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
학사환생 141화
천신우를 바라보는 철면수라의 눈빛은 의문으로 가득했다.
진법 내부라서 천신우의 기척을 뒤늦게 알아차렸다는 것은 핑계다.
결국 천신우나 철면수라나 같은 조건이었으니까.
‘그런데 어째서 저놈만 진법 안을 안방처럼 휘젓고 다닐 수 있는 것이지?’
유심히 지켜본 끝에 철면수라는 깨달았다.
천신우의 몸이 반쯤 안개에 잠겨있다는 사실을.
그뿐만이 아니었다.
천신우의 발은 지면에서 살짝 떠올라 있었고, 발밑으로 작은 알갱이가 무수히 떠다녔다.
마치 주변 풍경에 동화된 모습.
실제로 천신우가 호흡할 때마다 주변 공간이 함께 들썩이는 착각마저 들었다.
철면수라가 눈을 부릅떴다.
“설마……!”
보법의 경지를 단지 느리고 빠름으로 나누는 것은 하수나 하는 짓이다.
진정한 고수들은 보법을 길을 가는 것에 비유한다.
자신만의 길을 마음대로 오가는 것.
그 경지에 오르면 공간의 제약이 사라지고 거리는 무의미해진다.
……라고 진마존에게 들었던 철면수라다.
“나도 이제 겨우 길을 보는 수준이거늘…… 설마 네놈만의 길을 찾은 것이냐!”
철면수라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건 분노인 동시에 열등감의 표출이었다.
철면수라 본인이 도달하지 못한 길을 걸어가고 있는 천신우를 향한.
천신우가 고개를 내저었다.
“네놈이 죽인 부하들에게 미안하지 않나 보군. 그렇게 당당하게 떠드는 것을 보니.”
“어디서 헛소리를!”
“헛소리인지 아닌지는 확인해 보면 알잖나.”
천신우가 턱짓으로 주변에 쓰러진 시체들을 가리켰다.
절반이 넘는 시체에 방패로 인해 사지가 뜯긴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놈!”
철가면 밖으로 드러난 철면수라의 눈에 핏발이 섰다.
분명 이상한 낌새를 느끼긴 했다.
하지만 정말 자신의 손으로 부하들을 죽였을 줄이야.
천신우는 진법 안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며 자신과 부하들을 농락했던 것이다.
분노, 후회, 모멸감…….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가 철면수라를 휘감았다.
그러나 철가면을 눌러쓰는 순간.
철면수라는 냉정을 되찾았다.
그런 철면수라를 보며 천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표식을 보아하니 너도 마교 소속이군. 탐색은 진작 끝났을 테고. 그렇다고 본격적인 무림침공으로 보이진 않고. 역시 진사명의 복수 때문인가?”
“…….”
천신우는 철면수라의 침묵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럼 십인회를 움직인 것도 네놈 소행이겠군.”
십인회는 20년 동안 독야행의 흔적을 찾아내는 데 실패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독야행이 은거한 곳을 알아냈다면 외부요인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를테면 마교의 정보력을 빌렸다던가.
“십인회를 이용해 독야행 어르신의 시선을 돌리기 위함이겠지.”
최근 줄곧 풍뢰권 내지는 독야행 곁에 머물렀던 천신우다.
눈앞의 철면수라와 부하들로 그들을 넘본다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따라서 철면수라는 천신우가 홀로 움직이기만을 기다렸을 것이다.
“하긴 어느 쪽이든 상관없나. 중요한 것은 네놈이 마교 소속이라는 사실이니까.”
천신우의 유일한 지상과제는 마교를 멸하는 것.
철면수라의 목적이 무엇이든 아무래도 좋았다.
“크하하! 아주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오냐. 오늘 내가 네놈의 콧대를 꺾어주마!”
광소를 터뜨린 철면수라가 팔을 위로 들어 올렸다.
하늘을 향해 펼쳐진 손바닥 위에서 원형의 방패가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콰콰콰!
무림에서의 생사결은 단순히 경지의 높고 낮음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여러 가지 변수에 따라 얼마든지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철면수라는 그 변수를 창출할 능력을 갖고 있었다.
‘네놈이 움직일 만한 공간을 모조리 장악해 버리면 그만.’
마침내 방패가 맹렬한 질주를 시작했다.
단순히 속도만 빠른 게 아니었다.
방패의 움직임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정교했다.
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한 탓에 눈과 코에서 피를 쏟아냈지만 철면수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양손을 가슴 한복판으로 모은 다음, 과일즙을 짜내듯 손에 힘을 줬다.
