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학사환생 088화
금와전장의 고수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밀려드는 파도를 막아냈다.
서문비 역시 날이 시퍼런 박도를 휘둘러 파도를 반으로 갈라 버렸다.
하지만 배가 박살 나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
꽈앙!
하갑판이 박살 나며 그들이 타고 있던 배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균형을 잡은 금와전장의 고수들이 눈매를 좁혔다.
“네놈은……!”
“천씨세가 소가주? 저놈이 어떻게 이곳에!”
현실은 금와전장 고수들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만금소의 부하들이 천씨세가 선단을 끌고 온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심지어 백산도 작전의 총책임자인 자성은 보이지도 않았다.
금와전장의 고수 하나가 물었다.
“자성 그놈은 지금 어디에 있지?”
천신우는 대답 대신 공중에 떠오른 상태에서 검을 내려쳤다.
쏴아앙!
뱃전이 썰려 나가며 물기둥이 솟구쳤다.
옆에 있던 또 다른 고수가 다급히 소리쳤다.
“여기 없는 놈 신경 쓸 시간에 저놈부터 막아!”
기세 좋게 외친 것까진 좋았지만 그는 놓치고 말았다.
물기둥 뒤에서 나타난 천신우의 모습을.
“……!”
반사적으로 검을 내지르려 했지만 이미 천신우의 검이 그의 옆구리를 베고 지나갔다.
천신우가 뱃전에 사뿐히 내려서는 순간.
촤아악!
옆구리가 갈라진 금와전장 고수의 배에서 피분수가 솟구쳤다.
“이놈!”
졸지에 동료를 잃은 금와전장의 고수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나한텐 기습 따위 통하지 않는다!”
“과연 그럴까.”
천신우는 턱수염 사내의 대도를 쳐내고 곧바로 가슴팍에 자운검을 쑤셔 넣었다.
푸욱!
울컥울컥 피를 토해내는 턱수염 사내의 눈동자가 불신으로 물들었다.
“대체 어떻게……!”
천신우는 대꾸하지 않고 상대의 배를 걷어차며 가슴에 꽂힌 검을 뽑아냈다.
그런 다음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자운검을 높이 치켜들며 외치는 천신우였다.
“모두 진격하라!”
천신우의 활약에 고무된 천씨세가의 선단이 빠르게 물살을 가르기 시작했다.
마침 후방에서 불어온 바람이 진격에 속도를 더했다.
다급해진 서문비가 외쳤다.
“놈들이 합류하기 전에 저자를 제압해야 한다!”
백산도 작전과 달리 이곳엔 금와 전장도 소수 인원뿐이었다.
물론 원래라면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혼자서 충분히 다수를 상대할 수 있는 고수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천신우가 전장을 휘젓는 바람에 이야기가 달라졌다.
지금 상황에 천씨세가 고수들까지 가세한다면 그들로서도 감당해 내기 힘들 터였다.
그걸 아는 그들도 자연스레 마음이 급해졌다.
솨사사삭!
그러다 보니 그들의 공격에도 다급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에 반해 천신우는 서두르지 않았다. 침착하게 적들의 공격을 받아쳤다.
차차차차창!
사방에서 몰아치는 다수의 공격을 혼자서 받아치는 천신우의 집중력에 서문비는 혀를 내둘렀다.
마치 사전에 합을 맞춘 것처럼 금와전장 고수들의 공격은 번번이 빗나갔다.
“……어이가 없군.”
받아치는 것만 해도 놀라운데 거기에 절묘한 반격까지 이어졌다.
서걱!
천신우의 뒤를 노리던 거한의 목이 날아갔다.
“저런 미친!”
서문비는 놀라움을 넘어 황당함을 느꼈다.
저렇게 쉽게 막힐 공격이 아니었다.
저렇게 쉽게 당할 인간들이 아닌 것이다.
아무리 무인의 강함이 상대적이라지만 이건 정도가 심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금와전장의 고수들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을 수행하는 일반 무인들 역시 천씨세가 무인들의 사냥감이 되었다.
“크아악!”
“죽기 싫어……!”
죽음을 피해 바다로 뛰어내리는 금와전장 무인들이 계속해서 늘어갔다.
“이대로 가다간…….”
원래의 임무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전멸할 판인데 임무가 문문제인가.
서문비는 특단의 조치를 취할 필요성을 느꼈다.
“모두…….”
그러나 서문비가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등에 화끈한 감각이 느껴졌다.
“이런 개자식이!”
서문비와 천신혁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얼마 전에 천무검법 8성에 도달한 천신혁이다.
물론 그것만으로 금와전장에서도 고수로 꼽히는 서문비를 상대하긴 어려웠다.
만일 서문비가 다른 곳에 정신을 팔지 않았다면, 천신혁에게 불의의 일격을 허용하는 일은 없었을 터였다.
“오냐!”
서문비는 잠시나마 도망가려 했던 생각을 버렸다.
“이곳에 모조리 수장시켜주마!”
서문비가 본격적으로 밀어붙이자 천신혁은 막아내기 급급했다.
하지만 천신혁은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 천씨세가의 빈객들까지 가세하자 서문비는 분통을 터뜨렸다.
