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
학사환생 101화
결승전 당일 저녁.
비무대회를 마무리하는 연회가 철혈성에서 열렸다.
우승자인 검성을 축하하고 비무대회 참가자들을 격려하는 자리였다.
결승전에서 짜릿한 도박을 성공한 제갈휘와 모용비는 모처럼의 술자리를 만끽했다.
“하하하! 오늘은 맘껏 취해봄세!”
특히 제갈휘는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연거푸 들이켜는 모습이 보였다.
천신우는 픽 하고 웃었다.
‘제갈휘 형님의 저런 모습은 처음이군.’
정작 천신우는 연회를 즐길 겨를이 없었다.
눈웃음을 지으며 접근해 오는 여인들을 상대하는 거야 이제 연례행사라 치더라도.
만금소와 도제가 손을 잡은 것이 확실시되는 지금. 철저히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에 일찌감치 연회장을 떠나 거처로 돌아온 천신우다.
팔짱을 끼고 무림 지도를 바라보는 천신우의 눈이 어느 때보다 빛났다.
“만금소 입장에선 해상교역로부터 탈환하고 싶겠지.”
해상교역로의 중심인 백산도 일대는 고검장주인 고진성이 관리하고 있는 상황이다.
성공적으로 수적들을 몰아내고 천씨세가의 영역을 공고히 확립했지만 아직 안심하긴 일렀다.
“백산도에 추가인원을 보내도록. 금와전장의 반격이 시작될지도 모른다고 일러두고.”
이번 비무대회를 통해 많은 고수를 영입한 천신우였다.
그들 중에 일부를 백산도 방어에 투입한다면 적들도 쉽게 함락시키진 못할 터였다.
“그리고 흑백쌍선의 움직임이 심상찮다고 했던가?”
흑백쌍선은 도제의 측근이자 월풍의 후견인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천신우에게 앙갚음하려는 월풍을 돕기 위해 팔을 걷어붙인 상황.
“아무래도 독자적으로 움직이려는 모양입니다.”
“조바심이 나겠지. 도제가 본격적으로 나선다면 월풍은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되니까.”
도제는 지금까지 손자인 월풍에게 충분한 기회를 줬다.
하지만 아무리 혈육이라도 언제까지 기회를 주진 않을 것이다.
아들마저도 무능하다는 이유로 내쳤던 도제가 아니던가.
월풍의 후견인인 흑백쌍선도 그걸 알기에 결단을 내린 것이다.
늦기 전에 월풍에게 성과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소가주님의 개인 경호를 강화할까요?”
“그렇게 하도록.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
물론 이제 흑백쌍선 따위는 전혀 두렵지 않은 천신우였다.
도제와 정면으로 충돌하기 전의 준비운동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나저나 이상하게 마교가 잠잠하군.’
얼마 전에 검성과 충돌한 것으로 추정되는 마교였다.
하지만 이후로 별다른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았다.
무신도 심복을 통해 특이사항이 없음을 전해왔다.
‘하긴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 어차피 감찰각주 건을 터뜨리면 마교도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보일 테니까. 그리고…….’
천신우가 떠올린 것은 진사명의 얼굴이었다.
‘감찰각주를 잡아넣으면 진사명 그놈이 마교와 어떤 관계인지도 밝혀지겠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소가주님.”
북해빙궁과의 연락을 담당하던 무인이 천신우에게 보고했다.
“북해빙궁 삼 공녀 측의 고위인사가 만남을 요청해 왔습니다. 혼담과 관련해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무인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북해빙궁 삼 공녀와의 혼담은 천씨세가 내부에서도 기밀 중의 기밀이었다.
천신우를 제외하면 가주 천무흔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럼 만나줘야지. 방하기 대협이 동석할 거라고 알려주도록.”
얼마 전에 영입한 방하기는 북해빙궁과 연줄이 있는 고수.
그러니만큼 북해빙궁 고위인사와의 만남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터였다.
“소가주님.”
“뭐지?”
“그게, 삼 공녀 측에서 당장 오늘 밤에 만났으면 한다고…….”
