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
학사환생 128화
“이런 미친놈이!”
관가량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는 사인방의 일인으로 청해를 주도하는 거물이었다.
그런데 새파랗게 젊은 천신우에게 도발을 당했으니 격분할 수밖에.
“감히 이 몸 앞에서 난장을 피워!”
관가량의 분노를 느낀 청해 고수들이 천신우를 향해 일제히 몸을 날렸다.
지금까지 천신우 일행이 상대한 청해 무인들보다 훨씬 강한 실력자들.
천씨세가 고수 신중현이 외쳤다.
“소가주님을 지켜라!”
하지만 천씨세가의 고수들이 나설 기회조차 없었다.
퍼어어억!
폭죽이 터지듯 청해 고수들의 머리통이 터져나갔다.
“……!”
뒤쪽에 서 있던 청해 고수들은 눈동자만 껌뻑일 뿐이었다.
그나마 그들 가운데 천신우의 움직임을 감지한 것은 관가량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관가량조차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대체 뭐지?’
천신우의 소행인 것까진 알겠는데, 손을 썼는지 발을 썼는지 전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직접 맞붙어본 것도 아닌데 두려움이 관가량의 몸을 휘감았다.
“두렵나. 관가량.”
천신우의 싸늘한 목소리에 관가량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를 알고 있나?”
“그럼. 아주 잘 알고말고.”
관가량을 노려보는 천신우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청해의 사인방 가운데 일인인 관가량은 전생에도 악인으로 유명했다.
“길바닥을 떠돌던 네놈을 거둬들여 무공까지 가르쳐준 사람이 있었지. 하지만 네놈은 그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그에게 독을 타 먹여 살해하고 일가족까지 불태워 죽인 다음, 재물과 무공비급을 훔쳐 달아났지.”
관가량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이 커졌다.
“……그걸 어떻게?”
관가량은 철저히 과거를 숨기고 살아왔다.
물론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청해에 합류한 이후로도 허구한 날 악행을 저질러 댔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의 과거를 아는 사람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도대체 네놈은 누구냐?”
“천신우.”
“천신우라면 천씨세가의 소가주?”
만난 적은 없지만 천신우의 이름은 들어본 관가량이다.
당시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건만.
“천씨세가가 많이 크긴 했나 보군. 오대세가에서조차 밀려났던 놈들이 감히 본해를 적으로 돌릴 생각을 하다니.”
관가량이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경솔하게 설친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네놈에게 청해의 힘을…….”
콰콰콰콰콰!
전신을 강타하는 폭풍에 관가량이 헛바람을 삼켰다.
“헉!”
천신우가 뿜어낸 기파가 청해의 고수들을 뒤로 밀어냈다.
놀랄 여유 따윈 없었다.
어느새 쇄도한 천신우가 관가량의 가슴에 일장을 내지른 것이다.
파아앙!
순간적으로 호신강기를 끌어올렸지만 소용없었다.
뒤로 한참을 밀려난 관가량이 울컥 검은 피를 토했다.
내상을 입은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다시 달려드는 천신우를 향해 관가량이 검을 내려쳤다.
콰아아앙!
매서운 기운이 휘몰아치며 바닥에 커다란 구덩이를 만들었다.
하지만 천신우는 이미 허공에 떠오른 상태였다.
햇빛에 노출된 자운검이 눈부신 반사광을 뿜어냈다.
“놈이 관주님께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
뒤로 밀려났던 청해 고수들이 전열을 가다듬고 천신우에게 달려들었다.
“수고를 덜어주는군.”
천신우의 손끝에서 자운검이 춤을 췄다.
쏴아아아앙!
귀곡성이 울려 퍼졌다.
천신우에게 달려들던 청해 고수들이 잘게 찢어지며 사방으로 날아갔다.
그들이 익힌 무공도.
그들이 연습한 검진도.
천신우 앞에선 무력했다.
“……이럴 수가.”
관가량이 공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투두둑.
사방에서 핏물이 비처럼 쏟아졌다.
