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
학사환생 110화
북해빙궁 대공자는 온몸이 저릿저릿해짐을 느꼈다.
‘이 정도란 말인가……!’
직접 경험한 천신우의 무력은 정말이지 상상 이상이었다.
마주하기가 두려울 정도.
하지만 물러설 수도 없었다.
지금 물러서면 이제껏 쌓아 올린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이다.
권력을 향한 집념이 대공자의 입을 떨어지게 만들었다.
“모두 들어라! 소가주를 제압하는 자에겐 상으로 백만 냥을 내리겠다!”
백만 냥은 대공자 입장에서도 적은 돈이 아니다.
하지만 어차피 이번 싸움에서 패배하면 그야말로 끝장이다.
공수표를 남발해서라도 승리할 필요가 있었다.
거액의 상금을 내건 효과가 있는지 거대한 도로 무장한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대공자 진영이 술렁였다.
“오오! 태도난마가 나서는군!”
“대협! 건방진 소가주를 혼내주십시오! 북해빙궁의 위엄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거대한 도를 들고 말처럼 전장을 날뛴다 하여, 태도난마라 불리는 그는 우람한 체격을 자랑했다.
대공자 진영에서 손꼽히는 고수이기도 했다.
대공자 진영의 환호 속에 대문을 나선 태도난마가 칼자루를 바닥에 찍었다.
쿠우우웅!
지면이 쩍쩍 갈라지며 큼직한 구덩이가 파였다.
기세가 오른 태도난마가 쩌렁쩌렁 외쳤다.
“천씨세가 소가주라 했나? 본인은 북해빙궁의 태도난마다! 오늘 자웅을 겨뤄보자!”
“소가주께서 나서실 필요도 없습니다. 태도난마 정도는 제가 상대하지요.”
태도난마에 맞선 것은 천신우가 철혈성 비무대회 기간에 영입한 신중현이었다.
내로라하는 고수들 사이에서 4강에 올랐던 그는 태도난마를 상대하고도 남을 만한 실력자.
천신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신중현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앞으로 나섰다.
북방의 바람은 매서웠지만 그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릴 정도는 아니었다.
심지어 지금 신중현은 천신우가 선물한 영약 덕에 비무대회 때보다도 강해진 상태였다.
거기에 천신우의 도움으로 아버지의 유품을 찾으면서 마음의 짐까지 덜어낸 상황.
칼끝을 바라보는 신중현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진중했다.
“본인은 신중현이라 하오.”
소개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신중현이 가볍게 바닥을 박차는 순간.
천신우는 신중현의 승리를 직감했다.
그렇기에 마음 편히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하는 천신우였다.
‘이미 병력을 분산해 대공자를 지원할 만한 인물들의 근거지를 포위해놨으니 변수는 없다. 당장 눈앞의 본거지만 무너뜨리면 대공자는 끝장이다.’
물론 천신우가 전면전만 준비해 온 것은 아니었다.
전생에서 칠 공자와 대공자의 마지막 일전을 기록한 무림맹 보고서를 기억하는 천신우다.
그걸 토대로 대공자가 수성에 임할 경우를 대비한 공략방법은 물론.
궁지에 몰린 대공자가 탈출을 시도할 경우까지도 완벽히 대비했다.
‘해가 중천에 뜨기 전에 끝낸다.’
각오를 다지며 천신우는 신중현과 태도난마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예상대로 신중현은 태도난마와의 싸움에서 시종일관 우위를 점했다.
처음엔 공세를 퍼붓던 태도난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신중현의 검을 막기 바빴다.
‘앞으로 다섯 수면 끝이군.’
천신우는 천씨세가의 고수들과 산군 휘하의 고수들을 준비시켰다.
정확히 다섯 번의 공방을 오간 끝에 신중현의 검이 태도난마의 가슴을 갈랐다.
울컥!
피를 토해내며 태도난마가 웃었다.
많은 의미가 담긴 웃음이었다.
“……대단하군.”
쿠웅!
태도난마가 그대로 앞으로 쓰러지는 순간.
천신우가 한발 앞서 외쳤다.
“죄인 대공자와 일당들을 처단하라!”
“와아아아아!”
천둥 같은 함성을 내지르며 고수들이 정문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한발 늦은 대공자의 명령은 무인들의 함성에 묻혀버렸다.
“가라! 북해빙궁의 힘을 보여주는 거다!”
거대한 정문 앞에서 백병전이 벌어졌다.
“쏴라!”
담장 위로 북해빙궁의 궁사들이 몸을 내밀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가 화살을 쏘아 보냈다.
쐐애애애액!
내공이 실린 화살은 그야말로 북풍마저 찢으며 허공을 갈랐다.
가죽보호대 따위로는 절대 막지 못할 위력.
그런데도 천씨세가 고수들은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주었다.
따다다다당!
화살을 쳐내는 그들에게 대공자 진영의 고수들이 돌진했다.
하지만 대공자 진영이 승기를 잡는 일은 없었다.
“오늘 북해빙궁의 질서를 바로잡을 것이다!”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산군은 우렁찬 외침으로 모두의 머리털을 쭈뼛쭈뼛 서게 만들었다.
