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학사환생 121화
진사명은 마교 최고의 후기지수.
주로 전략 분야를 맡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공이 약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앞서 천신우에게 죽은 화사나 한태성보다 훨씬 강한 무공을 지닌 그였다.
그렇기에 천신우가 번번이 마교 계획을 방해할 때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혼자서도 막아낼 자신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천신우와 정면으로 맞선 지금.
진사명의 자신감은 눈처럼 녹아내렸다.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 빠를 수가 있지?’
당혹감과 경악 속에서 진사명은 본능적으로 검을 내질렀다.
차앙!
충돌하는 순간 진사명은 다시 한번 놀랐다.
천신우의 검은 빠르기만 한 게 아니었다.
‘방금 게 전부가 아니었단 말인가?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그렇다고 그냥 죽어줄 생각은 없었다.
진사명은 정말이지 죽을힘을 다해 천신우에 맞섰다.
서로의 검이 일으킨 바람에 등불이 꺼지며 주위가 어두워졌다.
빛이 사라진 곳에서 천신우와 진사명은 감각과 본능만으로 판단하고 움직였다.
스스스슥!
어둠 속을 누비는 보법이 예사롭지 않았다.
차차차차창!
검과 검이 부딪치며 좁은 공간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때마다 일시적으로 진사명의 표정이 드러났다.
이를 악물며 싸웠기에 가까스로 천신우의 공격을 받아내고는 있었지만.
상황이 팽팽하단 의미는 절대 아니었다.
어느새 진사명은 벽까지 내몰렸다.
툭.
진사명의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천신우가 경쾌하게 검을 찔러왔다.
솨아악!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에 진사명이 눈을 빛냈다.
‘지금이다!’
진사명이 벼락처럼 검을 휘둘러 천신우의 공격을 쳐냈다.
시야가 극도로 제한된 상황에서도 동물적인 감각을 발휘한 것이다.
물론 애초에 힘의 차이 때문에 완전히 떨쳐내기란 불가능.
하지만 검의 궤적에 아주 미세한 변화를 일으키기엔 충분했다.
각도가 틀어진 천신우의 자운검이 진사명의 얼굴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갔다.
푸욱!
벽을 뚫고 들어간 자운검이 파르르 떨렸다.
간담이 서늘해질 만한 광경이었지만 진사명은 침착하게 천신우의 오른팔을 노렸다.
일방적으로 밀리는 상황에서도 반격의 실마리를 찾아낸 것.
‘제법이군.’
천신우는 미련 없이 자운검을 잡았던 오른손을 놓아버렸다.
그로 인해 진사명이 준비한 회심의 일격은 허공을 가르는데 그쳤을 뿐이다.
솨악!
동시에 천신우는 진사명의 품으로 파고들며 팔꿈치로 턱을 올려쳤다.
하지만 진사명의 대처도 눈부셨다.
그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뒤로 젖히며 천신우의 팔꿈치를 피해냈다.
그러나 천신우의 공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물이 흐르듯 연계가 이어졌다.
천신우는 오른쪽 팔꿈치를 뒤로 빼며 왼손으로 진사명의 가슴을 가격했다.
퍼어억!
진사명은 몸을 뒤로 빼며 충격을 최소화했지만 미봉책에 불과했다.
콰앙!
벽에 부딪친 진사명의 몸이 출렁였다.
어느새 벽에 박힌 자운검을 뽑아낸 천신우가 그대로 진사명의 목을 베어갔다.
“……!”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임에도 진사명은 주저앉듯 자세를 낮췄다.
아슬아슬한 차이로 천신우의 자운검이 벽을 긁고 지나갔다.
스가각!
이번엔 천신우도 곧바로 검의 궤적을 틀어 진사명의 머리를 내려쳤다.
쏴앙!
진사명이 바닥을 굴러서 피해냈다.
동시에 천신우의 발목을 향해 날아든 검격!
하지만 진사명이 그렇게 나올 거라 예상한 천신우는 이미 높게 뛰어오른 후였다.
내리쳐지는 칼날에 진사명의 얼굴이 어스름히 비쳤다.
이 순간 진사명의 표정은 경악 그 자체였다.
“큭!”
그는 피할 새도 없이 칼날을 가로로 눕히며 천신우의 공격을 받아냈다.
하지만 불안정한 자세로 위에서 내리쳐지는 검을 막아내기란 버거울 수밖에.
스가가각!
결국 충격을 견뎌내지 못한 진사명의 검이 반으로 쪼개졌다.
“……!”
천신우의 검은 무방비상태가 된 진사명의 가슴팍을 그대로 내리그어버렸다.
촤아악!
어둠 속에서 솟구치는 피를 바라보는 진사명의 눈빛이 허망했다.
한순간에 수많은 광경이 눈앞을 스쳐 갔다.
