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
학사환생 105화
천신우가 비밀공간 안으로 들어서자 얼음벽이 닫혔다.
쿵-!
완전히 밀폐된 그곳에서 천신우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럴 수가…….”
한음빙정이 불투명한 얼음으로 뒤덮여 내부를 전혀 들여다볼 수 없었다면, 비밀공간을 채운 얼음들은 불순물 하나 없이 투명했다.
드넓은 공간 한복판에 얼음으로 만들어진 조각이 보였다.
그 위로 눈부신 얼음 파편으로 뒤덮인 결정체가 놓여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사방으로 뻗어 나가려는 기운을 억지로 붙잡아놓은 것처럼 역동적이었다.
천신우는 직감했다.
‘만상서고의 단서가 남겨진 곳마다 놓여 있었던 구슬이군.’
겉모습이 다를 뿐.
결국 알맹이는 같았다.
천신우는 얼어붙은 구슬을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 손짓에 반응하듯 얼음 파편이 천신우에게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와 같았다.
단서를 찾아내면 보상이 주어지고 두루마리가 갱신되는 방식.
차이점이 있다면 천신우조차도 내용물이 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일전에 얻었던 승천단이나 폭풍비의 경우는 이름이라도 적혀 있었다.
‘대체 이게 뭐지?’
그 정체를 가늠할 새도 없이, 구슬에서 돋아난 얼음이 천신우의 손가락을 거슬러 오르기 시작했다.
쩌저저적!
손쓸 새도 없이 순식간에 얼음에 뒤덮여 버린 천신우였다.
내공을 끌어올려 봤지만 소용없었다.
전력으로 내공을 끌어올렸음에도 얼음조각은 녹지도, 깨어지지도 않았다.
문자 그대로 얼음조각이 되어버린 천신우.
하지만 좌절하긴 일렀다.
‘이 또한 만상서고의 단서를 남긴 존재의 안배라면…….’
천신우는 오히려 내공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구슬의 힘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천신우를 뒤덮었던 얼음이 서서히 녹으면서 온몸에 스며들기 시작한 것.
“……!”
불쾌한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온몸을 안정시키듯 편안한 느낌.
천신우는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기운을 거부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만상서고의 단서들은 모두 자신이 강해지게 도와주었다.
그렇다면 이 정체불명의 기운 역시 해가 되진 않을 터.
천신우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구슬의 기운을 흡수할수록 새로운 변화를 감지한 천신우였다.
마침내 구슬이 완전히 흡수되어 사라지자 변화는 명확해졌다.
‘냉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
북해빙궁의 추위도 엄청나지만 한음빙정 안의 한기에 비할 바는 아니다.
정말이지 온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은 한기가 휘몰아치는 이곳이었다.
지금도 그 한기는 사라진 게 아니었다.
하지만 천신우는 한기를 느끼지 못했다.
새롭게 흡수한 기운이 냉기를 막아주고 있는 것.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공도 늘어났군.’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의 유의미한 변화였다.
솟구치는 힘을 당장에라도 확인해 보고 싶을 정도.
‘구슬 그 자체로 영약이었던 건가.’
전에 얻은 승천단도 충격이었지만 이건 그 이상이었다.
이런 영약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도 못한 천신우였다.
내공만 올려주는 게 아니라 한기로부터 몸을 보호해 준다니?
자연스레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누구지? 이런 안배를 해둔 존재는?’
솔직히 누군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어느 시대이든 무신과 도제를 뛰어넘는 거물일 거라 짐작할 뿐.
‘이 끝에 도달하면 알 수 있겠지.’
천신우는 새롭게 바뀐 두루마리의 내용을 확인했다.
만상서고의 다섯 번째 단서가 있는 장소.
그곳은 천신우도 익히 알고 있는 곳이었다.
‘망향곡…….’
천신우는 침음을 삼켰다.
절명곡이 마교의 사전작업이 시작된 곳이라면.
망향곡은 마교가 실체를 드러낸 곳이었다.
사실 마교의 본격적인 준동은 망향곡 참사 이후다.
그런데도 망향곡 참사는 그 어떤 사건보다 사람들의 뇌리에 강렬하게 각인됐다.
그만큼 희생자가 많았고 희생자들의 면면도 대단했기 때문.
당시 사건의 전말이 전해지고 나서도 많은 사람이 믿지 못했을 정도였다.
천신우는 당시의 상황을 똑똑히 기억했다.
‘망향곡 참사는 망향곡에서 거대한 유적이 발견되면서 시작됐지.’
지금은 알려지지 않은 사실.
망향곡엔 거대한 유적이 숨겨져 있다.
어느 시대에 누가 세웠는지 모를 거대한 유적의 발견은 당시 무림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이후 만상서고가 발견됐을 때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무인이 망향곡으로 모여들었다.
그렇게 모인 그들이 유적에서 발견된 보물들을 두고 충돌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작은 무력충돌로 시작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무인들의 탐욕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마교의 배후공작이 결정타였다.
