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학사환생 095화
머리카락에서 물을 전부 빼버린다면 저런 색이 나올까.
검성은 완전한 백발이었다.
그러나 단단한 육체와 날카로운 인상은 노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꼿꼿이 서 있는 그는 마치 날카롭게 벼려진 한 자루의 검 같았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천신우는 만감이 교차했다.
‘틀림없다. 내가 아는 바로 그 검성이다.’
검성을 다시 마주한 반가움보다도 안도감이 컸다.
‘역시 자운검 없이도 저 자리까지 올라왔구나. 잠깐, 그럼 지금 검성은 무슨 검을 갖고 있는 거지?’
천신우의 눈길이 검성의 등에 비스듬히 매어진 검을 향했다.
때마침 검성이 검을 뽑았다.
솨아악!
서릿발처럼 새하얀 검이 칼집에서 빠져나오는 소리에, 천신우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검을 뽑은 것만으로 주위를 완전히 압도해 버린 검성이었다.
그때 천신우 뒤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범하군.”
어느새 천신우 곁에 나란히 서 있는 그는 바로 무신이었다.
“검은 평범한데…… 주인이 검을 빛나게 만드는군.”
최고의 찬사였다.
무신 역시 검성의 진가를 알아본 것이다.
천신우가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천씨세가에 새롭게 영입된 고수들도 무신에게 예를 표했다.
“인사는 됐으니 시합이나 봄세.”
비무대회 기간 동안 철혈성에 줄곧 머무른 무신이다.
하지만 시합을 직접 관전한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권왕과 천비자의 대결.
그리고 이번에 검성의 시합을 찾은 것이다.
“신창 그 아이가 쩔쩔맨 이유를 알 것 같군.”
검성을 바라보는 무신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천신우는 내심 놀랐다.
‘필생의 숙적인 도제 앞에서도 저런 눈빛을 보이지 않았던 무신이건만……. 무엇이 무신의 감정에 변화를 일으켰을까.’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시작!”
감독관의 외침과 함께 검성이 검을 앞으로 겨눴다.
검을 휘두르지 않았음에도 주변이 잘려져 나가는 착각마저 들었다.
실제로 위협을 느낀 검성의 상대는 그 즉시 내공을 극성까지 끌어올렸다.
주변의 공기가 일렁이며 파동을 일으켰다.
쿠쿠쿠쿵!
공간마저 찢어버릴 것만 같은 파동이었다.
비로소 사람들은 새삼스레 기억해 냈다.
상대 역시 만만찮은 강자임을.
그러나 검성만큼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상대를 바라보는 검성의 시선에 담긴 것은 오만함이었다.
“약하군.”
검성은 나른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곳의 누구도 그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그들 모두 내심 동의했던 것이다.
상대는 분명 검성에 비해 약했다.
물론 상대는 동의하지 않았다.
아니. 동의할 수 없다고 봐야 했다.
무인에게 자존심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이노오옴!”
내공을 폭발시키며 상대가 검성을 향해 일직선으로 쇄도했다.
지켜보던 이들조차 놀랄 정도의 쾌속!
그러나 천신우는 보았다.
검성이 상대가 뿜어내는 맹렬한 기세 한복판으로 걸음을 내딛는 광경을.
마치 서릿발이 돋아나듯 검성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상대의 기운을 걷어냈다.
“……!”
무방비로 노출된 상대가 움찔하며 양팔로 몸을 감쌌다.
그런 상대를 바라보던 검성이 이내 검을 다시 집어넣었다.
철컥.
“너에겐 검을 휘두르는 것조차 아깝군.”
모욕적인 말이었지만 상대는 검성에게 대항할 생각조차 못 했다.
짧은 순간 격의 차이를 깨달은 것이다.
“……졌다.”
허무한 패배 선언에도 야유는 없었다. 누구도 검성에게 굴복한 무인을 비웃지 못했다.
“검성 승리!”
감독관이 외쳤지만 검성은 이미 시합에 흥미를 잃어버린 후였다.
나른한 표정으로 비무대를 내려오려던 검성이 순간 멈칫했다.
수많은 관중 사이에서 검성과 천신우의 시선이 교차했다.
“분명 지금 아우를…….”
모용비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검성은 천신우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단지 바라보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어느새 천신우를 향해 다가오는 검성이었다.
관중 대부분은 무공을 익혔고 그렇지 않더라도 무인을 상대하는데 이골이 나 있는 사람들이었다.
무수한 명성을 쌓아 올린 고수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들조차 검성 앞에선 빛이 바랬다.
홀로 빛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남들의 존재감마저 지워버리는 존재.
그게 바로 검성이었다.
썰물처럼 갈라지는 관중들을 가로질러 마침내 천신우 앞에 다다른 검성이 입을 열었다.
