 못했다.
게다가 습격자들의 무공 수준은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공덕조차 상대하기가 녹록잖을 정도.
“뭐하는 놈들이냐!”
날아드는 검을 가까스로 쳐내며 공덕이 이를 악물었다.
상대는 지금까지 베어 넘긴 놈들과는 격이 다른 고수였다.
“감히 무림맹 지부를 급습하다니!”
매섭게 몰아붙였지만 상대의 검을 뚫어내기란 쉽지 않았다.
자연히 공덕의 마음이 급해졌다.
발이 묶인 동안 제9지부 무인들은 계속해서 죽어나가고 있었다.
지부들 중에 가장 전력이 약한 제9지부 무인들이 당해내기엔 적들이 너무도 강했다.
‘이대로 가면 전멸이다.’
공덕은 검을 크게 휘둘러 상대를 떨쳐내고는 부하들에게 합류했다.
“지부를 버리고 달아나라! 뒤는 내가 맡겠다!”
“아니 됩니다! 어찌 지부장님을 내버려 두고…… 커헉!”
공덕이 가장 신임하는 부하가 피를 내뿜으며 쓰러졌다.
“!”
분노한 공덕이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습격자 서넛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방금까지 공덕과 상대하던 고수가 맞섰지만 이번엔 달랐다.
카카카카캉!
불과 다섯 번의 경합 만에 상대의 검을 날려버린 공덕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공덕의 표정이 굳어졌다.
눈앞의 상대보다 강한 고수들이 줄줄이 나타난 것이다.
“……여기까지인가.”
공덕은 죽음을 각오했지만 적들은 선뜻 공격해 오지 않았다.
오히려 옆으로 비켜나는 그들이었다.
“이런 변방에도 그럭저럭 괜찮은 녀석이 있구나.”
그들 뒤에서 나타난 노인을 보는 순간 공덕은 심장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바짝 말라붙은 입술에서 억지로 쥐어짜 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놈은 대체…….”
“감히!”
옆으로 물러났던 고수들이 살기를 뿜어내려는 찰나.
노인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내버려 두어라.”
다음 순간.
어느새 공덕의 눈앞에 나타난 진마존이 팔을 뻗었다.
푸욱!
공덕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아래로 내려갔다.
그의 망막에 마지막으로 맺힌 것은 휑하니 구멍이 뚫린 가슴이었다.
“본좌는 진마존이라 한다. 내게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알도록.”
진마존이 공덕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콰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