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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환생-126화 (126/171)

# 126

학사환생 126화

“이럴 수가…….”

천신우 일행은 탄식을 금치 못했다.

과거 만금소와의 해상전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던 천신우다.

하지만 몇 번을 봐도 도저히 익숙해지질 않는 광경이 있다.

불길에 휩싸인 민가.

잿더미가 되어버린 시체.

인간이라면 익숙해지기 힘든 광경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분노하는 천신우의 귀에 멀리서 비명이 들려왔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어느새 천신우는 비명이 들려온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우리도 따라가요.”

“그럽시다.”

눈빛을 교환한 일행들이 천신우를 뒤따랐다.

* * *

“흐흐흑.”

“아아악!”

“살려주세요. 으흑, 제발 살려주세요…….”

흐느끼는 여인들과 아이들 사이에서 남자 하나가 몽둥이를 쥐고 울부짖었다.

“여자와 아이들은 살려준다 하지 않았소!”

남자는 화전민 마을의 주민이었다.

산적과 대적하기 위해 몸을 단련한 그였지만 눈앞의 무인들 앞에선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무림 제12영역의 거대세력 청해 소속.

애초에 무공을 제대로 익혔다 해도 대적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서걱! 촤아아악!

끔찍한 절단음에 핏물과 살점이 사방으로 튀었다.

눈앞에서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광경을 목격한 남자가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다.

“으아아아!”

그러나 제정신으로도 당해내지 못했던 상대들이다.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막무가내로 휘두르는 몽둥이는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솨악!

남자의 팔이 몽둥이와 함께 잘려 나갔다.

“크아악!”

비명을 지르는 남자를 향해 무인 하나가 검을 내려치려는 순간.

청해의 백인장이 손을 들었다.

“그놈은 아직 죽이지 마라.”

물론 자비를 베푼 것은 아니었다.

청해의 백인장 중에서도 유독 잔인한 성격으로 유명한 그였다.

“우리를 기만한 대가를 치러야지. 느껴보아라. 눈앞에서 가족이 죽는 고통을.”

“기만이라니! 분명 말했잖소! 야수당인지 뭔지 하는 자들이 누군지 모른다고!”

청해의 무인들은 야수당의 잔당들을 쫓고 있었다.

이유는 하나.

야수당이 확보했다고 알려진 무림삼대비도 벽력비를 찾기 위해서였다.

망향곡에서 벽력비를 손에 얻은 야수당 무인들은 추격을 피해 이 일대로 달아났던 것이다.

“이미 야수당 놈들이 이곳으로 숨어들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발뺌해 봐야 소용없어.”

이미 답을 정해놓고 쏘아붙이는 청해의 백인장이었다.

화전민 마을 주민들 입장에선 억울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일단 여자아이부터 시작하지. 다리 하나를 잘라라. 놈이 진실대로 고하지 않으면 다음엔 팔을 자르고 귀를 자르도록.”

“개자식들아! 네놈들이 그러고도 사람이냐! 으아아아!”

고함을 지르며 발버둥 치는 남자를 청해 무인들이 찍어 눌렀다.

“조금이라도 오래 살고 싶으면 얌전히 지켜봐라, 으하하하.”

사악하게 웃던 청해 무인이 순간 멈칫했다.

청해 백인장 역시 눈매를 좁혔다.

“뭐 하는 놈이냐.”

쑥대밭이 되어버린 민가를 향해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사내의 얼굴을 알아본 남자가 눈물을 흘렸다.

“형님!”

남자와 의형제를 맺은 사내는 무인이었다.

얼마 전부터 이곳에 머물면서 산적들의 습격으로부터 마을을 지켜주곤 했던 그였다.

산짐승 사냥을 위해 잠시 마을을 비운 사이에 사고가 터진 것이다.

“당신들은 하늘이 무섭지 않소?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사내의 눈엔 분노가 가득했다.

그러나 청해 백인장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사내는 분명 이런 산골에서 썩기엔 아까운 실력자.