“망설이지 마세요. 오늘 흘리는 피가 새롭게 태어날 북해빙궁의 초석이 될 겁니다.”
뒤이어 삼 공녀의 차분한 지시를 받은 고수들까지 전장에 합류했다.
“이런…….”
대공자가 신음을 흘렸다.
정문으로 이어지는 언덕을 가득 메운 적들이 보였다.
그들의 공세에 아군은 속절없이 밀렸다.
삼 공녀의 수하들만 상대한다면 모를까.
천신우와 산군의 병력이 합세한 적들을 당해내기란 불가능했다
패배를 직감한 것은 대공자만이 아니었다.
“대공자님! 피하셔야 합니다!”
대공자의 측근이 후퇴를 종용하는 짧은 순간에도 전세는 급속도로 기울었다.
정문 밖으로 나가 싸우던 대공자의 부하들이 언덕 아래로 떨어졌다.
고랑에 얼굴을 처박은 그들은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대공자님!”
어느새 적들은 정문 앞까지 다다랐다.
“문을 닫아라!”
대공자의 부하들이 안간힘을 다해 육중한 철문을 걸어 잠갔다.
“으아아악!”
“크윽!”
철문 밖에선 비명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미처 정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무인들이 쓰러지는 소리였다.
“이대로는 얼마 버티지 못합니다! 어서 결단을!”
아무리 고수들이라 하더라도 엄청난 두께의 철문을 박살 내기란 쉽지 않다.
드높은 담장 역시 마찬가지.
그러나 난공불락은 결코 아니었다.
실제로 이미 담장을 뛰어넘으려는 적들의 모습이 여기저기 포착됐다.
“막아! 절대 넘지 못하게 해라!”
대공자의 심복이 목이 터져나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대공자는 눈앞의 현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가는 부하들의 표정이.
모든 것이 믿기지 않았다.
대세를 굳혔던 지난날이 꿈처럼 아른거렸다.
손만 뻗으면 잡을 것만 같았던 권좌가 점점 멀어져간다.
대공자의 오랜 꿈에 금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쏴아앙!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철문이 사선으로 그어졌다.
“…….”
순간 주위에 정적이 찾아왔다.
밀려드는 적과 싸우던 고수들도.
부상을 입은 채로 신음하던 무인들도.
대공자 주위를 지키던 심복들도.
지금만큼은 모든 동작과 생각을 멈추고 철문을 바라보았다.
반듯하게 잘려 나간 철문이 서서히 기울어졌다.
쿠웅!
풀썩이는 연기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천신우였다.
모두가 믿기지 않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그들은 알지 못했다.
눈앞의 광경이 천신우의 무공에 자운검의 위력이 더해진 결과라는 사실을.
‘……굉장하군. 솔직히 일격에 이걸 잘라낼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천신우 본인조차 놀랐을 정도.
물론 천신우나 대공자나 감상에 빠질 여유 따윈 없었다.
강제로 개방된 정문을 통해 천씨세가와 산군의 연합군이 밀려들었기 때문.
지형적 이점마저 사라진 이상, 수성은 이미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으득!
이를 악문 대공자가 원망 어린 눈으로 천신우를 노려보던 것도 잠시.
“어서 가셔야 합니다!”
“저희가 시간을 끌겠습니다!”
부하들이 대공자를 이끌었다.
이제는 대공자도 방법이 없었다.
이곳에 남아 있으면 결국 개죽음이다.
차아앙!
“막아라! 목숨과 바꿔서라도 이곳을 사수하라!”
대공자의 심복이 필사의 각오로 외쳤다.
대공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가자.”
* * *
“대공자님! 이쪽으로!”
오래된 심복들이 대공자를 저택 중앙의 우물로 안내했다.
누가 봐도 우물처럼 보이는 그곳은 사실 외부로 연결되는 비밀통로였다.
심복들이 우물을 덮은 덮개를 걷어냈다.
“가셔야 합니다!”
대공자는 차마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서두르지 않으면…….”
그를 재촉하던 심복이 일순 멈칫했다.
그들이 달려온 방향에서 한바탕 소요가 일어나고 있었다.
막아서던 무인은 한참을 나가떨어져 벽에 처박혔고, 검을 휘두르던 무인은 그대로 팔이 잘려 나갔다.
최후의 저지선이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밀리는 중이었다.
“온다! 막아!”
필사적으로 외치던 무인의 목소리가 멎었다.
옆에 서 있던 무인들은 귀신이라도 목격한 것처럼 뒷걸음질 쳤다.
멀리서 지켜보던 대공자의 심복들은 심장이 쿵쾅거림을 느꼈다.
그들 모두 직감했다.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마침내 상대를 막아서던 마지막 무인마저 허공으로 내던져졌다.
콰앙!
바로 앞에 처박힌 무인의 얼굴을 확인한 그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백존자!”
무백존자는 대공자 진영에서 손에 꼽히는 고수였다.
앞서 천씨세가의 신중현에게 당한 태도난마보다도 강하다고 알려진 그였다.
그런 무백존자가 형편없이 나가떨어졌으니 경악스러울 수밖에.
