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
학사환생 118화
쓰러진 마교 고수의 배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적셨다.
죽음이 가까워져 오는 지금도 그는 믿기지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다른 마교 고수들과 함께 천신우에게 달려들었던 것까진 기억난다.
하지만 그 이후의 광경은 대체 뭐였을까.
천신우가 그들 사이로 유유히 걸어오던 순간.
눈앞에서 섬광이 번쩍이며 순간 의식이 날아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모든 상황은 종료된 후였다.
당시 상황을 설명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천신우가 그들 모두를 압도하고도 남을 실력을 지닌 것이다.
‘설마 이 정도였을 줄이야…….’
이내 마교 고수의 숨이 끊어졌다.
그 광경을 처음부터 지켜본 감찰각주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도대체 네놈은……!”
무림맹에서 날고 기는 신진고수들을 수도 없이 봐왔던 감찰각주다.
그러나 천신우 나이에 저토록 압도적인 실력을 지닌 경우는 없었다.
게다가 감찰각주를 놀라게 만드는 사실이 하나 더.
“내가 환영객이란 사실은 어떻게 알았지?”
“오래전부터 조사해 왔으니까. 처음엔 적잖이 놀랐지. 감찰각주 네놈조차 암중세력의 꼭두각시일 줄이야.”
“…….”
천신우가 쓰러진 마교 고수들을 가리켰다.
“그래도 너는 저놈들에 비하면 운이 좋은 편이다. 적어도 죽기 전에 유언 정도는 남길 기회를 얻었으니까.”
감찰각주는 실소를 흘렸다.
“아까 그 질문 말인가? 어차피 죽을 거라면 그냥 죽고 말지.”
지극히 상식적인 반응.
하지만 천신우는 감찰각주의 속마음을 훤히 내다보았다.
‘내가 아는 네놈은 은혜는 몰라도 원한만큼은 확실히 갚아주는 위인이지.’
전생에서도 마교에게 버림받자 필사적으로 단서를 남겼던 감찰각주였다.
“진심은 그게 아닐 텐데.”
“…….”
과연 감찰각주는 부정하지 못했다.
만일 천신우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는 배신감에 몸부림치며 죽어갔을 것이다.
아마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했겠지.
잠시 고민하던 감찰각주는 결국 방금 내뱉은 말을 스스로 뒤집었다.
“그래. 어차피 죽을 거라면 차라리 놈들 등에 칼이라도 꽂고 죽는 편이 낫겠군. 과연 네놈이 그들을 당해낼지는 모르겠다만.”
이미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린 감찰각주였다.
천신우의 실력을 눈앞에서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로선 죽었다 깨어나도 천신우를 따돌리고 이곳을 빠져나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반쯤 눈을 감고 지난날을 회상하는 감찰각주의 표정은 오히려 홀가분해 보였다.
“오래전 일이다. 그들은 대리인을 내세워 내게 접근해 왔다. 부와 명예, 권력, 그 모든 것을 주겠다고 약속했지.”
당시 감찰각주는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들은 나조차 깨닫지 못했던 욕망을 꿰뚫어 봤던 것이다. 결국 나는 욕심에 눈이 멀어 그들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결과, 승승장구할 수 있었지. 이후는 모두가 아는 그대로다.”
“그들이 누구지?”
“나도 나중에야 그들이 누군지 알게 됐다.”
일단 마음을 먹은 감찰각주는 주저하지 않았다.
“네놈도 무림인이니 마교에 대해선 들어봤겠지.”
천신우는 이미 감찰각주의 배후가 마교임을 알고 있었지만 적당히 장단을 맞춰줬다.
“마교? 그럴 리가. 마교는 이미 오래전에 멸망했다고 들었는데?”
“아니. 그들은 멸망하지 않았다. 그저 수면 아래 웅크리고 때가 오기를 기다렸을 뿐.”
바로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이야기, 자세히 듣고 싶군.”
감찰각주는 깜짝 놀랐다.
“……!”
어느새 소리 없이 열린 문 너머로 두 사람이 보였다.
그들은 바로 무신과 도제였다.
무림맹을 대표하는 두 거물이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천신우는 전혀 놀란 얼굴이 아니었다.
“오셨습니까.”
고개를 숙인 천신우의 눈이 빛났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군.’
지금까지 마교의 존재에 대해 언제 어떤 식으로 밝힐지 수도 없이 고민한 천신우였다.
그리고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감찰각주를 이용해 마교의 존재를 폭로하기로.
부담 없으면서도 가장 확실한 방법을 택한 것이다.
감찰각주를 곧장 죽이지 않고 대화를 시도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무신과 도제가 듣길 바랐던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감찰각주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믿지 않을 수 없지.’
거기에 마교와 관련된 증거물들까지 확보한 상황.
아무리 의심 많은 도제라도 마교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무신과 도제 모두 마교의 존재를 확인했다. 적어도 무림맹 전체가 마교의 농간에 놀아나는 최악의 상황은 막은 셈이다.’
