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
학사환생 133화
투두두둑.
하늘에서 핏물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
금와전장 장주 만금소부터.
십인회 간부에 이르기까지.
특히 만금소는 검성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그토록 많은 사람을 쓰러뜨렸음에도 검성은 피 한 방울 튀지 않은 모습이었다.
“누군가 했더니만!”
“장주는 저놈이 누군지 알고 계신 것이오?”
“그렇소! 저놈이 바로 검성이오!”
“검성이라면…… 철혈성 비무대회 우승자였던가? 하지만 저렇게 강하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만금소를 제외한 거물들은 철혈성 비무대회에서 최상위권 성적을 내고도 남을 실력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보기에도 검성은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긴장한 만금소가 굵은 금반지를 문질렀다.
“아무래도 우리가 힘을 합칠 필요가 있겠구려.”
이미 부하들이 많이 죽어 나갔지만 여전히 휘하 고수들은 건재했다.
정의련 부련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꺼번에 칩시다.”
그들이 진형을 갖춰 일거에 검성을 덮쳐가려던 순간이었다.
“……!”
“……!”
모두의 몸이 굳었다.
검성을 공격하려던 적들도.
무림맹 정찰조원들도.
검성조차도 몸이 돌처럼 굳고 말았다.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며 등장한 것은 무명의 애꾸눈 노인이었다.
고수들 한복판을 가로지른 노인이 무림맹 정찰조에게 턱짓했다.
“가거라.”
이유는 몰랐지만 노인이 그들을 구해주려는 것만은 분명했다.
자연히 정찰조장의 고개가 숙여졌다.
부하들만큼은 살리고 싶었는데 다행히 하늘이 바람을 들어준 것이다.
“감사합니다!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정찰조장은 조원들을 데리고 빠르게 장내를 벗어났다.
그제야 가까스로 압박을 떨쳐낸 정의련 부련주가 고함을 질렀다.
“감히 어딜!”
청해의 사인방도 무림맹 정찰조를 뒤쫓으려 했다.
그들을 이대로 돌려보냈다간 무슨 후환이 생길지 몰랐기에.
하지만 질주하던 그들의 몸은 두둥실 허공에 떠올랐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것처럼 버둥거리는 그들과 노인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십인회 간부가 침음을 삼켰다.
“설마…… 독야행?”
사실 십인회의 진정한 힘은 청해나 정의련에 비할 바가 아니다.
도천과 무신궁 바로 아래라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십인회는 지나칠 정도로 외부활동을 삼갔는데 이유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간부인 그조차 정확한 내막은 알지 못했다.
다만 십인회의 결정이 20년 전에 있었던 어떤 사건 때문이라고 들었을 뿐이다.
‘분명 당시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의 별호가 독야행이라고 했었지.’
눈앞의 애꾸눈 노인은 인상착의로 보나 무공으로 보나 정확히 독야행과 일치했다.
“나를 알아보는 것을 보니 십인회와 관련이 있겠구나.”
무신의 부탁을 받고 망향곡을 방문한 독야행은 십인회의 간부를 바라보았다.
과연 놈의 가슴에 십인회의 표식이 보였다.
“그놈의 표식은 20년이 지나도 그대로군.”
십인회 간부가 입술을 깨물었다.
“20년이나 숨어 지내다 이제 와서 나타난 이유가 뭔지 모르겠군.”
그는 알고 있었다.
십인회의 요인들이 독야행의 행적을 조사해 왔다는 사실을.
“평생 숨어서 지냈으면 명을 재촉할 일도 없었을 것을.”
십인회 간부의 도발에 독야행은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네놈은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구나.”
독야행의 전신에서 가공할 기운이 휘몰아쳤다.
쿠오오오!
“……!”
아까보다 훨씬 강력한 기운 앞에서 십인회 간부는 숨조차 쉬지 못했다.
“정녕 내가 숨어 지냈다고 생각하느냐?”
독야행의 압도적인 무위 앞에서 적들은 감히 대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겁에 질린 금와전장 장주 만금소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던 그때였다.
쿠구구구!
격렬한 진동과 함께 땅거죽이 뒤집혔다.
사방에서 어둠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마교의 천망금쇄진이 발동된 것이다.
이윽고 어둠은 망향곡 전체를 뒤덮어버렸다.
* * *
땅이 흔들리고 주위가 어두워지는 순간 천신우는 직감했다.
진법이 가동되었음을.
동시에 엄청난 장력이 작용하며 천신우를 아래로 끌어당겼다.
마치 늪에 잠기듯 천신우는 끝없는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됐지? 어쩐지 일이 너무 쉽게 풀리나 싶더라니…….’
분명 전생에서도 마교는 대규모 전투에 진법을 활용하긴 했다.
