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
학사환생 107화
북해빙궁 원로인 산군의 일흔일곱 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도 어느덧 막바지에 이르렀다.
연회에 참석한 이들은 줄곧 산군이 천룡주를 개봉하기만을 기다렸지만.
산군은 대공자가 가져온 대왕주와 칠 공자가 가져온 월광주로만 건배했을 뿐이다.
최상의 명주라 불리는 천룡주만큼은 애지중지하며 내어놓질 않았다.
“천룡주 맛을 봤으면 했는데 아쉽네그려.”
“이번 생에선 천룡주를 보기라도 했으니 그걸로 만족하자고. 다음 생엔 마셔볼 기회가 있겠지.”
입맛을 다시는 연회 참석자들.
사실 산군의 결정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천룡주는 정말이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술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천신우는 천룡주를 선물한 보람을 제대로 느끼는 중이었다.
오늘 연회의 주인공인 산군은 천신우 곁에 계속 머물렀고.
자연스레 산군을 따르는 북해빙궁의 원로들 역시 천신우에게 접근했다.
구체적인 협상이 오간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교감을 나눈 상황.
물론 본격적인 협상은 연회가 끝난 직후 시작됐다.
산군이 곧바로 천신우와의 독대할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그야말로 파격적인 결정.
그만큼 천신우가 선물한 천룡주가 제대로 먹혔다는 의미였다.
심지어 산군은 직접 차를 내오는 성의까지 보였다.
천신우는 산군이 건네는 차를 받아들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술 다음으로 사냥을 좋아한다고 알려진 산군의 응접실답게 실내는 호랑이 가죽과 순록의 뿔로 장식되어 있었다.
“사냥을 즐기신다고 들었는데 과연 대단하시군요.”
“소가주도 관심이 있다면 한번 해보시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취미라오.”
“다른 사냥이라면 흥미가 있습니다만.”
천신우의 의미심장한 발언에 산군이 탁자 앞에 앉았다.
“좋소. 마음 편히 이야기해 보시오. 소가주가 원하는 것이 뭔지.”
“아시다시피 저는 삼 공녀와 손을 잡았습니다. 해서 산군께서 삼 공녀에게 힘을 실어주셨으면 합니다.”
이미 예상했는지 산군은 덤덤한 반응이었다.
“나는 이미 늙은 몸이오. 지금 와서 권력다툼에 끼어들어 무슨 영화를 누리겠소이까.”
완곡한 거절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천신우는 굴하지 않았다.
산군의 본심을 아는 까닭이었다.
‘산군이 지금까지 후계자들 가운데 누구도 지지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가장 세력이 강성한 대공자조차 자신의 숙원을 이뤄주기엔 부족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지.’
산군은 누구보다 북해빙궁이 강성해지길 바라는 사람이었다.
전생에서 칠 공자와 손잡은 것도 그가 북해빙궁을 발전시킬 인물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결국 북해빙궁의 미래를 보여주어야만 산군을 끌어들일 수가 있다.’
천신우는 사전에 준비해 온 이야기를 꺼냈다.
삼 공녀를 도와 앞으로 북해빙궁을 어떻게 발전시킬지.
명확한 목표와 구체적인 계획을 들어 설명했다.
기본골격은 전생에서 칠 공자가 산군을 설득시키는 데 성공한 계획.
하지만 거기에 천신우가 머리를 싸매며 고민한 흔적이 담기자 훨씬 그럴듯해졌다.
어느새 천신우의 의견을 경청하는 산군의 태도도 사뭇 진지해졌다.
중간마다 예리한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그때마다 천신우는 막힘없이 대답했고, 산군이 고개를 끄덕이는 횟수 역시 늘어났다.
마침내 수긍한 산군이 천신우에게 물었다.
“분명 괜찮은 계획이오. 하지만 어떤 계획이든 실행할 수 있을 때, 그 가치가 있는 법. 소가주도 알다시피 지금 삼 공녀에겐 이 계획을 실행시킬 힘이 없소이다.”
중도세력의 수장다운 객관적인 상황판단이다.
“동의합니다.”
천신우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산군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나는 소가주가 삼 공녀를 좀 더 변호할 거라 생각했소만.”
“저보다 산군께서 삼 공녀를 더 잘 아실 텐데, 아무리 좋게 포장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하하! 솔직해서 좋구려. 알겠소이다. 삼 공녀의 힘이 부족하다는 사실엔 우리 모두 동의했으니, 이제 그 해결책을 한번 들어봅시다.”
“해결책이랄 것까지도 없습니다. 산군께서 저와 합을 맞춰주시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산군은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천신우의 말 한마디에 실리는 무게감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엄청난 재력과 막강한 세력을 동시에 갖춘 천신우다.
산군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소가주의 위명은 익히 들었소. 그리고 낮에 벌어진 사건 역시 보고받았지.”
산군은 천신우가 대모 설상영이 보낸 살수들에게 습격당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북해빙궁 원로들의 수장답게 기민한 정보력을 갖춘 그였다.
