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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환생-90화 (90/171)

# 90

학사환생 090화

복면을 벗은 중년인과 천신우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틀림없다. 장우진이 확실해. 무신이 보냈군.’

천신우가 중년인의 정체를 알아본 순간, 중년인도 천신우를 알아보고 미소 지었다.

“자네가 천씨세가 소가주로군. 만나서 반갑네.”

“혹시 무신 어르신이 보내신 분입니까?”

“그렇다네. 나는 무신 어르신을 모시는 장모라는 사람일세. 무림맹 내부의 견제가 심해 무신궁 무인들을 움직일 수가 없어 나를 보내셨네.”

장우진은 무신궁 소속은 아니지만, 무신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무인이었다.

‘그중에서도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실력자지.’

무림맹 시험에 투입됐던 무영과는 격이 다른 고수가 천신우를 돕기 위해 파견된 것이다.

무신이 천신우를 얼마나 아끼는지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다만 혼자 오다 보니 제때 합류하지 못했군.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네.”

“아닙니다. 이렇게 멀리까지 와주신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합니다.”

무신궁에서 대규모 인원을 파견했다면 모를까. 장우진 혼자서 바다를 항해하는 천씨세가 선단에 합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무엇보다 도중에 항로가 바뀐 점도 컸다.

물론 천신우 입장에선 아쉬울 것이 전혀 없었다.

‘장우진 같은 고수와 안면을 텄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그때 장우진의 시선이 바닥에 쓰러진 백린에게로 향했다.

과다출혈로 인해 백린은 이미 정신을 잃은 후였다.

천신우가 설명했다.

“만금소가 이번 일에 끌어들인 자입니다.”

“그런가.”

장우진은 이내 백린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소가주를 노린 자이니 처분도 직접 하시게.”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천신우는 주저 없이 백린의 목을 날려 버렸다.

서걱!

‘그나저나 항상 생각하는 건데 마교의 일 처리는 정말 냉정하군.’

마교는 현장에 임무를 일임한 이상 결과가 나오기 전까진 간섭하지 않는다.

‘게다가 남들이 개입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지.’

이번에도 일단 백린이 나선 이상 마교의 개입이나 만금소의 지원은 없다고 봐야 했다.

물론 백린이 실패하기 전까지의 이야기.

백린이 죽은 지금, 천신우를 겨냥한 마교의 활시위는 더욱 팽팽하게 당겨질 것이다.

“기왕 오신 김에 금와전장과의 거래를 보고 가시겠습니까?”

가까워지는 천씨세가 고수들의 기척을 느끼며 천신우가 장우진에게 물었다.

“그런 자리에까지 나설 생각은 없네. 그래도 어르신의 지시가 있었으니 거래가 끝날 때까지 동행하기로 하지.”

“그럼 차라도 마시면서 여독을 푸시지요. 마침 좋은 차가 있습니다.”

“후후. 그거 기분 좋은 소식이군. 내가 차를 좋아한다는 소문은 어디서 듣고.”

장우진의 물음에 천신우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 * *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도중에 수적들의 습격을 받으셨다고 들었는데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거대한 물류창고를 앞에 두고 염소수염의 중년인이 천신우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는 금와전장의 제3총관으로 이번 광물 인도 계약의 실무자였다.

무림 곳곳에 세워진 지점만 수십 곳이 넘어가는 금와전장이다.

그런 금와전장에서 제3총관이라는 것은 그만큼 능력이 뛰어나단 의미.

동시에 만금소가 이번 거래를 얼마나 중요시하는지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했다.

“걱정해 주신 덕에.”

물론 속사정을 아는 천신우로서는 결코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제3총관은 천씨세가를 탈탈 털어먹으려고 만금소가 보낸 청부사라고 봐야 했다.

거기에 더해 천신우의 신경을 건드리는 사실 하나 더 있었다.

‘뻔히 금와전장의 고수들이 우리 천씨세가를 습격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시치미를 떼다니. 정말이지 만금소와 다를 바가 없는 놈이군.’

천신우의 냉랭한 시선에도 제3총관은 넉살 좋게 웃기만 했다.

“물량을 확인할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주시지요.”

제3총관은 계약서와 천신우가 가져온 광물을 꼼꼼하게 대조했다.

단순히 수량만 맞춰보는 수준을 넘어 혹시라도 중간에 광물을 바꿔치기하지 않았는지 강도까지 확인했다.

언뜻 보기엔 일반적인 거래장면이었지만, 사실 금와전장 제3총관의 속내는 전혀 달랐다.

‘설마 여기까지 무사히 당도할 줄은 몰랐군.’

어제까지만 해도 제3총관은 이번 거래가 불발될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만금소가 미리 언질을 줬으니까.

당연히 미리 준비한 서류 역시 위약금과 관련된 것이었다.

하지만 천신우는 멀쩡한 모습으로 광물을 운반해 왔다.

