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
학사환생 125화
그곳엔 채은수가 서 있었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그녀가 미소 지었다.
“오랜만이네요.”
채은수는 사뭇 달라진 느낌이었다.
눈부신 외모는 여전했지만 분위기가 바뀌었다.
당당한 모습.
이유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폐관수련에서 성과가 있었나보군요. 축하드립니다.”
채은수가 눈을 빛냈다.
“천 공자도 성취가 있었군요. 조금은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모용비나 천신혁 이상으로 가파르게 성장한 채은수였다.
원래 사룡의 말석이었지만 이제 그 이상을 충분히 넘볼 수 있는 경지.
물론 천신우와의 격차는 여전히 컸다.
그러나 채은수는 실망하지 않았다.
천신우의 등을 바라보며 따라갈 수 있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기에.
“흠흠.”
묘해진 분위기를 감지한 제갈휘가 눈치를 줬다.
하지만 천신우의 소장품에 정신이 팔린 모용비와 천신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천신우도 긴장이 풀렸다.
“채 소저도 보고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정말요?”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대답하는 채은수였다.
“물론입니다.”
“그럼 사양하지 않을게요.”
옹기종기 모여 천신우의 소장품을 전부 감상한 일행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어렵군. 어려워.”
워낙 눈이 휘둥그레지는 보물들이라 선뜻 하나를 고르기 힘든 것.
결국 오랜 고민 끝에 모용비는 손에 맞는 명검을 골랐다.
천신우의 자운검이나 얼마 전에 얻었던 흑성검까지는 아니어도 충분히 좋은 선택.
반면 제갈휘는 흑색 판관필에 꽂혔다.
모양은 붓처럼 생겼지만 단단하고 날카로운 판관필은 제갈휘와 제법 어울렸다.
그리고 용신갑은 일행의 권유로 천신혁에게 돌아갔다.
사실 모용비나 제갈휘가 고른 무구보다 용신갑의 가치가 훨씬 높긴 했다.
그럼에도 천신혁이 막내라는 이유로 다들 양보한 것이다.
“잘 어울리는데.”
“정말입니까? 하하! 감사합니다! 형님!”
용신갑을 입어본 천신혁도 마음에 드는지 어깨를 으쓱으쓱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천신혁을 보며 천신우는 전생을 떠올렸다.
천신혁은 가주 천무흔의 뒤를 이어 천씨세가를 개혁하고 마교와의 전쟁에도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그러다 최전선에서 마교 고수에게 저격당해 치명상을 입었지.’
전생과는 많은 것이 바뀐 지금.
천신혁이 또다시 마교 고수에게 저격을 당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용신갑이 있다면 같은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결과는 전생과 다를 것이다.
마지막으로 채은수는 원래 사용하는 검에 어울리는 짝을 골랐다.
의외의 선택에 천신우가 이유를 물었다.
“괜찮은 선택입니다. 하지만 원래 쓰던 검도 그에 못지않은 좋은 검으로 압니다만.”
“부끄럽지만 폐관수련에서 깨달은 바가 있어서요. 앞으로는 쌍검을 사용해 볼 생각이랍니다.”
채은수의 대답을 들은 천신우가 눈을 빛냈다.
‘그녀가 검후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시점은 한참 후다. 하지만 그 첫 걸음은 쌍검을 선택하면서부터였지.’
전생보다 채은수의 성장이 훨씬 앞당겨진 셈.
천신우는 흡족한 얼굴로 일행을 돌아보았다.
“다들 마음에 드십니까?”
“물론이지.”
“그럼요.”
“그럼 지금부터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방금 전까지 들떴던 것도 잠시.
일행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제갈휘와 모용비는 자세를 고쳐 앉았고.
천신혁은 눈을 초롱초롱 빛냈으며.
채은수는 전에 없이 지그시 천신우를 쳐다보았다.
자신을 향해 모여든 모두의 시선을 느끼며 천신우가 입을 열었다.
먼저 폐관수련을 막 끝내고 나온 채은수를 위해 현재 상황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마교가 여러 차례 암살사건을 시도했으며, 그것으로도 모자라 망향곡 사건까지 꾸미고 있다고.
“그렇군요.”
충격적인 사실의 연속에도 채은수의 맑은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미 조부인 무신으로부터 대략적인 상황을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천신우를 믿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듯 천신우가 해결책을 내놓을 거라고.
채은수는 그렇게 믿었다.
사실 빛조차 들지 않는 석실에서의 폐관수련을 견뎌낸 것도 천신우 덕이었다.
당당한 모습으로 천신우 앞에 서겠다는 일념으로 혹독한 수련을 이겨낸 그녀였다.
그리고 천신우는 그런 채은수의 기대감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한 천신우였다.
“일단 무림맹 주도로 공식조사대가 파견될 예정입니다. 물론 무림맹 연쇄살인사건의 여파 때문에 많은 인원이 투입되진 않을 겁니다. 마교의 양동작전도 염두에 두어야 하니까요.”
