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학사환생 098화
전장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바로 천신우였다.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인가?”
만금소는 정말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천신우가 지금 시점에 자신을 찾아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던 그였다.
게다가 외부인 출입을 통제할 부하들은 뭐 하고 있기에 천신우가 여기까지 오게 놔둔 것일까.
혼란에 빠진 만금소와 달리 천신우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여기 이분의 이야기를 듣고 찾아왔습니다.”
그제야 만금소의 눈동자가 천신우와 동행한 중년인을 향했다.
그는 만금소의 채무자였다.
만금소로부터 갑작스러운 상환요구를 받고 곤란을 겪던 그가 천신우를 만난 것은 바로 며칠 전이었다.
그때, 천신우는 그에게 제안했다.
대신 원금을 상환해 주겠다고. 나중에 갚기만 하면 된다고.
심지어 천신우는 이자 역시 대폭 낮춰주었다.
어차피 천신우는 고리대금업으로 돈을 벌 생각 따윈 눈곱만큼도 없었다.
“듣고 나니 사정이 딱하더군요. 그래서 원금을 대신 상환하고자 합니다. 장주님과의 채무계약을 제가 승계하는 조건으로.”
만금소는 실소를 머금었다.
정말이지 다른 놈이 이따위로 지껄였다면 당장 때려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천신우는 만금소조차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거물이었다.
“뭐하자는 짓인지 모르겠군. 영업 방해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 영업이라는 것이 돈을 빌려주고 재산을 강탈하는 일이라면 마땅히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천신우의 직설적인 비난에 만금소도 더는 웃지 않았다.
“가만 보니 어디서 헛소문이라도 주워들은 모양이군. 그걸 믿고 믿지 않고는 소가주 선택이네만, 이런 식으로 나를 모욕한다면 더는 참지 않겠네.”
만금소가 부하에게 눈짓했다.
이곳에 와 있는 금와전장의 고수들을 모조리 불러 모을 생각이었다.
사실 다짜고짜 천신우를 죽일 수는 없다.
비무대회로 무림의 이목이 철혈성에 집중된 시기다. 지금 그런 일을 벌였다간 아무리 만금소라도 후폭풍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버르장머리 정도는 고쳐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때 천신우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오해가 있는 듯싶습니다만.”
만금소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네놈이 그럼 그렇지.’
만금소는 천신우가 꼬리를 내린다고 생각했다.
하긴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추가적인 도발은 정말 싸우자는 의미니까.
“오해라. 지금 와서 그렇게 말한들 내가 순순히 넘어가 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일세.”
“역시 오해하고 계시는군요. 장주님은 제가 헛소문 따위를 듣고 이러는 거로 보입니까?”
천신우의 차가운 눈빛이 만금소를 향했다.
지금까지 만금소에게 보여준 적이 없는 표정이었다.
“당장 이분에게도 20만 냥을 갚지 못한다는 이유로 재산을 강탈할 생각이셨잖습니까.”
만금소가 채무자를 노려보았다.
이미 모든 내막을 천신우에게 털어놓은 모양이었다.
물론 빠져나갈 구멍은 많았다.
“증거 있나? 지금 소가주가 지껄이는 말은 모두 억측에 불과하네. 그야말로 소설이나 다를 바가 없지.”
때마침 도착한 금와전장의 고수들이 문을 두드렸다.
“장주님! 부르셨습니까.”
“그래. 어서 들어오게.”
문을 열고 들어온 금와전장 고수들이 만금소 뒤에 일렬로 도열했다.
척척!
그들은 금와전장 최고의 고수들.
누구도 검을 뽑지 않았지만, 위협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엔 충분했다.
실제로 천신우와 동행한 채무자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긴장감이 도는 상황임에도 천신우는 여전히 당당했다.
“고개 드십시오. 잘못하신 것도 없잖습니까.”
“크하하하! 과연 배포 하나는 대단하군.”
만금소는 천신우가 무신을 믿고 고자세로 나온다고 판단했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 천신우의 태도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무신을 믿고 개수작을 부리는 모양인데. 아무리 든든한 배경을 갖고 있더라도 그건 결국 본인의 힘이 아니야. 뒷감당은 스스로 져야 하지.”
“그러는 장주님은 도제 어르신을 믿고 이따위 일을 벌여온 겁니까?”
“감히!”
발끈하는 금와전장 고수들을 굳이 제지하지 않는 만금소였다.
“적당히 넘어가 주려고 했더니 기어이 선을 넘는군. 소가주가 자초한 일이니 원망하지 말게.”
만금소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걸 신호로 금와전장 고수들이 일제히 천신우를 제압하려는 순간이었다.
저벅저벅.
반대편 문에서 수많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
금와전장 고수들이 멈칫했다.