“빌어먹을!”
그들 중엔 서문비조차 쉽게 상대하기 어려운 고수도 존재했다.
천씨세가의 달라진 위상을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합공을 당한 서문비가 위협적으로 박도를 휘두르며 뒤로 훌쩍 물러났다.
“버러지 같은 놈들이 감히!”
그의 얼굴과 옆구리에선 이미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다.
죽음을 직감한 서문비가 절규하듯 외쳤다.
“죽고 싶거든 덤벼라!”
상처 입은 맹수의 마지막 발악!
천신혁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몸을 날렸다.
“오냐! 소원대로 죽여주마!”
서문비의 박도가 가로로 그어졌다.
하지만 천신혁은 놀라운 반응을 보여주며 서문비의 공격을 피해냈다.
물론 서문비도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곧바로 몸을 틀며 이번엔 사선으로 도를 날렸다.
“이것도 피해 보아라!”
하지만 서문비의 박도가 천신혁의 몸에 닿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도가 천신혁에게 닿기 전에 천씨세가의 빈객들이 거의 동시에 서문비의 몸에 칼을 꽂아 넣은 것이다.
푸우욱!
“개자식들…….”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서문비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미처 천신혁의 몸에 닿지 못한 박도가 서문비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철커덩.
“이 공자! 괜찮소?”
“이 공자님! 방금 굉장했습니다! 금와전장의 서문비와 호각을 이루시지 않았습니까!”
천씨세가 고수들의 흥분한 목소리에도 천신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정말 대단한 사람은…….”
천신혁의 시선이 천신우를 향했다.
어느덧 천신우 앞에 서 있는 상대는 웃고 있는 사내 하나가 유일했다.
물론 그가 웃고 있는 것은 승리를 자신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였다.
“나는 알고 있었지. 네놈이 이렇게 강하다는 사실을.”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굳이 위험을 경고하지 않은 것은 사내의 특이한 성격 때문이었다.
흘러내리는 피를 지혈할 생각도 하지 않고 사내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만금소 그 늙은 돼지가 네놈만큼이나 강한 자를 끌어들였다는 사실도 알고 있지.”
사내가 피로 표식 하나를 그려보였다.
“이 표식, 본 적 있나?”
사내가 그린 것은 바로 마교에서 사용하는 표식이었다.
물론 팔마존의 표식과는 달랐다.
“크크큭. 하긴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어차피 조금 있으면 서로 한판 붙게 될 테니.”
의식이 희미해지는지 사내가 갑판 위에 드러누웠다.
“그 좋은 구경을 못해서 아쉽군.”
하늘을 바라보며 대자로 누운 사내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숨을 거둔 것이다.
“형님!”
천신혁이 천신우에게 달려왔다.
“저자가 무슨 말을 한 겁니까?”
“만금소가 이놈들보다 더 강한 고수를 준비한 모양이야.”
“……그게 사실이라면.”
천신혁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는 방금 서문비조차 당해내지 못했기에.
“너무 걱정하진 말고.”
천신우가 동생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내가 있잖느냐.”
그제야 표정이 밝아지는 천신혁이었다.
천신우도 함께 미소를 지어주고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상륙을 준비한다!”
* * *
백산도 전투에 이어 금와전장의 고수들까지 격파한 천씨세가다.
그러나 그들의 피해는 극히 적었다.
천신우가 누구보다 앞장서서 싸운 덕분이었다.
마침내 마지막 항구에 상륙한 천씨세가 무인들이다.
“지금까지 모두들 정말 고생 많았다. 하지만 아직 다 끝난 것이 아니다.”
천신우는 마지막까지 천씨세가 무인들이 방심하는 일이 없게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곳에서 하루 떨어진 금와전장의 물류창고에 광물을 인도해야 비로소 이번 일이 끝이 난다. 그때까진 모두 긴장을 늦추지 말도록!”
천씨세가 무인들의 함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거듭되는 승리로 그들의 사기는 최고조였다.
“확실히 수레를 수배하기 어렵군요. 금와전장 쪽에서 미리 손을 썼다고밖에는…….”
보고하는 외당주 경총의 표정도 전에 없이 밝았다.
“확실히 형님 말씀대로 미리 수레를 배에 싣고 오길 잘했습니다. 이제 보니 만금소는 정말 치졸한 인간이었군요.”
새삼 천신우의 준비성에 감탄하는 천신혁이었다.
만일 금와전장에서 협조를 아끼지 않으리라 생각해서 배만 끌고 왔다면 낭패였을 것이다.
“이렇게 대놓고 훼방을 놨지만, 막상 거래가 이뤄질 때는 웃는 낯으로 우리를 대할 거다. 그게 만금소의 무서운 점이지.”
천신우는 이미 금와전장이 천씨세가와의 거래에서 이득을 극대화하기 위해 수작을 부릴 것을 밝혔다.
처음엔 설마설마하던 천신혁이나 천씨세가 지휘부도 이제 만금소의 속셈을 알아차린 상황이다.
모두가 긴장을 늦추지 않는 가운데 광물을 인도하기 전의 마지막 밤이 찾아왔다.
