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
학사환생 112화
무신은 천신우가 그린 표식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것은 바로.
“도천의 표식이군.”
도천의 표식과 천신우를 번갈아 보는 무신의 표정이 심각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군. 확실히 이렇게 보니 저번 현장에 남겨진 흔적도 표식의 일부분처럼 생각되긴 한다만…….”
천신우는 무신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설마 하는 마음일 것이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어르신께서 정적들을 암살한다면 범행현장에 무신궁의 표식을 남기겠습니까?”
천신우의 물음에 무신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당연히 은밀히 처리하겠지.”
“바로 그겁니다.”
무신은 납득한 얼굴이었다.
“하긴 도제가 대놓고 일을 벌일 인간은 아니지.”
도제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무신이었다.
도제가 이번 일을 꾸몄다면 절대 도천과 관련된 표식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그들이 일부러 표식을 남겨 도제를 곤경에 빠뜨리려 한다는 것이냐?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구나. 이런다고 사람들이 도제를 의심할까?”
“적어도 도제를 향한 여론이 나빠지긴 하겠지요. 물론 놈들이 정확히 무엇을 노리는지는 앞으로 지켜봐야겠지만. 적어도 모든 가능성을 열어둘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사실 천신우는 전생에서 마교가 실행에 옮긴 계획을 똑똑히 기억했다.
‘마교는 무림맹 고수들을 살해할 때마다 범행현장에 도제와 관련된 흔적들을 조금씩 남겼다. 처음엔 다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지만 나중엔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지.’
그렇게 무림맹 내부에서 도제를 향한 의심이 커질 무렵.
느닷없이 살인범 가운데 무신의 수하가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심지어 범행현장에서도 무신궁과 관련된 단서가 속속 발견됐다.
당연히 도제를 겨눴던 비난의 화살 또한 한순간에 무신에게로 돌아섰다.
급기야 일전에 범행현장에서 발견된 증거들 역시 무신이 조작했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파렴치한으로 몰린 무신은 결백을 주장했지만 소용없었다.
‘범행현장에서 무신의 수하가 현행범으로 체포된 것이 결정적이었지. 그로 인해 무신의 주장은 설득력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당시엔 몰랐지만 현행범으로 체포된 무신의 수하는 사실 마교의 첩자였다.
마교는 아주 오래전부터 무신궁에 첩자를 심어뒀다.
결정적인 순간에 무신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그런 마교의 노림수는 제대로 맞아떨어졌다.
‘여러 범인 중에 무신의 수하는 단 한 명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덤터기를 쓰기엔 충분했다. 결국 무신은 졸지에 연쇄 살인 사건의 배후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그렇게 정치적 입지가 좁아진 무신이 마교와의 전쟁에서 제 몫을 다하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나중에야 무신의 무고함이 입증됐지만 대세는 이미 기운 후였다.
‘지금 생각해도 마교의 전략은 주도면밀했다. 처음부터 무신에게 누명을 씌우려 했다면 쉽지 않았을 터. 하지만 이중으로 증거를 조작하는 바람에 모두가 꼼짝없이 속고 말았지.’
따라서 천신우의 목표는 명확했다.
‘더 이상 희생자들이 나오지 않게 막는 한편, 무신궁에 숨어든 마교의 첩자도 색출해 내야 한다. 무신이 억울한 누명을 쓰는 일이 없도록.’
그러기 위한 선행조건은 무신을 설득하는 것.
물론 현실적으로 지금 당장 마교의 첩자에 대해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원론적인 이야기부터 꺼내는 천신우였다.
“무엇보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추가 피해자를 막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이번 일의 내막을 무림맹에 알려야 하지 않겠느냐.”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 무림맹이 얼마나 썩어 있는지.”
무신은 반박하지 못했다.
무림맹 감찰각주를 조사하는데 많은 공을 들인 무신이었다.
그 과정에서 밝혀진 관련자들의 비리와 월권행위는 수도 없이 많았다.
감찰각주 하나 제거하는 것으로 끝날 수준이 아니었다.
아예 무림맹을 갈아엎어야 할 판.
그런 상황에서 이번 사건을 무림맹에 알린들, 제대로 조사가 이뤄질 리가 없었다.
고민에 빠진 무신에게 천신우가 답을 내놓았다.
“아시다시피 이번 일은 어르신 선에서 처리해야 합니다.”
결국 무신도 동의했다.
“네놈 말대로 하자꾸나. 그러려면 일단 그들의 다음 표적이 누군지 알아야겠지.”
사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무림맹 소속 고수가 어디 한둘이던가.
더군다나 그들은 앞선 범행현장에서 이렇다 할 증거를 남기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전생에서도 다음 표적을 정확히 예측해 냈던 천신우다.
다음 표적이 누군지 예상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일단 그들과 한패인 감찰각주의 측근들은 제외해야겠지요.”
비리에 연루되지 않았으며 투철한 정의감과 뛰어난 실력을 갖춘 고수들이 대상이었다.
그렇게 천신우는 최종명단을 추려냈다.
‘전생에선 2차 연쇄 살인 사건 당시 다섯 명이 순차적으로 살해당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달라.’
