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학사환생 123화
마교 혈마단주는 두 눈을 의심했다.
사실 그는 진사명이 준비한 보물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다.
그래도 지금까지 진사명의 능력으로 미루어 절대 평범한 물건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혈마단주의 기대가 무색하게 첫 번째 상자의 내용물은 충격 그 자체였다.
상자 안엔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헝겊 조각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건…….”
누구에게 물어봐도 똑같은 대답이 나올 것이다.
그것은 다리 밑의 거지들이나 입을 법한 누더기가 틀림없었다.
천신우가 아무도 몰래 용신갑과 바꿔치기한 것.
물론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혈마단주로선 기가 막힐 수밖에.
“단주님…….”
덩달아 혈마단주의 심복도 안색이 창백해졌다.
혈마단주의 분노가 어디로 튈지 몰랐기 때문이다.
다행히 혈마단주는 분노를 다스리는 데 성공했다.
“일단 나머지도 확인하지.”
혈마단주가 열쇠로 두 번째 상자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상자를 여는 동안 혈마단주의 부하는 숨을 죽였다.
제발 이번에야말로 혈마단주조차 눈이 휘둥그레지게 만들 보물이 들어 있기를.
덜컥.
상자가 열렸다.
그 안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은 한 권의 책이었다.
무공비급 ……이라고 생각하기엔 표지부터 심상찮았다.
빨간 바탕. 발가벗은 채로 뒤엉킨 남녀를 표현한 그림.
“…….”
혈마단주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책장을 펼쳤지만 민망한 그림과 표현만이 가득했다.
“이건 야설이군.”
혈마단주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그를 모신 부하는 알았다.
혈마단주가 지금 얼마나 분노했는지를.
“이것 역시 평범한 철검이군.”
세 번째 상자에 들어 있던 검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혈마단주가 기어이 폭발했다.
“이따위 물건이 보물이라고?”
챙강!
집어 던진 철검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혈마단주는 성난 황소처럼 나머지 상자들의 잠금장치를 풀고 내용물을 확인했다.
물론 보물이라 부를 만한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쓰레기라는 표현이 훨씬 잘 어울렸다.
“빌어먹을!”
천신우가 바꿔치기한 잡동사니들을 내동댕이친 혈마단주가 부하를 돌아봤다.
어찌나 분노했는지 그의 이마엔 핏줄이 돋아나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겁먹은 부하가 머리를 조아렸다.
“적어도 진사명의 소행은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어째서?”
“진사명이 주도적으로 이번 일을 계획하고 보물을 조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차피 본인 재산인데 굳이 이렇게 복잡한 방법을 쓰면서까지 빼돌릴 이유는 없습니다.”
“그래. 진사명은 아니야.”
혈마단주의 반응에 부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천만다행으로 목숨을 건진 것이다.
물론 혈마단주의 분노가 완전히 사그라진 것은 아니었다.
“운반 맡은 놈들. 지금 어디에 있나?”
“현재 정산 중입니다.”
“그렇군. 확실히 정산해 주도록.”
운반을 맡은 무인들의 운명이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처참한 죽음을 맞을 것이다.
“그래도 어디로 빼돌렸는지는 알아내야 하지 않을까요?”
“놈들 소행이 아니다.”
혈마단주는 상자를 내려다보며 덧붙였다.
“진사명은 각기 다른 조직에게 이번 운반임무를 맡겼다. 지금까지 진사명의 일처리 방식으로 보면 그놈들끼리는 서로의 존재를 모를 가능성이 높아. 그런데 한꺼번에 모든 보물이 사라졌다면 다른 원인이 있다고 봐야겠지.”
운반책들의 소행이 아님에도 혈마단주는 그들을 모두 죽이라고 지시했다.
물건이 사라진 책임을 물은 것이다.
“아마 진사명을 죽인 놈의 소행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진사명을 죽이고 얻은 단서를 이용해 보물을 도중에 바꿔치기했겠지.”
사실 혈마단주라고 이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일단 지켜본 것은 운반계획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기 때문.
그러나 상황이 발생한 지금.
이제부턴 혈마단주가 움직일 때였다.
“진사명을 죽이고 보물까지 가로채다니. 누군지는 몰라도 대단한 놈이군.”
부하의 표정을 확인한 혈마단주가 물었다.
“혹시 짚이는 바가 있나?”
“천신우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천신우? 천씨세가 소가주 말이군.”
혈마단주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놈이라면 나도 이름은 들었지.”
사실 어지간한 이름은 혈마단주 귀에까지 들어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혈마단주는 천신우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만큼 천신우가 유명해진 것이다.
“설마 그놈 소행인가?”
