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
학사환생 139화
마을로 이어지는 길로 들어선 순간 안개가 짙어지며 천신우 앞을 가로막았다.
“……진법인가.”
이미 만상서고의 다섯 번째 단서를 얻었기에 진법을 뚫고 가기란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내 마을 입구가 나타났다.
마을 입구를 앞에 두고 천신우는 생각이 많아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풍뢰권이 데려온 장소다.
당연히 평범한 곳은 아닐 터.
‘보물창고? 아니면 영약이 지천에 깔려 있으려나?’
물론 풍뢰권의 성격으로 봐서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일단 보물 따위에 욕심이 전혀 없는 분이니. 그래도 이건 가능성 있겠군.’
문득 은거기인들이 머무는 마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곳엔 풍뢰권 같은 고수들이 득실거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마을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천신우는 그런 생각을 깔끔하게 접었다.
마을 안의 넓은 공터에는 그네나 목마 같은 놀이기구들이 마련되어 있었고.
수많은 아이들이 뛰어놀며 웃고 떠들고 있었다.
세상 누구보다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모습들.
‘이곳은 대체…….’
천신우가 놀라움을 금치 못하던 그때.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이구나.”
“!”
천신우는 정말이지 소스라치게 놀랐다.
바로 옆에 다가올 때까지 전혀 기척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독야행은 따스한 얼굴로 아이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대부분 기근과 홍수로 부모를 잃고 죽어가던 아이들이다.”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편안한 느낌.
천신우는 긴장을 풀었다.
“전혀 그런 아이들처럼 보이지 않는군요. 다들 행복해 보입니다.”
“그렇게 보인다니 다행이구나.”
그 한마디에 아이들을 생각하는 독야행의 진심이 절절하게 묻어났다.
“그보다 점심은? 아직 먹지 않았다면 식사부터 하자꾸나.”
“좋습니다.”
“따라오너라.”
독야행이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할아부지!”
뛰어놀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독야행의 팔다리에 주렁주렁 매달렸다.
독야행은 귀찮은 기색도 없이 아이들의 재롱을 받아주었다.
천신우는 그런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독야행 같은 절대고수에게도 이웃 할아버지 같은 모습이 있었던 것이다.
사나이의 표본인 권왕이 높은 곳에만 가면 쩔쩔 매는 것처럼.
이윽고 식당에 도착하자 장성한 남녀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밥을 짓던 그들이 독야행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격식을 따지는 것이 아닌 진심에서 비롯된 인사.
독야행과 그들의 관계가 얼마나 두터운지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독야행은 밥그릇을 받아들고도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이곳에선 모든 사람이 함께 일하고 함께 먹는다.”
이윽고 수백 명에 달하는 마을사람들이 모두 모이고 나서야 식사가 시작됐다.
놀랍게도 그들 가운데 누구 하나 얼굴에 그늘이 없었다.
모두 함께 웃으며 서로를 살뜰히 챙겨주는 모습.
세상에 이런 마을이 존재하긴 할까.
무릉도원이 존재한다면 바로 이곳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시끌벅적한 식사가 끝나고 천신우는 독야행을 따라 팔을 걷어붙였다.
수백 개의 식기를 씻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만큼 보람된 일이기도 했다.
마지막 그릇의 물기까지 깔끔하게 닦아낸 천신우가 허리를 폈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 많았다.”
그뿐이었다.
독야행은 묻지 않았다.
천신우가 어째서 이곳을 찾아왔는지.
그리고 누가 이곳으로 오는 길을 가르쳐줬는지.
그저 사람을 통해 숙소를 배정해줬고 매일 해야 할 일을 정해줬다.
천신우 역시 군말 없이 독야행의 지시를 따랐다.
매일 밥을 지었으며 길을 닦았고 농사를 지었다.
물론 틈틈이 수련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흘러.
아이들과 놀아주고 있는 천신우를 독야행이 불렀다.
“바람이라도 쐴 겸 잠깐 걷자꾸나.”
아름답게 꾸며진 산책길을 따라 걸으면서 독야행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풍뢰권이 너를 이곳으로 보내면서 뭐라더냐?”
“갈 곳이 있다고만 하시더군요.”
“과연 풍뢰권답군. 그래도 녀석이 너를 많이 아끼는 모양이다.”
“…….”
천신우라고 풍뢰권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다만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이 과격할 뿐이지.