천신우 일행은 경이로운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감탄조차 나오지 않았다.
압도적인 힘이란 그런 것이다.
할 말이 없게 만들고, 생각마저 잊게 만든다.
마침내 천신우가 바닥에 내려섰다.
주위는 고요했다.
천신우를 막아서던 모든 것은 사라진 상태였다.
주르륵.
채은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슬퍼서도 기뻐서도 아니다.
압도적인 힘을 목격한 무의식적인 반응.
조부인 무신의 무위를 눈앞에서 목격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천 공자, 당신은 도대체…….’
심지어 모든 힘을 쏟아낸 것도 아니었다.
천신우의 호흡은 일정했고 움직임은 간결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는 건 당사자인 천신우였다.
‘과거로 돌아와 무공을 익힌 이후, 흑도방파 무리는 내게 한주먹거리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는 내로라하는 고수들조차 이렇게 쉽게 느껴지다니.’
스스로가 놀라웠고 대견했다.
그러나 아직 방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여전히 무신이나 풍뢰권 어르신에 비하면 갈 길이 멀다.’
벽을 넘어 두 번째 계단이 가시권에 들어왔음에도 여전히 힘에 목마른 천신우였다.
이래서 무림고수들이 죽는 그 순간까지 검을 놓지 못하는 거겠지.
천신우의 시선이 눈앞의 관가량을 향했다.
이제 청해의 무인들 가운데 멀쩡히 서 있는 것은 관가량이 유일했다.
“살려…….”
목숨을 구걸하려던 관가량이 움찔했다.
천신우의 눈빛에서 일렁이는 살기를 감당하지 못한 탓이다.
천신우가 피로 물든 자운검을 늘어뜨리며 관가량에게 다가갔다.
덮쳐오는 열기에 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이놈!”
관가량은 이를 악물며 저항했지만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후들거리는 다리. 흥건히 젖어오는 사타구니.
관가량이 가까스로 고개를 쳐들며 천신우를 올려다봤다.
그 순간, 천신우의 자운검에서 백광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이 관가량이 살아서 마지막으로 본 광경이었다.
촤아아악!
관가량의 비명은 피가 터져 나오는 소리에 묻혀버렸다.
일행조차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섬뜩한 광경.
하지만 돌아선 천신우의 표정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무림맹 공식조사대에 청해의 무인들이 저지른 일을 보고해 주십시오. 그리고 앞으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공문을 내려달라고 요청해 주시고. 마지막으로…….”
천신우의 시선이 쑥대밭으로 변한 마을을 향했다.
죽은 가족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흐느끼는 사람들.
여전히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
그리고 천신우를 향해 존경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까지.
모든 풍경을 눈에 담았다.
“이곳 사람들이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지원책도 논의해야겠지요. 당장 무림맹 차원의 지원이 어렵다면 천씨세가의 힘으로라도.”
신중현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가주님의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채은수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도 돕겠어요.”
“우리도 돕겠네!”
“형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제갈휘와 모용비. 그리고 천신혁까지.
천신우를 바라보는 모두의 눈빛이 뜨거웠다.
천신우는 그들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내며 바닥에 떨어진 벽력비를 집었다.
“이제 하나 확보했군요.”
그 말에 모두들 마음이 다시 무거워졌다.
벽력비 하나를 확보하기 위해서도 이렇게 많은 피를 봐야 했는데.
앞으로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것이다.
바로 그때.
멀리서 수상한 기척을 감지한 천신우가 눈을 빛냈다.
곧장 천신우의 손에서 비수가 날았다.
쐐애애애액!
공간을 찢으며 날아간 비수는 순식간에 시야에서 자취를 감췄다.
동시에 미약하게 느껴지던 기척도 사라졌다.
‘너무 멀었나.’
멀리 고지대의 숲을 바라보던 천신우가 고개를 돌렸다.
* * *
화전민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망향곡 인근의 울창한 수림.
“…….”