스스로 판단하기에도 너무 무례한 요구라 여겨지는지 무인이 허리를 굽혔다.
“죄송합니다.”
천신우가 무인의 어깨를 두드렸다.
“단지 북해빙궁 측의 요구를 전달한 것뿐이니 자네가 미안할 필요 없네.”
잠시 생각한 끝에 고개를 끄덕이는 천신우였다.
“좋아. 대신 장소는 우리가 정하겠다고 통보하도록.”
이제 천씨세가도 충분히 성장한 지금. 상대가 누구든 일방적인 요구에 끌려다닐 생각은 없는 천신우였다.
* * *
같은 시각.
철혈성에서 한참 떨어진 무림맹에선 장발의 남자가 달빛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바로 마교 최고의 후기지수 진사명이었다.
“검성이라…….”
진사명의 중얼거림을 들은 화사는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허벅지가 트인 옷차림으로 기둥에 몸을 기댄 그녀가 툴툴거렸다.
“백린 그놈이 당하는 꼴을 보고도 한태성 같은 놈한테 일을 맡기니 그렇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한태성은 일전에 천신우에게 당한 백린보다 강한 고수였다.
심지어 화사조차 한태성이 여래천살봉을 들고 날뛰기라도 하면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 한태성을 도망치게 한 상대라니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차라리 지금이라도 나한테 맡기지그래?”
진사명은 단칼에 화사의 의견을 묵살했다.
“한태성은 제 몫을 다했다.”
한태성이 작성한 철혈성 비무대회 보고서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수준이었다.
“다만 운이 나빴을 뿐.”
한태성과 검성의 충돌은 진사명으로서도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그나마 한태성의 부상이 심각하지 않다는 정도가 위안거리였다.
물론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천신우와 권왕에 이어 검성까지. 변수가 계속해서 늘어나는군.”
검성이라는 새로운 변수를 확인한 진사명이었다.
“그러니까 말했잖아. 천신우 그놈부터 진즉 치워버렸어야 한다고.”
진사명이라고 모르겠는가.
당연히 화사의 말대로 하면 당장은 편하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면 결국 언젠가는 눈에 띄게 마련이다.
마교의 존재를 파악한 무림맹이 결집하기 시작하면 지금보다 훨씬 상황이 어려워질 터였다.
“어차피 천신우나 검성이나 무림이란 바둑판 위에선 바둑돌에 불과해. 바둑돌 하나 치우자고 잠들어 있는 용을 깨울 필요는 없겠지.”
화사가 코웃음을 쳤다.
스승의 영향을 받아 항상 무림맹을 깔보는 그녀였다.
“무림맹이 이무기라고? 뱀이나 지렁이가 아니라?”
진사명은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무림맹 맹주전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과연 무림맹주를 직접 마주하고도 계속 저런 소리를 지껄일 수 있을지.
진사명은 그것이 궁금했다.
그때 화사가 혀를 날름거렸다.
“뱀이라고 하니까 갑자기 생각난 건데. 요즘 북해빙궁의 요물 움직임이 심상찮다더라고.”
요물은 화사가 북해빙궁 삼 공녀를 일컫는 호칭.
사실 이유는 정말 대수롭지 않았다.
질투심을 느낄 정도의 미모를 가졌다는 것이 전부였다.
“하긴 그럴 만도 한가? 대공자는 물론이고, 칠 공자에게까지 밀리게 생겼으니. 그년은 꿈에도 모르겠지? 우리가 칠 공자를 밀고 있다는 사실을.”
삼 공녀가 아무리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닌들 판세를 엎기란 불가능하다.
마교에서 북해빙궁에 공들인 세월은 삼 공녀의 노력이 비할 바가 아니었다.
화사뿐만 아니라 진사명 역시 그것만큼은 동의했다.
그러나 그들은 미처 알지 못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새로운 변수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음을.
* * *
천신우는 삼 공녀 측과의 약속장소인 호수에 도착했다.
잔잔한 호수는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호수 표면에 달빛이 부서져 내리고 불어오는 바람은 상쾌했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북해빙궁 소속 무인이었다.
“배에 오르시지요.”
