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학사환생 127화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채은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천신우가 먼저 움직이고 나서 거의 곧장 따라붙었건만.
어느새 천신우는 보이지도 않았다.
천신우의 속도가 얼마나 무지막지한지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천신우의 흔적을 찾기가 어렵진 않았다.
가는 곳마다 쓰러진 무인들이 보였으니까.
시체에 남겨진 상처들은 예술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깔끔하고 치명적이었다.
‘전부 천 공자 솜씨야. 모두 일격에 해치웠어.’
채은수의 뇌리에 하나의 광경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막아서는 모든 것들을 폭풍처럼 쓸어버리는 천신우의 모습.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두근두근!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무엇이 천신우를 이토록 분노하게 만들었을까.
그 답은 쑥대밭으로 변해 버린 민가에 있었다.
“으으으…….”
신음을 들은 일행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조심해.”
모용비가 주의를 주며 조심스럽게 신음이 들려온 곳으로 접근했다.
그곳엔 화전민 마을 주민들이 모여 있었다.
저마다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상태.
하지만 당장 생명이 위태로워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 간단한 응급처치를 해놓은 것이다.
“녀석이군.”
모용비가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 수 있었다.
천신우가 이미 위급한 환자들의 응급처치를 해놨다는 사실을.
“다행히 위험한 고비는 넘긴 듯싶네.”
부상자들을 돌아본 제갈휘가 판단을 내린 찰나.
다시 멀리서 비명이 들려왔다.
하지만 이번에 소리가 들려온 곳은 천신우가 사라진 방향과 달랐다.
갈등도 잠시, 모용비가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설령 아우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천씨세가의 고수들이 보호해 줄 거다. 애초에 아우를 위협할 만한 상대도 거의 없을 테고.”
그렇지 않아도 천씨세가에서 차출된 고수들이 무서운 속도로 천신우를 뒤따르는 중이었다.
“그러니 우리는 마을로 가서 사람들을 구하자고.”
채은수와 제갈휘가 천신혁을 돌아봤다.
천신우의 동생이니만큼 그의 의견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
천신혁은 이미 각오를 굳힌 얼굴이었다.
“형님이 여기 계셨다면 똑같이 말씀하셨을 겁니다.”
“그럼 결정됐군. 서두르자고.”
일단 결단을 내리자 그들은 빠르게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 * *
천신우의 차가운 눈빛이 북해의 눈발처럼 주위를 쓸고 지나갔다.
청해의 백인장과 부하들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귀하는 도대체 누구시오?”
백인장은 천신우의 정체가 도저히 짐작되지 않았다.
물론 망향곡 일대에도 천신우에 관한 소문은 유명했지만.
그렇다고 만난 적도 없는 천신우의 얼굴을 한눈에 알아보기란 힘든 법이다.
천신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유가 뭐지?”
그저 추궁했을 뿐이다.
“왜 마을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였지?”
천신우에게서 뿜어져 나온 분노가 사방에 휘몰아쳤다.
이미 알고 있었다.
전생에서도 망향곡의 보물 때문에 수많은 무인이 참혹한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하지만 눈앞에서 참상을 목격하고 나니 관점이 달라졌다.
“단지 보물 때문만은 아니겠지.”
천신우는 아이를 아비 곁에 눕혀놓았다.
망향곡의 보물이 그들의 본성을 바꿔놓은 것이 아니다.
“보물은 너희의 본성을 끌어내는 계기에 불과했을 뿐.”
천신우가 천천히 자운검을 뽑았다.
갱생의 여지가 없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 이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스르릉!
소름 돋는 금속성은 전장을 지배하던 광기마저 잠재워 버렸다.
완전히 뽑힌 자운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린 백광에 눈이 멀어버릴 지경이었다.
청해의 백인장이 공포에 저항하듯 이를 악물었다.
“이따위 일을 벌이고도 무사할 거라 생각하는가! 감히 우리가 누군지 알고!”
“청해.”
천신우의 대답에 백인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벽력비라는 구실이 있었다고는 해도 어쨌든 무자비한 학살을 저지른 상황.
그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 곤란해지는 쪽은 그들이었다.
“우리가 누군지 알고도 이따위 짓을 벌여?”
백인장이 부하들에게 눈짓했다.
누가 봐도 천신우는 어려운 상대.
하지만 그렇다고 얌전히 목을 내어놓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당장 진을 펼쳐라!”
청해가 유명해진 것은 단지 개개인의 무공이 강해서가 아니다.
여러 명이 진을 펼쳐 싸우는 데 능했기 때문.
적게는 다섯 명에서 많게는 수십 명이 일사불란하게 펼치는 진은 너무나도 위력적이었다.
지금까지 청해의 검진에 포위당해 죽은 고수들의 숫자만 해도 헤아리기 힘들 정도.
진의 외곽에 있던 천수문 출신의 사내조차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
‘이게 바로 청해의 검진인가! 과연 엄청나군. 저 청년이 누군지는 몰라도 돌파하기란 쉽지 않겠구나.’