“설상영 그 계집은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다고 하더이다. 오늘 연회에 불참한 것도 소가주가 두려워서일 거요.”
산군이 천신우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설상영 그 계집의 반응만 보더라도, 소가주에게 이번 일을 성공시킬 힘이 있다는 건 확신할 수 있소. 대공자도 그 계집을 포섭하고자 꽤 공을 들였을 정도니. 그러나 내 나이쯤 되면 매사에 지나칠 정도로 신중해지는 법. 하나만 더 물어보겠소이다.”
이어진 산군의 질문은 직설적이었다.
“삼 공녀가 북해빙궁을 장악하기 위해 쳐내야 할 사람은 대공자와 칠 공자만이 아니오. 혹시 그들이 누군지 삼 공녀로부터 들으셨소?”
사실 산군도 크게 기대하고 물어본 건 아니었다.
삼 공녀의 정보력과 판세를 보는 능력은 결코 대공자나 칠 공자 위라 보기 힘들었기에.
삼 공녀와 손잡은 천신우로선 얻을 수 있는 정보가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어진 천신우의 대답은 산군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사실 삼 공녀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후, 북해빙궁의 세력구도를 조사했습니다. 무력충돌이 불가피하다면 누굴 제거해야 할지. 어느 조직을 무력화시켜야 할지. 그 결과 열 명의 명단을 추려냈지요.”
“열 명이라 하심은?”
“산군께서도 미리 생각해두신 명단이 있을 텐데. 이건 어떻습니까?”
천신우가 제안했다.
“서로 종이에 명단을 적어서 확인해 보는 겁니다.”
산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합시다.”
산군은 시녀를 시켜 붓과 종이를 가져오게 했다.
능숙하게 먹을 갈고 글씨를 써내려가는 천신우의 모습에 감탄하는 산군이었다.
“소가주께서 문무를 겸비하신 줄은 몰랐습니다그려.”
산군 역시 호방한 필체로 써내려간 살생부를 천신우에게 건넸다.
“그럼 이제 확인해 보십시다.”
천신우의 살생부를 확인한 산군이 눈을 부릅떴다.
“허어!”
산군은 온몸이 발가벗겨진 기분마저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천신우의 살생부는 산군이 생각한 명단과 정확히 일치했던 것이다.
‘지금껏 살생부에 대해 단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이 없거늘. 어찌 소가주가 적어낸 살생부가 내 생각과 일치한단 말인가?’
지금까지 어떤 후계자도 지지하지 않은 산군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아예 손을 놓고 있던 건 아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치밀하게 북해빙궁의 정세를 분석했다.
그 결과물 중의 하나가 바로 방금 작성한 살생부.
‘북해빙궁에서 평생을 살아왔기에 핵심을 짚어낼 수 있었다. 삼 공녀는 물론 대공자나 칠 공자 역시도 이렇게까지는 생각 못 할 것이다. 그런데 외부인인 소가주가 저런 통찰력을 보여주다니.’
물론 산군으로선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천신우가 전생에서 칠 공자와 손잡은 산군이 벌였던 숙청작업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당연히 천신우의 궁극적인 목적도 알지 못하기에 전율이 일면서도 두려운 산군이었다.
‘만일 소가주의 칼날이 우리 북해빙궁을 향한다면 정말이지 쉽지 않겠구나.’
동시에 아쉬운 생각도 들었다.
‘어찌하여 하늘은 북해빙궁에 저런 인재를 내려주지 않았단 말인가.’
만일 천신우가 북해빙궁에서 태어났다면…….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산군이 고개를 저었다.
‘이 나이에 주책이군.’
이제는 결정을 내릴 때였다.
산군은 촛불에 살생부를 불살랐다.
화르르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는 산군의 눈빛에도 젊은 날의 열기가 번졌다.
“좋소. 소가주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산군은 금고에서 예전부터 모아온 증거자료를 꺼내왔다.
그것은 제거 대상들의 약점이 담긴 치부책이었다.
“명분은 이거면 충분할 거요. 원로들의 의견도 내가 한데 모으도록 하지. 그 밖에 내가 도울 일이 있겠소?”
천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삼 공녀를 보호해 주십시오. 아무리 대공자와 칠 공자에게 충성을 맹세한 이들이라도 산군이 나서신다면 쉽사리 삼 공녀를 해하지 못할 겁니다.”
“알겠소.”
북해빙궁은 여러 일족이 뭉쳐 만들어진 거대세력.
세월이 흐른 지금은 어떤 식으로든 핏줄이 이어져 있었다.
일족의 존장 급인 산군을 무시하고 움직일 만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마교나 도천의 고수들이라면 모를까.’
다행히 마교는 북해빙궁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생각이 없었다.
‘도제도 정치적 부담감 때문에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고수들 위주로 북해빙궁에 파견한 상황. 산군까지 나선다면 쉽사리 삼 공녀를 제거하진 못할 것이다.’
물론 삼 공녀의 신병확보는 시작에 불과하다.
‘지금부터는 속도전이다.’
살생부에 오른 이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대공자와 칠 공자가 대처하지 못하도록.
