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학사환생 119화
“그러니까 네놈 말은.”
무신이 손으로 가슴을 짚었다.
“마교의 다음 표적이 나란 것이냐?”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으허허!”
무신은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까지 나를 노린 자들이 없었을 거라 생각하느냐?”
오히려 그 반대였다.
무신이 지금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목숨을 노린 자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무신은 살아남았고 강함을 증명했다.
“오냐. 얼마든지 와보라지.”
그렇게 말하는 무신은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강자의 자신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천신우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물론 저도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마교라도 어르신을 어찌하기 힘들 거란 사실을. 하지만 암살이 실패하더라도 그들이 얻어가는 것이 있다면요?”
천신우가 던진 화두를 냉큼 받아든 무신이었다.
“과연.”
무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놈 말이 옳다. 도제와 나를 갈라놓으려 한다면 그보다 확실한 방법도 없겠구나.”
무신이 굳은살이 잔뜩 박힌 손가락으로 날짜를 헤아렸다.
“어디 보자. 가장 유력한 시기는 신임 감찰각주 임명식이 되겠지. 네놈 말대로 암살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분열 조장이 목적이라면.”
모든 사건은 무대가 클수록 파급력이 커진다.
마침 무림맹 안팎이 연쇄 살인 사건으로 소란스러운 상황.
이럴 때일수록 무림맹의 건재함을 보여주기 위해 임명식은 성대하게 거행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어지간한 놈을 보내선 이목을 끌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마교는 도천 소속의 고수를 칼잡이로 내세울 겁니다.”
무신이 눈을 빛냈다.
천신우는 무신궁에 잠입한 마교의 첩자를 색출해 낸 이력이 있었다.
“짐작 가는 자가 있느냐?”
사실 마교의 전략이 무엇인지까지도 알고 있는 천신우였다.
하지만 전생과는 이미 많은 것이 달라진 상황.
‘마교의 전략은 바뀔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어떤 방법을 쓰든 결국 도천에 잠입시킨 첩자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도제가 사주한 것으로 몰아갈 수 있으니까.’
그렇기에 천신우는 망설임 없이 도천에 잠입한 첩자들의 정체를 밝혔다.
“허어.”
무신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전에 천신우가 무신궁 고수 철무산의 정체를 폭로했을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분명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그들은 철무산과는 경우가 다르다.”
“물론입니다. 어르신께서 직접 나서 그들을 응징한다면 도천에서 반발하겠지요. 그거야말로 마교에서 원하는 것일 테고요.”
“그럼 어찌하면 좋겠느냐.”
“이번만큼은 제가 정답을 제시하기 어렵습니다. 서로 마음이 통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무신과 도제.
서로가 서로를 믿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무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결정을 내린 무신의 얼굴에서 망설임이라곤 찾아보기 힘들었다.
천신우는 나직하게 숨을 내뱉었다.
‘화살은 쏘아졌다.’
물론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4차 암살계획을 누가 총괄할지는 모른다. 하지만 마교에서 만일 전생처럼 4차 계획을 실행한다면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조만간 도천에 잠입해있는 마교의 첩자들에게 명령이 내려질 것이다.
‘놈들을 감시하고 있으면 마교의 연락책을 잡아낼 수도 있다는 뜻이지. 물론 허탕을 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시도해 볼 가치는 있었다.
‘누굴 신임 감찰각주로 임명할지는 이미 결정된 상황. 임명식은 아무리 늦어도 열흘 안에 거행되겠지.’
천신우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이번에야말로 마교의 꼬리를 잡으면 좋겠군.’
* * *
마교 은신처 가운데 한 곳.
콰앙!
거칠게 문을 닫는 혈마단주의 표정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결국 이렇게 됐군.”
자리에 앉아 있던 진사명이 고개를 숙였다.
“면목 없습니다.”
3차 암살계획에서 성공 이상의 실패를 맛본 진사명이었다.
게다가 감찰각주와의 연결고리를 잘라내는 일까지 실패했다.
무신과 도제가 그렇게 빨리 움직이리라곤 전혀 예상 못 했던 일이었다.
“이미 환영객이 본교의 존재를 폭로했을지도 모른다.”
“……계획을 앞당겨야겠지요.”
진사명의 표정이 어두웠다.
언젠가부터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건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제는 지금까지처럼 차근차근 계획을 진행할 여유가 없었다.
“솔직히 이번 일의 책임을 물어 자네를 끌어내리고 싶지만. 아무리 검토해도 계획 자체엔 문제가 없더군.”