“확실치는 않습니다만 천신우 그자가 본교의 계획에 훼방을 놓은 것은 사실입니다.”
“이상하군. 진사명은 그놈 이름을 거의 언급하지 않았는데.”
혈마단주가 쓰게 웃었다.
“이제 보니 이미 된통 당해놓고 직접 만회할 생각이었군.”
진사명이 굳이 흑풍대주와 남은 이유를 깨달은 혈마단주였다.
“진사명은 실패를 만회하려다 오히려 천신우에게 목숨까지 잃은 셈인가. 게다가 보물까지 가로채기 당하고.”
이제야 비로소 모든 정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천신우. 그놈이 범인이라면 찾는 수고를 덜었군.”
“지금 당장 수하들을 보내 놈을 응징할까요?”
“그게 쉬웠다면 진사명이 당하는 일도 없었겠지. 진사명과 흑풍대주를 무너뜨린 놈이다. 천씨세가 자체전력도 만만찮은 데다 무신이라는 든든한 후원자까지. 그런 놈을 상대하려면 과연 어느 정도의 전력을 투입해야 할까?”
혈마단주의 물음에 부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물론 이곳의 전력을 총동원한다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러면 이번 망향곡 계획은 무기한 연기할 수밖에 없다.”
혈마단주의 부하가 말끝을 흐렸다.
“사실 지금도 문제가 큽니다만…….”
보물을 바꿔치기 당한 지금.
무림 전역의 고수들을 망향곡으로 모여들게 하기란 불가능했다.
실체 없는 헛소문만으론 한계가 있기에.
물론 혈마단주는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본교에서 확보한 보물들을 미끼로 쓴다.”
“……!”
“내가 책임질 테니 즉시 실행에 옮기도록.”
혈마단주의 명령은 결코 가볍지 않다.
부하도 토를 달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부하가 나가고 혈마단주는 바닥에 내팽개쳐진 상자들을 돌아보았다.
“나를 갖고 놀았단 말이지?”
단지 보물이 목적이었다면 빼돌리면 그만이다.
굳이 상자 안에 쓰레기를 넣어놨다는 것은 마교를 농락할 목적일 터.
“곧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콰앙!
혈마단주의 일장이 쌓여 있는 상자들을 가루로 만들었다.
* * *
천신우는 빼돌린 보물들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태극신무 비급이나 용신갑은 뒷전.
천신우의 시선을 사로잡은 대상은 오직 흑성검뿐이었다.
겉모습 자체는 평범한 자운검과 달리 흑성검은 자태부터 달랐다.
빛을 빨아들이는 광경을 보고 있자면 순수한 어둠을 보는 느낌이었다.
물론 천신우는 흑성검의 외양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심지어 성능에도 크게 관심이 없었다.
‘이미 확인해 본 바에 따르면 흑성검의 성능은 지금까지 꾸준히 성장해 온 자운검과 엇비슷한 수준.’
천신우에게만큼은 흑성검 자체의 매력은 그리 크지 않은 셈.
그럼에도 천신우가 흑성검에 관심을 집중한 이유는 간단했다.
‘이거 먹을 수 있을까?’
자운검은 무기를 흡수하며 성장한다.
당연히 자운검이 흑성검을 흡수할 수 있는지 궁금할 수밖에.
‘만일 가능하다면 얼마나 강해지는 것이지?’
이미 폭풍비와 무신의 검을 집어삼키면서 자운검은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심지어 흑성검은 그 두 무기와 비교해 전혀 뒤처지지 않는 명검.
‘오히려 그 이상이라 봐도 무방하다.’
점심식사도 제쳐 두고 계속된 고민.
천신우는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자운검을 선택한 이상 끝장을 봐야겠지.’
일단 결심한 이상 천신우의 행동엔 거침이 없었다.
먼저 예전과 마찬가지로 흑성검을 자운검에 가까이 가져갔다.
그러자 두 자루의 검은 서로 공명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손을 갖다 대지 않아도 진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확실히 명검이라 부를 만한 무기엔 반응한단 말이야.’
그렇다고 해서 싸움 도중에 자운검이 다른 무기를 흡수하는 일은 이제껏 없었다.
‘내가 모르는 조건이 있는 거겠지.’
천신우는 격렬히 떨리는 두 검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이윽고 엄청난 빛이 천신우의 눈을 뒤덮었다.
자칫하면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강렬한 섬광에 천신우가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주위를 뒤덮었던 빛이 모두 사라졌다.
눈을 뜬 천신우 앞엔 한 자루의 검만이 놓여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이제까진 어떤 무기를 흡수하든 형태는 동일했는데.’
겉모습부터 변했다.
