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환생-115화 (115/171)

# 115

학사환생 115화

사실 천신우는 철무산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았다.

천신우가 아는 것이라곤 철무산이 무신궁 소속의 중견고수이며 무신의 신임을 받았다는 정도.

그리고 철무산이 무신궁의 정보를 마교로 빼돌렸다는 사실뿐이었다.

‘하지만 무신은 다르겠지.’

천신우로선 무신의 심정을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무신의 눈가엔 철무산과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거슬러 올라오는 중이었다.

무신은 천신우를 만나기 한참 전부터 철무산과 알고 지냈다.

채은수와 채은영.

무신의 손녀들이 태어날 때도 자기 일처럼 기뻐했던 철무산이었다.

경사가 생기면 무신과 함께 웃었고, 악재가 겹치면 무신과 함께 술 한 잔 마시는 것으로 털어냈다.

그렇게 쌓아온 세월이 어느덧 20년이 넘었다.

이제 무신에게 있어 철무산은 부하라기보다 가족 같은 존재였다.

그렇기에 천신우로부터 철무산이 첩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무신은 믿지 않았다.

만일 천신우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꺼냈다면, 당장 역정을 냈을 것이다.

천신우의 의견을 받아들여 철무산에게 거짓 명령서를 내릴 때는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20년 넘게 함께 웃고 울었던 가족을 어찌 시험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후의 일은 천신우가 말한 대로였다.

철무산은 무림맹 식당 퇴식구를 통해 명령서를 빼돌렸다.

지금까지 철무산이 줄곧 같은 식당만을 이용했는지, 왜 항상 음식을 남겼는지.

그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도 무신은 마음속으로 철무산에게 기회를 주었다.

철무산이 뒤늦게나마 진실을 털어놓는다면.

협박 때문에 어쩔 수 없었노라고 하소연한다면 믿어줄 생각이었다.

무신궁에서 추방할지언정 목숨만은 살려주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철무산은 끝끝내 무신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태연한 척하며 무신의 눈치를 살피는 철무산이었다.

무신은 대답 대신 천신우를 돌아보았다.

천신우가 꺼내 보인 것은 철무산이 빼돌리려 했던 명령서였다.

“어르신께서 당신에게 내린 명령서입니다.”

“그럴 리가. 나는 원칙대로 명령서를 폐기했다. 어디서 났는지는 모르지만 어르신이 다른 이들에게 내리신 명령서겠지.”

끝까지 발뺌하는 철무산이었다.

“아니요.”

그의 말에 천신우는 고개를 저었다.

“이것과 똑같은 명령서는 세상에 하나뿐입니다.”

“그럴 리가 없다! 어르신께선 나뿐만 아니라 무신궁의 다른 무인들에게도 같은 명령을 내리셨으니까.”

철무산은 확신을 담아 항변했다.

직접 확인했기 때문.

하지만 철무산의 항변에도 천신우는 당당했다.

‘……뭐지? 믿는 구석이 있는 건가?’

철무산이 내심 불안감을 느끼는 찰나.

천신우가 손가락으로 명령서 중간 부분을 가리켰다.

“이것이 증거입니다.”

무신은 철무산에게 내린 명령서에만 본인이 아니면 알아보지 못할 표시를 남겨놓았다.

그리고 지금 천신우가 들고 있는 명령서엔 해당 표식이 존재했다.

천신우가 들고 있는 명령서가 철무산이 빼돌린 것이라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

철무산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설마 천신우가 이런 식으로 함정을 팠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기에.

철무산이 찰나의 희망을 품고 무신을 돌아보았다.

무신은 여전히 철무산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철무산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무신이 분노하는 방식은 남들과는 다르다.

얼굴이 붉어지지도 고함을 지르지도 않는다.

그저 지금처럼 메마른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무신 곁에서 20년을 지내온 철무산은 이 끝이 어떤지도 잘 알고 있었다.

이윽고 무신의 외침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강휴! 철무산을 끌고 가도록!”

서릿발처럼 차가운 기도를 뿌리며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철무산의 동공이 분주히 움직였다.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수는 없다.’

얌전히 잡혀가 마교의 구출을 기다린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없었다.

정체가 발각당한 이상 마교는 철무산을 버릴 것이다.

그렇다고 아는 사실을 전부 털어놓고 무신에게 자비를 청할 수도 없다.

그럼 마교는 철무산과 관련된 모든 것을 세상에서 지워버릴 테니까.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철무산은 필사적으로 탈출할 방법을 생각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무신이야 자타공인 무림맹 최강자 가운데 하나.

강휴 역시 무신의 심복 가운데 최고수였다.

‘그나마 이놈이 만만하겠군.’

천신우를 향해 돌아서며 철무산이 탈출을 시도하던 바로 그때.