“그래, 그러니 너를 내게 보냈겠지.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그 까칠한 녀석이 너를 인정했다는 의미니까.”
아직까진 무슨 일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어디 보자. 그때 망향곡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느냐?”
천신우가 목걸이를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상서고의 다섯 번째 단서를 얻으면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만물을 꿰뚫어 보는 혜안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부작용도 있었다.
무작정 선을 추종하다보니 몸에 과부하가 걸린 것.
당시 독야행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사달이 났을지도 몰랐다.
“너는 지금 길을 볼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다. 하지만 길을 가는 법은 모른다.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느냐?”
천신우는 반쯤 고개를 끄덕였다.
“풍뢰권은 그 길을 가는 법을 가르쳐주라고 너를 내게 보낸 것이다.”
“그런 거였다면…….”
풍뢰권이 직접 가르침을 내려도 되지 않았을까.
천신우의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독야행은 고개를 저었다.
“풍뢰권은 이미 권왕이라는 걸출한 제자를 거두지 않았더냐. 물론 그것 말고도 이유는 있지. 무명의 늙은이들 가운데는 그나마 내가 가르치는 재주가 있으니까.”
확실히 풍뢰권이나 검신이나 제자를 교육하는 방식이 정상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쉬울 거라곤 생각하지 마라. 내가 지금껏 제자를 들이지 않은 이유는 아이들을 돌보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눈에 차는 제자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내건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가차 없이 내칠 것이다.”
천신우가 결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려운 길일수록 오르는 보람이 있는 법이지요.”
“자신감 하나는 인정해주마. 그리고 하나 더.”
독야행의 눈빛이 깊어졌다.
“내겐 해묵은 악연이 있다. 풍뢰권이 그것까지 말해줬느냐?”
“금시초문입니다.”
“그들은 조만간 이곳을 찾아올 것이다. 너도 이곳에 있다간 휘말릴지도 모르니 이야기해주마. 20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 * *
천신우는 독야행이 만든 굽이진 협로를 따라 걸었다.
협로는 마을사람들을 위한 길이 아니었다.
과거 독야행이 수련을 위해 만든 길이었다.
이 길을 걷는 것은 독야행이 천신우에게 내준 수련 과제 가운데 하나.
덕분에 천신우는 독야행의 가르침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독야행은 길에 발디딤의 위치는 물론.
그때마다 머리와 손의 위치까지도 표시해 두었다.
그것은 천신우의 눈에 보이는 선과 일치하기도 했고 가끔은 상반되기도 했다.
‘목걸이를 통해 보이는 선이 완벽한 정답은 아니었군.’
하나의 길이 모든 인간에게 적합하다고 생각하면 오산.
결국 자신의 길은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제 알겠다. 어째서 눈에 보이는 선을 따라갔음에도 문제가 생겼는지.’
목걸이의 힘으로 길을 보게 됐지만, 그 길이 천신우의 것은 아니었던 셈.
‘길을 걷는 방법이라고 했지만, 결국 내게 어울리는 길을 찾는 것부터 시작이구나.’
천신우가 얻은 깨달음은 모든 것과 맞닿아 있었다.
보법의 연장선이었고, 내공을 운용하는 방법이었으며, 동시에 검로를 찾는 법이기도 했다.
그렇게 얼마나 길을 걸었을까.
천신우는 자신만의 길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 길은 목걸이로 인해 보이는 선은 물론, 독야행의 길과도 일치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 길이 천신우의 길이었으니까.
동시에 흥미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만일 목걸이의 힘으로 보이는 길과 내가 만들어낸 길을 마음대로 오갈 수 있다면?’
지금 당장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언젠가 천신우를 더 높은 경지로 올려줄 발상이었다.
어느새 천신우의 발은 지면에서 살짝 떠오른 상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동심원의 파문이 번져나가며 알갱이들이 살짝 위로 떠올랐다.
‘이제 독야행과 풍뢰권 어르신의 신출귀몰한 움직임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군.’
어느새 길었던 길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 끝자락에서 천신우는 생각했다.
독야행은 이 길을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독야행이 말해준 20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 * *
독야행은 본래 십인회 소속의 고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도 십인회가 표면적으로 내세운 기치는 정의로움이었다.
독야행도 십인회의 기치에 공감했기에 묵묵히 그곳에서 수많은 임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독야행이 십인회의 추악한 실체를 깨닫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탐욕에 눈이 멀어 십인회를 배신한 문파를 응징하는 임무였다.