만금소의 부하들이 전부 실패했다는 의미. 그들은 아마 지금쯤 바다 아래 수장됐을 것이다.

‘천신우…… 정말 대단한 놈이야.’

이미 제3총관은 머릿속으로 천신우가 이번 거래로 얻을 이익을 계산한 후였다.

막대한 운임. 거기에 해상교역로에 대한 영향력까지.

이번 거래에서 얻은 이익만으로도 천신우는 무림에서 손꼽히는 갑부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천신우의 앞날이 장밋빛인 것만은 아니었다.

앞으로 만금소의 총공세를 견뎌내야 함은 물론.

‘지금까지 우리 금와전장 때문에 해상교역로로 진출하지 못했던 세력들의 도전까지 받게 될 거다. 차라리 물속에 처박혀 죽는 게 나았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물론 제3총관은 그런 속내를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확인했습니다. 대금은 계약서에 따라 금와전장의 전표로 지급하겠습니다.”

이미 천신우가 거래장소에 나타난 지금, 더 이상의 수작은 무의미했다.

대놓고 수작을 부렸다간 문제가 커질 수 있다.

그렇게 겉으로 보기엔 아주 깔끔하게 천씨세가와 금와전장의 거래가 마무리됐다.

그러나 거래가 끝난 시점에서 이미 천신우와 제3총관은 이후의 일들을 생각하기 바빴다.

‘금와전장의 자금력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아무리 낮게 잡아도 우리와의 거래로 인해 입는 손실을 몇 년은 버틸 수 있을 터. 그러나 과연 만금소의 인내심이 그때까지 바닥을 드러내지 않을까?’

천신우는 고개를 저었다.

만금소의 인내심은 아무리 오래 걸려도 반년 안에 바닥날 것이다.

어쩌면 이미 다음 계획을 준비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어느 쪽을 택할까? 도제? 마교? 그것도 아니면 제3세력?’

전생에선 마교를 택한 만금소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러리란 보장은 없었다.

‘구왕들의 은닉재산을 선점하지 못한 데다, 이번 일로 막대한 손실까지 입었으니까.’

단지 금전적 손해의 문제가 아니다.

마교가 중시하는 것은 능력.

두 번의 실패를 통해 무능한 존재로 낙인찍혔다면 마교는 만금소와의 접점을 끊어버릴지도 몰랐다.

‘만금소의 동향을 주시해야겠군.’

한편 만금소 밑에서 오랫동안 일한 제3총관은 보다 구체적인 시기를 예상했다.

‘기고만장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새해 전에는 어르신께서 네놈을 요절내실 테니 말이야. 흐흐흐.’

서로의 생각을 숨긴 채로 천신우와 제3총관이 돌아섰다.

* * *

천씨세가와 금와전장의 거래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는 소식은 빠르게 무림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당연히 그걸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만금소의 실체를 아는 이들이었다.

“만금소가 작정하고 움직이겠군.”

“해상교역로를 내주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을 테니.”

“천씨세가는 무신궁과 손을 잡았다던데. 그럼 만금소는 도천과 손을 잡겠군.”

“드디어 무신과 도제가 일전을 벌이는 건가? 무림맹주가 이걸 그냥 두고 볼지 궁금한데.”

물론 진짜 내막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극소수였다.

그들 중에서도 가장 진실에 근접해 있는 마교 최고 후기지수 진사명의 숙소.

문을 덜컹 열고 들어온 화사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거봐! 내가 뭐라고 그랬어!”

정자세로 앉아 책을 읽던 진사명은 조용히 책장을 덮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화사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백린 그 머저리한테 일을 맡기니 이런 문제가 생기지. 나한테 맡겼으면 진작 처리했을 텐데.”

창가로 다가간 화사가 양팔로 창문틀을 짚었다.

그녀의 길게 뻗은 다리는 무척이나 도발적이었지만 진사명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그의 무덤덤한 반응에 실망했는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화사가 물었다.

“이제 어쩔 건데?”

굳게 다물려 있던 진사명의 입이 열렸다.

“만금소에게서 손을 뗀다.”

“뭐라고? 방금 뭐라고 했어?”

화사는 깜짝 놀랐다.

진사명이 이렇게 나올 거라곤 정말이지 상상도 못 했기에.

“만금소에게 지금까지 들인 공이 얼만데 그걸 포기한다고? 잠깐. 그거 우리가 금와전장을 접수하겠다는 의미야?”

진사명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그럼?”

화사는 설명을 요구하는 얼굴로 진사명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고양이처럼 빛났다.

“만금소는 이번 일로 깨달았을 거다. 천씨세가의 저력이 생각 이상임을.”

그리고 그건 진사명 역시 마찬가지였다.

‘분명 얼마 전에 장서각에서 천신우 그놈과 마주쳤을 때는 그렇게까지 압도적인 느낌은 아니었어.’

천신우가 그날의 마주침을 기억하듯, 진사명 또한 그날을 기억했다.

물론 진사명은 알지 못했다.