그러자 매서운 속도로 날아가던 방패가 여러 개로 갈라졌다.
철면수라의 의지에 따라 여러 개의 방패가 일제히 천신우에게 날아들었다.
“이놈! 끝이다!”
철면수라는 천신우의 죽음을 확신했다.
눈으로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다.
천신우가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을. 그리고 천신우의 사지가 방패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는 것도.
하지만 다음 순간, 철면수라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잘려나간 것은 천신우가 아니었다.
천신우의 잔상 너머로 뒤쪽의 잘게 쪼개진 바위가 보였다.
천신우의 보법은 철면수라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던 것이다.
그때 멀리서 검을 뽑는 소리가 들렸다.
차아앙!
십인회 고수들이 독야행과 격돌한 것이다.
순간 철면수라는 등에 소름이 쫙 돋았다.
이렇게나 감각이 날 서 있는데도 천신우의 움직임을 완전히 놓친 것이다.
차라리 방심했던 거라면 만회할 기회라도 있을 텐데.
물론 낙담할 여유 따윈 없었다.
어느새 천신우가 바로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
“이런 씨발!”
날아드는 칼날을 피해 철면수라가 황급히 몸을 틀었다.
방패를 무기로 다루는 것뿐만 아니라 보법에도 자신 있는 그였다.
하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천신우의 보법에 비하면 자신의 보법은 뱁새가 황새 따라하는 꼴이었다.
솨아아악!
이번엔 철면수라 뒤편의 바위가 잘려나갔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방금 철면수라가 했던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위력적으로 바위가 잘렸다는 것을.
당황한 철면수라를 향해 천신우가 날아들었다.
철면수라는 황급히 방패를 불러들여 천신우의 검을 막아냈다.
차차차차창!
공방을 주고받을수록 철면수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여러 개의 방패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철면수라였지만 자운검 하나를 당해낼 수 없었다.
충격이 가해지며 방패가 하나씩 깨져나가기 시작했다.
지금껏 어떤 명검을 상대로도 박살 나기는커녕, 금이 간 적도 없었기에 충격이 더했다.
“대체 그 검은!”
대답 대신 묵직한 일격이 돌아왔다.
마지막 방패가 반으로 쪼개졌다.
심지어 방패를 들고 있던 철면수라의 양팔에도 충격이 전해졌다.
투두둑!
근육과 혈관이 잇따라 파열될 정도였다.
철면수라가 이를 악물며 양팔을 가슴에 붙였다.
다음 순간.
꽈아아앙!
철면수라 눈앞에서 엄청난 충돌이 일어났다.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날아간 철면수라가 형편없는 몰골로 바닥에 처박혔다.
“일어나!”
익숙한 목소리에 철면수라가 벌떡 일어났다.
물론 그건 그만의 생각일 뿐이었다.
실제로는 그의 팔다리 어느 쪽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공황상태에 빠진 철면수라에게 새롭게 등장한 사내가 물었다.
“이놈인가? 천신우란 놈이?”
그는 진마존의 또 다른 심복이었다.
철면수라가 진마존의 오른팔이라면, 사내는 진마존의 왼팔이었다.
“자네가 여길 어떻게?”
“마존께서 보내셨네. 이곳의 위치는 자네 수하에게 들었고. 그나저나.”
사내가 경악스런 얼굴로 천신우를 바라보았다.
“상대가 독야행도 아닌데 자네가 이렇게까지 궁지에 몰리다니.”
“조심하게!”
철면수라로선 그렇게 외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 외침이 무색하게 천신우가 사내의 뒤에서 나타났다.
그야말로 번개가 치듯 번쩍!
“뒤네!”
철면수라가 다급히 경고했지만 사내는 한참 늦게 반응했다.
사내의 검이 뒤로 내질러졌을 때는 이미 천신우가 그의 턱을 날린 후였다.
그전에 등에 일장을 날린 것에 이은 연타!
철면수라는 그제야 깨달았다.
어째서 사내가 천신우의 움직임을 전혀 쫓아가지 못하는지.
눈으로 따라가기도 힘든데 몸이 반응할 리가 없는 것이다.
허공에 떠오른 사내를 향해 천신우의 공세가 이어졌다.
파파파팍!
사내는 옆구리에 일격을 허용하는 와중에도 회심의 반격을 날렸다.
“그거지!”
철면수라의 입에서 절로 감탄이 나올 만큼 날카로운 한 수였다.
하지만 천신우에게 피해를 입히기엔 부족했다.
