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
학사환생 138화
천신우로선 실소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
‘천하의 권왕이 고소공포증이 있을 줄이야.’
고수들이라고 해서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뱀만 보면 기겁하는 고수가 있는가 하면, 여자에겐 손도 대지 못하는 고수들도 있다.
철인처럼 보이던 권왕에게도 약점은 있었던 것이다.
“저래갖고 망향곡에선 어떻게 돌아다녔는지 모르겠군요.”
“흐흐흐! 어떤 엄살이든 알맞은 특효약이 있는 법이다.”
풍뢰권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고 천신우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풍뢰권은 구름다리 위에서 발을 굴렀다.
쿠웅-!
출렁이는 정도를 넘어서 구름다리가 끊어질 정도.
“으아아아! 망할 노인네!”
급기야 자포자기한 권왕이 구름다리 위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공포와 분노가 한데 섞인 눈빛을 보며 풍뢰권이 껄껄 웃었다.
“잘만 건너면서 엄살은.”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구름다리를 건넌 천신우 일행 앞에 펼쳐진 것은 작은 마을이었다.
방금 지나온 협곡이 무색하게 그곳은 푸른 초목과 향기로운 꽃으로 가득했다.
마치 무릉도원을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광경에 천신우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런 천신우에게 풍뢰권이 마을로 내려가는 굽이진 길을 가리켰다.
“내려가라.”
“어르신은 함께 가지 않으십니까?”
“여기까지 안내해 줬으면 됐지. 무슨 욕심이 그리 많으냐.”
“…….”
좀처럼 풍뢰권의 화법에 적응이 되지 않는 천신우였다.
다짜고짜 이곳으로 데리고 오더니 이제는 혼자 가란다.
그러나 불만을 토로할 새도 없이 풍뢰권은 어느새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권왕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몰아붙이는 모습이 마치 소를 모는 악동 같았다.
풍뢰권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천신우는 결국 깊은 한숨과 함께 마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마교에서 망향곡 계획 실패를 가장 먼저 예측했던 인물은 바로 진마존의 심복 철면수라였다.
덕분에 그는 망향곡에서의 비보가 마교 본산에 전해지기도 전에 움직일 수 있었다.
철면수라가 방문한 곳은 바로 십인회의 본거지.
천년향이라 불리는 이곳은 아주 특이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삼면을 둘러싼 절벽은 험준한 데다 여름을 제외하곤 항상 얼어붙어 있어 접근이 불가능했다.
유일한 입구인 남쪽은 오직 물길을 통해서만 진입이 가능했는데.
그마저도 물살이 빠르고 거칠어 헤엄쳐서 건너는 것은 물론.
어설픈 항해술로는 도강을 엄두조차 내기 힘들었다.
“여기군. 십인회의 본거지 천년향이.”
나루터에서 꾸벅꾸벅 졸던 사공들이 하품을 내뱉으며 일어났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사공으로 위장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들은 십인회의 무인들이었다.
불청객의 접근을 가장 일선에서 차단하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
“무슨 일이시오? 강을 건널 생각이라면 잘못 찾아왔소. 지금은 물때가 맞지 않으니 나중에 다시…….”
철면수라는 단칼에 사공의 말허리를 잘랐다.
“회주들은 어디에 있나?”
“……!”
사공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벼락처럼 칼을 뽑아든 그들이 철면수라에게 달려들었다.
퍼어억!
물론 나가떨어진 것은 철면수라가 아닌 그들이었다.
첨벙!
치명상을 입고 강에 빠진 그들은 그대로 물살에 휩쓸려 내려갔다.
곧바로 나루터 옆의 갈대숲이 술렁였다.
나루터의 무인들이 멋모르고 흘러든 불청객을 쫓아내는 역할을 한다면.
갈대숲의 고수들은 천년향의 존재를 알고 찾아온 침입자들을 저지하는 일을 맡았다.
마치 기관이 발동하듯 수십 발의 화살이 일제히 갈대숲 위로 솟구쳤다.
그러나 철면수라는 날아드는 화살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갈대숲 위로 푸드덕 날아오른 물새였다.
마침내 화살이 눈에 꽂히기 직전.
철면수라가 팔을 휘젓자 소매가 펄럭이며 돌풍이 휘몰아쳤다.
후우욱!
방향을 바꾼 화살들이 갈대숲으로 되돌아가는 광경은 차라리 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파파파파팍!
물론 십인회 무인들에겐 눈앞에 닥친 현실이었다.
자신들이 쏜 화살에 가격당한 그들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댔다.
“끄아아악!”
“크윽!”
