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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환생-87화 (87/171)

# 87

학사환생 087화

“……!”

백산도 도주는 정말이지 눈앞의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천씨세가와 금와 전장의 일전.

‘당연히 결과는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건만.’

그의 생각에 천씨세가가 금와 전장을 상대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는 꼴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천씨세가 무인들은 백산도 도주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

무공도 뛰어났지만, 무엇보다 투지 면에서 만금소의 부하들을 압도했다.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천씨세가 무인들 앞에서, 만금소의 부하들은 하나둘 쓰러져갔다.

심지어 천씨세가의 무인들은 지금의 전투를 통해서 성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착각이 아니야. 싸움이 거듭될수록 놈들은 점점 강해지고 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지난 세월 동안 맹훈련을 거치며 정예로 거듭난 천씨세가 무인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유일하게 부족했던 것이 바로 실전경험이었다.

물론 한수 지역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전투를 경험하기는 했지만, 만금소의 부하들처럼 강한 적을 상대하는 것은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었다.

싸움이 길어질수록 경험이 축적된 천씨세가 무인들은 더욱 강해졌다.

‘아무리 만금소의 부하들이 최정예는 아니라지만 머릿수가 훨씬 많거늘 어찌…….’

천씨세가가 수적 열세와 경험 부족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

바로 천신우의 존재였다.

문자 그대로 전장을 지배하는 천신우를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다.

‘설마 자성 저 인간조차 당해내지 못할 줄이야.’

백산도 작전의 총책임자인 자성은 천신우를 당해내지 못하고 절벽 아래로 추락한 상태였다.

“빌어먹을……!”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자성이 돌무더기를 떨쳐내며 일어났다.

자성의 잘생긴 이마는 상처로 가득했다.

물론 그가 얻은 것은 상처만이 아니었다.

방금의 격돌로 그는 천신우와의 격차를 확실히 깨달았다.

‘어르신의 말씀이 틀렸다. 나로선 도저히 저놈을 상대하지 못해.’

뼈저린 현실 파악.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아날 수는 없었다.

이대로 돌아갔다간 만금소의 추궁을 피하지 못할 것이기에.

‘어차피 원래 그리려던 그림은 어그러졌다.’

광물을 강탈하고 천씨세가에게 위약금까지 물리는 것이 당초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제 광물을 강탈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도대체 무슨 수로 천신우를 제압하고 광물을 빼앗는단 말인가.

‘그렇다면 배와 함께 광물을 가라앉혀 위약금이라도 물게 해야겠지.’

최선의 결과는 아니라도 차선책 정도는 되니 만금소의 분노를 피할 수 있을 터.

결단을 내린 자성이 고함을 질렀다.

“놈들의 배를 가라앉혀라!”

자성의 명령이 떨어지자 만금소의 부하들은 일점돌파를 시도했다.

효과는 확실했다.

띠처럼 펼쳐진 천씨세가의 방어선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한 것.

천씨세가 외당주 경총이 목소리를 높였다.

“막아! 한 놈도 방어선을 통과하게 놔둬서는 안 된다!”

“하아압!”

투혼을 발휘하며 방어선을 지키는 천씨세가 무인들이었다.

천신혁과 고진성을 비롯한 고수들도 방어선에 뚫린 구멍을 필사적으로 메웠다.

그들 사이에서 천신우 역시 미친 듯이 싸우고 있었다.

‘과연 이게 맞는 걸까.’

천신우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자운검으로 적들을 수도 없이 베어 넘기면서도 천신우의 머릿속엔 고민이 가득했다.

불필요한 싸움을 최대한 피한다면 천씨세가 무인들이 입을 피해는 줄어들 것이다.

지금처럼 천신우가 직접 전장에 앞장서서 아군의 피해를 줄이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그래선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나 혼자선 마교 전체를 상대할 수 없으니까.’

결국, 천씨세가 무인들이 마교를 상대할 수 있을 만큼 강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거듭되는 실전을 통해 경험을 쌓아야 했다.

그 과정에서 천씨세가 무인들이 죽거나 다치는 것은 필연이었다.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이 마교와의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건 이상에 가까웠다.

‘알고 있는데도…….’

천신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달랐다.

돈이나 물자야 마교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언제든지 희생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은 다르다.

천신우는 천씨세가 무인들이 죽어 나가는 광경을 보고도 어쩔 수 없다고 넘길 수 있는 냉혈한이 아니었다.

“지금이다! 놈을 죽여!”

천신우를 향해 달려들던 만금소의 부하들이 흠칫했다.

“……!”

천신우와 눈이 마주친 것이다.

차갑게 가라앉은 그 눈빛을 보는 순간, 그들은 감히 천신우에게 다가설 수 없었다.

“뭣들 하는 거냐!”

결국, 보다 못한 자성이 다시 나서는 순간이었다.