마교의 농간에 놀아난 무인들은 서로 죽이고 죽였다.
망향곡에 만들어진 시체의 산과 피의 바다는 절명곡 사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사실 천신우는 학사 시절 두 사건을 서류상으로 접했을 뿐이다.
접했음에도 어느 쪽이 충격이 심했는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사실 피해의 경중을 따지는 건 의미가 없다.’
천신우는 각오를 다잡았다.
‘망향곡 참사 역시 무림맹 연쇄 살인 사건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막아야 한다. 물론 망향곡에 대한 정보를 마교에서 퍼뜨린 것이니만큼 원천봉쇄할 수는 없겠지. 어떻게든 피해를 최소화하는 수밖에.’
그전에 망향곡을 찾아가 만상서고의 다섯 번째 단서를 확보하는 것도 필수였다.
‘물론 당장은 북해빙궁의 일부터 처리해야겠지.’
생각을 정리한 천신우가 비밀공간 입구 앞에 섰다.
벌어진 틈으로 비밀공간을 빠져나오자 다시 얼음벽이 닫혔다.
쿠웅-!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다시 얼음벽 앞에 서봤지만 아까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런 반응도 없이 제자리를 지키는 얼음벽이었다.
이유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만상서고의 다섯 번째 단서를 찾았으니 효용이 다한 거겠지. 그나저나 시간도 남았으니 여기서 수련이라도 하고 가야겠군.’
이곳 한음빙정에선 외부보다 내공 증진이 빠르게 이뤄진다.
‘당연히 여느 영약들이 그렇듯 한계치야 있겠지만 나는 오늘이 초행.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평소엔 외부인의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는 한음빙정이다.
오늘이 아니면 언제 다시 드나들 수 있을지 몰랐다.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한 천신우는 수련에 적당한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북해빙궁 궁주들과 그 제자들이 사용하던 곳이라 그런지, 여기저기 수련의 흔적이 눈에 띄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또 다른 얼음벽에 새겨진 흔적이었다.
남겨진 흔적은 저마다 제각각이었다.
도를 내려친 흔적도 있었고, 주먹으로 강타한 흔적도 있었다.
그뿐 아니라 무공도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궁주가 되면 전대 궁주로부터 북해빙궁 비전의 무공을 전수받는다지만 제자들은 그렇지 않으니까.’
흔적을 남긴 방법은 달랐지만, 목적은 동일했다.
‘이곳에서 무공을 시험해 본 거겠지.’
두근두근.
얼음벽에 남겨진 흔적들을 바라보는 천신우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이곳에 흔적을 남긴 이들은 역대 북해빙궁의 고수들.
이미 죽은 고수들과 무공을 겨루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곳에서만큼은 간접적으로나마 가능했다.
‘허락도 받았으니까.’
천신우가 한음빙정 출입 명목으로 내세운 것은 수련이었다.
만상서고의 네 번째 단서에 관한 사실은 절대 밝힐 수 없었기에, 적당한 구실을 둘러댄 것이다.
그 덕에 천신우는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이곳에서 궁주의 제자들과 똑같은 조건으로 수련할 수 있었다.
천신우가 내공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웅-!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발밑에서 시작된 진동이 사방으로 전달되며 돌풍을 일으켰다.
‘확실히 달라.’
천신우는 느낄 수 있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과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온몸에 넘쳐나는 힘을.
‘해보자.’
스르릉-!
칼집을 빠져나오는 자운검의 움직임도 어느 때보다 경쾌했다.
마침내 얼음벽을 향해 천신우의 검이 사선으로 휘둘러졌다.
‘통하는군.’
천신우는 내심 탄성을 내질렀다.
자운검이 얼음벽을 파고드는 느낌이 손에 강렬히 전해졌기 때문.
그러나 그 직후 벌어진 상황은 천신우조차 예상 못 한 것이었다.
솨아아아악!
반으로 갈라진 얼음벽이 사선으로 기울어졌다.
워낙 거대한 얼음벽이라 완전히 박살 나진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이미 북해빙궁의 역대 고수들이 남긴 족적을 뛰어넘는 위력을 선보인 셈이다.
쿵쿵!
심장 박동이 더욱 빨라지고 피가 들끓었다.
강해진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다는 것.
그 어떤 것보다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천신우는 이내 흥분을 가라앉히며 돌아섰다.
‘이걸로 만족해선 곤란하다.’
냉정히 생각해 보면 이 얼음벽에 남겨진 흔적이 북해빙궁 역대 고수들의 모든 것이라 할 수는 없었다.
다른 곳에 또 다른 흔적을 남겼을 수도 있고, 어쩌면 일정 경지에 오른 이후론 이곳에 출입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걸 알기에 얼음벽을 등진 천신우의 눈빛은 열망으로 가득했다.
‘더 강해지고 싶다.’
천신우를 더 높은 경지로 이끌어줄 강렬한 바람이었다.
* * *
한음빙정 앞에 북해빙궁의 고수들이 서 있었다.
