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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환생-106화 (106/171)

# 106

학사환생 106화

“어, 어떻게…….”

한령은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한음빙정 안에서 오랜 시간을 머무른 천신우다.

지금쯤이면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을 테니 몸놀림이 굼떠져야 마땅했다.

하지만 눈앞의 천신우에게선 그런 기미가 전혀 엿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천신우가 뿜어내는 기세는 한령이 모시는 대모 설상영을 넘어설 정도였다.

설상영은 북해빙궁 내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실력자인데도 말이다.

‘이 정도면 어쩌면 궁주님과도…….’

거기까지 생각하던 한령이 머리를 흔들었다.

새파란 신진고수를 감히 북해빙궁의 궁주와 비교하다니.

참으로 불손한 생각이었다.

그런 한령을 바라보며 천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할 생각이 없나 보군.”

철컥-!

그 즉시 들려온 금속성에 한령은 곧바로 반응했다.

뽑혀 나온 한령의 검이 천신우의 검이 날아들 경로를 예측해 휘둘러졌다.

솨아앙!

누가 봐도 완벽한 대처.

하지만 정작 한령의 표정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뭐지? 이 불길함은?’

불길함의 정체는 곧 밝혀졌다.

주르륵.

한령의 목에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미 천신우의 검에 목이 베인 것이다.

‘대체 어느 틈에?’

뒤늦게 진실을 깨달은 한령이었다.

철컥- 하는 금속성은 검이 뽑혀 나오는 소리가 아니었다는 것을.

이미 한령의 목을 베고 다시 칼집으로 들어가는 소리였다.

천신우와 한령의 압도적인 수준 차를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툭.

이윽고 몸통과 분리된 한령의 머리통이 얼음 바닥 위로 떨어졌다.

죽어서도 감지 못한 한령의 두 눈엔 경악만이 가득했다.

“이놈이 마지막인가.”

천신우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한령과 그를 따르던 북해빙궁의 고수들이 모두 싸늘한 주검이 되어 얼음 위에 너부러져 있었다.

새하얀 복면이 붉게 물들고 얼음 위로 피가 흘렀다.

끔찍한 광경이었지만 지금의 천신우에겐 익숙했다.

‘대모 설상영의 수족들. 아마도 대공자의 사주가 있었겠지.’

전생에서도 대모 설상영은 대공자와 손잡았었기에.

‘마음 같아선 당장 설상영을 응징해 주고 싶지만 자제해야겠지.’

이곳은 북해빙궁.

아무리 천신우라도 경거망동은 곤란했다.

‘만상서고의 단서도 이미 얻었으니 이제 중도세력의 수장인 산군을 끌어들여야겠군.’

한음빙정을 나서는 천신우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냉정했다.

* * *

중년의 여인이 거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요염한 몸매를 간직한 그녀는 바로 북해빙궁 대모 설상영이었다.

한음빙정의 관리자이자 북해빙궁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

그러나 설상영은 지금의 위치에 만족하지 못했다.

끊임없이 젊음을 갈구했고 사내들을 발밑에 무릎 꿇리고 싶어 했다.

대공자와 손을 잡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한음빙정 안에서라면 아무리 날고 기는 천씨세가 소가주라도 충분히 암살 가능하다는 계산.

하지만 그 믿음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한음빙정을 찾아간 심복에 의해 깨졌다.

“대모님…….”

거울에 비치는 심복의 표정이 어두웠다.

설상영은 일이 틀어졌음을 직감했다.

“실패했느냐?”

무겁게 고개를 숙이는 심복.

설상영이 붉게 칠한 손톱을 다듬으며 물었다.

“누가 훼방을 놓은 게지?”

설상영은 누군가 천신우 암살을 저지했다고 판단했다.

한음빙정 내부는 극한의 냉기로 가득한 공간.

그런 곳에서 천신우 혼자 암살자들을 상대로 살아남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기에.

그런 의미에서 심복의 보고는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한음빙정 내에 조력자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천씨세가 소가주 혼자 살수들을 상대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럴 리가 없잖느냐! 내가 직접 확인해 봐야겠다.”

호통을 치는 설상영의 몸에서 섬뜩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직접 한음빙정을 찾은 설상영 앞에 펼쳐진 광경은 너무도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이게 도대체…….”

그녀가 보낸 살수들이 모조리 피를 흘린 채로 얼어붙어 있었다.

바닥을 기어가는 자세로 얼어붙었는가 하면, 대자로 누운 채로 얼어붙은 이들도 있었다.

사인은 하나.

검에 의한 죽음이었다.

천신우는 단 한 번의 공격만으로 그들을 쓰러뜨린 것이다.

‘분명히 한음빙정에 오랜 시간 머물렀을 텐데.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한음빙정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설상영이었다.

그녀의 판단에 따르면 눈앞의 상황은 결코 일어나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명백한 현실이기도 했다.