복잡한 고민과 번뇌를 털어내듯 천신우가 검을 휘둘렀다.

솨아아악!

그 순간, 만금소의 부하들은 보았다.

천신우 주위에서 바람이 휘몰아치는 광경을. 그 바람이 자성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것도.

“히이익!”

만금소의 부하들은 살기 위해 뒷걸음질 쳤지만, 결과적으로 현명한 판단은 아니었다.

스가가가각!

천신우의 검이 한 차례 사방을 휩쓸고 지나간 자리.

침묵만이 깊게 가라앉았다.

만금소의 부하들은 그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이윽고.

촤아아악!

핏물이 솟구치며 그들의 상체가 터져나갔다.

하체만 남은 그들은 더 이상 사람이라 부를 수 없었다.

너무도 참혹한 광경에 천씨세가 무인들마저 순간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

침묵을 깬 것은 천신우의 동생 천신혁이었다.

“적의 우두머리가 쓰러졌다!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그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온 천씨세가 무인들이 살아남은 만금소의 잔당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만금소의 부하들은 살기 위해 저항했지만 이미 전세는 완전히 기운 후였다.

“으아악!”

밀려난 만금소의 부하들이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해변은 흡사 피바다를 방불케 했다.

그러나 천씨세가 무인들은 만족하지 않았다.

피에 굶주린 야수처럼 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적들의 심장에 검을 꽂고 목을 잘라냈다.

하지만 주목할 만한 천씨세가 무인들의 성장에도 천신우의 표정은 어두웠다.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사망자를 수습하도록.”

전에 유가장의 협조를 받아 편성된 의무대가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천신우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내 실수다.’

지금까지 마음먹은 대로 승승장구해 왔기에 너무 쉽게 생각했다.

어쩌면 책상머리에서 숫자만으로 피해를 추산하던 학사 시절의 먹물이 빠지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했다.

‘내가 좀 더 신중했다면, 내가 좀 더 인명을 소중히 여겼다면…….’

사실 피해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다.

아군보다 훨씬 많은 적을 상대로 한 싸움임을 감안하면 기록에 남을 만한 대승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미 죽은 이들이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니지.’

처음으로 지휘한 대규모 전투에서 뼈저린 교훈을 얻은 천신우였다.

‘앞으론 한 사람도 죽게 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싸움에 임하겠다. 설령 그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할지라도.’

피에 절은 모습으로 천신우는 백산도 도주에게 돌아왔다.

“소가주…… 본인은 그저…….”

서걱!

백산도 도주의 목을 날려 버린 천신우가 놈의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보급물자를 배에 싣도록.”

그들은 수적 출신인 백산도 도주의 부하들이다. 하지만 천신우의 압도적인 무위를 직접 확인한 이상 반발할 수 없었다.

겁에 질린 그들은 서둘러 보급물자를 챙겨 천씨세가 선단에 실었다.

그렇게 출항 준비가 끝나자 천신우는 그들 역시 모조리 목을 날려 버렸다.

“소가주님.”

구왕도 임무를 계기로 천씨세가에 합류한 고진성이 입을 열었다.

모두의 앞이기에 그는 전과 달리 천신우를 존대했다. 소가주의 권위를 존중하는 것이다.

“무인들을 잃으신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이곳 백산도는 버리기엔 아까운 요충지입니다.”

사실 천신우도 동의하는 바였다.

원래 계획 역시 만금소의 부하들을 섬멸시킨 다음, 백산도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백산도를 기반으로 삼는다면 한수 지역에서 시작되는 교역로를 확장시킬 수 있으니까.

“청컨대 백산도를 제게 맡겨주십시오. 전력을 다해 이곳을 천씨세가가 뻗어나갈 거점으로 만들겠습니다.”

구왕에 의해 가족을 잃기 전까지 고검장을 잘 이끌어나갔던 고진성이다.

그라면 믿고 백산도를 맡길 수 있었다.

천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고검장 고수들도 고진성과 함께 백산도에 남았다.

천신우가 만금소와의 거래를 속행하는 동안, 그들은 후방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천신우는 천씨세가 무인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적들의 배에도 인원을 분산시키도록.”

그는 만금소의 부하들이 끌고 온 배로 항해를 계속할 생각이었다.

단순한 전리품 취급이 아니었다.

‘만금소의 세력이 이번 백산도 급습이 성공했다고 믿게 만든다.’

물론 그들의 배만 끌고 간다고 만금소를 속이기 어렵다.

하지만 금와 전장의 보고체계를 역으로 이용한다면 얘기가 달랐다.

‘이게 금와 전장에서 사용하는 은어군.’

천신우는 만금소의 부하들이 사용하는 은어를 해독하는 데 성공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미 전생의 학사 시절, 수많은 암호와 은어들을 해독했던 천신우였기에.