갈대숲 곳곳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철면수라는 여전히 물새를 바라보고 있었다.
푸욱!
철면수라가 튕겨냈던 화살 가운데 하나가 물새의 눈동자를 정확히 꿰뚫었다.
그대로 강에 곤두박질치는 물새를 끝까지 쳐다보며 철면수라가 입을 열었다.
“십인회주들을 만날 것이다.”
“…….”
갈대숲에 매복해 있던 십인회 무인들 가운데 생존자는 오직 한 명.
철면수라가 날아든 화살 가운데 한 발을 물새에게 날려보낸 덕에 살아남은 그였다.
물론 운이 좋았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갈대숲에 매복해 있던 십인회 무인들 가운데 가장 고수였으니까.
철면수라는 협상을 위해 일부러 그를 살려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굴하지 않았다.
“십인회를 도발한 자는 끝까지 추적해 일족 전부를 응징한다. 각오는 됐는가?”
“재미있군.”
철면수라가 갈대숲으로 고개를 돌렸다.
“!”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십인회 고수는 심장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독야행은 십인회를 적으로 돌리고도, 20년 넘게 생존한 것으로 안다만. 그것이야말로 십인회의 경고가 허풍뿐이라는 증거 아닌가?”
“그게 무슨 개소리냐!”
상대의 격렬한 반응에 철면수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역시 네놈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군. 괜한 짓을 했어.”
철면수라는 나루터에 묶여 있던 나룻배를 발로 밀어낸 다음 뱃머리에 올라섰다.
얼떨결에 살아남은 십인회 고수가 비둘기를 날려 천년향에 보고하려던 순간.
쐐애애액!
맹렬한 굉음을 내며 날아든 방패가 그의 목을 잘라냈다.
돌아온 방패를 다시 집어든 철면수라는 거친 물살 너머로 고고히 서 있는 망루들을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철면수라의 손을 떠난 방패가 수면 위를 날았다.
원형의 방패는 눈부신 속도로 날아가며 거대한 파도를 일으켰다.
콰콰콰콰콰!
“!”
망루를 지키던 무인들이 이상한 조짐을 감지했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높은 파도가 망루를 뒤덮었다.
콰아아-!
물속에 잠겨버린 십인회 무인들 머리 위로 날아가는 방패!
방패에 그려진 악귀형상은 마치 십인회 무인들을 내려다보며 비웃는 듯했다.
뜻밖의 홍수에 천년향 전역에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둥둥둥!
순식간에 집합하는 십인회 고수들을 뱃머리 위에서 지켜보며 철면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정도는 되어야 찾아온 보람이 있지.”
만일 눈에 차지 않는다면 십인회를 아예 몰살시킬 생각까지도 했던 철면수라였다.
휩쓸려나간 망루 너머 완만한 언덕 위부터.
작은 숲과 주둔지에 이르기까지.
십인회 고수들의 위치가 속속들이 철면수라의 눈에 들어왔다.
철가면 안의 얼굴이 씰룩였다.
“마음 같아선 전부 쓸어버리고 싶지만 일단 참아주지.”
부하들을 이끌고 나타난 십인회 간부들이 입을 열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이곳이 어디인지는 알고 이따위 짓을 저지른 것인가!”
구름처럼 모여든 십인회 고수들 앞에서도 철면수라는 전혀 위축된 모습이 아니었다.
“네놈들에겐 관심 없다.”
오히려 심후한 공력을 담아 외쳤다.
“십인회주들은 당장 나와 마교의 사자를 맞이하라!”
천년향 전체로 충격파가 퍼져나갔다.
“……!”
“……!”
실력이 떨어지는 십인회 무인들은 밀려드는 기운에 무릎을 굽힐 정도였다.
십인회 간부들조차 깨달았다.
그들의 힘으론 눈앞의 철면수라를 저지하기 힘듦을.
바로 그때.
저벅.
새롭게 등장한 사내가 언덕 끄트머리에 한쪽 발을 걸치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마교라.”
마교의 이름을 들었음에도 사내의 얼굴에서 두려움이라곤 찾아보기 힘들었다.
“십회주님!”
그는 십인회의 정점.
10명의 회주들 가운데 일인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백광을 발했다.
“이렇게 소란을 피웠으니 보통 놈이 아닌 줄은 알겠다. 하지만 네놈이 마교 소속임을 어찌 증명할 것이냐.”
철면수라는 대꾸하지 않았다.
상대를 죽이기로 결심한 이상 대화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에.
하지만 십회주는 침묵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증명하지 못하겠다면.”
십회주가 손을 들어올렸다.