그곳에서 마교 혈마단의 고수는 방금의 광경을 떠올리며 식은땀을 흘렸다.
원래 그의 임무는 마교에서 미끼로 내놓은 벽력비의 행방을 쫓는 것이었다.
강남삼성에서 야수당으로.
그리고 다시 청해로.
마교의 의도대로 벽력비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참혹한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본격적인 계획을 실행하기도 전에 이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상황.
그런데 뜻밖의 변수가 발생했다.
천신우가 청해 무인들을 전멸시키고 벽력비를 확보한 것이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멀리서 감시하던 혈마단 고수에게 비수를 날리기까지 했다.
혈마단 고수의 뺨을 찢고 지나간 비수는 나무를 박살 내고 절벽마저 뚫고 들어갔다.
“천신우…… 정말 괴물 같은 놈이군.”
당장 몸을 빼서 망정이지.
어물쩍거렸다간 무슨 사고를 당했을지 몰랐다.
“일단 단주님께 보고 드려야겠군.”
손에 흥건한 식은땀을 털어내며 혈마단 고수가 이내 그곳을 벗어났다.
* * *
망향곡 인근의 노상식당.
그곳엔 평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망향곡에서 보물쟁탈전을 벌이는 무림고수들을 피해 일반인들이 모여든 것이다.
손님이 워낙 많아 길가 자리에 간신히 합석한 보따리상인 둘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자네도 경고문 봤는가?”
“봤지. 민가를 습격하거나 일반인을 살해하는 경우 무림맹에서 엄중히 벌하겠다고 하더군.”
“믿어지는가?”
상인 하나가 주위 눈치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믿기지 않는다네. 지금까지 어지간한 사고엔 꿈쩍도 하지 않았던 무림맹 아닌가.”
“이번엔 다르다는 소문일세. 인근 화전민 마을을 약탈하던 청해 무인들을 무림맹에서 응징했다더라고.”
“허어! 그게 사실인가?”
“그래. 듣기로는 천씨세가의 소가주가 청해 사인방의 일인인 관가량의 목을 쳤다고 하던데.”
“!”
상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관가량이 누군가.
청해 사인방의 일인으로 온갖 만행을 저질러온 고수다.
일반인들은 물론 근방 문파에서도 피해가 극심했지만 어찌할 방법이 없었는데.
“천씨세가 소가주?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고수기에 관가량을 처단했다는 것인가?”
“자네도 장사치면서 무슨 소식이 그리 늦나. 요즘 무림에 명성이 자자한 천씨세가 소가주를 모른단 말인가? 별호가 뭐였더라. 그래! 뇌전검!”
천신우가 친척이라도 되는 것처럼 흥분해서 떠드는 상인들.
구석자리에서 장국을 먹던 검성은 숟가락을 내려놨다.
‘어딜 가나 그놈 이야기뿐이군.’
철혈성 비무대회 당시 천신우와 처음 맞닥뜨렸던 검성이다.
당시의 기억은 지금도 뇌리에 강렬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만일 무신이 중재하지 않았다면 그날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
사실 검성이 망향곡을 찾은 목적은 따로 있었다.
보물을 차지한 고수들을 상대로 그간 수련의 성과를 시험해 보기 위함.
그런데 천신우라는 월척이 걸린 것이다.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검성이 목을 긁적이는 순간.
한 무리의 무인들이 우르르 들이닥쳤다.
“우리 청해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은 놈이 누구냐!”
무림맹의 경고가 있었기에 청해는 섣불리 천신우를 건드리지 못했다.
천신우 뒤에 무림맹이 있는 이상 아무리 관가량이 죽었다고 해도 대놓고 보복할 수는 없었다.
대신 지금처럼 만만한 일반인들에게 분노를 풀었다.
청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구실을 앞세우며.
청해 무인들의 등장에 대화를 나누던 상인들이 화들짝 놀라 손이 가루가 되도록 빌었다.
“죄송합니다!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그러니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말았어야지.”
청해 무인이 검을 뽑으려던 그때였다.