천신우는 작은 조각배에 선뜻 올라탔다.
사공이 노를 저어가는 와중에도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았다.
이윽고 조각배가 호수 한복판에 멈춰 섰다.
반대편 기슭에서 다른 배가 다가왔다.
천신우가 탑승한 조각배보다 화려한 배였는데 내부를 들여다보지 못하게 차단막으로 가려져 있었다.
“소가주님. 저리로 옮겨 타시면 됩니다.”
배에 오르는 천신우를 북해빙궁 소속 고수들이 맞았다.
그들은 모두 여인들이었다.
그녀들은 순백색의 면사로 절반 가까이 얼굴을 가렸음에도 미모가 도드라졌다.
“안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휘장을 걷고 안으로 들어서자 탁자에 앉아 있던 사람이 일어났다.
상대가 면사를 벗는 순간.
“……!”
천신우는 깜짝 놀랐다.
면사 속에 숨겨져 있던 얼굴은 앞서 안내하던 여인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게 아름다웠다.
지금까지 천신우가 만나본 여인 중에 오직 채은수만이 눈앞의 여인에 필적할 만했다.
그러나 눈앞의 여인에게선 채은수와는 다른 이지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은발의 머리카락은 마치 비단처럼 찰랑거리며 흘러내렸고, 파란 눈동자는 남국의 바다처럼 반짝거렸다.
처음 보는 얼굴임에도 천신우는 상대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천신우입니다. 삼 공녀를 뵙습니다.”
“소가주님. 명성은 익히 들었어요. 오늘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해요. 부디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삼 공녀의 성격을 두고 도도하다 못해 건방지다고 비난하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삼 공녀가 보여준 모습은 소문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긴 얼마나 절박했으면 직접 나섰을까.’
이곳에 와 있는 것만으로도 삼 공녀가 처한 상황이 짐작이 갔다.
“지금 같은 중요한 시기에 북해빙궁을 나서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그만큼 절박하니까요.”
삼 공녀는 상황을 숨기지 않았다.
천신우는 다시금 확신했다.
그녀의 성격이 소문과는 많이 다름을.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지금 저는 소가주의 도움이 필요해요. 도와주신다면…….”
삼 공녀의 눈동자가 고혹적으로 빛났다.
“은혜는 반드시 갚겠어요.”
삼 공녀의 행동마다 모든 것을 내던지겠다는 각오가 느껴졌다.
하지만 천신우는 삼 공녀의 몸을 원하는 경쟁자들과는 달랐다.
“그렇다면 서로 솔직해집시다. 어느 정도 수준의 지원을 원합니까?”
“마음 같아선 전폭적인 지원을 원하지만 그건 힘들겠지요.”
천신우가 받아들인다고 해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삼 공녀의 신분이라도 외부세력을 대거 끌어들이기란 불가능했다.
칠 공자도 마찬가지. 칠 공자가 북해빙궁으로 불러들인 도제 휘하의 고수들 숫자는 많지 않았다.
다만 개개인의 실력이 압도적일 뿐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적어도 도천 수준의 지원은 필요해요. 그래야 최소한 칠 공자와의 균형을 맞출 수가 있을 테니까.”
“그렇게 하지요.”
천씨세가의 세력은 아직 도천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소수정예만 추려 일전을 벌인다면 밀릴 이유가 없었다.
‘도제가 직접 나서지 않는 이상에야.’
천신우의 흔쾌한 대답에도 삼 공녀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아직도 침상에 누울 때면 그날의 충격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삼 공녀였다.
어렸을 때부터 믿고 따르던 북해빙궁의 고위인사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갔던 날의 기억…….
삼 공녀를 손녀라 부르며 귀여워해 주던 그는 지원의 대가로 잠자리를 요구했다.
그때 삼 공녀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세상에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는 사실을.
그렇지만 삼 공녀는 권력을 놓지 못했다.
이미 권력의 마성에 사로잡힌 것이다.
“소가주께서는 무엇을 원하시나요?”
사실 삼 공녀가 북해빙궁 고위인사의 잠자리 요구를 거절한 것은 순결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다.