백인장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이제 네놈이 누군지는 상관없다. 진이 발동된 이상 어차피 죽은 목숨…….”
백인장은 말을 잇지 못했다.
스가가각!
진의 외곽을 구축하던 부하들의 목이 한꺼번에 날아간 것이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일격으로 진의 측면을 무너뜨린 천신우가 중앙으로 파고들며 왼팔로 일장을 내질렀다.
콰아앙!
일장의 경로에 서 있던 청해 무인들의 머리가 일제히 터져 나갔다.
즉사한 부하들을 보며 백인장이 일갈했다.
“진을 보수하라!”
스스슥!
청해의 무인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그보다 천신우의 움직임이 빨랐다.
빠악! 빠가가각!
진의 형태가 복구되기도 전에 무인들의 뼈가 부러지고 머리통이 터졌다.
‘이래서는……!’
백인장이 눈을 부릅떴다.
어느새 천신우는 진의 좌측까지 박살 내기 시작했다.
백인장을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며 천신우를 덮쳐가던 진은 이제 형태조차 남지 않았다.
“젠장!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
남은 청해의 무인들이 필사적으로 천신우를 노렸다.
쏴아앙!
덮쳐오는 검들을 피해 천신우의 몸이 변화무쌍하게 흔들렸다.
“……!”
그들로선 감히 예측조차 못 할 움직임이었다.
어느새 뻗어진 천신우의 검이 그들의 목을 쳐 냈다.
서걱!
머리통이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천신우가 땅을 박찼다.
파파파팟!
날아드는 천신우를 막기 위해 청해 무인들이 검을 날렸지만 옷깃조차 스치지 못했다.
촤악!
천신우가 휘두른 자운검에 목이 날아가고 일장에 머리통이 폭발했다.
“이런 미친!”
경악하는 백인장을 향해 천신우가 가공할 속도로 접근했다.
미처 천신우의 움직임을 눈에 담기도 전에.
빠악!
엄청난 충격이 백인장의 두개골을 뒤흔들었다.
그야말로 혼이 빠져나가는 충격을 느끼며 백인장이 뒤로 넘어갔다.
“감히…….”
쿠우웅!
육중한 육체를 바닥에 처박은 백인장은 다시는 움직이지 못했다.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천수문 출신의 사내는 두 눈을 의심했다.
그토록 위협적이었던 청해의 무인들이 한 청년에 의해 몰살당했다.
그것도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머리통과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든 시체들이 아니었다면 믿기 힘들었을 광경.
얼마나 놀랐는지 다른 주민들은 혼절해 버린 후였다.
“…….”
할 말을 찾지 못하는 사내를 잠시 바라보던 천신우가 자운검을 칼집에 밀어 넣었다.
스르르릉!
소름 끼치는 금속성이 시체들 위로 퍼져 나갔다.
이제 자운검은 단순한 검이 아니었다.
야수와도 같았다.
끊임없이 피를 갈구하며 생명력을 탐했다.
이제 그 자운검이 새로운 피를 원하고 있었다.
우우우웅!
칼집 안에서 요동치는 자운검의 손잡이를 매만진 천신우가 고개를 돌렸다.
콰아앙!
바닥을 구른 천신우의 신형이 폭발적으로 쏘아졌다.
* * *
전력을 다해 비명이 시작된 지점에 도착한 천신우 일행.
그러나 그곳의 풍경은 그들이 상상하던 것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채은수가 믿기지 않는 목소리로 물었다.
“천 공자……?”
단련된 육체, 패도적인 기세.
천신우가 분명했다.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고 생각한 천신우가 그들보다 앞서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채은수의 등장에도 천신우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의 서늘한 눈빛은 정면을 향했다.
참혹하게 뭉개져 아무렇게나 처박힌 사내들.
그리고 옷이 찢긴 채로 신음하는 여인들.
모두 마을 주민인 그들은 이미 숨이 끊어진 경우도 허다했다.
그들을 지나쳐 천신우의 시선이 청해의 또 다른 무인들에게 내리꽂혔다.
약자들을 유린하고 마을을 짓밟는 그들의 표정은 광기로 가득했다.
모든 것을 짓밟아놓고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모습.
오히려 그들은 희열마저 느끼는 듯했다.
으드득!
천신우와 마찬가지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모용비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천신혁은 부들부들 주먹을 떨며 당장에라도 뛰어나갈 기세였다.
천신우의 심정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이게 현실이었군.’
전생에서 사람들은 망향곡 참사가 보물쟁탈전 끝에 일어난 사고라고 간주했다.
하지만 그들이 보지 못한 내막.
어쩌면 알고도 애써 외면했을 진실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청해는 원래부터 문제가 많은 세력이었다. 다른 영역에서 범죄를 저지른 무인들을 신분까지 세탁해 가며 받아들인다는 소문이 돌았지. 그래서 망향곡 참사 때도 청해에서 민간인 학살을 주도했다는 의심이 있었다.’
오늘 직접 보고 나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청해에서 얼마나 참혹한 만행을 저질렀는지를.
“저놈들은?”