“너도 비무대회 참가자인가.”
“아니.”
고개를 젓는 천신우.
검성의 입가가 비틀어졌다.
“그렇다면.”
검성이 등으로 손을 가져갔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동작이라 누구도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굳이 다음을 기약할 필요가 없겠지.”
검성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서늘한 기운을 천신우도 느꼈다.
검성의 상대가 패배를 시인한 이유가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꼬리를 내릴 생각은 없었다.
쿠오오오!
마찬가지로 기세를 피워 올리는 천신우였다.
“……!”
옆에 있던 모용비와 제갈휘는 깜짝 놀랐다.
이미 검성의 압도적인 기운을 피부로 느낀 그들이다.
그런데 설마 천신우가 검성에 맞서 밀리지 않을 줄이야.
물론 검성은 놀라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예상했다는 얼굴이었다.
“역시 내 느낌이 틀리지 않았군.”
공기를 베어내듯 검성의 검이 뽑혔다.
솨아악!
동시에 뽑혀 나오는 천신우의 자운검.
천씨세가의 고수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천신우와 검성이 서로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그들 중에 가장 고수인 신중현조차 반응이 한발 늦었다.
하지만 천신우와 검성이 격돌하기 직전.
무신이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을 비집고 들어왔다.
“……!”
천신우와 검성 모두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신은 항상 그렇듯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존재감만은 압도적이었으니까.
방해당한 검성이 무신을 노려보았다.
그 모습은 솔직히 천신우조차 놀랄 정도였다.
아무리 검성이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지만 설마 무신 앞에서조차 저럴 줄은 몰랐기에.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검성은 이내 몸을 돌렸다.
검을 어깨에 걸친 채로 걸어가는 그의 표정은 더 이상 나른하지 않았다.
활기를 되찾은 얼굴로 장내를 벗어나는 검성이었다.
그제야 천신우는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후우.”
정말이지 이렇게 긴장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내가 원망스러우냐?”
많은 것을 내포한 무신의 물음이었다.
‘솔직히.’
조금은 그런 생각이 들긴 했다.
‘검성과는 한 번쯤 맞붙어보고 싶었으니까.’
물론 검성 정도의 강자가 무림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검성은 천신우에게 특별했다.
전생에서 장서각 안에 틀어박혀 있던 천신우에게 검성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무림을 활보하는 그를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너무 서두르지 말거라. 네놈은 누구보다 착실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무신은 경기장을 떠났다.
멍하니 서 있는 천신우에게 모용비가 다가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야. 정말 큰일 나는 것은 아닌가 걱정했다네. 그나저나.”
검성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는 모용비의 눈이 빛났다.
검성은 모용비의 가슴에도 불을 지핀 모양이었다.
“정말 대단하군. 검성이란 별호가 전혀 아깝지 않아. 그런데 아우.”
이내 고개를 돌린 모용비가 물었다.
“검성을 천씨세가로 영입할 생각은 없는가?”
사실 모용비도 검성이 탐났다.
검성이 모용세가에 합류한다면?
모용세가는 날개를 달고 비상할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모용세가는 검성을 담을 그릇이 되지 못하니까.
하지만 천씨세가는 다르다.
충분히 검성을 품을 그릇이 된다는 것이 모용비의 생각이었다.
“아니요.”
천신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검성은 신중현과는 경우가 달라.’
천신우는 며칠 전에 신중현을 영입했던 일을 떠올렸다.
사실 신중현은 천신우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죽은 아버지가 사용하던 검이 묵혼이란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만일 알았다면 묵혼의 행방을 수소문했을 테고, 그 소식이 화 노야의 귀에까지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신중현은 묵혼을 보는 순간 기억해 냈다.
아버지와의 오래된 추억을.
산에서 쉬지 않고 검을 휘두르며 수련에 매진하는 아버지. 그리고 그걸 지켜보던 어린 신중현.
아버지는 수련이 끝나고 나면 신중현을 목말 태워 산에서 내려오곤 했다.
신중현에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추억이었다.
그리고 그 추억의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검이 바로 묵혼이었다.
그 묵혼과 함께 천신우는 신중현의 원수에 대한 정보까지 건넸다.
그렇게 신중현을 천씨세가에 합류시킨 천신우임에도, 검성의 영입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검성은 신중현처럼 사연이 있는 게 아니야. 그냥 어딘가에 얽매이고 싶지 않은 거다. 그러니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지.’
미련을 털어낸 천신우가 주위를 돌아보았다.
“가시지요. 오늘 시합은 모두 끝났으니 마음 놓고 마셔봅시다.”
주당으로 소문난 고수가 껄껄 웃었다.
“하하하! 이번에야말로 소가주 술이 얼마나 센지 어디 한번 확인해 보겠소이다.”