자운검과 흑성검을 반쯤 합친 모습.
‘누가 믿을까.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천신우는 크게 심호흡하고는 달라진 자운검을 쥐었다.
“……!”
손에 쥐는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자운검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자연스레 천신우의 시선이 용신갑을 향했다.
얻고 나서 확인해 보긴 했다.
‘비수를 아무리 던져도 작은 흠집조차 생기지 않았지.’
만일 지금의 자운검으로 용신갑을 찌르면 어떻게 될까?
이내 천신우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무조건 뚫린다.’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그렇기에 천신우는 자운검을 도로 칼집에 넣었다.
철컥.
칼날이 칼집에 감겨드는 소리가 어느 때보다 경쾌했다.
‘그나저나 이제 마교가 반응할 때가 됐는데.’
천신우는 그길로 거처를 나섰다.
장윤호를 만나볼 생각이었다.
* * *
“하하하! 어서 오라고!”
천신우를 반기는 장윤호의 표정이 밝았다.
천신우 덕에 연거푸 공을 세우면서 승진한 그였다.
이제는 무림맹 정보조직 화향루의 핵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잖아도 자네 주려고 거금을 들여 좋은 차를 사놓았다네.”
장윤호는 호들갑을 떨면서 차를 직접 타왔다.
직급이 올라가도 특유의 유쾌한 성격은 어디 가지 않는 모양.
“그래. 천하의 천씨세가 소가주께서 무슨 일인가. 승진축하 때문만은 아닐 테고.”
정곡을 찌르는 예리함도 여전했다.
“혹시 망향곡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장윤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대체 어디서 들었나?”
“들어온 소식이 있습니까?”
“솔직히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좀 더 확인해 본 후에 자네에게 말해줄 생각이었네만. 이미 자네가 알고 있다니 굳이 미룰 이유가 없겠지.”
장윤호가 주위를 돌아보더니 격앙된 목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최근에 망향곡에서 엄청난 보물이 발견됐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네. 무림삼대비도 중 하나인 벽력비가 발견됐다는 거야!”
“그렇군요.”
천신우가 놀라지 않자 오히려 장윤호가 당황했다.
“자네는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천신우는 이미 벽력비와 동급인 폭풍비를 얻은 경험이 있었다.
물론 그 이유 때문에 놀라지 않은 건 아니었다.
‘계획을 아예 철회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강행하는 쪽을 택했군.’
천신우 입장에선 망향곡에서 벽력비가 발견된 것이 마교의 소행임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벽력비뿐이 아니라네. 천총검이 발견됐다느니. 아예 거대한 유적이 존재한다느니. 온갖 해괴한 소문들뿐이야.”
천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사명은 죽었지만 마교의 누군가가 계획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진사명보다 훨씬 과감했다.
천신우가 중간에 보물을 가로챘음에도 보란 듯이 새로운 보물들을 쏟아 붓고 있는 것이다.
“허어. 예전부터 평범한 친구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확실히 반응이 남다르군. 이런 뜬소문을 곧이곧대로 믿다니.”
“확인해 보면 밝혀질 겁니다.”
“뭐가?”
“지금 말한 소문들이 모두 진실이라는 게.”
“……!”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장윤호가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당장 만사를 제쳐놓고 망향곡으로 달려가야 하지 않겠나!”
“그게 바로 마교에서 노리는 것이겠지요.”
“뭐? 마교?”
흥분을 가라앉히고자 차를 마시려던 장윤호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뜨거운 김에 입술이 뎄는지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뜨거워!”
찬물로 열기를 식히고 나서야 간신히 진정한 장윤호가 천신우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러니까 마교에서 일부러 보물을 미끼로 던져놓고 사람들을 망향곡으로 모여들게 한다는 건가? 그래서 마교에 무슨 이득이 있다고?”
무신 암살사건 실패 이후 마교의 존재는 세상에 드러난 상황.
장윤호가 마교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당연했다.
“이미 무림맹 요인들의 암살을 시도한 놈들입니다. 무엇을 노리는지 예상하기란 어렵지 않지요.”
벼락을 맞은 것처럼 장윤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그러는 것도 잠시.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장윤호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쁜 놈들! 이렇게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지!”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화향루의 정보력을 망향곡에 집중해 주십시오.”
“그 정도야 식은 죽 먹기지! 그러면 그동안 자네는?”
“지금 당장 사람들부터 만나볼 생각입니다. 차 잘 마셨습니다.”
찻잔을 내려놓은 천신우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 * *
장윤호의 집무실을 나선 천신우가 향한 곳은 거대한 전각이었다.
그곳으로 들어선 천신우가 문 앞에 섰다.
“천신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