그 행동에 담긴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십인회의 회주들은 모두 독자적인 세력을 갖추고 있다.
그 세력은 어지간한 중견문파를 아득히 넘어서는 규모.
지금 십회주는 그들을 동원하여 철면수라를 응징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파파파파팟!
사방에서 튀어나온 십회주의 부하들이 철면수라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앞뒤좌우.
심지어 하늘까지도 십회주의 부하들에 의해 가려졌다.
순식간에 어두워진 주위를 돌아보며 철면수라가 냉소를 머금었다.
“좋아. 하나 정도는 쓸어버려도 아홉이 남으니까.”
철면수라의 손끝에 원형의 방패가 걸렸다.
빙글 돌기 시작한 방패는 순식간에 맹렬한 속도로 회전했다.
콰아아아아-!
철면수라에게 가장 가까이 접근했던 십인회 고수가 튕겨져 나왔다.
물론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원형의 방패를 중심으로 동심원 모양의 파문이 확장되며 거기에 닿는 모든 것을 날려 버렸다.
갈기갈기 찢긴 채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십인회 고수들.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쿠우우웅-!
지반이 흔들리며 주둔지의 집들이 흔들렸다.
기둥이 뽑히고 지붕이 날아갔다.
어지간한 내공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땅을 딛고 서 있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였다.
“이런 미친……!”
십회주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의 부하들이 신음하며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추리고 추리더라도 반의 반절도 건지지 못할 정도로 피해를 입었다.
회주 자리에서 끌어내려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오냐! 내가 직접 끝장내주마!”
십회주가 발을 구르는 순간.
때마침 천년향에 주둔하며 이곳만을 수호하는 고수들이 가세했다.
오직 일회주의 명만을 따르는 그들은 다른 점은 몰라도 실력만큼은 믿을 만했다.
하지만 그들 모두 철면수라의 움직임을 놓치고 말았다.
“!”
“!”
모두가 감각을 끌어올리며 철면수라를 찾아내려는 찰나.
콰아아앙-!
그들이 서 있던 언덕이 쪼개지며 바위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친 바위들은 닿는 모든 것을 부수고 으꺠놓았다.
그 폭풍 한복판에서 철면수라가 입가를 비틀었다.
“마지막이다. 나오지 않으면 십인회는 무림에서 사라질 것이다.”
문득 철면수라는 심상찮은 기운을 느꼈다.
자연스레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곳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천년향 가장 중심부의 거대한 나무.
그 위의 나뭇가지 위를 시작으로.
십인회의 회주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앞서 철면수라가 상대한 십회주와 엇비슷한 회주들이 다수였지만.
3인의 기세는 십회주를 훨씬 압도했다.
특히 가장 늦게 등장한 청년은 철면수라조차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
“호오.”
철면수라와 청년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젊은 날의 모습을 여전히 간직한 그는 십인회의 일회주였다.
10년 전에도. 20년 전에도. 30년 전에도 그는 일회주였다.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 거의 없는 그가 드디어 철면수라 앞에 나타난 것이다.
“내가 십인회의 회주다. 마교의 사자여. 무슨 말을 전하려는 것인가.”
청년의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중후한 음성이 천년향 전체로 퍼져나갔다.
철면수라는 위화감을 느꼈다.
젊은 겉모습에 어울리지 않는 늙은 목소리.
심지어 왼쪽 뺨을 따라 길게 이어진 상처엔 노화의 흔적이 역력했다.
“크크큭.”
대충 상황을 가늠한 철면수라가 실소를 흘렸다.
“십인회에서 금지된 비술을 사용하는 자가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니 신기하긴 하군.”
“감히!”
다른 회주들이 으르렁거렸지만 일회주는 신중하게 대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림맹 연쇄살인과 망향곡 사건을 통해 마교의 힘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비록 실패했을지언정 마교가 무림맹의 유일한 대항마인 것만은 확실했다.
“그대가 마교의 사자가 아니었다면 당장 찢어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내가 영원히 계속될 거라 착각하진 말도록.”
마교를 존중하면서도 자존심을 굽히지 않는 일회주.
철면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판단하기에 일회주에겐 그만한 자격이 있었다.
“좋아. 나는 거래를 제안하러 왔다.”
“거래라면?”
“독야행이 어디 있는지 알려주마.”
그 순간, 철면수라는 느낄 수 있었다.
일회주의 뒤틀린 분노와 증오를.
“독야행이라. 아주 재미있는 말을 지껄이는군. 그 대가는?”
“십인회는 독야행을 맡아주면 된다. 그동안 나는 천신우란 놈의 목을 가져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