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학사환생 124화
“들어오너라.”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입구를 지키던 고수들이 일제히 옆으로 물러났다.
그들 모두 굉장한 실력자들이었다.
각기 무신궁과 도천 소속의 고수들.
당연히 안에는 무신과 도제가 앉아 있었다.
“그래.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도제까지 부른 이유가 무엇이냐?”
물론 천신우를 대하는 태도는 완전히 달랐다.
무신은 비교적 살갑게 천신우를 맞이한 반면.
도제는 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로 천신우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사실 무신이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 절대 나오지 않았을 도제였다.
“두 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천신우도 도제의 냉랭한 반응을 예상했기에 당황하는 기색은 없었다.
“말해보아라.”
천신우와 무신이 대화하고 도제가 흘려듣는 식이었다.
“혹시 망향곡의 소문을 들어보셨습니까?”
“망향곡이라면 지명 정도는 들어봤다만.”
무신이 부하를 불러 확인했다.
아무래도 무신이나 도제는 장윤호와는 입장이 다르다.
뜬소문들까지 직접 챙길 수는 없는 것이다.
이윽고 부하에게 보고를 받은 무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망향곡에서 보물이 발견됐다는 소문 말이냐?”
“그렇습니다.”
“대관절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이기에 우리를 불러 모은 것이냐? 누군가에게는 벽력비가 가치 있는 보물이겠지만 내게는 아니다. 심지어 소문의 진위도 밝혀지지 않았고 말이다.”
화를 내는 것이 아니다.
무신은 지금 천신우에게 납득시킬 기회를 주고 있었다.
“제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이번 일을 꾸민 배후는 마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교?”
무신이 눈매를 좁혔다.
이번에는 도제도 관심을 보였다.
그래봐야 살짝 고개를 움직인 것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보물을 미끼로 던져 무림 전역의 무인들을 망향곡으로 끌어들일 계획으로 보입니다.”
“그간의 암살시도가 연달아 실패했으니 아예 전장을 바꿔버린다는 건가. 일리 있는 선택이군.”
천신우를 전적으로 믿기에 가능한 무신의 반응.
하지만 도제를 설득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도제를 납득시키기 위해 천신우는 가져온 서책을 꺼냈다.
그것은 잡서와 바꿔치기한 태극신무 비급이었다.
“이걸 봐주십시오. 마교에서 미끼로 사용하려던 무공비급입니다.”
먼저 내용을 확인한 무신이 눈을 빛냈다.
“이건…… 태극신무 비급이군.”
무신도 태극신무 비급을 보는 것은 처음.
하지만 비급에 담긴 정수를 간파해내기란 어렵지 않았다.
그제야 도제도 비급을 건성으로 훑었다.
물론 천신우는 도제의 눈빛이 살아 있음을 놓치지 않았다.
도제 역시 비급의 가치를 알아본 상황.
‘슬슬 쐐기를 박아보실까.’
천신우는 내친 김에 용신갑까지 내어놓았다.
소문만 무성하던 전설적인 무구들의 등장에 무신과 도제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이게 전부 미끼라고?”
물론 무신과 도제의 소장품들을 뒤져보면 비슷한 가치의 보물들이 수레 분량으로 나올 것이다.
하지만 그걸 미끼로 뿌리는 것은 완전히 의미가 달랐다.
아무리 무신과 도제라도 그런 과감한 선택을 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원래 망향곡으로 운반돼 미끼로 쓰일 예정이었던 물건을 제가 중간에서 가로챈 겁니다. 그리고 이건.”
결정타는 망향곡 계획이 담긴 문서였다.
“마교에서 이번 일을 꾸몄다는 증거입니다. 암살계획을 총괄했던 진사명이란 자가 직접 작성한 문서이니 확인해 보시길.”
물론 거기엔 절명곡에서부터 이어진 마교의 음모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하지만 보물을 미끼로 고수들을 망향곡으로 유인한다는 것만으로도 반응을 이끌어내기엔 충분했다.
망향곡 계획을 거듭해서 살펴본 무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교에서 아주 작정했구나. 좋다. 놈들이 이렇게까지 나온다면 우리도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는 노릇.”
결단을 내린 무신이었다.
“소문을 듣고 망향곡으로 몰려드는 이들이 없도록 맹주에게 건의해 접근금지 명령을 내리겠다. 네가 원하는 것도 그것일 테니.”
하지만 천신우는 고개를 저었다.
무신의 의견은 그야말로 이상론이다.
전생에서도 비슷한 대책을 내놓았지만 결국 참사를 막지 못했다.
“지금 상황에서 접근금지 명령은 독이 될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소문을 신뢰하게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뒤이어 문서 확인을 마친 도제가 무신을 비웃었다.
