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학사환생 100화
바로 직전. 천신우는 아주 은밀한 기운을 감지했다.
결승전을 지켜보기 위해 감각을 최고조까지 끌어올리지 않았다면 절대 느끼지 못했을 기운이었다.
‘초고수……!’
미약한 것과 은밀한 것은 명백히 다르다.
외부로 힘을 드러내지 않고 은밀하게 갈무리한다는 것은, 그만큼 높은 경지에 올랐다는 의미였다.
‘도대체 누구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천신우와 눈이 마주친 것은 기묘한 인상의 남자였다.
불처럼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는 외모이지만 계속 보고 있기엔 부담스러운 느낌이었다.
천신우는 상대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철혈성주!’
이번 비무대회의 주최자이자 철혈성의 주인.
무신과 도제와 동시대를 풍미한 그가 천신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어째서?’
천신우가 의문을 품는 순간, 기운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어느새 철혈성주도 천신우에게서 시선을 거둔 후였다.
천신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착각이었나?’
철혈성주에게 직접 묻지 않는다면 평생 확인 못 할 사실이었다.
* * *
“확실히…… 흥미롭군.”
철혈성주는 천신우에 대한 솔직한 감상을 숨기지 않았다.
“이제 자네도 알겠지? 녀석이 비무대회에 나왔다면 어떤 결과를 냈을지.”
무신은 손자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처럼 들뜬 모습이었다.
철혈성주 입장에선 흥미로웠다.
정작 자신의 손녀들을 언급할 때는 남의 일처럼 심드렁하던 무신이었다.
그에 반해 도제는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물론 도제의 속셈을 모를 리가 없는 무신이었다.
“그나저나 정녕 만금소 그자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인가?”
당사자들이 워낙 철저히 보안을 유지했기에 세부적인 조건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도제와 만금소가 여러 차례 만나며 조건을 조율 중이란 사실 정도는 파악한 무신이었다.
추후 거래가 성사되면 도제는 본격적으로 천씨세가를 견제하기 시작할 터였다.
“자네와는 상관없는 일일 텐데?”
도제의 반응에 무신이 천신우를 돌아보았다.
“그건 모르지. 혹시 아는가? 더 늙기 전에 손녀사위를 맞게 될지.”
“그런가.”
도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더 이상 본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럼 어디 한번 막아보게.”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전력을 다하면 무신을 힘으로 누를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인 동시에 무신이 섣불리 나서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기도 했다.
실제로 지금껏 과감하게 나서기보다 관망한 적이 훨씬 많은 무신이었다.
무신으로서는 도제와 정면으로 충돌했다간 득보단 실이 많기에.
“이번엔 다를 걸세.”
그런 무신조차 강경하게 나오자 둘을 보던 철혈성주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 정도로 험악한 분위기는 정말이지 오랜만이군.’
알려진 바와 같이 무신과 도제는 젊었을 때부터 이미 앙숙이었다.
재능도 재능이었지만 성격 면에서 번번이 부딪혔다.
무신이 대의를 중시하고 결과보다 과정을 강조했다면.
도제는 이익을 위해 움직였으며 결과를 위해선 과정의 정당성 따윈 무시해 버렸다.
하지만 완전히 상극이라 해도 좋을 두 사람임에도, 의외로 피를 본 적은 없었다.
‘다들 마지막 선만큼은 지켰으니까. 하긴 그렇기에 둘 다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거겠지.’
물론 도제와 무신이 충돌 직전까지 간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세월 참 빠르군. 저 두 인간이 연 소저를 두고 싸울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 시대에 사룡의 일인 채은수와 북해빙궁의 삼 공녀가 무림 최고의 미녀로 칭송받는다면.
오래전에는 연 소저라고 불린 여인이 무림 최고의 미녀로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녀의 핏줄을 이어받은 채은수가 아름다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철혈성주는 무신과 연 소저의 결혼식을 떠올렸다.
‘사랑하던 여인이 무신을 선택했음에도 도제는 겉으로는 담담하게 반응했다. 심지어 결혼식에 참석해서 축하까지 해줬지. 하지만 나는 기억한다. 도제가 그때 얼마나 피눈물을 삼켰는지.’
그때 철혈성주는 처음으로 도제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그전까지만 해도 도제에게 열등감을 느꼈을지언정, 두려움은 없었던 철혈성주다.