단순히 발소리가 들려와서가 아니었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한 것이다.
“뭣들 하는 거냐! 지금 당장……!”
호통치던 만금소조차 입을 다물지 못했다.
덜컹.
반대편 문이 활짝 열리며 발소리의 주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세등등하게 장내로 입장한 그들은 바로 천씨세가의 고수들이었다.
끝이 없는 그들의 행렬에 금와전장 고수들의 웅성거림이 멎었다.
이윽고 수십 명에 달하는 천씨세가 고수들이 천신우 뒤에 도열했다.
천신우와 만금소.
그들을 사이에 두고 양측의 고수들이 서로 대치하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만금소가 쓴웃음을 삼켰다.
“아주 작정했군. 이러고도 아무 문제 없이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러나 막상 험악한 말과는 달리 천신우를 응징하지 못하는 만금소였다.
이제 천신우는 혼자가 아니었기에.
얼핏 보기에도 천씨세가 고수들의 전력은 금와전장에 비해 절대 밀리지 않았다.
정면충돌이 벌어진다면 만금소조차 목숨을 장담하기 힘들 터였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천신우만이 입을 열었다.
“억울한 사람들을 구제해 주는 것뿐입니다. 문제가 생길 이유가 없지요.”
모두의 시선이 천신우에게 집중됐다.
만금소가 결단을 주저하는 지금.
모든 것은 천신우의 의지에 달려 있었다.
천신우의 선택에 따라 싸움을 시작될 수도 끝날 수도 있었다.
“게다가 따로 알아보니 피해자가 한둘이 아니더군요. 설마 오래전부터 그런 악랄한 일을 저질러 오셨을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천신우는 채무자들의 명단과 만금소가 그들에게 저지른 일들을 언급했다.
만금소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천신우가 작정하고 오늘 일을 벌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물론 쉽게 잘못을 인정할 만금소가 아니었다.
“분명히 말했을 텐데! 증거 없이 내게 누명을 씌우려 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아니요. 이미 증거도 증인도 충분합니다.”
천신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도열한 천씨세가 고수들이 양옆으로 갈라섰다.
그들 사이로 등장한 것은 만금소의 채무자들이었다.
심지어 그들 중엔 이미 만금소에게 재산을 강탈당하고 온갖 수모를 당한 이들도 존재했다.
그들이 다투어 입을 열었다.
누군가는 원통함에 눈물을 흘렸고, 또 다른 누군가는 강한 목소리로 만금소를 비난했다.
만금소의 민낯이 세상에 낱낱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어떻습니까?”
천신우가 만금소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경멸 어린 시선들이 비수처럼 날아와 만금소에게 박혔다.
채무자들과 천씨세가 고수들은 물론, 심지어 금와전장 일부 고수들 사이에서도 만금소를 향한 시선이 달라졌다.
설마 만금소가 이렇게까지 악랄한 인간일 거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장주를 너무 몰랐군.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그만두겠소. 계약금은 전부 돌려드리지.”
급기야 금와전장에서 이탈하겠다는 고수까지 나타났다.
만금소는 깨달았다.
이런 상황에서 전면전을 감행해 봐야 승산이 없음을.
“그래서 이제 어쩌자는 것이냐?”
“아까 말씀드린 대롭니다. 여기 모인 채무자들의 빚을 청산하고 모든 거래를 끝내십시오. 이건 부탁이나 권고 따위가 아니라 통보입니다.”
천신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사람들의 귀엔 오히려 지금까지보다 훨씬 또렷하게 들렸다.
“그러니 당신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네놈이 감히……!”
만금소 입장에서 채무자들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그런데 천신우가 나서서 판을 엎어버린 것이다.
만금소로선 격분할 수밖에.
하지만 천신우는 만금소의 외침을 깨끗이 무시했다.
“채무청산은 금와전장의 전표로 하겠습니다.”
천신우가 수십 장의 전표를 만금소에게 던졌다.
흩날리는 전표를 바라보는 만금소의 얼굴이 푸들푸들 떨렸다.
일생을 통틀어 최악의 굴욕을 맛본 만금소였다.
“이놈! 감히 장주님께 뭐 하는 짓이냐!”
분노한 금와전장 고수 몇이 나섰지만 천신우에게 도달하지도 못했다.
천씨세가 고수들이 그들을 막아선 것이다.
“네놈들이야말로 소가주께 무슨 짓이지?”
제지당한 만금소의 부하들이 주위를 돌아봤다.
하지만 금와전장 고수 중에도 이탈자가 생긴 지금.
누가 봐도 전황은 만금소에게 불리했다.
여세를 몰아 만금소에게 채무자들의 차용증까지 받아낸 천신우다.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가지요.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닙니다. 채무자들을 핍박한다면 언제라도 다시 찾아올 겁니다.”