‘설마 알려진 것보다 소가주가 훨씬 강력한 고수란 말인가?’

그것 말고는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그 순간.

주르륵.

설상영의 이마를 따라 흘러내리던 식은땀이 바로 얼어붙었다.

설상영은 펼친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주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내가 두려워하고 있다고?’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설상영은 대공자와 손잡은 결정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소가주는? 지금 어디에 있지?”

* * *

그날 저녁.

천신우는 북해빙궁 원로들의 수장 산군의 저택으로 들어섰다.

차기 궁주 자리를 두고 피 튀기는 전쟁이 펼쳐지는 시기다.

자연히 연회나 친목 모임도 뜸한 상황.

그러나 오늘만큼은 산군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북해빙궁의 실력자들이 한데 모였다.

물론 만에 하나 무력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기에 산군이 직접 나서 수행원의 숫자를 제한했다.

천신우 역시 최소한의 호위만을 대동했다.

귀를 내놓고 이마만을 가린 모자를 착용한 삼 공녀가 천신우 옆에 나란히 섰다.

“긴장되시나요?”

삼 공녀의 물음에 천신우가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저는 조금 긴장되네요.”

삼 공녀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얼마 만에 웃는 건지.

후계경쟁이 본격화된 이후 미소 지을 여유조차 없었던 그녀였다.

물론 웃는다고 걱정마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과연 산군을 끌어들일 수 있을까?’

천씨세가의 힘을 빌려 간신히 한숨 돌린 상황.

하지만 이미 기울어진 판세를 뒤덮으려면 산군의 도움이 필수였다.

물론 쉽지 않다.

게다가 만일 산군이 대공자나 칠 공자 편을 들어주기라도 한다면?

그땐 그야말로 끝장이었다.

그렇기에 저택 안으로 들어서는 삼 공녀의 표정은 긴장으로 가득했다.

“오셨군요. 어르신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산군 휘하 무인들이 천신우와 삼 공녀를 연회장으로 안내했다.

이미 연회장에선 연회가 한창이었다.

애주가로 알려진 산군의 연회답게 연회장에 들어서기 전부터 향긋한 주향이 감돌았다.

“하하하! 어서 오시오!”

백호 가죽으로 만든 옷을 걸친 노인이 출렁이는 술잔을 들어 보였다.

그가 바로 산군.

오늘 연회의 주인공이자 북해빙궁 원로들을 이끄는 수장이었다.

“삼 공녀도 오셨으니 새로 술을 가져와라!”

산군의 외침에 아름다운 시녀들이 쟁반에 술을 가지고 차례로 나타났다.

“이것은 초설이라는 술이외다. 북해에 내리는 첫눈을 모아 만든 술이지요.”

천신우에게도 시녀가 다가와 술을 따라주었다.

“부족한 늙은이를 위해 모여 주셔서 감사하오. 오늘만큼은 마음껏 먹고 마십시다!”

산군의 건배사와 함께 모두가 술잔을 들었다.

천신우 역시 술잔을 비웠다.

초설이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아주 산뜻한 맛이었다.

물론 초설은 시작에 불과했다.

진귀한 술들이 차례로 등장하며 참석자들의 환호성을 자아냈다.

그렇게 연회에 참석한 이들의 얼굴이 불콰하게 물들어갈 무렵.

대공자가 앞으로 나섰다.

차기 궁주에 가장 가까운 그에게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했다.

“산군의 일흔일곱 번째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소생이 약소한 선물이나마 준비했습니다.”

대공자의 심복이 비단에 둘러싸인 술병을 가져왔다.

산군이 눈을 빛냈다.

“호오. 이건 남해의 대왕주로군.”

수백 년을 넘게 살아온 대왕거북으로 담그는 대왕주는 아주 진귀한 술로 알려져 있었다.

대공자는 산군의 환심을 사고자 심복을 시켜 대왕주를 직접 공수한 것이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물론이외다.”

산군이 기분 좋게 웃으며 대왕주를 술잔을 채웠다.

“자아! 모두 대공자의 대왕주로 건배합시다!”

술잔을 들어 올리는 대공자의 만면에 미소가 떠올랐다.

사실 대공자는 굳이 무리해서 산군을 포섭할 이유가 없었다.

지금 이대로 현상유지만 되더라도 대권이 유력한 그였다.

그런데도 대왕주를 선물한 것은 삼 공녀와 칠 공자를 견제하기 위함이다.

대공자의 의도를 알기에 천신우 옆에 서 있던 삼 공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대사형이 대왕주를 준비했을 줄은 미처 몰랐네요.”

삼 공녀의 표정이 어두웠다.

대공자가 준비한 대왕주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대공자의 동향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는 무력감이 컸다.

반면 천신우의 표정엔 여유가 넘쳤다.

“칠 공자 역시 좋은 술을 준비한 모양이군요.”