하지만 도제가 얼마나 독한 인간인지 깨닫고 나자 평가를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도저히 이기지 못할 상대다. 권력을 얻기 위해서라면 핏줄도 친구도 죽음으로 내몰 놈이니까.’
그런 도제가 지금 송곳니를 드러내려고 하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갈아온 그 송곳니가 얼마나 날카로울지, 철혈성주는 감히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명목이야 만금소와의 거래를 이행하기 위함이라지만, 결국 그 칼끝은 정점을 향하겠지. 무신조차 도제에겐 거쳐 가는 과정일 뿐일 터.’
그런데 이번에는 무신도 절대 양보하지 않을 것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사실상 무신과 도제의 대결이 성사된 것이다.
‘이 모든 원인을 제공한 게 저 녀석이란 말이지?’
철혈성주는 상황이 이렇게까지 치달은 내막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천신우라…… 천씨세가 소가주라고 했던가?’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전혀 관심도 없었던 변방의 가문.
그러나 지금은 그 어떤 세력보다 강렬한 존재감을 과시하기 시작한 천씨세가였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 바로 천신우가 있었다.
철혈성주의 시선이 다시금 천신우를 향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 * *
‘저 인간은 왜 자꾸 쳐다보는 거야. 무신 어르신이 나에 대해 이상한 소리라도 한 건 아니겠지?’
철혈성주의 노골적인 시선에도 천신우는 결승전에 집중하려 애썼다.
검성과 신창의 대결.
솔직히 이번만큼은 천신우조차 전혀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다.
‘마교와의 전쟁에서 더 두각을 드러낸 건 분명 검성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검성이 신창보다 뛰어난 고수라고 말할 수는 없지.’
게다가 전생에선 검성과 신창 모두 이번 비무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당연히 천신우의 예상범위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모르겠군.’
결과를 예측할 수 없음에도 천신우의 표정은 밝았다.
내기가 걸린 것도 아니니 마음 편히 시합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물론 모두가 천신우처럼 마음이 편한 건 아니었다.
“이보게, 아우.”
어느 때보다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오는 제갈휘였다.
“무슨 일입니까?”
제갈휘의 표정이 심각했다.
“아우가 생각하기엔 검성과 신창, 둘 중에 누가 이길 것 같나?”
옆에서 모용비가 껄껄 웃었다.
“꼭 좀 알려주게. 냉철한 분석이니 뭐니 하더니 벌써 얼마를 날려 먹었는지. 이러다 마차까지 팔아치우고 무림맹에 걸어서 복귀할 판이야.”
웃음을 참으며 천신우가 대답했다.
“솔직히 저도 이번 승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굳이 꼽자면?”
천신우는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래서 도박이 무서운 거다.
수재라는 제갈휘마저 헤어 나오지 못하게 만드니까.
“굳이 한쪽을 선택하라면…….”
모용비조차 침을 꿀꺽 삼키는 모습.
“검성을 고르겠습니다.”
근거? 당연히 없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제갈휘의 표정이 밝아졌다.
“고맙네! 고마워! 은혜는 잊지 않겠네.”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려가는 모용비와 제갈휘를 바라보던 천신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저 둘 중에 한 사람은 신출귀몰한 전략으로 마교의 진격을 막아내고, 다른 사람은 한쪽 팔을 잃고도 끝까지 마교에 맞서 싸우게 될 거라고.’
* * *
철혈성 비무대회 결승전이 시작되기 직전, 뜻밖의 사실이 전해졌다.
“들었는가? 검성의 배당이 터무니없게 낮다더군.”
“그럴 리가? 전문가들은 검성과 신창이 박빙일 거라 예측하지 않았나.”
“그랬지. 그런데 천씨세가 소가주가 검성이 이긴다고 장담했다나 뭐라나.”
“허어! 천씨세가 소가주라면 승부예측의 신이잖나! 이번 비무대회에서 예측이 빗나간 적이 없다고 아는데…….”
장내가 술렁였다.
원래 검성과 신창의 배당은 거의 비슷했다.
절반 정도가 검성의 승리를. 다른 절반은 신창의 승리를 예상했다.
하지만 천신우가 검성의 승리를 확언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판도가 급변했다.
정확히는 천신우의 측근으로 알려진 제갈휘와 모용비가 가진 돈을 모두 검성에게 걸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제갈휘와 모용비가 천신우와 대화를 나누는 광경을 봤다는 증언까지 더해지면서.
검성과 신창 사이에서 고민하던 사람들이 죄다 검성에 돈을 걸어버린 것이다.