독야행은 언제나 그렇듯 막아서는 모든 것을 베었다.
그의 냉정한 칼날 앞에서 장원을 지키던 무인들은 침묵하며 죽어갔다.
의문을 토하지도, 비명을 지르지도 못했다.
독야행 스스로 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배신자들의 변명으로 귀를 더럽히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장원을 지키던 무인들을 모조리 베고 별채로 들어서는 순간.
독야행은 멈칫했다.
“!”
아이들이 그곳에 모여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독야행은 모든 것이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이번 임무는 정의를 수호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 잘못도 없는 이들을 학살한 것에 불과했다.
문득 이곳을 지키던 무인들을 베면서 일종의 쾌감을 느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그는 죄책감이 들었고 동시에 분노가 치밀었다.
어째서 십인회에선 이런 임무를 맡긴 것일까.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일까?
독야행은 결국 아이들에게 검을 휘두르지 못했다.
그저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곳을 빠져나왔을 뿐이다.
그런 독야행을 빠르게 지나쳐가는 고수들이 있었다.
바로 십인회의 고수들이었다.
불길한 느낌에 독야행은 그들을 따라 돌아섰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들은 아이들까지 죽여 없애려던 것이었다.
“무슨 짓이냐!”
“배신자들을 전부 죽이라는 명령입니다.”
“아이들까지?”
“배신자의 자식들입니다. 살려두면 후환이 될 겁니다.”
“정말 배신자이긴 한 건가?”
“그것은 우리가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아니, 나는 알아야겠다.”
독야행이 아이들 앞을 막아섰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십인회 고수들이 눈빛을 주고받았다.
원래 이런 상황이 생기면 주저 없이 베어버리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십인회의 간부들 가운데서도 최고수였다.
진작 회주가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는.
그러나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돌아가서 문책당하는 것은 자신들이었기에.
“선배라고 떠받들어줬더니 선을 넘는군. 지금부터 네놈도 저것들과 같은 배신자로 간주하겠다.”
십인회 고수들의 태도가 돌변하자 독야행은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한솥밥을 먹었던 식구들에게 검을 휘두를 엄두가 나지 않았으니까.
차아앙-!
독야행의 검이 바람을 갈랐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십인회 고수들은 모두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들 가운데 누구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지금은 죽이지 않으마. 아직 이번 임무의 진실을 모르니까.”
독야행은 쓰러진 십인회 고수들을 내버려두고 아이들과 여인들을 안전한 장소로 옮겼다.
그리고 그 길로 일회주를 찾아가 진실을 요구했다.
일회주는 독야행의 요구를 묵살했지만 그는 기어이 진실을 밝혀냈다.
십인회에서 숨겨온 추악한 이면을 뒤늦게 확인한 독야행은 선언했다.
“나는 떠나겠다.”
“불가!”
일회주는 독야행을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곁에 둬도 위협적인 독야행이다.
적으로 돌린다면 감당하기가 결코 쉽지는 않을 터.
그럴 바엔 차라리 이곳에서 깔끔히 죽이는 편이 나았다.
스윽.
일회주가 손짓하자.
임무를 위해 동원된 이들을 제외하고 십인회의 고수들이 모두 집결했다.
혼자서는 결코 감당하지 못할 전력.
일회주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가는 길이 외롭지는 않을 게다. 네놈이 그토록 지키려 하던 아이들도 함께일 테니.”
하지만 일회주는 그 말을 철회해야 했다.
유난히 달이 시리도록 밝던 그날 밤.
그곳에서 끝까지 서 있던 사람은 독야행이 유일했다.
홀로 밤을 걷는 자.
독야행이란 별호는 그때 생겼다.
쓰러뜨린 이들의 숨통을 일일이 끊을 틈도 없이 독야행은 달리고 달렸다.
아이들을 숨겨둔 곳으로.
하지만 근처에 도착한 독야행은 이미 늦었음을 깨달았다.
침입자들의 시체를 발견한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안으로 뛰어든 독야행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모처럼 웃음을 되찾은 아이들과…… 그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풍뢰권이었다.
그것이 독야행이 기억하는 풍뢰권의 첫 만남이었다.
* * *
둥둥둥!
마을에서 들려오는 북소리에 천신우는 회상에서 깨어났다.
침입자를 알리는 신호.
마을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다음 순간.
스륵.
천신우의 신형이 그곳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