천신우와 검성의 충돌이 있긴 했지만,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만일 천신우가 검성에게 모욕을 당했거나 기습 시도가 있었다면 그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방금의 충돌은 그저 무인끼리의 자존심 대결이기에 웃어넘기는 분위기였다.
오히려 새롭게 합류한 고수들 사이에선 천신우를 새삼스레 다시 보는 시선이 늘어났다.
‘과연! 뇌전검이란 별호가 괜히 생긴 것이 아니었군.’
‘검성은 신창을 상대로 백중세를 이룬 고수다. 그런 검성에게 소가주가 전혀 밀리지 않을 줄이야.’
천신우의 명성을 익히 들었지만 직접 눈앞에서 실력을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 천신우도 의도한 바였다.
아무리 좋은 조건으로 영입했다고 해도 충성심이 담보되진 않는다.
그들의 충성을 얻으려면 그들을 거느릴 자격을 증명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천신우는 오늘 제대로 자격을 증명한 셈이었다.
물론 우락부락한 사내들 사이에선 주량도 하나의 척도.
오늘 밤의 술자리가 중요한 이유였다.
* * *
검성은 밤거리를 걷고 있었다.
딱히 정해둔 목적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검성은 이따금 이렇게 정처 없이 걷곤 했다.
오직 검의 길만을 걸어온 그에게 있어 유일한 취미이기도 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어디선가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유쾌한 웃음소리. 호탕한 고함.
사람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있는 듯했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테지만, 귀에 익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검성을 그리로 이끌었다.
단 한 번 들어봤을 뿐이지만 검성은 목소리의 주인을 정확히 기억했다.
‘천신우라고 했던가.’
딱히 알아보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천신우의 이름은 사람들 사이에서 워낙 많이 오르내렸다.
만금소와의 내기.
천신우가 천씨세가에 새롭게 영입한 고수들.
그리고 검성과의 신경전까지.
덕분에 검성은 원치 않아도 천신우의 이름을 알게 됐다.
‘나와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왔더군.’
발소리를 따라 지난 기억이 검성의 눈가로 거슬러 올라왔다.
* * *
고아로 자라 스승에게 거둬들여졌던 검성이다.
그 후론 줄곧 산중에서 지냈다.
스승이 물려준 철검만이 유일한 친구였다.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 검을 휘둘렀고 새벽 별을 보며 잠이 들었다.
그렇게 살기를 삼십여 년.
정정했던 스승의 얼굴에 검버섯이 피고 머리에 세월이 내려앉았다.
죽음을 앞둔 스승은 검성을 바라보며 마지막 숨을 토해냈다.
“내 이제껏 너를 돌봤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동안 못난 스승 수발드느라 고생 많았다. ……부디 남은 생은 네 뜻을 펼치며 살도록 해라. 하늘에서나마 지켜보마.”
그렇게 세상을 떠난 스승의 무덤 앞에서 검성은 사흘 밤낮을 서 있었다.
밤사이 내린 눈이 머리 위에 소복이 쌓였지만,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
마침내 검성은 몸을 돌렸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검성의 머리 위에 쌓였던 눈이 투두둑 떨어졌다.
그런데 간밤에 쌓인 눈이 전부 떨어져 내렸음에도, 검성의 머리카락은 여전히 눈처럼 새하얬다.
그렇게 새하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하산한 검성은 수많은 무인과 맞닥뜨렸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검성의 적수는 없었다.
다시 산이 그리워질 무렵.
검성은 신창을 만났다.
반나절 동안 치열하게 싸웠지만 공허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검성을 보며 신창은 말했다.
“이제 곧 철혈성이란 곳에서 비무대회가 열린다네. 그곳이라면 자네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 필생의 적수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찾아온 철혈성엔 과연 수많은 강자가 존재했다.
무신과 도제. 철혈성주…….
하지만 그들 가운데 누구도 검성의 가슴을 뛰게 만들어주진 못했다.
결국, 산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굳힌 검성 앞에 그가 나타났다.
‘천신우.’
어째서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를 보는 순간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는 사실.
* * *
회상에서 깨어난 검성이 나직한 숨을 내쉬었다.
두근두근.
여전히 가슴이 뛰고 있었다.
기분 좋은 두근거림에 몸을 맡기며 검성이 휘적휘적 걸었다.
겨울임에도 주루의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창문 너머.
한가득 음식을 쌓아놓고 먹는 사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검성은 알지 못했지만, 그는 권왕이었다.
검성을 힐긋 쳐다본 권왕은 이내 음식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산처럼 쌓였던 음식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경악할 만한 광경이었지만 검성이 관심 있는 쪽은 따로 있었다.
마침내 천씨세가 고수들과 술잔을 부딪치는 천신우를 발견한 검성이다.
그러나 검성은 천신우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검성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그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