‘대체 그새 놈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날 천신우가 장서각에서 만상서고의 세 번째 단서를 얻었다는 사실을. 그로 인해 벽을 뛰어넘었다는 것도.

하지만 진사명은 이내 의문을 털어버렸다. 알아낼 수 없는 일에 집착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다.

“물론 만금소가 전력을 총동원하면 천씨세가를 누를 수 있겠지. 하지만 섣불리 움직이진 못할걸.”

금와전장의 영역은 무림 전역이다.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무림 전역에 영향을 끼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한데 힘을 집중시키기 어렵다는 뜻이 된다.

“무엇보다 만금소는 적이 너무 많아.”

만금소가 아무리 위선자 행세를 하며 평판을 관리했다지만.

결국, 그에게 당한 사람들은 원한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손을 벌리는 방법뿐이지. 선택지는 우리와 도제. 천씨세가를 완벽하게 제압할 힘을 가졌으면서 동시에 무신의 영향력에서도 자유로우니까.”

무림맹주는 애초에 논외다. 무림맹주는 금와전장의 경쟁상대인 만수전장과 밀접히 연관돼 있기에.

“생각해 봐.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만금소 손을 놓아버리면 어떻게 될지.”

현재 만금소는 도제와 마교 중에 누굴 선택할지 저울질하고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을 택하면 손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지.

그런데 마교라는 선택지가 사라져 버린다면?

“울며 겨자 먹기로 도제를 택할 수밖에 없겠네?”

진사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사는 여전히 의문스러웠다.

“그럼 도제의 세력이 너무 커질 텐데? 아무리 만금소라도 거래를 위해선 도제에게 많은 부분을 양보할 수밖에 없으니.”

당초 금와전장을 내세워 무림의 자금을 긁어모은다는 진사명의 전략과도 충돌했다.

“기껏 금와전장을 키워놓고 그걸 도제에게 고스란히 넘겨주겠다고? 이걸 그분들이 허락하실까? 혹시나 착각할까 봐 덧붙이는데 걱정해 주는 거 아니야.”

“도제가 지금까지 무신과의 전면전을 꺼린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지?”

“힘이 부족하다고 판단해서?”

“그래. 그런데 이제 금와전장의 재력이라는 힘이 생기게 된다. 심지어 금와전장에서 재력을 내어주는 대가로 요구하는 것은 천씨세가의 몰락.”

이제 화사도 진사명이 그리는 그림의 윤곽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천씨세가는 무신과 밀접한 관계니까 결국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겠네.”

도제와 금와전장.

무신과 천씨세가.

세력과 세력 간의 대결이 벌어질 터였다.

“누가 이기든 서로 힘만 약화된다면 우리로선 이득이지.”

화사가 기다란 혀로 입술을 핥으며 물었다.

“알았으니까 말해줘.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건지.”

“먼저 도제에게 힘을 실어줬으니 무신에게도 그에 맞는 힘을 줘야겠지. 물론 도제가 눈치채지 못하게.”

진사명의 머릿속엔 이미 여러 가지 방법이 떠오르고 있었다.

도제뿐만 아니라 무신의 수족 중에도 끄나풀을 숨겨놓은 그였다.

‘천신우. 네놈의 의외성만큼은 인정하마. 하지만 기뻐하긴 일러. 길이 달라졌어도 결국 도착하는 곳은 같을 테니.’

장서각에서 봤던 천신우의 얼굴을 떠올리며 진사명은 미소 지었다.

남들 앞에선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소름 끼치는 미소였다.

* * *

금와전장과의 거래를 마치고 천씨세가로 복귀한 무인들의 표정이 밝았다.

“이제 우리 천씨세가는 앞으로 나아갈 일만 남았군.”

“그러게 말일세. 금와전장의 콧대 높다는 제3총관마저 소가주님 앞에선 저자세로 나오지 않았나.”

물론 그건 내막을 아는 실무진들로선 그저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당장은 이익이 크겠지만 과연 만금소가 가만히 있을까요?”

외당주 경총의 의견에 천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요. 아마 어떤 식으로든 수작을 부릴 겁니다. 그러니.”

천신우가 경총을 비롯한 천씨세가 실무진들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철저히 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책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천신우를 동생 천신혁이 기다리고 있었다.

“형님!”

“무슨 일이냐?”

“글쎄 말입니다! 신창이 맞붙어 승부를 내지 못한 신진고수가 있다고 합니다!”

천신우는 비밀경매에서 신창의 애병을 봤던 기억을 떠올렸다.

‘확실히 이맘때쯤이면 신창이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겠군. 그런데 신창과 비등비등한 신진고수가 있다고?’

천신우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가 누구라더냐?”

“이름은 모릅니다. 다만 신창과의 비무 이후 사람들이 그를 검성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더군요.”

검성이라는 별호를 듣는 순간 천신우는 머릿속에서 번개가 치는 기분이었다.

‘검성? 설마……!’

천신우의 시선이 자운검에 내리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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