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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환생-92화 (92/171)

# 92

학사환생 092화

만금소는 무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거부.

현금동원력만 놓고 보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것이다.

그런 만금소에게도 천만 냥은 적은 돈이 아니었다.

하물며 개인적인 내기에 걸 만한 액수는 더더욱 아니다.

천만 냥이면 황보세가 정도 되는 문파의 1년 예산을 훌쩍 넘어갔다.

번화가에 번듯한 집을 백 채 가까이 구입할 수 있었고 방이 수십 개나 딸린 커다란 장원 역시 열 개는 소유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만금소가 천신우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단지 액수 때문만이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군.’

누가 봐도 천비자의 승리가 유력한 상황이다.

‘그런데도 권왕이 이기는 쪽에 천만 냥을 걸겠다고?’

사람 보는 안목이 탁월한 만금소라도 지금만큼은 천신우의 의도를 전혀 종잡을 수 없었다.

‘허세인가? 아니면 내가 파악하지 못한 변수가 있는 건가?’

이미 비무대회 대진표까지 사전에 받아본 만금소다.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아 출전자들의 예상 승률까지 치밀하게 계산해놓은 상황.

‘우승확률은 말할 것도 없고 천비자가 권왕을 이길 확률 역시 9할이 넘는다.’

만금소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었다.

실시간으로 반영되는 배당 역시 천비자와 권왕의 격차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

천비자가 이길 경우 수수료를 떼고 나면 배당금은 본전보다 조금 높은 수준인 것에 비해 반대로 권왕의 배당은 8배가 넘었다.

‘설령 권왕이라는 놈의 실력이 예상보다 뛰어나다고 해도 천비자를 이길 가능성은 매우 낮아.’

구왕도에서의 결과를 토대로 권왕의 무공 역시 숫자로 산출해놓은 만금소였다.

고지식한 무인들이야 숫자놀음이라며 비난하지만, 그의 분석이 빗나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만금소에겐 이 내기를 거절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여기서 내가 주저한다면 천비자를 영입하는 일 역시 틀어질 수 있다.’

무인들은 돈도 중시하지만, 무엇보다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족속이다.

만금소가 천비자의 승리를 확신하지 못해 내기를 거절했다는 소식이 알려진다면?

천비자 영입은 물 건너갈 것이다.

자존심 강한 천비자는 절대 그냥 넘기지 않을 테니까.

‘게다가 천비자는 인맥도 두텁지. 그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기를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과감하게 승부를 걸어왔기에 지금의 자리에 오른 만금소였다.

“좋네.”

일단 결정을 내리자 만금소는 거침이 없었다.

금와전장에서 발행한 백지 전표를 꺼내 천만 냥이라고 적어 넣었다.

“만일 자네가 이번 내기에서 이긴다면 당장 철혈성 지부에 가서 받으면 되네.”

천신우도 증서 하나를 꺼냈다.

만수전장에 천만 냥을 보관했다는 증빙서였다.

“제가 진다면 만수전장에서 이걸로 돈을 인출하시지요. 그리고 제가 진다면 이참에 천씨세가가 거래하는 전장도 금와전장으로 바꾸겠습니다.”

“하하하. 천씨세가처럼 우수한 고객은 언제든 환영일세.”

만금소는 호탕하게 웃자 그를 수행하는 무인들도 덩달아 웃었다.

하지만 모용비는 여전히 놀란 반응을 감추지 못했다.

“허어! 천만 냥이라니……. 듣고도 믿기지 않는구먼.”

천씨세가가 급속도로 성장하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던 그들이다.

하지만 천만 냥이란 액수를 듣고 나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불과 1년 사이 천씨세가는 모용세가나 제갈세가가 닿지 못할 곳까지 도달한 것이다.

입을 다물 생각을 못 하는 모용비와 달리 제갈휘는 냉정함을 유지했다.

“권왕이 이길 가능성도 없진 않아. 하지만 그 낮은 가능성을 믿고 동전 앞뒤면 맞추기 같은 내기를 제안하다니 아우답지 않군.”

제갈휘가 천신우를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렇게 된 이상 권왕이 이기길 기원하지. 대신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좌절하지 말게. 천비자가 이기면 내가 한턱 크게 내겠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천신우가 일행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관중들은 계속해서 늘어났다.

비무대회 예선의 경우 동시에 여러 시합이 진행되기에 관중이 분산되는 편이었다.

하지만 만금소와 천신우가 무려 천만 냥을 걸고 내기를 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사람들이 몰려든 것이다.

“천만 냥짜리 내기라고? 천 냥을 잘못 들은 게 아니고?”