하지만 그렇다고 청해의 무인들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어디서 무공을 익혔는지는 모르겠지만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놈이구나.”

청해 백인장이 부하들에게 눈짓했다.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었다.

자신들의 소행을 목격한 이상 반드시 죽여서 입을 막을 필요가 있었다.

파파팟!

청해의 무인들이 사내를 향해 쇄도했다.

달려드는 무인들을 바라보던 사내가 철검을 뽑아 들었다.

차차차창!

4대 1의 싸움.

그러나 사내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청해 무인들의 검을 쳐 냈고 급기야는 어깨에 상처를 입히기까지 했다.

“큭!”

어깨를 찔린 청해 무인이 비틀거리며 물러나자 균형이 무너졌다.

매섭게 몰아치는 사내를 지켜보던 청해 백인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니 천수검법을 익혔군.”

사내의 얼굴이 굳어졌지만 백인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천수문에서 소문주를 죽이고 달아난 놈이 있다고 들었는데. 내가 보기엔 네놈이 바로 그놈 같구나.”

사내는 부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마을의 참상을 목격한 이상 청해 무인들은 그를 살려두지 않을 터였다.

죽는 마당에 지난 과거가 무슨 소용일까.

“죽어 마땅한 놈이라 죽였다.”

불타고 있는 화전민 마을 위로 얼마 전의 비극이 겹쳐졌다.

사내는 얼마 전까지 중견문파 천수문 소속이었다.

그것도 제법 인정받는.

하지만 천수문주의 아들이 사내가 사랑한 여인을 겁탈하고 살해한 순간 모든 것이 틀어졌다.

사내는 연인을 죽인 소문주에게 복수하고 달아났다.

그렇게 다다른 곳이 바로 이곳 화전민 마을이었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주민들을 보고 그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남은 삶은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도 했다.

그런데 또다시 시련이 찾아온 것이다.

“너희 또한 죽어 마땅한 놈들 같군.”

“천수문 망나니 아들놈 하나 죽였다고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모양인데.”

백인장이 섬뜩하게 웃었다.

자신만만한 태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청해의 백인장이라면 중견문파의 장로급 이상.

눈앞의 사내보다 월등한 실력을 지닌 그였다.

“나를 상대로도 그렇게 날뛸 수 있을까.”

사내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단지 마주 섰을 뿐인데 실력 차가 느껴졌다.

하지만 두려움도 잠시.

입술을 깨문 사내가 백인장을 향해 쇄도했다.

“이놈 봐라?”

의외의 선택에 백인장이 눈매를 좁히는 찰나.

방향을 바꾼 사내가 앞서 팔이 잘린 남자를 구속하고 있던 청해 무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위협적인 움직임에 그들은 임무조차 망각하고 뒤로 물러났다.

사내가 남자를 일으켜 세웠다.

“훈아! 아이를 데리고 달아나라!”

“형님…… 어찌 아우 혼자 달아나라 하십니까.”

“너는 나와 달리 혼자가 아니잖으냐! 잔말 말고 가라! 어서!”

망설이던 남자가 이를 악물며 일어났다.

잘린 팔을 대충 지혈하고 남은 한쪽 팔로 아이를 안고 달리기 시작했다.

백인장이 호통을 쳤다.

“멍청한 자식들! 저대로 가게 내버려 둘 거냐?”

그제야 청해 무인들이 남자를 뒤쫓으려 했다.

그들 앞을 사내가 필사적으로 막아섰다.

“여기서부턴 아무도 지나가지 못한다!”

사내와 청해 무인들 사이에 치열한 사투가 벌어졌다.

차차차차창!

달려가던 남자가 소리 질렀다.

“형님!”

“멈추지 마라! 계속 가라! 그래야 너와 아이가 살아!”

사내는 이를 악물고 청해 무인들과 맞섰다.

채채채챙!

그러나 팽팽한 접전은 오래가지 못했다.

“크윽!”

사내가 비틀거렸다.