몇 번이나 죽을 위기를 넘기며 마교에서 정식 무인으로 인정받았던 순간.
사부 진마존과의 만남.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화사와의 추억이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나서야 깨달은 진사명이었다.
화사를 좋아했음을.
‘죽고 나면 널 다시 볼 수 있을까.’
감상도 잠시.
진사명은 천신우를 노려보며 차갑게 웃었다.
“내가 죽더라도 내가 세운 계획까지 중단되진 않는다. 과연 네놈이 막을 수 있을까?”
“물론.”
천신우의 목소리는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아쉽겠군. 그 모습을 보지 못해서. 아니지. 오히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네놈의 계획이 어그러지는 꼴을 보지 않아도 되니까.”
천신우는 자운검을 들어 올렸다.
운명이란 참으로 얄궂다는 생각이 든다.
전생에선 진사명의 계획으로 인해 천신우가 무림맹과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하지만 이번 생은 정반대였다.
진사명은 계획마다 번번이 실패했고 결국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만 가라. 다음 생이 있다면 그렇게 살지 말고.”
천신우은 주저하지 않고 진사명의 목을 잘라냈다.
서걱!
* * *
와장창!
“죄, 죄송합니다!”
찻잔을 깨뜨린 시비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깨진 찻잔의 가격도 비쌌지만 그보다 상대의 반응이 걱정이었다.
눈앞의 노인은 팔마존의 일인인 진마존.
마교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실력자였다.
진마존이 손짓만 해도 시비는 물론 그녀의 가족까지 죽어 나갈 터.
그나마 불행 중 다행히도 진마존은 시비에게 분노를 표출하지 않았다.
그의 눈썹이 휘어지며 박살 난 찻잔을 향했다.
진마존은 아주 감이 좋은 편이었다.
“녀석에게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군.”
이런 예감은 단 한 번도 빗나가지 않았기에 진마존의 표정이 진중했다.
어쩐지 요즘 제자 진사명이 보고하는 내용들이 하나같이 심상찮더라니.
“이만 나가보아라.”
깨진 찻잔 조각을 주워 담던 시비가 황망히 고개를 숙이고 그곳을 벗어났다.
시비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던 진마존이 입을 열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그러자 기둥 뒤에서 사내 하나가 스르륵 나타났다.
철가면을 착용한 그는 온몸에도 검은 천을 칭칭 감고 있어 기괴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가 바로 진마존의 오른팔 철면수라.
정식 단주는 아니지만 단주급에 필적하는 실력을 가졌다고 알려진 고수였다.
“혈마단주는 이미 망향곡 계획 실행을 위해 무림맹 지부를 떠났다고 알려왔습니다. 진사명이 혼자 그곳에 남았다면 지금쯤 무슨 일이 생겼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무신과 도제가 손잡고 감찰각주를 시작으로 첩자들을 뿌리 뽑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 상황.
아무리 진사명이라도 위험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진마존이 원하는 바는 결코 아니었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나는 녀석을 왼팔로 키워낼 생각이다. 지금 죽어선 곤란해.”
제자에게 애착이 강한 진마존이었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
진마존이 구석에 떨어져 있던 찻잔 조각을 주워들었다.
“찾아오게. 녀석이 살아있다면 반드시 살려서 데려오도록. 만일 죽었다면…….”
진마존의 손에 닿은 찻잔이 모래보다 고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무슨 뜻인지 알겠나?”
“물론입니다. 마존의 명을 받듭니다.”
“얼마나 시간이 필요하겠나?”
“보름 안에 진사명의 행방을 찾아내겠습니다. 만일 문제가 생겼다면 한 달 내로 관련된 놈들을 모조리 처리해서 대령하겠습니다.”
“기다리지.”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철면수라가 홀연히 사라지자 진마존은 창가로 걸어갔다.
멀리 연무장에서 수련하는 생도들이 보였다.
치열한 경쟁에서 끝까지 생존한 생도들만이 마교 정식무인으로 인정받는다.
그중에서도 팔마존의 제자로 선택되어 마교의 미래를 이끌어나가는 것은 극소수다.
진마존 역시 그렇게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당연히 진사명도 자신과 같은 길을 걸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진마존은 의자에 앉아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감긴 눈가로 제자를 처음 만나던 날이 거슬러 올라왔다.
-마존을 뵙습니다.
진사명이 마교를 떠나 무림맹으로 향하던 날의 모습도 뇌리에 생생했다.
-옛말에 호랑이 새끼는 강하게 키우라지 않습니까. 최소한의 지원만 해주시면 제자가 무림맹을 집어삼키겠습니다.
자신감과 그에 걸맞은 능력까지 갖춘 진사명이었다.
그래서 마교 내부의 반발을 무릅쓰며 과감하게 전권을 부여했다.