‘대개 급보는 매를 날려 전달하게 마련.’

천신우는 적들의 배에 실려 있던 새장에서 매를 꺼내 날렸다.

훈련된 매는 기억하는 장소를 향해 날아갔다.

당연히 매의 발목엔 종이가 묶여 있었다.

백산도에서의 작전이 성공했음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천신우가 조작한 보고서가 만금소 진영에 전해진다면 당분간은 마음을 놓을 터.

그동안 최대한 빠르게 진격할 생각이었다.

‘이로써 무의미한 소모전을 피할 수 있게 됐다.’

물론 그렇다고 전면전을 피할 수는 없다.

결국, 목적지에 다다르기 전에 한 번 더 큰 싸움이 있을 터.

천신우는 눈을 감고 각오를 다잡았다.

몸이 산산조각이 나더라도 가장 앞에서 싸울 것이다.

* * *

천신우가 조작한 보고서는 만금소 진영에 제대로 전해졌다.

보고서를 받아든 금와 전장 소속 고수 서문비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만금소가 거느린 고수 중에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그였다.

“성공했다는군.”

함께 있던 금와 전장 고수들은 심드렁한 반응이었다.

백산도 작전에 투입된 만금소의 부하들보다 훨씬 실력이 뛰어난 그들이었다.

그러니 백산도 작전이 성공했다는 보고로는 감흥을 느끼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결과지. 고작 천씨세가 따위.”

사실 그들 정도면 무림맹에서도 충분히 통할 만했다.

그런 그들이 굳이 금와 전장에 소속되어 만금소에게 충성을 바치는 이유는 오직 하나.

돈 때문이었다.

금 막대를 일렬로 세운 다음 넘어뜨리기를 반복하는 턱수염 사내도 마찬가지.

“그래서 언제 놈들이 언제 도착한다고?”

“열흘 후.”

“기다리는 것도 일이겠군.”

“돈 벌려면 어쩔 수 있나.”

“그것도 그렇지.”

그들은 저마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확인은 해봐야지. 혹시라도 허위보고면 어쩌려고?”

신중한 인물의 발언.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바다로 나가서 확인이라도 하고 오던지.”

모두가 코웃음을 치는 가운데 서문비가 상황을 정리했다.

“따로 사람을 풀어 알아보지. 특별한 일이 없다면 열흘 후, 이곳에서 모이기로.”

* * *

천신우가 조작한 보고서로 벌어들인 열흘.

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하지만 주어진 열흘의 시간을 쓰는 방법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천씨세가 선단은 만금소의 부하들에게 제압당한 것처럼 위장한 채, 목적지를 향해 쾌속 항해했다.

만금소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수적들이 천씨세가 선단을 발견했지만 아무런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미 금와 전장에서 그들을 막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왔기 때문이다.

물론 그 또한 천신우가 조작한 또 다른 명령서의 힘이었다.

그렇게 열흘이 흘러.

“드디어 오늘이군.”

금와 전장의 고수들이 열흘 전과 같은 장소에 모였다.

호화스러운 배에 탑승한 그들은 자성이 인솔하는 선단을 맞이하기 위해 근해로 나갔다.

사실 그들의 입장에서 자성은 먼저 마중 나가야 하는 거물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자성의 공적을 가로채기 위해서였다.

전공을 세우면 만금소로부터 두둑한 보상을 받을 것이기에.

만금소는 정말 치가 떨릴 정도로 악랄했지만, 적어도 수하들에게 줄 돈을 아끼는 치졸한 위인은 아니었다.

“저기 오는군.”

서문비가 멀리서 접근하는 선단을 바라보았다.

언뜻 보기에도 처음 출발했을 때보다 숫자가 늘었다.

“저게 다 광물을 실은 배란 말이지?”

이번 거래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가장 선두의 배로 향했다.

아직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펄럭이는 깃발을 알아보기란 어렵지 않았다.

“천씨세가? 어째서 천씨세가의 배가 앞장서고 있지? 사전에 저러겠다고 언급을 했었나?”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성이 전공을 내세우기 위해 천씨세가의 배를 타고 오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뱃머리에 서 있는 청년은 만금소의 심복인 자성이 아니었다.

뱃머리 위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전방을 주시하는 그는 바로 천신우였다.

“저놈은……?”

서문비가 눈매를 좁히는 순간이었다.

빠르게 물살을 헤쳐오던 배가 멈췄다.

하지만 천신우는 멈추지 않았다.

파아앗!

뱃머리를 박찬 천신우가 물살 위를 날았다.

서문비를 비롯한 금와 전장의 고수들은 순식간에 접근해 오는 천신우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

다음 순간!

천신우의 검이 일으킨 파도가 그들이 있던 배 위를 덮쳤다.

콰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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