“확실히 인간의 욕망은 아주 강렬하지. 불길에 타들어 가면서도 절대 손에 쥔 것을 놓지 않는 게 인간이다. 철옹 네놈이야 그걸 모르니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고.”
이번만큼은 천신우와 도제의 의견이 일치했다.
“이번 일이 정말 마교에서 꾸민 것이라면 막을 방법은 하나뿐이다. 놈들이 미끼로 던진 보물을 모조리 선점하는 것.”
무신이 혀를 찼다.
“그렇게 하면 다들 가만히 있겠느냐? 그렇잖아도 무림맹에 이래저래 반감을 품은 놈들이 많거늘.”
모든 세력이 무림맹이 주도하는 질서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적으로 무림맹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운 거대세력들도 여럿 존재했다.
물론 앞에서야 무림맹의 권고를 듣는 척하겠지만, 결국 뒤로는 은밀히 사람을 풀어 보물을 노릴 터였다.
도제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러니 힘으로 찍어 눌러야겠지. 감히 눈독조차 들이지 못하게 말이다.”
말이야 저렇게 하지만 누구보다 정치력이 뛰어난 도제다.
일단 보물을 확보하고 나면 거대세력들과의 물밑협상을 통해 문제를 풀어나갈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천신우가 생각하는 정답은 아니었다.
“힘만으로 광기를 잠재우기란 불가능합니다. 마교에서 분명 방해공작을 해올 것이기 때문이지요.”
실제로 전생에서도 벌어진 일이다.
마교는 선동과 날조를 일삼으며 망향곡에 모여든 무인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무림맹의 권고가 전혀 먹히지 않았던 것도 마교의 그러한 방해공작 때문.
“그러니 단지 힘만 내세울 게 아니라 망향곡으로 모여든 사람들을 설득할 필요가 있습니다.”
“크하하!”
도제가 웃음을 터뜨렸다.
듣는 이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드는 광기 어린 웃음이었다.
“아주 재미있는 말을 지껄이는구나. 설마 광기에 사로잡힌 자들을 설득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마교가 이번 일의 배후에 있다는 사실을 밝히면 납득할 겁니다.”
도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납득한 표정은 아니었다.
“원한다면 그렇게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어떤 대가를 치를지 벌써부터 기대되는군.”
그대로 몸을 일으킨 도제는 그곳을 떠났다.
도제를 수행하는 고수들 역시 함께 사라지고 나자 무신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으허허. 나이 먹어서도 저놈의 성질머리는 여전하군.”
무신이 천신우를 돌아봤다.
“그나저나 네놈 목적은 보물을 취하는 것이 아니구나. 보물을 차지할 생각이었다면 이럴 시간에 먼저 움직였을 터.”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좋게 보긴. 네놈 머릿속엔 마교를 막을 생각뿐이라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느니라.”
무신이 손등으로 턱을 쓱쓱 문질렀다.
“그 생각이 기특하니 이번만큼은 확실하게 도와주마. 내가 무엇을 해주면 되겠느냐?”
“먼저 명분을 만들어주십시오.”
“과연. 나와 도제가 의견을 모아 맹주에게 건의한다면 적어도 명분만큼은 확실하겠지. 하지만 네가 말했다시피 명분만으론 광기를 잠재우기 힘들 것이다.”
“당연히 힘도 빌려주셔야 합니다. 물론 무신궁의 힘을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신궁은 언제까지나 도천을 견제하는 세력으로 남아 있어야 하니까요.”
천신우는 무림맹의 권력구도를 정확히 짚었다.
지금이야 무신과 도제가 일시적으로 협력하는 상황.
하지만 무신궁의 고수들이 대거 자리를 비운다면?
그동안 도제가 무슨 일을 벌일지 몰랐다.
“이제 알겠구나.”
비로소 천신우의 속내를 간파한 무신이었다.
“무명을 소집해달라는 말이었군.”
그것이야말로 천신우가 바라는 바였다.
이번 일엔 무명에 속한 절대강자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래주시면 감사하지요.”
“부탁을 들어주면? 이번에도 고맙다는 인사만 하고 입 닦을 생각이냐?”
“……무슨 말씀이신지?”
“됐다. 이놈아. 나가보아라.”
천신우를 내보낸 무신이 심복을 불러들였다.
“수아가 언제 폐관수련을 끝낸다고 했는지 기억하는가?”
“사흘 후입니다.”
“사흘이라…… 얼추 시간이 맞아떨어지겠군.”
천신우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무신이었다.
* * *
망향곡에서 시작된 소문은 순식간에 무림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거대한 유적이 발견됐으며 보물을 얻은 자들도 수두룩하다는 소문이었다.
물론 보물을 얻은 이들이 입을 함부로 놀린 것은 아니다.
마교에서 의도적으로 소문을 퍼뜨린 것뿐.