전생에서도 그랬지만 마교의 전략은 항상 변칙적이면서도 유동적이었다.
망향곡에 전력을 집중시키는가 싶더라도 틈이 보인다면 무림맹을 직접 타격할 터였다.
“현재로선 무림맹 천검단 일부가 동원되고 무신궁과 도천의 고수들이 포함되는 안이 유력한 거로 압니다. 아직 확정까지는 아니지만요.”
전생에선 이미 일어난 사건의 보고서를 읽었을 뿐인 천신우다.
하지만 이번 생에선 무림맹의 의사결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입장이었다.
그야말로 인생역전을 일궈낸 셈이지만 들뜬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 우리도 공식조사대에 합류하게 되나요?”
채은수도 전과 달리 적극적으로 물음을 던지는 모습.
무공만 성장한 것이 아니라 태도 역시 변한 그녀였다.
“사실상 공식조사대의 임무는 인명피해가 커지지 않도록 감독하는 것입니다. 거대세력들이 대규모 인원을 투입해 망향곡 일대를 장악한다던가. 보물에 눈먼 마두가 대량학살을 일으킬 경우 개입하게 되겠지요.”
제갈휘가 손바닥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확실히 무림맹 공식조사대라도 먼저 개입하긴 어렵겠지. 아무래도 민감한 사안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망향곡은 여러 영역의 접경지역에 위치해 이해관계가 충돌할 수밖에 없으니까.”
처음부터 망향곡을 통제하려 든다면 무림맹에서 보물을 독점한다는 소리가 나올 것이다.
결국 무림맹 공식조사대의 행동반경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공식조사대에 합류하지 않습니다.”
다들 깜짝 놀란 얼굴이었지만 토를 다는 대신 천신우의 설명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우리는 다른 세력들과 마찬가지로 보물 쟁탈전에 뛰어들 겁니다. 무림맹에서 정한 규율을 준수하면서 모든 보물을 차지하는 것이 우선목표입니다.”
보물을 독점하면 필연적으로 다른 세력끼리의 충돌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들도 보물이 목적이니까.
결국 그들의 이목은 온통 보물을 차지한 천신우 일행에게 향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와는 별개로 마교의 첩자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갈 겁니다. 망향곡에 마교가 구축했을 근거지까지 파괴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잠깐.”
끼어드는 제갈휘의 표정이 심각했다.
“지금이야 망향곡에 모여든 무인들의 면면이 변변찮다지만 앞으론 상황이 달라질 걸세. 이미 남악련을 비롯해 여러 거대세력에서 조사대를 파견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네.”
소문은 사실이었다.
전생에서도 수많은 세력이 망향곡에 고수들을 파견했으니까.
“우리와 천씨세가의 고수들만으론 그들과 경쟁해 우위를 점하기 힘들어. 그런 상황에서 마교까지 상대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우리뿐이라면 그렇겠지요.”
천신우가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조력자들이 합류할 겁니다.”
채은수가 눈을 빛냈다.
“설마 풍뢰권 어르신과 권왕인가요?”
이미 구왕도에서 그들의 실력을 직접 확인한 채은수였다.
당연히 기대를 품을 수밖에.
“그들이 끝이 아닙니다. 확정돼야 알겠지만 아마 구왕도 임무 때보다도 전력 면에서 훨씬 앞설 겁니다. 그러니 믿고 출발할 준비를 해주십시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모두가 의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당장 준비하자고!”
“내일 아침에 이곳에서 모여서 함께 출발하겠습니다.”
천신우가 먼저 몸을 일으켰고 채은수가 미소와 함께 뒤따랐다.
* * *
같은 시각.
올해 들어 처음 무명 모임이 열린 무림맹 근방의 모처.
무신은 손녀의 얼굴을 떠올리며 흐뭇하게 웃었다.
“지금쯤 천신우 그놈과 만났을 텐데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이미 많은 것을 이룬 무신이다.
이제 개인적인 바람이라곤 하나뿐이었다.
손녀 채은수가 좋은 상대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룬다면 더는 여한이 없었다.
신랑감 0순위는 당연히 천신우.
“어련히 잘하겠지만 여차하면 내가 나서야겠지.”
“무슨 혼잣말을 그리 하나.”
뒤늦게 무명의 일원 애꾸눈 노인을 발견한 무신이 급히 화제를 돌렸다.
“설마 자네뿐인가?”
“이미 소식을 들은 거로 아네만.”
검신은 제자 검귀의 수련을 구실로 불참했다.
풍뢰권은 권왕을 데리고 멋대로 망향곡으로 출발한 상황.
“그랬지. 하여간 말귀라곤 들어먹질 않는 놈들이라니까. 이런 식이면 고민할 필요조차 없겠군. 나야 도제 그놈 때문이라도 무림맹에 발이 묶일 수밖에 없으니.”
무신이 애꾸눈 노인을 바라보았다.