하지만 그건 거의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서였다.
‘진법을 발동시키는 조건이 워낙 까다로워서였지. 그런데 설마 망향곡에서부터 마교가 진법을 펼칠 줄이야.’
전생과는 많은 일들이 달라지고 앞당겨진 상황.
그럼에도 천신우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래도 빨리 진법의 활로를 찾아낸다면 충분히 대처 가능하다.’
인간병기가 그랬듯 진법도 무적은 결코 아니기에.
하지만 마침내 바닥에 내려서는 순간.
천신우의 기대는 산산조각 났다.
‘이건 도대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가 전생에서 전해들은 진법 내부와는 전혀 달랐다.
오히려 망향곡 외부에서 발견된 거대한 유적과 비슷했다.
커다란 석문과 그것을 감싸는 거대한 석벽.
석문에 조각된 기이한 문양까지도 동일했다.
그러나 천신우를 정말 놀라게 만든 사실은 따로 있었다.
항상 품에 보관해 온 두루마리가 빛나기 시작한 것이다.
천신우도 눈을 빛냈다.
‘설마……!’
덩달아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그도 그럴 것이 두루마리는 만상서고와 관련된 물건.
그렇다면 눈앞의 공간 역시 만상서고와 연관이 있다는 뜻이었다.
‘만상서고의 다섯 번째 단서가 망향곡에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지.’
그런데 이렇게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게 우연일까? 아니면 마교에서 펼친 진법의 영향일까?’
어느 쪽이든 한 가지는 확실했다.
만상서고의 다섯 번째 단서에 접근할 기회가 생겼다는 것.
어떻게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두루마리에서 새어 나온 빛이 닿자 거대한 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끼이익-!
완전히 개방된 석문 너머로 작은 제단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위에 구슬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마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심연처럼 불길한 어둠을 머금었다.
하지만 천신우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와 같았다.
두루마리가 반응하고 구슬이 나타난 것까지.
이제 다음 순서는 구슬에 들어 있을 내용물을 획득하는 것뿐.
천신우가 손을 구슬을 향해 손을 뻗었다.
“!”
일순 엄청난 충격이 전해졌다.
마치 지금까지의 성과를 확인하듯.
손끝을 통해 흘러든 강렬한 기운이 온몸 구석구석을 훑고 다시 밖으로 빠져나왔다.
육안으로도 미지의 기운이 구슬로 다시 빨려 들어가는 광경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
마침내 어둠이 걷히듯 구슬이 서서히 사라지며 내용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덩그러니 남겨진 것은 작은 보석이 박힌 목걸이였다.
“설마 이게 끝인가?”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하던가.
괜히 김이 빠졌다.
물론 섣불리 판단하긴 일렀다.
천신우는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감정에 일가견이 있진 않았지만 한눈에 봐도 보석으로서 가치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목걸이를 목에 거는 순간.
“……!”
천신우는 경악했다.
시야에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선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테면 눈앞의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어디서부터 충격을 가해야 할지.
막연하게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던 그림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바로 그때.
철문이 소리를 내며 닫혔다.
콰아아앙-!
동시에 지반과 천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금이 쩍쩍 가더니 급기야 바닥이 갈라지고 천정이 무너져 내렸다.
집채처럼 거대한 바위와 칼날처럼 날카로운 파편들이 머리 위로 끝도 없이 쏟아졌다.
한순간에 지하 공간 전체가 아수라장으로 변한 것이다.
하지만 당황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 천신우의 눈엔 길이 보였으니까.
파파파팟!
몸을 솟구친 천신우가 쏟아지는 바위를 피해 계속해서 위로 도약했다.
그렇게 지상으로 빠져나오기 무섭게.
콰콰콰콰쾅!
방금까지 머물렀던 지하공간은 완전히 땅속에 파묻혀버렸다.
그러나 천신우는 이미 아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사방에 펼쳐진 것은 어둠과 짙은 안개.
분명 진법의 영향이라 생각됐지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안개는 천신우에게 전혀 해를 가하지 못했다.
아마도 북해빙궁 내부의 한음빙정에서 얻은 영약 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때는 몰랐는데 이제 보니 한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악한 기운도 막아주는군.’
진법 안에서 헤맬 필요도 없었다.
어둠 너머로 길이 보였기 때문이다.
비로소 천신우는 깨달았다.
목걸이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보물이라는 표현조차 모자랐다.
‘만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신물이었어.’
물론 기뻐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일행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진법 안을 가로지르는 천신우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 * *
천망금쇄진 내부.
누구보다 빠르게 진법을 빠져나가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제갈휘였다.
명석한 두뇌와 특유의 분석력으로 진법의 활로를 찾아낸 것이다.