“멍청한 인간아! 만금소가 누군지 몰라서 그러는가? 금와전장의 주인이 고작 천 냥짜리 내기를 하겠나?”

“그렇다곤 해도 천만 냥은 너무 심한데. 게다가 만금소야 그렇다 치더라도 천신우? 그게 누군데?”

“허어. 진짜 어제까지 폐관 수련하다 나왔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최근 명성을 날리는 천씨세가 소가주를 모른단 말인가?”

사람들의 웅성거림에서 천씨세가를 향한 시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 수 있었다.

“천씨세가가 오대세가에 복귀하고 나아가 세력확장을 꿈꾸는 것이 모두 소가주 덕이라네. 솔직히 사룡의 새로운 일원으로 거론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야.”

당연히 천신우를 향한 평가 역시 올라간 상황이었다.

사실 사룡 가운데 채은수나 월풍 정도는 밀어내고도 남을 정도였다.

하지만 채은수와 월풍의 배경이 각각 무신과 도제이기에 그런 일이 현실화되진 않았다.

그때 웅성거리던 목소리가 급속히 커졌다.

“잠깐! 저거 무신 아닌가?”

“맙소사! 옆에는 도제인데?”

나란히 걸어오는 무신과 도제를 발견한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사실 무신과 도제가 철혈성 비무대회에 얼굴을 비친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대세가 무림대회와 달리 철혈성 비무대회는 그만한 격을 갖춘 행사이기에.

하지만 주요시합도 아닌 일개 예선전을 관전할 줄이야.

그들을 발견한 만금소가 먼저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만금소의 수행원들도 무신과 도제를 알아보고 즉시 길을 텄다.

“여기서 다시 뵙습니다그려.”

풍채 좋은 모습의 도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주. 소식은 들었네. 천만 냥짜리 내기라니. 두고두고 화제가 되겠어.”

만금소와 간단한 대화를 나누던 도제에게 수행원 하나가 다가와 보고했다.

“그런가.”

수행원의 안내를 받아 도제가 찾은 사람은 바로 천신우였다.

모용비와 제갈휘가 황급히 인사했다.

“무림 말학 후배들이 도제 어르신을 뵙습니다!”

천신혁도 화들짝 놀란 얼굴이었다.

하지만 도제는 그들에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자네로군.”

천신우를 바라보는 도제의 시선이 의미심장했다.

주변 사람들마저 괜히 긴장하게 만드는 눈빛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천신우와 도제 손자 월풍의 충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하지만 정작 천신우는 태연한 태도로 도제를 대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천신우라고 합니다.”

“듣자 하니 금와전장 장주와 내기를 했다지? 권왕이라는 자가 천씨세가 소속이라 들었는데 실력이 대단한가 보군.”

천신우를 상대하는 도제의 태도 또한 자연스러웠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본다면 천신우와 도제가 가까운 사이처럼 보일 정도로 친근해 보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만큼은 권왕 손을 들어줘야지요.”

“하하하. 맞는 말일세. 자고로 무인은 자신을 믿어주는 주군에게 충성을 바치는 법이지.”

도제가 부하를 돌아보았다.

“이번 시합. 우리는 어디에 걸었지?”

“아직 걸지 않았습니다만.”

“그래? 그럼 우리도 권왕에게 걸어보지. 백만 냥 정도.”

“알겠습니다.”

“……!”

멀찍이 떨어져서 천신우와 도제의 대화를 엿듣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설마 도제가 권왕에게 돈을 걸리라곤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이러다 정말 권왕이 이기는 것은 아니겠지?”

“설마…….”

“너무 겁먹지 말자고. 그만큼 배당이 올라갈 테니.”

도제가 고개를 돌리자 수군거림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물론 도제는 무신을 돌아본 것뿐이었다.

풍채가 크고 인상이 강한 도제에 비해 무신은 체구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도제 앞에서도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자네도 걸지 그러나.”

“좋네.”

무신은 선뜻 도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우리도 권왕에게 백만 냥 걸도록.”

“의외로군.”

“의외랄 것까지야. 자고로 도박은 이기는 쪽에 거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무신의 선언에 이제 주위는 혼돈의 도가니로 변해 버렸다.

무신과 도제.

무림맹을 대표하는 절대 고수들이 모두 권왕의 승리를 점찍은 것이다.

“이러면 우리도 권왕에게 걸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지. 이럴 때일수록 천비자에게 걸어야지. 덕분에 배당이 제법 올라갔을 텐데.”

“그래도 무신과 도제의 안목을 무시할 수는…….”

시합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래저래 혼란에 빠진 사람들이었다.