북해빙궁은 그들이 태어난 이래 줄곧 살아온 삶의 터전.
그러나 지금 그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새하얀 복면을 착용하고 있었다.
지금 하는 일이 떳떳하지 못하다는 증거였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책임자인 한령은 목소리를 낮췄다.
“오늘 우리가 이곳에 출입했다는 사실은 절대 알려져선 안 된다. 설령 임무에 실패하더라도 말이다.”
임무 실패.
그건 곧 죽음이다.
그 사실을 강조한 건 시체조차 남기지 않아야 한다는 뜻.
“알고 있습니다.”
북해빙궁의 고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이곳 한음빙정을 관리하는 대모 설상영의 수족들.
설상영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수 있는 그들이었다.
“모두 빙속단을 복용해라.”
빙속단은 한음빙정의 냉기에 대응할 수 있게 해주는 비약이었다.
물론 한계는 명확하다.
빙속단이 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제한시간 이내.
제한시간이 지나면 복용한 무인의 체온은 급속도로 떨어진다.
그 상태로 한음빙정의 냉기에 노출된다면?
그야말로 끝장이었다.
그렇기에 지시를 내리는 한령의 목소리는 엄숙했다.
“최대한 빨리 일을 마쳐야 한다.”
각오로 가득한 북해빙궁 고수들의 눈빛을 확인한 한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돌입한다.”
한령이 한음빙정의 출입문을 열었다.
혹한의 냉기가 온몸을 덮쳐오기 시작했다.
“우웃!”
빙속단을 복용하고 두꺼운 털옷을 겹쳐 입었음에도 냉기는 피부를 파고들었다.
한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한음빙정의 냉기는 언제 봐도 가공할 위력이군. 이런 곳에서 오랜 시간 머물렀으니 아무리 천씨세가 소가주라도 지금쯤이면 몸이 얼어붙고 있겠지.’
사실 개인적인 욕심으론 천신우가 최상의 상태일 때 맞붙고 싶었다.
북해빙궁 소속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그였기에.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대모 설상영이 직접 내린 명령이다.
거부권 따윈 없었다.
‘최대한 빠르고 확실하게 해치운다.’
지금으로선 그것만 생각할 뿐.
* * *
한음빙정 내부.
갈림길에 당도한 북해빙궁 고수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한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 맡은 구역을 수색해라! 표적을 발견하는 즉시 보고하도록!”
한음빙정은 네 개의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리고 지금 한령의 손엔 각각의 구조를 나타낸 지도가 들려 있었다.
‘네놈이 어디에 있든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3구역으로 향했던 고수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급히 3구역으로 향한 한령은 보고 말았다.
얼음벽에 남겨진 엄청난 흔적을…….
관리 차원에서 한음빙정에 여러 차례 드나들었던 한령이었다.
그렇기에 눈앞의 얼음벽에 남겨진 흔적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북해빙궁 역대 고수들이 남긴 흔적이었다.
그중엔 손톱자국처럼 미세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시할 수는 없었다.
지금 한음빙정에 돌입한 고수들 가운데 누구도 이 얼음벽에 생채기 하나 만들 수 없었으니까.
그런 얼음벽에 사선으로 그어진 흔적이 남아 있었다.
검에 의해 만들어진 그 흔적은 너무도 선명했다.
‘이런 흔적이 있었다면 전에 알아보지 못했을 리가 없거늘.’
순간 불길한 상상이 한령의 뇌리에 떠올랐다.
“설마…….”
그러나 이내 고개를 흔드는 한령이었다.
그럴 리가 없잖은가.
천신우의 명성이 대단하긴 하다.
하지만 그 소문이 다 진실이라 하더라도 이런 흔적을 남길 정도의 고수는 결코 아니었다.
“이건 나중에라도 대모님께 반드시 보고 드려야겠군. 그보다 놈은 아직 찾지 못했느냐?”
지금쯤이면 다른 구역을 수색하는 북해빙궁 고수들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보고가 들어왔어야 했다.
찾았든 찾지 못했든 수색이 끝났을 시간이다.
하지만 보고는커녕 바로 옆에 있는 부하들의 대답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스산한 한기가 휘몰아쳤다.
온몸을 덮쳐오는 으스스한 기운에 한령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곳엔 그가 서 있었다.
천씨세가 소가주이자 뇌전검으로 불리는 당대 최고의 후기지수.
그러나 그가 뿜어내는 기운은 알려진 것 이상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압도당한 한령의 귓가에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누가 너희를 이곳으로 보냈지?”
한령 앞에 서 있는 천신우의 옷은 깨끗했다.
순백의 눈처럼.
하지만 한령은 알 수 있었다.
천신우가 이곳까지 오는 동안 수많은 피를 보았음을.
그리고 그 피는 모두 북해빙궁 고수들의 것이란 사실을.
이 순간, 한령의 이빨이 딱딱 부딪치는 것은 한음빙정의 냉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대답해라.”
천신우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한령에겐 천신우의 목소리가 지상명령처럼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