천신우가 과거로 돌아오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
‘전생에선 1차에서 죽었던 사람이 지금은 살아 있고, 살아 있던 사람은 죽었다. 앞으로도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니 최대한 범위를 넓힐 수밖에.’
물론 지나치게 범위를 넓히다 경계망에 구멍이 뚫려도 곤란했다.
현실적으로 모든 무림맹 고수를 보호할 수는 없었다.
‘2배수 정도가 적당하겠지.’
생각을 정리한 천신우가 무신의 동의를 구했다.
“10명 정도 추려내려고 하는데 어떤지 봐주십시오.”
명단을 검토한 무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장차 무림맹을 이끌어나갈 인재들이군. 확실히 이들이 한꺼번에 암살당한다면 무림맹의 미래는 암담해지겠지.”
실제로 전생에서 연쇄 살인 사건으로 인해 크나큰 전력손실을 입었던 무림맹이다.
그때만 생각하면 천신우는 지금도 눈앞이 아찔했다.
‘용천세를 비롯한 희생자들 모두 마교와의 전쟁에 없어서는 안 될 인재들이다. 더는 인명피해가 없어야 한다. ……잠깐.’
명단을 재차 검토하던 천신우가 멈칫했다.
뭔가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조만간 무림맹 정기인사가 예정된 거로 압니다만.”
“도제의 칠순잔치가 끝나면 바로 발표될 거다.”
“혹시 인사명단을 알고 계십니까?”
도제 칠순잔치까지는 얼마 남지 않은 상황.
하지만 무신 정도 되면 사전에 인사명단을 확보하는 정도야 쉬운 일이었다.
물론 천신우의 의도를 모르는 무신은 다른 쪽으로 해석했다.
“멸악전단이 슬슬 질리는 모양이지? 옮기고 싶은 조직이라도 있는 것이냐?”
“그게 아니라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래? 무엇을 알고 싶은 게냐?”
“제13지부 부지부장 인사명령을 확인해 주셨으면 합니다.”
무신은 의외라는 표정이었지만 캐묻진 않았다.
천신우를 전적으로 신뢰했기에.
“어디 보자. 제13지부 부지부장이라면…… 용천세로군. 요즘 세대답지 않게 괜찮은 녀석이지.”
세대 차이가 느껴지는 발언을 내뱉은 것도 잠시.
기억을 더듬은 무신이 답을 내놓았다.
“그간 제13지부에서 쌓은 실적을 인정받아 무림맹으로 복귀할 예정으로 안다. 당연히 직급도 올라갈 거고.”
천신우가 눈을 빛냈다.
마교의 연쇄 살인 사건이 앞당겨진 것처럼 용천세의 무림맹 복귀도 빨라진 것.
천신우가 용천세를 대신해 실종사건을 해결해 준 덕이었다.
‘이렇게 되면 마교에서 용천세를 다음 표적으로 삼지 않을 이유가 없지. 전생에서도 가장 먼저 살해당했으니까.’
천신우는 명단에 용천세의 이름을 추가했다.
“이렇게 11명에게 비밀호위를 붙이도록 하지요. 용천세 부지부장은 제가 직접 엄호하겠습니다.”
전생에서 가장 먼저 살해당했던 용천세다.
그러니만큼 다음 표적이 될 가능성도 가장 높다고 봐야 했다.
“이 명단에 있는 녀석들을 암살하려면 상대가 보내는 살수들도 보통 실력이 아닐 터. 비밀호위로 누굴 붙여줄지도 신중해야겠구나.”
사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일.
하지만 도제에 필적하는 세력을 갖춘 무신이기에 가능했다.
“그건 그렇고 당사자들에게 사실을 알려줄 생각이더냐?”
“어르신 생각은 어떠신지요?”
“아직 확실하지 않으니 굳이 밝힐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 자칫하다가 정보가 새어나가기라도 하면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고. 물론 믿을 만하다면 개인적으로 귀띔 정도는 해줘도 되겠지.”
“같은 생각입니다.”
천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용천세에게만큼은 암살시도에 대해 경고할 생각이었다.
“자. 그럼 온 김에 한 그릇 먹고 가거라.”
천신우는 무신과 함께 국밥 한 그릇씩을 뚝딱 비웠다.
돼지머리를 푹 삶아 국물을 우려낸 국밥은 언제 먹어도 맛있었다.
* * *
도제의 칠순잔치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아직 2차 연쇄 살인 사건은 발생하지 않은 상황.
앞서 3명의 무림맹 고수가 죽은 사건 역시 잠잠해지는 분위기였다.
애초에 타살이라 생각할 만한 정황이 없었기에.
물론 도제의 칠순잔치에 재를 끼얹지 않으려는 이유도 있었다.
긁어 부스럼 만든다고.
괜히 분란을 키워 도제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오랜만에 천신우와 마주 앉은 제13지부 부지부장 용천세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은 어딜 가나 도제 선배 칠순잔치가 화제군.”
정기인사에 앞서 무림맹에 복귀한 용천세였다.