왼쪽 어깨에 상처가 제법 깊었다.

그러나 상처를 돌볼 새도 없이 사내는 다시 검을 휘둘렀다.

그가 물러서면 의형제와 아이를 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이놈들! 여기서 죽더라도 네놈들은 전부 저승으로 데려갈 것이다!”

사내의 눈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무모할 정도로 청해 무인들을 향해 돌진한 사내가 매섭게 검을 휘둘렀다.

푸욱!

무인 하나의 배를 찌르고 돌아서며 다른 무인의 팔을 날려 버렸다.

정말이지 귀신같은 움직임!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집요하게 달려드는 청해 무인들의 공격을 전부 막아내기란 역부족이었다.

푸욱!

복부를 찔린 사내가 울컥 피를 토해냈다.

과연 청해의 무인들다웠다.

거대세력과 중견문파 사이에는 이만한 격차가 있는 것이다.

그래도…….

의형제를 구했다.

자신을 삼촌처럼 따르던 아이도 구했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하지만 백인장의 표정을 보는 순간 사내는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후후후.”

백인장이 비릿하게 웃었다.

“청해를 뭐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설마 우리가 네까짓 놈이 숭고하게 죽도록 내버려 둘 거라 생각했느냐?”

사내의 불안감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뒤쪽에서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삼촌…….”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느 때보다 몸이 무거웠다.

“아아…….”

사내의 부르튼 입술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도망갔던 아이가 잡혀 왔다.

아이를 빼앗긴 남자는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형님……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사내의 얼굴에 절망이 어렸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는 대신 으스러져라 검을 고쳐 잡았다.

“너와 희아와 알고 지내 행복했다. 너희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삶을 포기했을 것이다.”

진심이었다.

사랑하는 연인이 없는 하루하루는 지옥과도 같았으니까.

“그러니 미안해하지 마라.”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내의 눈빛이 바뀌었다.

기습하려던 청해 무인의 목을 날려 버린 그가 핏물을 뱉었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으마.”

“형님!”

“이런,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신파극이군.”

백인장이 고개를 까딱였다.

청해 무인 하나가 아이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아악!”

아이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흘러나오자 사내는 몸에서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백인장은 그에게 무인으로서의 최후마저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으드득!

사내가 잇몸이 터질 듯이 이를 악물던 그때였다.

빠아아악!

엄청난 타격음이 들려왔다.

소리보다 빠르게 바닥에 처박힌 것은 청해 무인의 머리통이었다.

“……!”

백인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나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십여 개의 머리통이 날아와 바닥을 뒹굴었다.

“이럴 수가…….”

백인장 옆을 지키던 청해 무인들이 신음을 토해냈다.

그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오히려 바닥에 나뒹구는 이들의 표정이 평온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럴 만도 했다.

그들은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목숨을 잃었으니.

백인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건 대체……!”

그 순간.

쐐애애액!

쏜살처럼 날아든 비수가 백인장의 뺨을 할퀴고 지나갔다.

볼이 뭉텅이로 잘려 나가고 허옇게 드러난 광대뼈 주위로 피가 흘러내렸다.

머리카락이 쭈뼛해짐을 느끼며 백인장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부하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로.

“……괜찮으십니까?”

가슴이 뚫린 것도 모르고 바람 빠진 숨소리를 내뱉은 부하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마치 돌무더기가 우르르 무너지듯 청해의 무인들이 차례차례 쓰러졌다.

그 뒤로 바위에 박힌 비수가 보였다.

비수 끝이 파르르 떨리는 찰나.

거대한 바위가 쩌억 소리를 내며 반으로 쪼개져 버렸다.

동시에.

저벅.

정반대 방향에서 흙바닥을 짓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째서일까.

바위가 쪼개지는 충격음보다 훨씬 작은 소리임에도 모두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백인장은 뭔가에 홀린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서 있는 것은 천신우였다.

아이를 안아 든 그의 눈빛은 지금까지 백인장이 봐왔던 그 누구보다 차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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