검성이 그와 상인 사이에 나타났다.
물론 누구도 검성을 알아보지 못했다.
“뭐냐! 네놈은!”
“글쎄다.”
원래 검성은 불의를 보고 나서는 성격이 아니다.
그렇다고 악행을 저지른 적도 없다.
흘러가는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아왔던 검성이다.
그런 검성이 나선 이유는 오직 하나.
‘그놈이라면 분명 이렇게 했겠지.’
검성이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나무젓가락 하나를 집었다.
“설마 지금 그걸로 우리 전부를 상대하겠다고?”
실소를 흘리는 청해 무인들과 달리 검성은 웃지 않았다.
그저 나무젓가락을 휘둘러 청해 무인의 검을 잘라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다 걸린 우연이 아니었다.
어느새 청해 무인들의 검이 깔끔하게 절단된 채로 바닥에 떨어졌다.
“……!”
잘려 나간 칼날과 손잡이만 남은 검을 번갈아 보던 청해 무인들이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급기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는 그들이었다.
청해 무인들이 사라진 자리.
검성은 나무젓가락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수련의 성과를 직접 확인했음에도 그는 전혀 만족스러운 표정이 아니었다.
‘역시 제대로 된 상대가 아니면 전혀 즐겁지 않군.’
그 순간, 검성의 눈앞에 떠오른 건 천신우의 얼굴이었다.
* * *
망향곡의 낡고 오래된 사당.
그곳으로 체구가 작은 사내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들어섰다.
그는 왕중산이라는 이름난 도둑이었다.
심한 부상을 입었음에도 왕중산의 표정은 희열로 가득했다.
신비문파 귀곡의 곡주가 사용했었다고 알려진 보물 유혼마격창을 손에 넣었기 때문.
일단 이곳에서 상처를 치료하고 망향곡을 벗어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왕중산의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다.
‘젠장! 설마 여기까지 쫓아올 줄이야!’
사당 주위로 기척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정체는 유혼마격창을 노리던 무림고수들.
하지만 누구 하나 선뜻 사당으로 들어서지 못했다.
서로 눈치를 보는 것이다.
그들끼리 교통정리가 끝나야 왕중산을 죽이고 유혼마격창을 차지할 터였다.
물론 왕중산 역시 제법 실력 있는 고수에 속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부상을 입고서 포위망을 돌파할 자신은 없었다.
게다가 사당을 에워싼 고수들의 숫자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다.
왕중산이 사당에 모셔진 장군상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가 내 무덤인지도 모르고 들어왔구나.’
그때였다.
사당 안으로 잘생긴 청년 하나가 들어왔다.
“왕중산. 맞지?”
왕중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직 상황정리가 끝난 것도 아닌데 대뜸 안으로 들어온 청년의 정체가 궁금했다.
“그러는 당신은 누구요?”
“천신우. 당신을 이곳에서 빠져나가게 해줄 사람.”
천신우가 기다란 창을 가볍게 휘두르며 덧붙였다.
“유혼마격창의 새로운 주인이기도 하고.”
“……!”
왕중산은 깜짝 놀랐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앞에서 유혼마격창을 빼앗긴 것이다.
“도대체 언제!”
“도둑이 그런 질문을 하면 쓰나.”
“…….”
“그보다 여기 계속 있을 건가?”
어느새 사당 밖으로 걸어 나가는 천신우.
왕중산은 뭔가에 홀린 것처럼 그 뒤를 따라나섰다가 헛바람을 삼켰다.
“헉!”
사당 주위를 수많은 고수들이 새카맣게 에워싸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천신우는 전혀 개의치 않고 일행에게 합류했다.
커다란 수레에 아무렇게나 유혼마격창을 실은 천신우가 중얼거렸다.
“이걸로 여섯 개째군.”
수레에 실린 다른 보물들을 발견한 왕중산이 경악했다.
천신우가 망향곡의 보물을 쓸어 담고 있다는 소문이 사실로 밝혀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