정작 돈을 하나도 걸지 않은 천신우는 팔짱을 끼고 비무대 위를 응시했다.
“기다리고 기다리시던 결승전이 바로 지금 시작됩니다!”
결승전답게 축하공연에 이어 유명연사가 분위기를 돋웠다.
물론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러지 않더라도 검성과 신창의 승부는 분위기를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기 충분했다.
저벅.
검성과 신창이 비무대 양편에 마주 섰다.
감독관이 어느 때보다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시합 시작!”
* * *
결승전 외에도 수많은 시합을 지켜봐 온 천신우다.
그리고 그 시합들에서 배운 것도, 깨달은 것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 같은 느낌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마치 직접 비무대 위에 오른 느낌.
검성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순간 그런 느낌은 확신이 됐다.
시합의 흐름이 고스란히 천신우의 눈동자에 감겼다.
천신우는 제삼자의 입장이 아닌 검성의 시점으로 신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성의 시점으로 신창의 움직임을 관찰했고, 검성의 움직임에 담긴 의미를 간파했다.
어째서 그런 일이 가능한지 뒤늦게 깨달은 천신우였다.
‘이제 알겠군.’
방법은 다르지만 결국 검성과 천신우가 추구하는 방향은 같았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천신우는 검성의 무공을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검성이 내지르는 일격을, 시선을 처리하는 방식을, 호흡을 고르고 간격을 조절하는 사소한 부분들까지도.
천신우는 보고 학습했다.
물론 그렇다고 검성을 고스란히 답습할 생각은 없었다.
천신우에게도 자신만의 방식이 있었으니까.
언젠가부터 천신우가 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관전이 아니었다.
검성의 무공에서 정수를 뽑아내 자신의 무공에 맞게 변화시키는 과정을 반복했다.
집중하는 천신우의 모습에 제갈휘와 모용비는 입조차 벙긋 못했다.
다만 속으로 추측할 뿐이었다.
‘아우가 저리 긴장하는 모습은 처음인데……. 도대체 검성에게 얼마나 많은 돈을 걸었기에.’
그들은 천신우와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천신우가 보는 것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천신우가 보는 광경을 보고 있는 사람은 이곳에 모인 고수들 가운데서도 극소수뿐이었다.
그중 하나인 철혈성주는 혀를 내둘렀다.
“설마 비무대회라는 사실을 잊은 것인가?”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앞에서 밑천을 드러내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상대의 무공을 알고 싸우느냐. 모르고 싸우느냐.
전자와 후자 사이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뿐만 아니라 무공을 도둑질당할 염려도 컸다.
괜히 수련을 훔쳐보는 행위가 무인들 사이에서 금기시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도제의 견해는 달랐다.
“괜한 걱정을 하는군. 과연 누가 저기 담긴 정수를 올곧이 이해하겠는가.”
철혈성주와 도제 정도 되니 검성의 무공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실제로 4강까지 올랐던 신중현이나 적잖은 명성을 날리는 고수들조차 그저 감탄하기 바빴다.
‘단 한 사람, 예외가 있다면…….’
무신의 시선이 천신우를 향했다.
“아무래도 한 녀석만은 제대로 이해한 듯싶다만.”
극도로 집중한 천신우의 눈빛은 마치 직접 시합의 당사자처럼 진지했다.
바로 그 순간.
검성의 검이 신창의 창을 쳐냈다.
까앙!
신창의 창이 포물선을 그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모두가 신창의 창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그때.
천신우의 뇌리에선 검성의 검이 마지막으로 그렸던 궤적이 몇 번이고 반복되며 떠오르고 있었다.
‘북해빙궁까지 갈 필요도 없었군.’
벽을 뛰어넘은 자들에게만 보이는 계단들.
그 첫 번째 계단을 올라갈 단서를 검성의 마지막 일격에서 발견한 천신우였다.
“올해 비무대회 우승자는 검성이오!”
감독관의 선언에 관중석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정작 대다수의 시선이 모여든 곳은, 우승자인 검성도 아깝게 준우승을 차지한 신창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천신우를 바라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역시 대단하군. 결승까지 맞추다니.’
‘이번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들였을지.’
철혈성주와 도제마저도 천신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실로 무서운 재능이다.’
‘만금소와의 거래가 아니더라도 천신우 저놈만큼은 치워야겠군.’
본의 아니게 철혈성 비무대회를 통해 가장 많은 유명세를 얻게 되어버린 천신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