* * *
늦은 시각.
경치 좋은 정자에 두 노인이 마주 앉아 있었다.
“이번에 힘을 써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정중한 태도로 먼저 인사한 것은 금와전장의 장주 만금소였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네.”
만금소 앞에 마주 앉은 풍채 좋은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바로 도제였다.
무신과 더불어 무림맹을 이끌어나가는 거물답게 천하의 만금소를 하대하는 모습. 그러나 만금소가 신경 쓰이는 사실은 따로 있었다.
‘여전히 술은 입에도 대지 않는군.’
술만이 아니다.
도제는 여인도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도제가 원래부터 술과 여자를 멀리했던 것도 아니다.
‘권력을 쥐고자 모든 욕망을 억누르는 지독한 자다. 절대 쉬운 상대가 아니야.’
형식적인 인사만을 나눈 도제와 만금소가 무언의 신경전을 벌이던 그때.
도제의 심복이 정자로 달려왔다.
“천주님!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도제의 기반세력은 도천.
그렇기에 도제는 추종자들에게 천주라고 불렸다.
심복에게 보고를 들은 도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도제의 표정엔 전혀 변화가 없었지만, 만금소는 상인 특유의 감으로 일이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의 직감은 정확했다.
“장주님! 급보입니다!”
한발 늦게 정보를 입수한 금와전장의 무인이 만금소에게 알렸다.
백산도 작전에 이어 금와전장의 고수들까지 천씨세가에 당했다고.
“…….”
최악의 결과에도 만금소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그는 알았다. 지금 감정을 드러냈다간 도제에게 물어뜯길 거란 사실을.
만금소를 가만히 바라보던 도제가 술 대신 물을 들이켰다.
“기껏 무신의 발목을 붙잡아뒀더니만…… 괜한 수고를 했어.”
만금소의 청탁을 받고 무신이 천신우를 돕지 못하게 손을 썼던 도제다.
만금소가 고개를 숙였다.
“면목이 없습니다.”
“아닐세. 그럴 수도 있지.”
도제가 덧붙였다.
“그리고 이번 일이 틀어졌다고 해서 금와전장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잖은가.”
그건 사실이었다.
서문비와 자성을 비롯한 고수들이 죽었다지만 아직 금와전장엔 그보다 많은 고수가 남아 있었다.
만금소의 재산 역시 마찬가지.
설령 거래가 원래 조건대로 진행되더라도 만금소는 충분히 버틸 여력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면 좋을 텐데 말일세.”
뼈있는 말이었다.
금와전장은 이번 일로 해상교역로에 대한 영향력을 일정 부분 상실할 터였다.
천씨세가가 그 빈자리를 파고들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천씨세가와 금와전장의 본격적인 전쟁은 이제 시작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장주도 아직 믿는 구석이 있다는 건 나도 알고 있네.”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만금소는 적잖이 놀랐다.
도제는 이미 만금소가 정체불명의 세력과 접촉한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충고 하나 하지. 그들을 너무 믿지 말게.”
의미심장한 발언에 만금소가 눈을 가늘게 떴지만, 도제는 이미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후였다.
“밤이 너무 깊었군. 먼저 일어나겠네.”
“살펴 가십시오. 생신날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도제가 사라지고 나서도 만금소는 한참이나 자리를 뜨지 않았다.
‘나도 안다. 그들이 위험하다는 것쯤은. 하지만 그건 도제 네놈도 마찬가지 아니더냐.’
무신의 개입을 막아주는 대가로 도제에게 많은 것을 지불한 만금소다.
하지만 방금의 대화를 통해 만금소는 확신할 수 있었다.
도제는 전혀 만족하지 않았다는 것을. 금와전장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어내려고 하고 있음을.
‘이렇게 된 이상, 그자가 해줘야 한다.’
일단 천씨세가를 집어삼켜야 도제든, 정체불명의 세력이든 상대할 여력이 생기는 것이다.
‘부디 좋은 소식이 들렸으면 좋겠군.’
만금소는 백린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원했다.
* * *
같은 시각.
천신우는 깨어 있었다.
금와전장의 고수를 통해 마교가 개입한 정황을 파악한 그였다.
‘마교가 직접 움직인다면 오늘 밤일 가능성이 크다.’
거래가 끝나고 나면 개입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줄어드니까.
‘많아 봐야 둘을 넘기지 않겠지.’
마교의 추종자들이야 떼로 몰려다니지만 마교는 다르다.
‘놈들은 소수정예니까.’
전생에서 무림맹을 직접 침공할 때도 마교의 병력은 많지 않았다.
천신우는 오늘도 그럴 것이라 예상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숙소를 나와 달이 떠오른 밤하늘을 바라보던 천신우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달빛도 구름 사이로 자취를 감췄다.
어둠 속에 누군가 서 있었다.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짜릿한 감각이 온몸을 휘감았다.
상대는 낮에 해상에서 상대한 금와전장의 고수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실력자였다.
마교 후기지수 백린 역시 천신우를 알아보았다.
“천신우? 맞지?”
어둠 속에서 백린이 이빨을 드러내며 하얗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