뒤쪽에서 폭발적인 기운이 터져 나왔다.

장내에 있던 모두가 움찔했다.

“……!”

탈출하려던 철무산은 물론이고.

천신우조차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게 바로 무신의 진정한 힘인가……!’

내공을 방출한 장본인은 당연하게도 무신이었다.

끝까지 달아날 궁리만 하는 철무산에 대한 분노를 표출한 것이다.

“크으으윽!”

무신의 기운에 압도당한 철무산이 신음을 토하며 털썩 무릎 꿇었다.

강제로 무릎 꿇려진 철무산의 귀에 무신의 발소리가 울렸다.

모든 것이 끝났음을 직감한 철무산이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하!”

철무산의 눈동자에 광기가 어렸다.

“과연 대단하구나! 그러나 아무리 네놈이라도 우리를 막진 못할 것이다!”

“유언은 끝났느냐?”

어느새 철무산에게 다다른 무신이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우두두둑!

무신의 내공이 철무산의 전신으로 퍼져나가며 모든 것을 파괴했다.

생명력이 다해 쓰러지는 철무산을 무신은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나 천신우는 무신의 눈빛에 깃든 착잡한 감정을 읽었다.

천신우의 시선을 느낀 무신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네게 못난 모습을 보였구나.”

“아닙니다.”

“그래. 이놈이 끝이냐?”

“제가 알고 있는 한에선 그렇습니다.”

“알겠다. 고생 많았다. 이만 물러가거라.”

무신의 마음을 헤아린 천신우는 그곳을 나섰다.

문이 닫히기 전에 마지막으로 목격한 무신의 얼굴은 회한으로 가득했다.

* * *

3차 연쇄 살인 사건에 대비해 무림맹은 만반의 대비를 마쳤다.

표적으로 예상되는 인물들에게 무신과 도제가 각각 비밀호위를 붙여준 것이다.

천신우도 스스로에게 역할을 부여했다.

직속상관인 멸악단주 심인기.

3차 사건의 표적으로 유력한 그를 호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물론 천신우가 심인기를 밀착 경호할 입장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심인기 본인이 원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천신우는 걱정하지 않았다.

‘심인기는 대부분의 시간을 무림맹 내부에서 보낸다. 본인의 무공도 뛰어나기 때문에 무림맹의 경계망을 뚫고 암살하기란 쉽지 않다. 마교도 그걸 알고 있겠지.’

실제로도 무림맹 연쇄 살인 사건은 대부분 외부에서 발생했다.

그편이 암살하기도 쉬웠고 탈출하기도 용이했기 때문.

‘그러니만큼 오늘 같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지.’

심인기는 일에 파묻혀 사는 인물이다.

그런 심인기에게 사적인 일정이라곤 하나뿐이었다.

부하들의 경조사.

아무리 바빠도 부하들의 결혼과 부모 장례만큼은 반드시 챙기는 심인기였다.

‘오늘 근교에서 멸악전단 무인의 결혼식이 열린다. 심인기가 참석할 것은 당연한 일. 마교에서도 그걸 염두에 두고 움직일 거야.’

천신우 역시 결혼식에 초대받은 상황이었다.

공교롭게도 오늘 혼인하는 멸악전단 무인은 천신우와도 안면이 있었다.

천신우가 멸악전단에 처음 발령받았을 당시 같은 조의 선배였던 것이다.

무복 대신 편안한 옷차림으로 결혼식장을 찾은 천신우였다.

대개 일반인들의 혼례가 그렇듯 결혼식은 신부의 본가에서 이뤄졌다.

무림맹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이었지만 임무 수행 중인 무인들은 제외하곤 대부분 참석했다.

멸악전단의 끈끈한 조직 분위기를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천신우를 발견한 멸악전단 동료들이 아는 척을 해왔다.

“왔군!”

“이제 소가주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하하하.”

천신우의 명성이 전과는 비교조차 하지 못할 만큼 드높아졌음에도.

천신우를 대하는 동료들의 태도에선 가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신분이나 출신에 상관없이 오직 실력만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멸악전단 특유의 분위기 덕분이다.

천신우 역시 모처럼 그들과 어울려 술잔을 나눴다.

“설마 동식이가 우리 중에 가장 먼저 결혼할 거라 누가 생각이나 했겠나?”

“그러게 말일세. 부끄럼도 많은 놈이 대뜸 짝사랑하던 여인에게 고백하고 승낙을 받아 내다니.”

“크윽! 부럽군!”

떠들썩하게 이야기꽃을 피우던 멸악전단 무인들의 화제는 자연스레 천신우로 바뀌었다.

“그런데 그 소문 사실인가?”

난데없는 질문에 천신우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슨 말씀인지?”