혈마단주는 진사명과 파벌이 달랐지만 소신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가 판단하기에 이번 일의 실패는 진사명의 무능 때문이 아니었다.
“운이 나빴다고 봐야겠지.”
“……다시 기회를 주시는 겁니까?”
“망향곡 지휘를 맡기지. 하지만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그때는 목숨조차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네.”
잠시 눈을 감았던 진사명이 입을 열었다.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보게.”
“이걸 읽어주십시오.”
진사명이 건넨 계획서를 읽은 혈마단주가 코웃음을 쳤다.
“어이가 없군. 실패를 만회하고 싶은 마음은 알지만, 아무리 그래도 무신을 암살하겠다니? 그건 나조차 불가능한 일이야.”
“이번 계획의 목적은 무신을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신과 도제를 분열시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현재 그들의 동맹은 살얼음판처럼 위태로운 상태. 살짝 충격만 가한다면 금세 쪼개질 겁니다.”
무신과 도제의 악연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걸 알기에 혈마단주도 진사명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하지만 무슨 수로?”
오랜 세월 공을 들여 잠입시켜둔 첩자들은 대부분 몸을 빼낸 상황이었다.
물론 극소수가 남아 있지만 그들만으로 무림맹 내부에서 음모를 꾸미기란 불가능했다.
“도천에 잠입시켜둔 첩자들을 움직이면 됩니다. 실패하더라도 도제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겁니다. 어쨌든 도천의 고수들이 벌인 일이니까요.”
혈마단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시작도 자네가 했으니 끝도 직접 맺게. 성공한다면 망향곡 계획도 계속해서 맡게 해주지.”
“반드시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진사명이 허리를 숙였다.
* * *
무림맹의 분위기는 이래저래 어수선했다.
감찰각주가 체포된 후폭풍 때문이었다.
감찰각주의 비리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자들은 몸을 낮추고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반대로 이번 사건과 무관한 사람들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날뛰었다.
“저번 정기인사 때는 물먹었지만 이번 기회는 절대 놓치지 않아야 하오.”
“여부가 있겠소이까.”
“허허허. 본인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구려. 전임 감찰각주에게 밉보여 감찰각 내부승진에서 밀렸던 것이 불과 엊그젠데.”
“전화위복이라 하지 않소. 이번엔 다를 거요.”
“그래야지요. 일단은 도제 어르신부터 찾아가 인사드립시다. 이번 인사는 그분이 주도하신다는 소문이 파다하니.”
공석이 된 요직들을 두고 물밑작업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그러다 보니 권력의 핵심인 도제의 장원은 그야말로 문턱이 닳아 없어질 지경이었다.
수사선상에 오른 이들은 무죄방면을 위해.
연초 무림맹 정기인사에서 누락된 이들은 승진을 위해.
금은보화를 싸 들고 도제의 장원을 들락거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중년인이 실소를 흘렸다.
“한심한 놈들 같으니라고. 부질없는 짓임을 모르는군.”
비쩍 마른 몰골의 그는 도천의 고수 마관평.
도제를 오랫동안 지척에서 보필했지만 사실 그의 정체는 마교의 첩자였다.
“조만간 알게 되겠지. 저들이 올려다보는 하늘이 누구의 것인지 말이야.”
마관평 옆에 서 있는 토실토실한 중년인은 적하기라 불렸다.
그도 마관평과 마찬가지로 도천에 잠입한 마교의 첩자였다.
막강한 무공과 과감한 일처리로 도제의 신임을 얻은 그들이었다.
“하루빨리 그날이 왔으면 좋겠군.”
마관평의 소망에 맞장구를 치려던 적하기가 눈을 빛냈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
적하기는 마당을 쓸던 하인이 떨어뜨린 물건을 자연스럽게 주워들었다.
그것은 붉은 빛이 감도는 돌멩이였다.
값어치는 전혀 없었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마교에서 새로운 지시가 내려온 것이다.
“서두르세.”
“그러지.”
적하기가 말했고 마관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서둘러 그곳을 벗어났다.
그들이 사라지고 얼마나 지났을까.
아무도 없던 그곳에 그림자가 나타났다.
‘드디어 움직이는군.’
그림자는 바로 천신우였다.
마교의 첩자들을 감시하기 위해 도제의 장원에 잠입한 그였다.
지금의 천신우에겐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물론 가장 경계가 삼엄한 도제의 거처 주위론 얼씬도 하지 않았다.
도제의 눈만큼은 속이기 힘들다는 판단에서였다.
‘안내해라. 너희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자가 있는 곳으로.’