북해빙궁 고위인사가 경멸스럽게 느껴져서도 아니다.
단지 그와 잠자리를 함께 한들 궁주가 되지 못함을 알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궁주 자리에 오를 수만 있다면 누구와도 잠자리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삼 공녀였다.
그런 삼 공녀에게 천신우의 대답은 정말이지 뜻밖이었다.
“북해빙궁에는 궁주와 궁주의 제자들만 출입 가능한 공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한음빙정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곳에 출입하게 도와주십시오.”
삼 공녀가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요구조건은 그것뿐인가요?”
“아니요.”
그럼 그렇지. 쓰게 웃는 삼 공녀에게 천신우가 덧붙였다.
“만일 궁주 자리에 오른다면 부탁하나를 추가로 들어주십시오.”
천신우는 북해빙궁이 마교와의 전쟁에 참전할 것을 요구할 생각이었다.
“담보는 궁주의 신물 가운데 하나면 족합니다.”
“정말 그게 전부인가요?”
“물론입니다. 삼 공녀와 마찬가지로 저도 마음에 없는 혼인은 원치 않습니다.”
천신우의 진지한 눈빛을 확인한 삼 공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원래는 다른 사람들도 만나볼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겠네요.”
“그럼 승낙하신 거로 알겠습니다.”
“준비가 끝나는 대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그가 북해빙궁으로 소가주님을 안내해 줄 겁니다.”
다시 조각배로 갈아타고 멀어져가는 천신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삼 공녀였다.
그때 그녀의 심복 소월이 다가와 고개를 조아렸다.
“어떻게 되셨습니까?”
“소가주가 나를 도와주겠다는구나.”
복잡한 표정의 소월을 돌아보며 삼 공녀가 화사하게 웃었다.
“네가 생각하는 요구는 없었으니 걱정하지 말렴.”
차마 속마음을 모두 드러내진 못하는 삼 공녀였다.
‘하긴 지금에 와서 진지하게 만나보고 싶은 상대가 생겼다는 말이 무슨 소용일까.’
스스로가 처한 현실을 알기에 삼 공녀의 눈빛은 음울하게 빛날 뿐이었다.
* * *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알아.”
대화를 나누는 노인들은 바로 도제의 측근이자 월풍의 후견인인 흑백쌍선이었다.
쌍둥이 형제인 그들은 생김새는 똑같았지만 머리칼만큼은 전혀 달랐다.
형인 흑선은 육십이 넘은 나이에도 칠흑 같은 머리카락을 간직한 반면, 동생 백선은 태어났을 때부터 머리가 새하얬다.
도제의 측근 중에서도 제법 입지가 탄탄한 그들이 천신우를 응징하기 위해 직접 나선 것이다.
사실 그들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월풍이 도제의 후계자가 된다면 그들의 권력 역시 더욱 커질 것이기에.
“슬슬 도착할 때가 됐는데.”
흑선이 나무문을 바라보았다.
천신우가 얼마 후에 근처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그였다.
호위 무인들과 함께였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도천의 고수들이 천신우의 호위들을 따돌리는 역할을 맡았으니까.
일이 제대로 풀리면 도천 무인 하나가 이곳으로 와서 알릴 것이다.
그럼 흑백쌍선이 직접 나서 천신우를 처리할 예정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복면을 착용한 무인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흑백쌍선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그를 따라나섰다.
애초에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흑백쌍선조차 복면을 착용한 상태였다.
무인을 따라 대나무숲으로 들어설 때까지도 흑백쌍선은 전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침내 대나무숲 한복판에서 무인이 멈춰 섰다.
“이곳입니다.”
동생인 백선이 짜증을 냈다.
“아무도 없잖나!”
반면 형인 흑선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대나무숲으로 깊이 들어올수록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한 그였다.
지금에 이르러 불안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럴 리가요.”
불안감의 정체는 그들을 이곳으로 안내한 무인이 복면을 벗는 순간 밝혀졌다.
“여기 있잖습니까. 선배님들이 찾던 천씨세가 소가주가.”
흑백쌍선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남자는 다름 아닌 천신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