천신우가 몸을 돌려 장내를 빠져나가자 천씨세가 고수들도 뒤따랐다.
남겨진 만금소가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찍었다.
콰앙!
오랜 기간 공들여 빚을 지게 했던 채무자들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것도 화가 났지만.
무엇보다 만금소의 피를 거꾸로 솟게 만드는 것은 얼마 전의 내기였다.
천신우가 내기에서 이긴 돈으로 상당한 채무를 변제했다고 생각하니 혈압이 도졌다.
결국, 분을 참지 못한 만금소는 쇠몽둥이를 들고 집기를 닥치는 대로 박살 내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 * *
만금소가 기물을 박살 내는 소리를 배경음 삼아 천신우는 걸음을 옮겼다.
채무자들을 위해 거액을 선뜻 내놓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천신우는 전혀 손해가 아니었다.
어차피 원금은 채무자들에게 받아내면 그만이었다.
게다가 채무자들과의 우호적인 관계 형성은 덤이었다.
금와전장의 전표들을 전부 털어버린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만금소와 전면전이 시작되면 금와전장 전표는 갖고 있어 봐야 아무 의미가 없다. 만금소가 작정하고 지급을 미루면 휴지 조각이나 다를 바가 없어지니까. 차라리 지금 이런 식으로 처리하는 편이 훨씬 홀가분하지.’
물론 가장 큰 결실은 만금소의 진짜 모습을 사람들이 알게 됐다는 것이다.
이전에도 만금소에 대해 나쁜 소문이 돌긴 했지만 공론화되진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천씨세가 고수들은 물론이거니와 금와전장 고수들까지 만금소의 실체를 눈앞에서 확인했다.
당연히 만금소는 오늘 일로 크나큰 곤경에 처할 것이다.
‘이미 만금소는 돌이키기 힘든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만금소라면 포기하지 않을 거야.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승부수를 던지겠지.’
이미 다음 단계까지 계산을 마친 천신우였다.
‘도제와 마교. 어느 쪽을 끌어들이든 함께 박살 내주지.’
전의를 불태우는 천신우였다.
* * *
어느덧 철혈성 비무대회도 막바지에 접어든 시점.
만금소는 공식 석상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자연히 만금소의 거취를 두고 온갖 소문이 떠돌았다.
사람들의 비난을 피해 낙향했다는 소문이 도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도제와 손잡고 복수를 준비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물론 천신우는 소문에 휘둘리지 않았다.
모든 정보력을 동원해 만금소의 동향을 파악하며 최후의 일전을 준비했다.
그러는 가운데. 드디어 비무대회 4강전이 시작됐다.
‘어느덧 4강전이군.’
워낙 진출자들의 수준이 높아서인지 비무대회 열기는 그야말로 최고조였다.
“역시 우승은 신창이겠지?”
“무슨 소리! 신창은 검성부터 이기고 오라고 하게.”
“그럼 자네는 누가 우승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당연히 권왕이지!”
신창과 검성의 우승을 점치는 이들이 가장 많았고.
의외로 권왕이 우승을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예측도 상당했다.
비무대회 전엔 강력한 우승자로 꼽혔던 신중현이 가장 최약체로 꼽힐 정도.
그런 상황임에도 신중현은 묵묵히 시합을 준비 중이었다.
“차라리 마음이 편합니다. 오히려 부담 없이 시합에 임하게 됐으니까요.”
시합 전에 천신우와 만난 자리에서 속내를 털어놓은 신중현이었다.
“그래도 저는 기대가 됩니다.”
천신우의 진심이었다.
신중현은 대답 대신 미소만 지어 보였다.
이윽고 진행된 4강전 첫 시합.
신중현은 천신우의 기대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신창을 상대로 굉장한 명승부를 펼친 것이다.
“신중현 최고다!”
“신중현 대협 만세!”
수많은 관중이 신중현을 연호했다.
그만큼 신중현이 신창을 상대로 보여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패배가 너무나 아쉽게 느껴질 정도로.
비무대를 내려오던 신중현과 천신우의 눈이 마주쳤다.
신중현이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패자인 자신에게 쏟아지는 성원이 멋쩍었던 모양.
그러나 천신우의 생각은 달랐다.
신중현은 박수받을 만한 자격이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진심이 담긴 한 마디에 신중현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 * *
뜨겁게 달아오른 분위기 속에 시작된 4강전 두 번째 시합.
“시작!”
감독관과 관중들의 함성이 미처 잦아들기도 전에.
공중으로 솟구친 권왕이 지면으로 수직낙하하며 주먹을 내리찍었다.
콰아아앙!
귀빈석에서 시합을 관전하던 천신우가 벌떡 일어났다.
“이런 미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