“달아나게…… 어서…….”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 무백존자가 경고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저벅.
발소리가 들려왔다.
쓰러진 무인들 사이로 고고하게 걸어오는 것은 잘생긴 청년이었다.
이제 스무 살을 겨우 넘겼건만 그의 눈빛은 진중했다.
“……천신우.”
대공자가 쥐어짜 내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어서 가십시오! 소가주는 저희가 막겠습니다!”
무백존자마저 처참히 당하는 모습을 봤으면서도 대공자의 심복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랜전부터 대공자에게 충성을 바친 그들이었다.
이를 악문 모습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대공자를 지키겠다는 각오가 느껴졌다.
하지만 천신우는 그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대공자.”
천신우의 시선이 우물을 향했다.
굳이 전생의 기억을 더듬을 필요조차 없었다.
대공자의 심복들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으니까.
“알고 있겠지. 저리로 달아나 봐야 네놈을 기다리는 것은 오명뿐이다.”
대공자는 부정하지 못했다.
설령 운이 좋아 비밀통로를 통해 탈출한다고 해도 재기는 불가능했다.
평생을 치욕과 불명예 속에 숨어 지내야 하리라.
대공자에게 천신우의 목소리가 서릿발처럼 날아들었다.
“차라리 명예롭게 끝내라.”
대공자는 깨달았다.
이것이 천신우가 베푸는 마지막 자비라는 것을.
대공자의 눈동자가 결연한 표정의 심복들을 지나 천신우를 향했다.
천신우의 존재감은 너무도 강렬했다.
최후의 발악을 꿈꿀 생각조차 지워버릴 만큼.
마침내 결심을 굳힌 대공자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는 이제 겨우 중천을 향해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불과 하루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만에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허망했다.
“크크크큭.”
자조 섞인 웃음이 대공자의 비틀린 입가에서 새어 나왔다.
“대공자님!”
심복들의 외침은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대공자는 실로 오랜만에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크하하하하!”
한참을 웃어젖히는 대공자 앞에 산군과 삼 공녀가 나타났다.
이미 대공자의 저택을 완전히 장악한 그들이었다.
“그만하면 됐네.”
산군의 목소리에 대공자가 고개를 내렸다.
산군을 바라보는 대공자의 눈동자에 회한이 담겼다.
“나로는 부족했습니까?”
만일 산군이 대공자를 선택했다면 후계전쟁은 진즉 끝났을 것이다.
천신우가 개입할 여지조차 없이.
대공자는 그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산군은 냉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일세.”
대공자도 더는 묻지 않고 삼 공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축하한다, 사매. 너의 승리다.”
“……명예롭게 보내드릴게요. 누구도 사형을 비웃지 못하도록.”
삼 공녀가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였다.
그러나 대공자는 고개를 저었다.
“죽음까지 구걸하고 싶은 생각 없다.”
대공자는 부하들을 바라보았다.
훨씬 많은 수의 적들에게 둘러싸였음에도 그들은 아직도 검을 놓지 않았다.
만일 자신이 명령을 내린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적들과 사투를 벌이다 죽어갈 그들이었다.
“이자들은…….”
잠시 고심하던 대공자가 말을 이었다.
“모두 죽여라. 그래야 북해빙궁을 하나로 만들 수 있을 것이야.”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가장 소중한 가치를 깨달은 대공자였다.
대공자의 진심을 알기 때문일까.
심복들은 대공자를 원망하는 대신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대공자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켜보던 산군도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모두 끌어내라.”
* * *
마침내 고요해진 그곳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천신우는 손으로 눈송이를 매만졌다.
눈은 손에 닿기 무섭게 녹아내렸다.
어쩌면 인생도 이처럼 덧없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앞으로 달려 나가는 것이 인간이다.
아직은 멈출 수 없는 천신우였다.
“마음 아프십니까?”
천신우의 물음에 삼 공녀가 솔직한 속내를 드러냈다.
“조금…… 아니. 많이요.”
권력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졌지만, 감정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었기에.
“그렇다면 앞으로 잘하셔야 합니다. 저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북해빙궁을 이끌어나가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천신우는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쌓인 눈밭 위에 천신우의 발자국이 생겨났다.
삼 공녀는 그 발자국이 크다 깊다고 생각했다.
어릴 적 보았던 흰곰의 발자국보다도.
* * *
삼 공녀 측에서 마련해 준 거처로 돌아온 천신우는 눈이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거세진 눈발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이런 날씨라면 북해빙궁 사람들도 밖에 돌아다니기 어렵겠군.’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삼 공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아니었다.
천신우를 방문한 것은 무신의 심복 무영이었다.
일전에 무림맹 시험에 잠입해서 임무를 수행한 그는 이후로도 천신우와 무신과의 연결책 역할을 해왔다.
“오랜만이군, 소가주.”
눈으로 뒤덮인 무영의 모습을 보는 순간, 천신우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북해빙궁까지 직접 찾아왔다면 보통 일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천신우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어르신께서 이걸 전해주라고 하셨네.”
무신의 서신을 받아든 천신우의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이건 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