천신우는 그들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벌써 놀라긴 이를 텐데.’

다른 사람들의 비무가 이렇게 기다려지긴 처음이었다.

* * *

같은 시각.

비무대 뒤에선 비무대회 참가자들이 시합을 준비 중이었다.

“많이 소란스럽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사내는 다름 아닌 천비자였다.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상황을 파악하고 돌아온 무인이 고개를 조아렸다.

“무신과 도제 어르신께서 오신 모양입니다.”

“그게 정말인가?”

반색하는 천비자.

무인은 차마 진실을 밝힐 자신이 없었다.

무신과 도제가 상대편에게 백만 냥씩 걸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려웠기에.

결국, 무인은 천비자가 듣기 좋아할 만한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금와전장 장주를 비롯해 수많은 거물이 경기장을 찾았습니다.”

“하하하. 그렇단 말이지.”

천비자는 명예욕이 아주 강한 인물이었다.

남들 부럽지 않은 명성을 얻었음에도 만족하지 못했다.

비무대회에 참가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너무 빨리 끝내면 기껏 찾아온 귀빈들에게 예의가 아니겠군.”

이미 승리를 확신하는 천비자였다.

때마침 진행요원이 들어왔다.

“준비 끝나셨으면 저를 따라오십시오.”

진행요원을 따라 밖으로 나온 천비자는 새삼 놀랐다.

관중석에 빈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관중이 많아지면 부담 때문에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무인들도 많다.

하지만 천비자에겐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아주 좋군.”

기분 좋게 웃으며 천비자가 비무대 위로 올라섰다.

“저놈인가.”

반대편에서 권왕이 올라오고 있었다.

“확실히 보통 놈은 아니군.”

권왕을 보고 천비자가 떠올린 감상이었다.

특히 단련된 육체는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물론 감상은 거기까지.

다음 순간 천비자는 모든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스르릉.

검이 뽑혀 나오는 순간 천비자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

관중들조차 숨을 죽일 정도였다.

무신과 도제의 식견을 믿고 권왕에게 돈을 걸었던 이들이 탄식을 내뱉었다.

이미 여러 차례 다른 시합이 진행됐지만 천비자처럼 강한 느낌을 주는 고수는 없었던 것.

자연히 사람들의 시선이 권왕에게 향하는 순간, 감독관이 깃발을 내렸다.

“시작!”

그 즉시 권왕이 바닥을 박찼다.

콰앙!

그야말로 비무대를 박살 내며 날아오른 권왕이 천비자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어림없다!’

천비자는 당황하지 않고 몸을 틀었다.

때문에 권왕의 주먹은 천비자의 얼굴 옆을 스치고 지나갔을 뿐이다.

하지만 수월하게 피해냈음에도 천비자는 반격하지 못했다.

부우우웅!

풍압에 몸이 휘청거렸기 때문이다.

‘이런 미친!’

가까스로 균형을 잡은 천비자에게 권왕의 주먹이 재차 날아들었다.

아까와 똑같은 방향과 속도.

만일 다른 상대였다면 천비자는 비웃었을 것이다.

같은 공격이 다시 통하리라 생각했느냐고.

바로 상대를 응징해 줬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천비자는 피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부우웅!

연거푸 날아드는 주먹을 피해 천비자는 계속해서 뒤로 물러났다.

‘어느새…….’

비무대 끝자락까지 내몰린 천비자가 다급히 검을 내질렀다.

쉬이익!

보는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일격이었다.

하지만 권왕의 대응은 한결같았다.

일직선으로 뻗어진 주먹이 검과 부딪혔다.

콰아앙!

천비자는 이를 악물었다.

정말이지 검을 놓칠 정도로 강한 충격이었다.

쾅쾅쾅!

급기야 천비자의 검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흐아아압!”

이대로는 힘들다고 판단한 천비자가 기합을 내지르며 권왕의 가슴을 노렸다.

검이 권왕의 가슴을 베어가는 순간 천비자는 마음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퍼어억!

권왕의 주먹이 천비자의 얼굴을 강타했다.

순식간에 한참을 날아간 천비자가 경기장끼리 구역을 나누는 벽에 처박혔다.

콰아앙!

모두가 경악할 상황.

그러나 정작 권왕은 천비자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심드렁한 표정으로 가슴에 박힌 검을 뽑아 던져 버렸다.

철커덩.

쇳소리와 함께 장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침묵 속에서 천신우와 만금소의 시선이 마주쳤다.

미소와 함께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는 천신우.

분노를 참지 못한 만금소가 이를 악물었다.

으드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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