‘물론 결국은 대공자와 칠 공자가 손잡는 구도로 흘러갈 것이다. 이번 싸움의 결과는 거기서 정해지겠지.’
이미 이후의 상황까지도 머릿속에 계산해둔 천신우였다.
그때, 산군이 물었다.
“언제 시작할 생각이오?”
천신우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지요. 지금 당장 시작하겠습니다.”
* * *
어둠에 뒤덮인 산군의 저택.
차가운 밤바람이 불어오는 가운데, 수많은 횃불로 환하게 밝혀진 연병장엔 중무장한 고수들이 결집해 있었다.
산군을 따르는 고수들이었다.
대열을 맞춰 도열한 그들은 강렬한 존재감을 표출하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모이는 단상 위엔 오랜만에 무복을 갖춰 입은 산군이 서 있었다.
산군을 바라보는 고수들의 눈빛은 존경심으로 가득했다.
북해빙궁을 위해 평생을 힘쓴 산군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존경의 대상이었다.
산군 또한 집결한 고수들을 차례차례 돌아보았다.
여든이 가까워진 나이에도 산군의 눈빛은 호랑이처럼 강렬했다.
“늦은 밤에 모이느라 고생들 하셨네.”
밤바람을 따라 산군의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이 늙은이가 다시 검을 잡은 이유는 북해빙궁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자들을 처단하기 위함이네.”
무거운 침묵이 연병장을 짓누르는 듯했다.
권력을 멋대로 휘두르고 월권행위를 일삼는 이들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북해빙궁 역시 마찬가지.
대모 설상영을 비롯해 여러 실력자는 오직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몰두했다.
당연히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북해빙궁 고수들은 그런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지금껏 참은 것은 그들을 이끌어주는 구심점이 없었기 때문.
그런데 지금껏 무수한 요청에도 침묵하던 산군이 드디어 나선 것이다.
“나와 함께하겠는가?”
연병장에 집결한 고수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명을 내려주십시오!”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 산군이 단상을 내려왔다.
북해빙궁 고수들이 썰물처럼 옆으로 비켜나며 예를 취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길을 지나 문에 다다른 산군.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바로 천신우였다.
천신우와 산군은 세월을 뛰어넘은 눈빛을 주고받았다.
“가시지요.”
산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소가주와 나는 죽어도 함께 죽고, 살아도 함께 살아남을 것이오.”
천신우와 산군이 함께 문을 넘었다.
그 뒤를 천씨세가의 고수들과 산군 휘하의 고수들이 뒤따랐다.
백여 개가 넘는 횃불이 동시에 일렁이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렇게 산군의 저택에서 시작된 불빛은 삽시간에 북해빙궁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 * *
북해빙궁 대모 설상영의 저택.
“대공자는! 대공자는 아직 연락이 없는가!”
발작에 가까운 목소리로 묻는 것은 바로 이곳 저택의 주인 설상영이었다.
불혹의 나이에도 항상 곱게 치장하던 그녀였지만 오늘만큼은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산발한 머리. 번진 눈 화장.
지금 상황이 얼마나 다급한지 알려주는 광경이었다.
“송구하오나 전혀 연락이 닿지 않고 있습니다.”
“도대체 여태 뭐 하고 있단 말이냐! 안 되겠다. 내가 직접 대공자를 찾아가야겠다!”
거처를 나서려는 설상영을 심복이 만류했다.
“위험합니다! 지금 북해빙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럼 이대로 앉아서 당하란 말이냐? 이곳이라고 언제까지 안전하리란 보장은…….”
설상영이 말끝을 흐렸다.
정문 쪽에서 비명이 들려왔던 것이다.
“설마 벌써 이곳까지……!”
침소 밖으로 나온 설상영의 눈앞에 수십 개의 횃불이 보였다.
북해의 밤하늘 아래 일렁거리는 불빛들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물론 그녀는 감탄을 내뱉을 처지가 아니었다.
횃불들 사이에서 남자 하나가 걸어 나온 까닭이다.
당연하게도 그는 천신우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천씨세가의 천신우라고 합니다. 대모 설상영 되시지요?”
설상영은 정말이지 천신우를 죽이라고 명령한 스스로를 저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기둥을 붙잡아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지탱한 그녀가 떨리는 눈으로 천신우를 바라보았다.
깊게 가라앉은 눈빛은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삼 공녀와 산군의 명을 받아 당신을 압송하겠습니다. 저항은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웃기는 소리! 감히 네놈 따위가 나를……!”
악을 쓰듯 외치던 설상영은 말을 잇지 못했다.
검을 뽑으려던 팔이 통째로 잘려 나갔다.
촤아악!
피 분수를 쏟아내며 떨어진 팔을 내려다보는 천신우의 눈빛은 냉정하기만 했다.
“이건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의 보답입니다. 이자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순식간에 설상영을 제압해 무릎 꿇린 천신우가 나직이 덧붙였다.
“원금은 날이 밝는 대로 받도록 하지요.”
공포에 사로잡힌 설상영은 감히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북해빙궁에서 천신우의 본격적인 행보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