처음엔 모든 것이 순탄했다.
진사명은 물밑에서 빠르게 마교의 영역을 넓혀나갔고 수많은 계획의 뼈대를 만들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계획이 엇나가기 시작했다.
끝내는 진사명 혼자선 절대 감당하기 힘든 수준까지 치달은 상황.
그러나 진마존은 제자를 추궁할 생각이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묻지 않겠다. 무엇을 놓쳤는지 따지지 않겠다.’
이번에 살아남는다면 진사명은 실패를 발판 삼아 마교의 기둥으로 성장할 것이다.
어쩌면 진마존은 도달하지 못한 교주 자리에까지 오를지도 모른다.
‘살아서 돌아오기만 해다오. 내가 너를 반석 위에 올려줄 터이니.’
눈을 부릅뜬 진마존이 아무도 없는 허공을 응시했다.
* * *
천신우는 신속하게 마교의 은신처를 빠져나왔다.
진사명뿐만 아니라 대주급 고수까지 죽인 상황.
숨긴다고 숨겨질 일이 아니었다.
‘만일 지금까지의 계획들을 진사명이 총괄해 왔다면, 앞으로의 미래는 내가 기억하는 전생과 달라지겠지.’
마교의 침공 역시 앞당겨질 가능성이 높았다.
진사명을 제거한 것이 천신우 입장에선 반드시 호재라고만 보긴 힘든 이유.
물론 이번 일로 천신우가 얻은 소득이 없진 않았다.
‘오히려 노력 이상의 보상을 얻었다고 봐야겠지.’
천신우는 죽은 진사명에게서 빼앗은 서책 표지를 만지작거렸다.
가죽표지의 매끈매끈한 촉감이 느껴졌다.
‘전생에서도 이런 서책의 존재는 드러나지 않았다. 솔직히 나도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겠지.’
진사명이 소지했던 서책은 무림에 존재하는 진귀한 보물과 무공비급들에 관한 것이었다.
보물의 대략적인 정보와 그것이 보관된 위치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여기 있는 몇 가지 정보는 내가 알고 있는 사실과 일치해. 나머지도 진짜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지.’
당연히 천신우로선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진사명은 대체 이 정보들을 어떻게 얻은 거지?’
그 해답은 진사명이 남긴 서책에 있었다.
이제는 천신우에게 너무나 익숙해진 단어가 눈에 띄었다.
‘만상서고……!’
그 네 글자에 천신우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단지 이름만 언급한 수준이 아니었다.
진사명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만상서고를 조사해온 것으로 보였다.
천신우는 서책에 적혀있는 보물 관련 정보들을 떠올렸다.
‘설마 이 모든 게 만상서고를 찾는 과정에서 얻은 결과물들인가?’
동시에 머릿속을 찌르르 울리는 생각 하나.
‘그럼 진사명이 무림맹 장서각에 들락날락한 것도?’
장서각에서 진사명과 우연히 마주쳤을 때는 그러려니 하고 넘겼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진사명은 만상서고의 단서를 찾기 위해 장서각을 찾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책장을 넘기는 팔에 소름이 돋았다.
‘이만한 정보라면 만상서고의 단서를 찾아내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다. 어쩌면 전생에서 만상서고의 실체에 가장 근접했던 것은 진사명일지도.’
물론 진사명이 죽은 지금은 무의미한 가정.
그렇다고 천신우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만상서고를 찾는 것은 그들의 흔적을 쫓는 과정이다. ……이게 무슨 뜻이지?’
진사명이 남긴 기록 중엔 천신우가 지금껏 알지 못했던 사실들도 존재했다.
‘노독혼? 강백령?’
계속해서 언급되는 이름들.
‘대체 누구지? 이들은?’
세상 모든 지식을 섭렵했다고 자부해 온 천신우조차 처음 들어보는 이름들이었다.
그러나 천신우는 당황하지 않았다.
‘결국 만상서고의 모든 단서를 찾아낸다면 알게 되겠지.’
오히려 목표가 명확해진 셈이다.
‘그나저나 여기 기록된 보물과 무공비급 중에 취할 만한 것이 남아있으면 좋겠는데.’
가능성은 충분했다.
진사명이 꼼꼼하게 정리해뒀으니까.
기록에 따르면 이미 확보한 보물이 3할가량.
거짓으로 밝혀진 경우가 3할가량.
나머지 4할은 진사명의 힘으로도 찾아내지 못했거나 아직 찾으려는 시도조차 못 한 경우였다.
‘하다못해 한두 개만 건져도…… 잠깐! 이건……!’
흥미로운 대목을 발견한 천신우가 눈을 빛냈다.
‘이런 식이었나.’
전생에서 마교가 계획한 망향곡 대참사.
그 숨겨진 비화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