천신우의 그림자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적하기와 마관평이 찾은 곳은 인근의 기루였다.
워낙 여색을 밝히는 것으로 알려진 그들이었기에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머! 이게 얼마 만인가요! 소녀가 기다리는 동안 얼마나 외로웠는지 아세요?”
“요망한 계집 같으니라고! 내가 너를 품은 것이 고작 사흘 전이거늘.”
“고작이라니요. 소녀에겐 지난 사흘이 삼 년보다 길게 느껴졌답니다.”
“그랬느냐? 오늘 밤은 십 년처럼 길게 느껴질 것이다. 흐흐흐.”
적하기와 마관평은 기녀들을 옆구리에 끼고 밀실로 들어섰다.
그곳에서 그들은 술을 진탕 마시고 기녀들과 뒹굴었다.
한밤중이 되자 그들은 기녀들을 내보냈다.
여인들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누구신가.”
몸을 일으킨 적하기와 마관평의 눈빛은 기녀들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꿀물을 가져왔습니다.”
묘령의 여인이 꿀물이 담긴 잔을 내려놓고 나갔다.
적하기와 마관평이 눈빛을 주고받았다.
“확인해 보게.”
적하기가 꿀물을 반쯤 따라내자 바닥에 글자가 나타났다.
“……!”
“뭔데 그러는가?”
“직접 확인해 보게.”
한발 늦게 마교의 지령을 확인한 마관평 역시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허어!”
평생을 마교에서 지시한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 온 그들이었다.
하지만 오늘 내려온 임무만큼은 도저히 실현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어쩌겠나. 명령이니 따라야지.”
“물론이네. 우리의 희생으로 대업을 이룰 수만 있다면.”
“당장 준비해야겠군.”
적하기는 찻잔 바닥에 새롭게 글자를 적은 다음 꿀물을 다시 채워 넣었다.
“서두르세.”
그들이 자리를 뜨고 얼마나 지났을까.
아까 꿀물을 가져왔던 기녀가 다시 들어와 찻잔을 회수해 어디론가 향했다.
이윽고 그림자가 그녀를 소리 없이 뒤따르기 시작했다.
그림자의 주인은 당연하게도 천신우였다.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언젠가는 발원지에 이르게 마련.’
기녀를 뒤쫓는 천신우의 눈빛은 확신으로 가득했다.
* * *
닷새 후에 무림맹 대연병장에서 거행된 신임 감찰각주 임명식은 성황리에 마무리됐다.
이어진 연회 역시 전에 없이 성대했다.
무림맹의 건재함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축하드리오, 감찰각주.”
무신과 도제도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감찰각주의 어깨에 무림맹의 미래가 걸려 있소이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신임 감찰각주는 무신과 도제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신과 도제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사실을 의미하진 않았다.
오히려 전임 감찰각주보다 무게감이 떨어졌다.
급진적인 개혁보다는 혼란을 수습하고 내부를 안정시키는 데 중점을 둔 인사였기에.
그런데도 도제는 만족을 몰랐다.
권력의 중추인 감찰각을 손에 쥐고 흔들고 싶은 도제였다.
그런 속셈을 짐작한 무신이 핀잔을 줬다.
“감찰각주 자리에 자네 꼭두각시를 세워놔야 만족하겠는가?”
도제는 대꾸하는 대신 반문했다.
“그놈은 어디 있지?”
“누구? 혹시 천신우 그놈 말인가? 아마 지금쯤이면…….”
그때였다.
“모두 비켜주십시오! 많이 뜨겁습니다!”
무림맹 요리사들이 오늘을 위해 준비한 특선요리가 연회장 안으로 들어왔다.
거대한 솥에 신선한 해물을 가득 넣고 끓여낸 용왕탕은 냄새부터 일품이었다.
“오오!”
기대감 어린 시선을 받으며 마침내 연회장 중앙에 솥이 내려졌다.
그런데 솥뚜껑을 들어 올리는 순간이었다.
콰아앙!
강렬한 폭발음과 함께 사방에서 희뿌연 연기가 치솟았다.
동시에 누군가 외쳤다.
“암살자다! 신임 각주님을 엄호하라!”
순간적으로 모두의 시선이 신임 감찰각주에게 집중된 순간.
연기 속에서 움직임이 시작됐다.
‘천신우. 이번에도 녀석이 말한 대로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무신이 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몸을 돌리려는 찰나.
연기 속에서 누군가 무신에게 빠르게 접근했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무신이 눈을 부릅떴다.
“!”
바로 앞에서 무신을 향해 일장을 날리는 상대는 다름 아닌…….
도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