오랜만의 만남임에도 그를 대하는 천신우의 태도가 자연스러웠다.
“명실상부한 무림맹 최고 실력자가 아닙니까.”
“그렇기야 하지. 그런데 그거 아는가? 그런 도제 선배조차도 젊었을 적엔 자네만큼은 아니었다네. 자네와 처음 만났던 게 거의 1년이 다 되어가는 것 같은데. 그동안 이렇게 성장할 줄이야.”
용천세는 천신우가 지금까지 어떤 업적을 쌓아왔는지 알고 있었다.
과거 제13영역에서 백가장 후기지수와 시비가 붙었던 일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었다.
아마 백가장 후기지수가 지금의 천신우와 맞닥뜨렸다면 고개도 들지 못했을 것이다.
“정말 대단하군.”
“과찬이십니다.”
“아닐세. 진심이야. 그래서 더 궁금하다네. 자네 같은 거물이 무슨 이유로 나를 찾아온 것인지.”
누구보다 바쁘게 살아온 천신우가 단지 술자리나 갖자고 찾아오진 않았을 터였다.
천신우가 겸연쩍게 웃었다.
“예전에 제게 진 빚을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물론일세.”
용천세의 의뢰로 호수에서 발생한 실종사건을 해결한 천신우였다.
당시 그 대가를 받지 않았기에 용천세는 천신우에게 빚을 진 셈.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은 비밀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친우이신 공덕 부지부장님께도.”
그렇기에 용천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용천세의 확답을 받아낸 천신우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얼마 전에 무림맹에서 발생한 사망사건들에 대해 들으셨을 겁니다.”
그 순간, 용천세가 자세를 바꿨다.
상체를 앞으로 끌어당기고 눈을 빛내며 경청할 준비를 마친 것이다.
“독자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 사건들은 타살일 가능성이 큽니다.”
용천세가 손으로 탁자 끄트머리를 움켜쥐었다.
“역시!”
용천세도 무림맹 고수들의 죽음을 석연찮게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 배후가 누군지 알아냈는가?”
“아직 거기까지는. 하지만 다음 표적이 누가 될지는 어느 정도 범위를 좁혀놓았습니다.”
용천세가 엄숙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누군가?”
천신우는 대답 대신 용천세를 응시했다.
“……설마 나란 말인가?”
용천세의 물음에 천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로선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근거는?”
“실은 무신 어르신과 함께 조사해 온 바에 따르면 무림맹의 전복을 원하는 암중세력이 존재합니다. 그들 입장에서 지부장님 같은 위인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 수밖에요.”
“하하하! 내 목을 원하는 자들이 있다니 내가 헛살진 않았군.”
호탕하게 웃던 용천세는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알려줘서 고맙네. 각별히 주의하지.”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용천세도 동의하는 바였다.
앞서 살해당한 이들 역시 실력 있는 고수들이었기에.
천신우가 해결책을 제시했다.
“당분간 비밀호위를 붙여드리겠습니다. 안심하시고 평소처럼 행동하시길.”
용천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그나저나 이러면 내가 신세를 갚은 게 아니라 빚을 더 진 셈이군.”
“하하. 그렇게 되나요?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나중에 어떻게든 받아낼 테니.”
“좋을 대로 하게. 이자까지 두둑하게 쳐서 갚아주지.”
천신우를 바라보는 용천세의 눈빛은 신뢰로 가득했다.
* * *
같은 시각.
마교 최고 후기지수 진사명은 명령서를 만지작거렸다.
1차 무림맹 요인암살계획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그였다.
이제 도제의 칠순잔치 전후로 2차 요인암살을 시도할 생각이었다.
얼마 전에 암살한 고수들에 이어 마교에서 4번째 표적으로 삼은 대상은.
“이번 표적은 무림맹 제13지부 부지부장이었던 용천세다. 실수 없이 처리하도록.”
바로 용천세.
천신우의 예상이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 * *
깊은 밤이었다.
용천세는 무림맹에서 마련해준 숙소에서 책을 읽는 중이었다.
제13지부 부지부장까지 거친 그이기에 숙소를 지키는 호위무인들의 수준은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호위무인들의 존재가 무색하게 숙소로 잠입하는 데 성공한 암살자였다.
그 사실을 용천세가 깨달은 건 이미 암살자가 지척까지 다가왔을 때였다.
책장을 넘기던 용천세의 손이 멈췄다.
“오늘 밤에 손님을 초대한 기억은 없소만.”
용천세의 눈빛이 탁자 위에 올려둔 검을 향했다.
당장에라도 검을 뽑을 수 있도록 모든 신경을 곤두세운 상황.
하지만 암살자의 움직임이 훨씬 빨랐다.
솨아악!
용천세의 등 뒤에서 엄청난 예기가 느껴졌다.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반응하지 못할 만큼 빠른 발검이었다.
뒤늦게 검을 향해 팔을 뻗는 용천세보다 한발 앞서 암살자가 움직이려는 찰나.
암살자의 목에 서늘한 칼날이 닿았다.
이어서 들려온 것은 천신우의 나직한 목소리였다.
“잠깐 얘기 좀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