천신우가 감찰각주를 바라보았다.
‘욕심 같아선 놈이 마교의 기밀을 술술 털어놓으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힘들겠지.’
감찰각주가 거물이라고 하나 결국 마교 소속이 아닌 외부인이다.
당연히 접근할 수 있는 기밀등급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그래도 한 가지 정도는 확인해 볼까.’
천신우는 무신과 도제에게 양해를 구했다.
“두 분께는 죄송하지만 감찰각주에게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좋을 대로.”
무신은 흔쾌히 허락했고 도제는 무표정한 얼굴로 천신우를 쳐다봄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허락을 받아낸 천신우가 감찰각주에게 물었다.
“혹시 진사명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나?”
천신우는 감찰각주의 반응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진사명?”
감찰각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억나는군. 마교에서 잠입시킨 첩자 가운데 하나였지.”
“그것뿐인가?”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어보였다.
감찰각주의 표정에 전부 드러나 있었으니까.
결국 놈도 마교에게 이용당한 꼭두각시일 뿐인 것이다.
“그럼.”
천신우는 자운검을 거둬들였다.
감찰각주가 눈매를 좁혔다.
“살려주는 건가?”
“그건 저분들이 결정하실 문제지.”
사실 당장 감찰각주의 목숨을 거두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뒤처리였다.
천신우 선에선 감찰각주의 죽음을 수습하기가 쉽지 않았다.
‘워낙 거물이어야지.’
그러나 무신과 도제는 입장이 달랐다.
명분이 확실하게 주어진 이상.
그들이 감찰각주를 입맛대로 요리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물론 잡은 사냥감을 거저 넘겨줄 생각은 없었다.
“다들 오늘 제게 빚지신 겁니다.”
“뭣이? 으허허!”
무신은 호탕하게 웃었다.
도제는 탐탁잖은 얼굴이었지만 차마 반박은 못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사실 내가 작정하고 감찰각주의 비리를 파고들면 곤란해지는 쪽은 도제지. 도천의 고수들도 굴비처럼 줄줄이 엮여 나올 테니까.’
천신우는 도제에게 감찰각주와의 연결고리를 끊어낼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더불어 감찰각주의 수족들을 쳐낸 자리에 도천의 고수들을 채운다면?
세력 확장도 동시에 달성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도제를 동맹이라 생각해서 호의를 베푼 것은 절대 아니다.
당장 마교와의 일전에 앞서 손을 내민 것뿐.
‘도제도 무림맹을 멸망하게 놔둘 생각은 없을 테니 내가 내민 손을 잡을 것이다. 물론 결국 언젠가는 다시 맞붙어야겠지.’
마교의 침공을 막아낸 이후.
어찌 보면 그때부터가 진짜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다.
‘과연 그날이 올까.’
그러려면 당장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해야 한다.
“말씀들 나누시지요. 저는 가볼 곳이 있습니다.”
천신우가 양해를 구하고 사라지자 무신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대어를 낚아놓고도 남에게 던져주다니. 확실히 보통 그릇이 아니야. 이젠 마음 놓고 은퇴해도 되겠군.”
“…….”
도제조차 천신우를 의식하는 모습.
졸지에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되어버린 감찰각주는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천하의 감찰각주가 이런 꼴을 당하리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 * *
맹주전은 무림맹 소속 무인이라 하더라도 평생 한 번 구경하기가 힘든 곳이다.
무림맹에서 가장 삼엄한 경계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자연히 맹주전 내부를 두고 온갖 소문이 떠돌았다.
누구도 잠입 불가능한 함정이 존재한다느니.
수백 명의 고수가 맹주전을 둘러싸고 불철주야 지킨다느니.
하지만 정작 실제 맹주전 풍경은 한가롭기 그지없었다.
저벅.
발소리를 들은 노인이 난에 물을 주다 말고 입을 열었다.
“왔는가.”
그가 바로 당대 무림맹주 진무극이었다.
현재 무림에서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그였지만 겉모습은 초로의 노인과 차이가 없었다.
“그래. 어찌 됐는가?”
“감찰각주가 모든 혐의를 인정하고 비밀을 털어놓았습니다.”
“허허. 욕심 많은 녀석이 그리 쉽게 포기했다니 믿기지가 않는군. 설마 이번에도 천씨세가 소가주 작품인가?”
맹주의 심복 파천도가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러합니다. 혼자서 감찰각주의 신병을 가장 먼저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입막음하려던 살수들을 제압했습니다. 심지어 모든 공을 무신 선배와 도제 선배에게 넘기고 현장을 떠나더군요.”
파천도는 멸악전단주 심인기가 암살위기에 처했을 당시 개입했던 고수.
이번에도 감찰각주 사건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본 그였다.
“아주 흥미롭군.”
“애지중지하시는 난만큼은 아니겠지요.”