“이번엔 자네가 나서줘야겠네.”
“망향곡이라고 했지?”
“그렇다네.”
“그럼 십인회 그자들도 나타나겠군.”
애꾸눈 노인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하지만 무신은 이 순간 그의 고뇌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림 제11영역을 지배하는 십인회는 애꾸눈 노인과 악연으로 얽힌 사이.
그와 십인회가 망향곡에서 마주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무신은 애꾸눈 노인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를 믿네.”
“재미있군. 나도 내 자신을 믿지 못하는데 자네가 나를 믿는다니.”
애꾸눈 노인이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추적추적 내리는 봄비를 바라보는 그의 눈가로 지난날이 거슬러 올라왔다.
“벌써 20년인가…….”
* * *
금와전장.
한때 만수전장에 이어 무림 제2의 전장이었던 이곳은 전성기에 비해 폭삭 주저앉았다.
자산과 매출이 나날이 줄어갔고 주력사업들도 차례차례 무너졌다.
원인은 간단했다.
“천신우……! 빌어먹을 자식 같으니라고!”
금와전장의 장주 만금소는 광기에 사로잡힌 눈으로 거울을 노려보았다.
거울에 비치는 그의 몰골은 살이 빠져 앙상하게까지 보였다.
육중한 체격을 자랑했던 과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천씨세가가 금와전장의 영역을 치고 들어오면서 극심한 압박감을 느꼈기 때문.
하지만 복수하고 싶어도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이미 천씨세가는 한 영역의 패자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성장했으며.
천신우는 무신과 도제의 동맹을 이끌어내며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었다.
아무리 만금소라도 독자적인 힘만으로 천신우를 처단하기란 불가능했다.
게다가 도제에겐 버림받고 마교의 진사명과는 연락이 끊어진 상황.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인가!”
궁지에 몰리면 밑바닥이 드러난다고 하던가.
지금의 만금소가 그랬다.
냉철함을 완전히 잃어버린 그는 밀려드는 압박감과 초조함을 이겨낼 힘이 없었다.
결국 평소라면 절대 물지 않았을 미끼까지 물어버린 만금소였다.
“그래. 망향곡……! 기회는 그것뿐이다.”
무림 전역의 고수들과 마찬가지로 만금소 역시 망향곡에서 온갖 보물들이 발견됐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경매에서 보기도 힘든 전설적인 무구들.
만금을 주더라도 구하기 힘든 무공비급들까지.
만일 망향곡의 보물들을 모조리 손에 넣는다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을지도 몰랐다.
성공보다 실패할 확률이 훨씬 높았지만 이미 이성이 마비된 만금소는 무리수를 던졌다.
“고수들을 모두 집결시켜라! 목적지는 망향곡이다!”
광기에 사로잡힌 만금소의 목소리가 금와전장에 울려 퍼졌다.
* * *
공식조사대 외에 천신우 주도로 별도의 인원이 꾸려졌다.
천신우와 채은수를 위시한 후기지수 일행들.
거기에 천씨세가의 고수들과 각자의 수행원들까지 합류하자 제법 그럴듯한 규모가 갖춰졌다.
화룡점정은 장윤호.
정보원으로 일행에 합류한 장윤호 덕에 망향곡이 가까워질 때까지 심심할 날이 없었다.
“망향곡은 제10영역과 제11영역. 그리고 제12영역이 맞닿은 접경지대. 이미 오래전에 인근 세력들끼리 망향곡 일대를 공동관리하기로 합의를 봤다네. 물론 지금까진 돈이 되지 않기에 사실상 방치 상태였지.”
장윤호는 마차가 덜컹거리는 동안에도 쉬지 않고 떠들었다.
“하지만 망향곡에서 거대한 유적과 보물이 발견됐다는 소문이 돌면서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어. 이제는 저마다 이권을 주장하고 나서는 통에 아주 개판이라는군. 지금까진 서로에게 관리책임을 전가하던 주제에 웃기는 일이지.”
그렇다고 실속이 없는 정보는 결코 아니었기에 천신우는 주의 깊게 들었다.
“조금 있으면 도착할 화전민 마을도 그런 곳들 가운데 하나야. 산적들에게 숱하게 약탈당했지만 지금껏 어떤 세력도 보호해 주지 않았다네.”
무림 문파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인보다도 계산적인 경우가 허다했다.
돈이 되지 않는 화전민 마을 따위 그들의 관심 밖이었다.
씁쓸한 현실에 천신우를 포함한 모두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나 말했다시피 지리상 이 일대의 화전민 마을들은 망향곡으로 진출할 전초기지로 아주 적합해. 지금쯤이면 특정세력에서 점거했을지도 모르지.”
때마침 앞서 정찰을 나갔던 천씨세가 고수들이 복귀했다.
“소가주님! 큰일 났습니다!”
급하게 말을 달려간 천신우 일행 앞에 펼쳐진 것은…… 시커먼 불길에 휩싸인 마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