그렇게 수십 개의 갈림길을 지나 마침내 드넓은 공터에 다다른 제갈휘 일행.
그곳은 천망금쇄진의 중심부로 나아가는 길목이었다.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다름 아닌 혈마단주와 부하들이었다.
“그물을 쳐두면 항상 미꾸라지들이 빠져나오게 마련.”
혈마단주가 눈짓하자 혈마단 고수들이 앞으로 나섰다.
적들이 천망금쇄진 안에서 헤매다가 죽어버리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지금처럼 빠져나와도 문제될 것은 없었다.
이미 진법 내부에서 내공을 소실한데다 소수에 불과한 상대들은 사냥감에 불과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네년은…….”
채은수를 바라보는 혈마단주의 눈에 열기가 피어올랐다.
“무신의 손녀로군. 아름답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지만 소문 이상이로구나.”
혈마단주는 여색을 밝히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채은수라는 당대 최고의 미녀를 마주하니 욕정이 샘솟은 것이다.
혈마단주의 욕망을 알아차린 부하들이 고개를 숙였다.
“당장 잡아 올리겠습니다.”
“너무 상하지 않게 조심하도록.”
“존명!”
혈마단 고수들이 일제히 뛰쳐나갔다.
“어림없다!”
천신혁이 날아드는 혈마단 고수의 검을 받아쳤다.
모용비도 놀라운 움직임을 보여주며 혈마단 고수 둘을 상대했다.
물론 가장 눈부신 대처를 보여준 것은 채은수였다.
“조심해요. 모두들.”
그녀의 쌍검이 허공을 수놓았다.
공간을 장악하는 그녀의 검무 앞에서 혈마단 고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당황하지 마라! 고작 계집 하나일 뿐이다!”
“과연 그럴까.”
고함을 지른 상대를 향해 채은수가 쇄도했다.
다수와의 싸움이라면 보통 수세에 몰리게 마련이건만.
채은수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공세에 나섰다.
시간차를 두고 휘두른 쌍검이 상대의 가슴을 베어냈다.
촤아악!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상대의 움직임을 잡아두기엔 충분했다.
“감히!”
뒤에서 날아드는 검은 오로지 본능적인 감으로 피하며 채은수가 쌍검을 찔러갔다.
“!”
상대가 검을 피해 허리를 젖히는 순간.
빠악!
채은수의 발차기가 그의 발목을 후려쳤다.
균형이 무너지며 뒤로 넘어가는 상대를 채은수는 놓치지 않았다.
순식간에 공중에 떠오른 그녀가 쌍검을 내리꽂았다.
푸우욱!
그대로 칼날에 뚫린 채로 바닥에 처박힌 상대는 다시는 움직이지 못했다.
“이런 미친!”
흥분한 혈마단 고수들이 뒤에서 달려들었지만 채은수는 바닥을 구르며 피해냈다.
머리에 흙먼지를 뒤집어썼음에도 그녀는 털어낼 생각조차 하지 않고 검을 바로잡았다.
“과연 일품이군.”
지켜보던 혈마단주가 입맛을 다셨다.
“미모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안는 맛이 있겠어.”
순간 혈마단주의 소매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무영객을 쓰러뜨렸던 은침!
다만 은침에 발라진 독은 그때와는 달랐다.
“마비독이다. 지금부터 서서히 몸이 굳어갈 거다. 그때까지 최대한 나를 즐겁게 만들어보도록.”
채은수는 목에 꽂힌 은침을 뽑아냈지만 이미 마비독은 온몸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전혀 반응하지 못했어.’
정말이지 혈마단주의 실력은 부하들과는 수준이 달랐다.
특히 은침을 다루는 솜씨는 채은수가 지금까지 봐왔던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체념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아직 움직일 수는 있어. 이번 공격에 모든 것을 거는 거야.’
쌍검을 고쳐 잡은 채은수가 혈마단주를 향해 쇄도했다.
자세를 낮추고 쌍검을 양쪽으로 늘어뜨린 채로 질주하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매와 같았다.
하지만 상대는 혈마단주.
아직 그녀가 대적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제법이긴 하다만.”
날아드는 채은수의 검을 여유 있게 잡아낸 혈마단주가 섬뜩하게 웃었다.
“이것만으론 나를 즐겁게 해주기 부족하다.”
채은수의 검을 던져버린 혈마단주가 옷자락을 찢어버렸다.
쇄골이 고스란히 드러난 채은수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끝까지 저항하다 죽고 싶었지만 마비독에 중독된 몸은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절망에 사로잡힌 그녀의 눈가에 떠오른 것은 아버지도 조부인 무신도 아니었다.
“천 공자…….”
바로 그 순간.
거짓말처럼 진법을 뚫고 나온 천신우가 혈마단주와 충돌했다.
콰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