그로 인해 무림맹 고수들도 모이기만 하면 망향곡의 보물을 입에 담을 정도였다.
“들었는가? 강남삼성이 망향곡 유적에서 벽력비를 발견했다던데?”
“어허. 소식 한번 늦구먼. 이미 강남삼성은 살해당하고 벽력비를 강탈당했다네. 지금 벽력비의 주인은 야수당 놈들이야.”
마교에서 의도한 대로 망향곡 일대의 상황은 급박하게 흘러갔다.
처음 마교에서 미끼로 던진 보물을 얻었던 무인들은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모두 살해당했다.
불과 며칠 사이에 모든 보물이 최소한 두세 번씩은 주인이 바뀌었을 정도였다.
물론 그런다고 경각심을 품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솔직히 강남상성은 물론이고 야수당도 그렇게 강한 놈들은 아닌데.”
“……병가 제출하고 우리도 가볼까?”
차라리 망향곡에서 발견된 보물을 절대강자가 차지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교는 일부러 어중간한 실력을 가진 무인들이 미끼를 물도록 설계했다.
자연히 실력깨나 있는 고수들은 저마다 탐욕에 사로잡혔다.
“확실히 벽력비만 손에 얻으면 인생역전이긴 하지. 평생 무림맹에 있어 봐야 어차피 요직 근처도 가지 못할 텐데.”
“늙어서까지 붙어 있기나 하면 다행이지. 요즘은 실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정년도 보장해 주지 않는 분위기잖나.”
대화를 나누던 무인들을 지나쳐 약속장소로 들어선 천신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림맹 무인들이 이러니 다른 곳의 고수들은 오죽할까.”
망향곡의 보물과 관련해 순식간에 퍼져나가는 소문들.
그리고 소문에 눈이 돌아간 무인들.
전생에서 경험한 그대로였다.
그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다행히 무신 주도로 무명 모임이 소집될 예정이다. 아마 한둘 정도는 직접 나서는 걸로 결론이 나겠지.’
물론 천신우라고 손 놓고 있진 않았다.
이미 천씨세가의 일부 고수들을 소집한 상황.
천신우가 준비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거 어딜 가나 망향곡 보물 이야기뿐이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천신우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한층 깊어진 눈빛의 모용비가 서 있었다.
‘이제야 내가 기억하는 전생의 모용비와 비슷해졌군.’
전생에 팔 한쪽을 잃고도 마교에 맞서 싸웠던 강인한 모습이 조금씩 엿보이기 시작했다.
변한 것은 모용비뿐만이 아니었다.
제갈휘 역시 사뭇 성장한 모습.
“다들 오랜만입니다.”
바로 그때.
“형님!”
천신우를 향해 달려온 것은 동생 천신혁이었다.
“왔구나.”
“하하! 형님이 부르시는데 당장 달려와야지요!”
여전히 쾌활한 천신혁이었다.
천신우는 천신혁을 보며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수련을 열심히 했구나.”
“형님을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천신혁은 모용비와도 인사를 나눴다.
안부인사와 함께 서로 성취를 확인하는 모습.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제갈휘가 운을 뗐다.
“천씨세가의 고수들 또한 무림맹으로 불러들였다고 들었네. 역시 아우님도 망향곡을 염두에 두고 있는 건가?”
“그렇습니다.”
“목표는?”
“망향곡에서 발견된 보물 전부입니다.”
“……!”
제갈휘는 물론.
모용비와 천신혁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물론 보물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진정한 목적은 이번 일을 꾸민 마교를 응징하는 것.”
천신우가 마교를 언급하자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천신우와 함께 여러 사건을 겪은 그들이었지만 마교 앞에선 위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용비가 마른침을 삼켰다.
“솔직히 긴장되는군.”
천신우라고 그 마음을 어찌 모를까.
하지만 언제까지 그들을 화분 속의 화초처럼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결국 마교는 무림 전역에 걸쳐 침공해 올 터.
그때 그들이 제몫을 하려면 지금부터 실전경험을 갈고 닦을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 그들은 천신우의 마음을 알아주었다.
“그래도 아우님과 함께라면 안심일세. 그깟 마교 놈들 얼마든지 덤벼보라지.”
천신혁도 거들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신우가 환하게 웃었다.
“다들 활기차서 다행이군요. 물론 아무 대책 없이 사지로 내몰 생각은 없습니다.”
천신우는 그동안 모은 무구들을 탁자 위에 꺼내놓았다.
여러 차례 경매와 거래를 통해 수집한 무구들.
거기에 진사명의 기록을 통해 입수한 무구들까지.
천신우의 수집품에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골라보시지요.”
모두가 선뜻 나서지 못하던 그때.
엉뚱한 방향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저도 구경해도 될까요?”
경쾌한 발놀림. 부쩍 성숙해진 목소리.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끼며 천신우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