마치 예상한 것처럼 사내의 반격을 흘려보낸 천신우가 그대로 몸을 들이박았다.
충격을 고스란히 흡수한 사내가 철면수라 바로 옆에 사이좋게 처박혔다.
철면수라가 믿기지 않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철면수라와 사내의 실력은 엇비슷했다.
상식적으로 둘을 제압하는데 걸리는 시간도 비슷해야 하건만.
천신우가 사내를 제압하는데 투자한 시간은 철면수라를 상대한 것의 1할도 되지 않았다.
“설마 그사이에 강해진 것이냐?”
철면수라는 자신이 묻고도 어이가 없었다.
처음 무공을 익히는 아이도 저토록 빨리 강해질 수는 없다.
하물며 경지가 높아질수록 깨달음에 필요한 시간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수순.
괜히 고수들이 밤잠까지 줄여가며 수련하겠는가.
물론 그건 천신우에겐 통용되지 않은 이야기였다.
“강해졌다기보다는 익숙해졌다는 표현이 어울리겠지.”
천신우의 자신감은 허세가 아니었다.
검법과 보법, 신법과 내공심법.
모든 분야에 걸쳐 자신만의 길을 찾아낸 천신우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강해졌다.
심지어 매 순간,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것이, 이렇게 효율적일 거라곤 미처 생각 못 했다.
스륵.
천신우가 철면수라와 사내 앞에 섰다.
팔마존들을 제외하면 마교에서 적수가 거의 없는 그들이지만, 지금은 꼼짝 못 하는 신세였다.
“잠깐!”
마지막 순간, 삶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철면수라가 소리쳤다.
그러나 천신우는 주저 없이 자운검을 내려쳤다.
촤아아악!
철면수라와 사내의 목이 동시에 베어졌다.
천신우는 철가면이 벗겨져 고스란히 드러난 철면수라를 내려다보았다.
철면수라의 얼굴엔 죽음의 공포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어쩌면 그가 마교와 관련된 정보를 털어놓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쉬움은 없었다.
그 정보조차 거짓일 확률이 훨씬 높았으니까.
두 번의 생에 걸쳐 마교를 경험하면서 깨달은 사실이었다.
“지금쯤이면 저쪽도 슬슬 끝나가겠군.”
철컥.
자운검을 칼집에 집어넣은 천신우가 몸을 돌렸다.
* * *
“이럴 수가…….”
십인회의 회주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특히 독야행이 떠난 이후 십인회에 합류한 회주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설마 독야행이 이렇게까지 강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던 그들이었다.
2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소문이 부풀려지고 과장된 거라고 생각했는데.
독야행의 실력은 진짜였다.
그 증거로 앞서 달려들었던 십인회의 모든 고수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울타리조차 없는 마을이 천혜의 요새처럼 느껴질 정도.
이제 남은 것은 회주들뿐이었다.
그들을 찬찬히 돌아보던 독야행의 시선이 일회주에게 꽂혔다.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 다시는 나를 찾지 말라고.”
일회주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네놈은 더 강해졌군.”
20년 전 그날, 독야행은 오늘처럼 십인회의 모든 고수를 쓰러뜨리고 천년향을 떠났다.
하지만 일회주도 속수무책으로 당하진 않았다.
독야행의 한쪽 눈에 검상을 남긴 장본인이 바로 일회주였다.
물론 그 대가로 얼굴에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얻긴 했지만.
“오늘 이곳을 찾기 전까지만 해도 내 손으로 직접 네놈을 처단할 생각이었거늘.”
20년 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강해졌기에 할 수 있었던 생각.
하지만 눈앞에서 독야행의 무위를 확인한 지금.
일회주는 생각을 바꿨다.
“그 즐거움은 영원히 누릴 수 없겠군. 그렇다고 해서 네놈의 운명이 달라지진 않는다. 네놈 혼자 우리 모두를 상대할 수는 없을 테니.”
그 말을 듣고도 독야행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역시 네놈이 알 리 없지.”
20년 전 그날, 피가 철철 흐르는 눈을 지혈조차 하지 않고 달렸던 이유.
그리고 그때보다 훨씬 강해진 이유.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지.”
독야행의 기운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지축이 흔들리고 공기마저 떨었다.
발밑에서 휘몰아친 바람에 독야행의 백발이 하늘로 솟구쳤다.
주변의 바위들은 크기와 상관없이 땅에서 뽑혀져 나와 허공에 떠올랐다.
“영원히 모를 것이다.”
다음 순간.
바위폭풍이 십인회 회주들을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