“으흐흐. 시치미 떼기는. 자네 북해빙궁 삼 공녀와 결혼할 사이라며? 벌써 소문이 파다하네.”

“어허! 함부로 입 놀리지 말게! 무신궁의 채 소저가 알면 이 친구 끝장이야! 여자의 질투가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

“쯧쯧. 누가 보면 여자깨나 울리고 다닌 줄 알겠군. 살면서 여자 손도 못 잡아본 놈이.”

“뭐가 어째!”

악의 없는 그들의 농담을 적당히 받아주는 천신우였다.

물론 그러면서도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무림맹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지원은 기대하기 힘들다.’

물론 멸악전단 무인들이 상당수 참석했다곤 하지만 거물급 인사들은 없었다.

만일 마교의 정예들이 심인기 암살을 시도한다면 막아내기가 쉽지 않을 터였다.

‘내가 저지하는 수밖에.’

천신우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위를 훑었다.

하지만 결혼식 직전까지도 별다른 징후는 엿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조짐이 감지된 것은 신부 들러리들의 축하공연이 시작되고부터였다.

신부의 친구들은 춤과 노래를 추며 분위기를 한껏 띄웠다.

모두가 손뼉을 치며 즐겁게 장단을 맞추느라 음식을 나르는 하인들의 움직임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직 천신우만이 눈을 가늘게 떴다.

‘평범한 하인이 아니야.’

발걸음이 가볍고 움직임에 절도가 있었다.

분명 무공을 익힌 자들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하인들 가운데 일부가 슬그머니 멸악전단 단주 심인기가 있는 곳으로 접근했다.

축하공연에 정신이 팔린 데다 하인들의 움직임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신경 쓰는 이들이 없었다.

그리고 상황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심인기 앞에 접시를 내려놓던 하인이 단도를 빼 들며 달려든 것이다.

심인기와 동행한 멸악전단 고수가 막아섰지만 상대는 교묘하게 공간을 파고들었다.

“감히!”

벌떡 일어난 심인기가 날아드는 단도를 쳐냈다.

물론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쐐애애액!

바람을 가르며 화살이 날아들었다.

어느새 결혼식장 곳곳마다 숨어든 궁사들이 활을 쏘아 보낸 것이다.

심인기는 벼락처럼 뒤돌며 날아드는 화살들을 모조리 튕겨냈다.

따다다다당!

그제야 결혼식에 참석했던 멸악전단 무인들도 사태를 파악했다.

“단주님을 지켜야 한다!”

누군가 소리를 지르며 심인기에게 다가갔다.

누구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그를 주시하던 천신우만이 조용히 움직였다.

천신우의 시야에 심인기 뒤로 접근하는 상대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심인기는 몸을 피하는 대신 암살자들과 정면으로 맞서는 중이었다.

과연 자신의 안위보다 부하들을 먼저 챙기는 심인기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심인기의 지척까지 접근한 상대가 검을 뽑아 휘두르려는 순간.

소리 없이 뽑혀 나온 천신우의 검이 상대의 몸을 사선으로 갈랐다.

촤아악!

한발 늦게 뒤돌아선 심인기와 암살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암살자가 침음을 흘렸다.

“……운이 좋구나. 그래 봐야 아주 잠깐 수명이 연장된 것뿐이지만.”

몸이 반으로 쪼개진 암살자가 옆으로 무너졌다.

비로소 천신우와 마주 선 심인기다.

“…….”

대화는 필요치 않았다.

심인기는 눈빛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러고는 돌아서며 다른 암살자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상황을 파악한 멸악전단 무인들도 저마다 무기를 뽑아 들고 가세했다.

신랑은 새파랗게 질린 신부를 감쌌다.

방금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어느새 최악의 날로 변해버린 결혼식 당일이었다.

천신우는 씁쓸함을 삼키며 암살자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적들을 베어 넘겨도 불길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온몸을 지배하는 불길함에 천신우가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지붕 위에 올라선 남녀가 보였다.

거대한 체격의 남자.

요염한 자태의 여인.

그들은 마교의 후기지수 한태성과 화사였다.

마교 최고 후기지수 진사명의 지시로 천신우를 제지하기 위해 동원된 그들이었다.

한태성은 예전에 검성과 붙었을 때와 달리 애병인 여래천살봉을 휴대한 상태.

“저놈이 천신우군.”

한태성이 오만한 눈으로 천신우를 노려보았다.

화사는 요염하게 입술을 핥았다.

“역시 언제 봐도 먹음직스럽게 생겼다니까.”

그러나 천신우는 이내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의 존재를 확인했음에도 여전히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

과연 천신우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난장판이 되어버린 결혼식장의 정문을 열어젖히며 걸어오는 중년인이 보였다.

중년인의 가슴에 수놓인 표식을 보는 순간 천신우는 숨을 삼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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