“그거야 직접 보면 알겠지.”
“……!”
파천도는 깜짝 놀랐다.
맹주가 일개 후기지수를 이런 식으로 평한 적은 지금껏 없었기에.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직접 지켜본 천신우는 정말이지 굉장했으니까.
“어떤가. 자네가 보기에는.”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자네가 언제 내 눈치를 봤었나?”
“원하신다면 지금부터라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맹주의 진심이었다.
그가 강해질수록, 유명해질수록, 주변에 모여드는 사람은 계속해서 늘어갔다.
하지만 마음을 털어놓을 만한 상대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당연히 파천도처럼 거리낌 없이 직언하는 심복이 소중할 수밖에.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말해보게.”
“흡사 맹주님의 젊은 시절을 보는 듯했습니다.”
“하하하. 별 볼일 없다는 소리처럼 들리는군.”
맹주는 웃어 넘겼지만 사실 그가 살아온 인생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지금은 전설로 남은 일화들…….
다음 순간 맹주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지금이야 그렇다 치고. 나중엔 어떻게 되겠는가?”
“나중 일을 어찌 알겠습니까만. 아마 무신이나 도제 선배 근처까지 가면 성공 아니겠습니까.”
맹주가 눈을 빛냈다.
파천도의 본심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거 아는가? 자넨 거짓말할 때면 왼쪽 눈썹이 올라간다네.”
“그렇게 티가 많이 납니까?”
“절대 부정은 하지 않는군.”
“죄송합니다.”
“됐네. 됐어.”
몸을 일으킨 맹주가 기지개를 켰다.
“조만간 봄이군.”
일상적인 대화.
하지만 맹주를 오랫동안 보필한 파천도에겐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봄이 되면 낙엽이 썩어 만들어진 거름 위에 새로운 싹이 돋아난다.
맹주는 무림에 불어올 격변을 암시한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의 시작엔…… 천신우가 있었다.
* * *
천신우가 달려간 곳은 진사명의 거처였다.
정확한 위치는 일전에 화향루의 장윤호를 통해 알아둔 상황.
어렵지 않게 그곳을 찾아간 천신우였다.
하지만 그곳은 텅텅 비어있었다.
관계자에게 물어보니 집안에 변고가 생겨 떠났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미 빠져나갔군.”
하지만 이게 끝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진사명과는 어떤 식으로든 다시 마주칠 것이다.
재회장소가 망향곡이 될지. 다른 곳이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천신우는 진사명의 거처를 나서며 생각에 잠겼다.
‘이미 전생과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감찰각주가 훨씬 이른 시점에 실각하고 무신과 도제는 마교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그로 인해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는 천신우로서도 예측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미래가 변하더라도 대비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
전생에서 무림맹 연쇄살인사건은 4차까지 이어졌다.
다만 앞서와 달리 4차 시도에선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럴 만도 하지. 암살하려던 대상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신우는 마교의 4차 암살대상을 떠올리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암살대상이 바뀌지 않는 이상 이번 생에서도 4차 시도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마교도 성공보다는 혼란을 조장하는 것에 주안점을 뒀으니까.’
그렇다고 방관할 생각은 없다.
‘혼란이 최소화되도록 노력해야겠지.’
천신우는 그길로 무신을 다시 찾아갔다.
무신은 도제와 이미 감찰각주 처리에 대한 합의를 마친 후였다.
“감찰각주는 종신형을 선고받을 것이다. 지금부터 죽는 순간까지 다시는 햇빛을 보지 못하게 되겠지.”
무림맹주가 승인하고 무신과 도제가 합의한 안건이었다.
철회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리고 가까운 시일 내로 신임 감찰각주 임명식이 열릴 것이다.”
서두르는 이유는 간단했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감찰각주 자리를 오래 비워둘 수가 없는 것이다.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적인 인물이 신임 감찰각주로 임명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마교에선 임명식 이후에 열릴 연회를 노리겠군요.”
“감찰각주를 잡았는데도 마교에서 다시 암살시도를 한다는 것이냐?”
“아시다시피 감찰각주는 마교의 꼭두각시에 불과합니다. 감찰각주가 잡혔다고 해서 그들의 계획에 지장이 생기진 않을 겁니다. 오히려 실패를 만회하려 들겠지요.”
무신은 충분히 납득한 얼굴이었다.
지금까지 천신우가 했던 예측이 대부분 맞아떨어졌기에.
“그럼 네놈은 다음 표적이 누구라 생각하느냐?”
“도제 어르신일 가능성이 2할은 된다고 봅니다. 지금까지의 실패를 만회하려면.”
“허!”
설마 천신우가 도제를 언급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던 무신이었다.
동시에 궁금해졌다.
“그럼 도제 외에 다른 표적은?”
천신우는 고개를 들어 무신을 바라보았다.
“어르신이겠지요.”
“……!”
천신우와 마주한 이래 처음으로 무신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