대공자의 대왕주를 보고도 칠 공자는 전혀 위축된 모습이 아니었다.

대왕주 이상의 선물을 준비했다는 의미.

과연 산군에게 다가가는 칠 공자의 얼굴엔 자신감이 넘쳤다.

“대사형만큼은 아니지만 저도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칠 공자가 건넨 술을 확인한 산군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이건……!”

애주가인 산군으로 하여금 말을 잇지 못하게 만든 술의 정체는 바로 월광주였다.

술잔을 반쯤 채운 다음 기울이면 달빛이 비친다는 월광주는 애주가들도 구하기 힘든 술이었다.

등급을 매긴다면 대왕주보다 한 단계 높은 월광주였다.

“월광주를 구하다니. 사제 수완이 만만찮군.”

심기가 불편한 대공자였다.

설마 칠 공자가 월광주를 구해올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기에.

“운이 좋았습니다.”

당연히 운이 아니었다.

도제와 연결시켜 준 인물을 통해 월광주를 건네받은 칠 공자였다.

사실 그는 마교의 고수였지만 칠 공자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오직 천신우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교에서 구해준 모양이군.’

물론 내막을 전혀 모르는 삼 공녀는 체념한 얼굴이었다.

그녀가 준비한 술은 월광주는 물론이거니와 대왕주에도 미치지 못했기에.

그러나 준비한 선물을 숨길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모두의 이목이 삼 공녀를 향하고 있었다.

“이쯤 되니 삼 공녀는 어떤 술을 준비했을지 궁금해지는군.”

“설마 월광주보다 좋은 술이겠어?”

“하긴 월광주가 얼마나 귀한 술인데.”

연회 참석자들은 웅성거리면서 삼 공녀가 준비한 술을 내오길 기다렸다.

삼 공녀가 준비한 술이 뭔지 아는 측근들만이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삼 공녀가 나직한 한숨과 함께 준비한 술을 산군에게 건네려던 그때.

천신우가 삼 공녀를 잡아 세웠다.

“여기부턴 제게 맡겨주십시오.”

삼 공녀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천신우를 바라보았다.

싱긋 웃어 보인 천신우가 준비한 천룡주를 들고 산군에게 다가갔다.

천신우에 대한 소문은 이미 북해빙궁에 퍼진 후였다.

산군 역시 천신우를 알아보았다.

“천씨세가의 천신우라고 합니다.”

“소가주. 소문은 익히 들었소. 멀리서 찾아왔는데 대접이 변변치 못해 미안하구려.”

“아닙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왔는데 반겨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지요.”

천신우는 비단에 둘러싸인 천룡주를 산군에게 건넸다.

“삼 공녀의 부탁으로 준비한 선물입니다. 분명 마음에 드실 겁니다.”

산군의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

이미 천신우도 대왕주와 월광주를 목격했을 터다.

그런데도 자신감을 내비치니 산군으로서도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열어봐도 되겠소?”

“물론입니다.”

기대감 어린 손길로 비단을 끌러내던 산군이 우뚝 멈춰 섰다.

“……!”

직접 본 적은 없다. 그저 들었을 뿐이다.

최상의 명주에 관해 전해지는 전설을.

산군은 귀신에 홀린 것처럼 중얼거렸다.

“용과 구름이 조각된 병에 담긴 그 술은 가히 천상의 맛이라 할 만하다…….”

천신우를 바라보는 산군의 눈동자에 격정이 담겼다.

“내 죽기 전에 천룡주를 맛볼 날이 오게 될 줄은 몰랐구려! 고맙소이다! 소가주!”

산군의 외침에 주위가 술렁였다.

“천룡주?”

“정말 그 천룡주란 말인가!”

천신우가 예상한 그대로의 반응이었다.

대공자와 칠 공자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졌고, 삼 공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놀라움을 드러냈으며.

산군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귀한 선물을 받고 답례하지 않는다면 세상 모두가 이 늙은이를 비웃을 터. 무엇이든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해 보시오.”

“차 한 잔 마실 시간을 내어주신다면 그걸로 족합니다.”

천신우가 내뱉은 말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천신우는 줄곧 중립을 지키던 산군에게 협상을 제안한 것이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산군이었다.

“차 한 잔이 대수겠소?”

그 말에 대공자와 칠 공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지난 수년간 그리 공을 들여도 협상의 자리로 끌어내지 못했건만, 천신우는 처음 만난 자리에서 산군과의 회담을 성사시킨 것이다.

삼 공녀가 감격한 얼굴로 천신우를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당신은…….”

“기뻐하긴 이릅니다. 이제 시작일 뿐이니까요.”

산군과의 회담을 성사시켰으니 다음은 협력을 끌어낼 때.

당연히 그 계획 또한 이미 머릿속에 있는 천신우였다.

‘앞으로 사흘. 그 안에 북해빙궁을 접수한다.’

천신우의 눈이 강렬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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