뒤늦게 천신우 일행을 발견한 청해 무인들의 시선이 한데 모여들었다.
광기와 탐욕으로 가득한 시선을 천신우는 정면으로 받아냈다.
“약속하마.”
천신우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너희 중 한 놈도 이곳을 살아서 나가지 못할 것이다.”
천신우의 전신에서 폭발적인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
경악하는 청해의 무인들을 바라보며 모용비가 검을 뽑았다.
제갈휘가 나직이 말했다.
“단순한 도적 떼가 아니네. 아마 망향곡의 보물을 취하려고 거대문파에서 보낸 칼잡이들이겠지.”
청해 무인들은 소속을 증명하는 어떠한 표식도 갖추지 않았다.
하지만 제갈휘는 무장상태와 단련된 육체를 보고 그들의 정체를 짐작한 것이다.
“상관없네.”
모용비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설령 저들이 무림맹 소속이라 하더라도.”
모용비의 눈동자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무고한 이들을 헤쳤다면 죗값을 치러야 하는 것은 당연.”
천신혁이 검을 뽑는 것으로 동의를 대신했다.
차아앙!
채은수까지 쌍검을 뽑아 들자 호위무인들도 망설이지 않았다.
천신우를 필두로 거대한 기세가 청해 무인들을 덮쳐가기 시작했다.
* * *
타오르던 불길이 잦아든 마을.
청해의 잔당들 사이에서 중년인 하나가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운상.
청해에서 이번 작전을 위해 파견한 무인들 가운데 이인자였다.
과거 흉악범죄자였던 운상은 신분세탁을 마친 후에도 악행을 멈추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도 벽력비를 찾는다는 구실로 무고한 마을 사람들을 유린하던 그였다.
하지만 지금의 운상에게서 광기와 폭력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순간, 그를 지배하는 감정은 오직 공포뿐이었다.
운상의 눈동자가 좌우로 분주히 움직이며 주변의 풍경을 담아냈다.
앞서 벌어진 일전에서 청해 무인들을 제압한 천씨세가의 고수들.
쌍검으로 전장을 휘저은 채은수.
분노를 폭발시킨 모용비와 천신혁.
그러나 그 모두를 합한 것보다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한 것은 바로 눈앞의 천신우였다.
전장을 휩쓸던 천신우의 모습은 그만큼 비현실적이었다.
이제 그 천신우가 운상에게 묻고 있었다.
“네놈들 역시 청해 소속인가.”
천신우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운상이 아니라 천씨세가의 고수 신중현이었다.
“그렇습니다. 알아본 결과 저들 모두 청해 소속입니다.”
제12영역의 거대세력 청해는 천씨세가 입장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상대.
신중현의 태도가 신중한 것도 당연했다.
“본래 우리의 목적은 보물을 확보하고 나아가 마교를 응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청해와의 정면충돌은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큽니다.”
충분히 일리 있는 조언.
하지만 천신우는 고개를 저었다.
“얼마 전까지는 제 생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의 적은 마교뿐이며 다른 이들과의 충돌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천신우의 차분한 목소리에 일행들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천신우가 분노한 나머지 이성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걱정했던 것이다.
물론 지금 천신우는 어느 때보다도 냉정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단지 마교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악에 맞서는 것이라고.”
“……!”
신중현뿐만이 아니었다.
천신우를 따르는 이들 모두 뭔가 느끼는 바가 있는지 눈빛이 달라졌다.
“과연,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신중현이 검을 높이 세워 들며 천씨세가의 고수들에게 지시했다.
“소가주의 말씀대로 눈앞의 놈들은 모두 악인이다. 하나도 남김없이 쓸어버리도록.”
천신우 역시 운상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겁에 질린 운상이 뒤돌아 달아나려던 그때였다.
뒤편에서 한 무리의 무인들이 나타났다.
그들 속에서 청해 사인방의 일인인 관가량을 발견한 운상이 반색했다.
청해에서 손꼽히는 고수 관가량이라면 자신의 목숨을 구해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한 것.
“관주님!”
관가량은 한 손에 야수당 당주의 목을, 다른 한 손에는 그에게서 빼앗은 벽력비를 들고 있었다.
“합류가 늦어지기에 뭐 하나 싶었더니만 손님들이 계셨군.”
그렇게 말하며 관가량은 천신우 일행의 면면을 살폈다.
그들 중에 신중현의 얼굴을 알아본 관가량의 얼굴이 굳어졌다.
신중현은 관가량이 전력을 다해도 승부를 장담하기 힘든 고수였기에.
게다가 천신우를 비롯한 나머지 일행의 기세도 심상치 않았다.
“무슨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구려.”
쉽지 않은 상대임을 직감한 관가량이 대화를 시도하려는 찰나.
서걱!
관가량에게 걸어가던 운상의 목에 실선이 그어졌다.
모두의 시선을 느낀 운상이 의아한 표정으로 목을 매만졌다.
“……?”
바로 그 순간, 운상의 목이 떨어지며 핏물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촤아아아악!
운상의 목을 단칼에 날려 버린 천신우가 물었다.
“이래도 오해라고 말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