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학사환생 086화
“도대체 무슨 일이!”
당황한 천씨세가 무인들과 달리 천신우는 신속히 지시를 내렸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도록.”
이윽고 조각배에 나눠서 탑승한 정찰대가 항구로 접근했다.
하지만 한참 만에 돌아온 그들의 보고는 절망적이었다.
“무리해서 상륙한다고 해도 보급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항구가 불타고 주민들은 모조리 살해당한 상황. 불길에 휩싸인 거리마다 시체들로 가득했다.
“도대체 어떤 놈들이!”
소식을 전해 들은 천씨세가 무인들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범인들을 응징할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범인들은 이미 범행을 저지르고 유유히 자취를 감춘 후였기에.
으득!
천신우가 이를 악물었다.
만금소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전장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거겠지. 어느 정도는 경고의 의미도 있을 테고.’
하지만 의도가 어쨌든 이건 아니다.
‘무인끼리의 싸움에 일반인들까지 끌어들이다니.’
천신우는 최대한 냉정함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렇다고 분노가 사그라지진 않았다.
오히려 그럴수록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았다.
‘나를 분노하게 하려는 목적이라면 성공했다. 오늘 이곳에서 죽은 희생자들의 원한까지 반드시 갚아주마.’
천신우가 차가운 눈빛으로 외당주 경총을 돌아보았다.
“다른 항구로 이동합시다.”
그러나 기나긴 항해 끝에 도착한 주변의 다른 항구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려 4곳의 항구마을이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경총이 참담한 얼굴로 천신우에게 보고했다.
“이러면 보급을 위해 돌아가거나 백산도 지역을 경유할 수밖에 없습니다.”
“백산도라면.”
천신우는 백산도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백산도는 거대한 모래섬으로 수적들이 지배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이제 확실히 알겠군.’
천신우는 만금소의 의도가 무엇인지 정확히 간파했다.
‘백산도로 끌어들여 광물을 강탈할 생각이야. 백산도는 일단 상륙하면 탈출하기 힘든 지형이니까.’
생각을 정리한 천신우가 모두를 돌아보았다.
“백산도로 간다면 적들이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상대한 어떤 적보다도 강할 것이다.”
기나긴 항해로 지친 상황임에도 천씨세가 무인들은 나약한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천씨세가를 위해 싸우겠습니다!”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함성을 들으며 천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백산도로 간다!”
‘만금소가 싸움을 걸어온다면 피하지 않을 것이다.’
* * *
“육지가 보입니다!”
망루 위에서 전방을 주시하던 무인이 외쳤다.
천신우 역시 갑판 위에 올라 멀리 내다보이는 섬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의 항구들과 달리 백산도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았다.
선상에서 백산도를 바라보던 천씨세가 무인들도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리 단련된 무인이라도 먹어야 산다.
하물며 오랜 항해로 지친 상황.
식수와 식량 보급은 필수였다.
“혹시 모르니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조각배에 탑승한 정찰대가 백산도로 접근했다.
멀리서 보던 대로 과연 백산도에는 침공의 흔적이 없었다.
정찰대 무인들은 직접 상륙해 곳곳을 누빈 끝에 결론을 내렸다.
“이상 없습니다!”
본대로 복귀해 보고하는 무인의 표정이 밝았다.
기나긴 시간을 배에서 먹고 잤으니 지칠 대로 지친 것이다.
“입항하지.”
천신우의 지시에 따라 선단이 백산도 항구로 들어섰다.
외당주 경총만이 불안한 얼굴이었다.
“백산도의 항구엔 많은 배가 정박할 수 있지만 정작 들어가는 길목은 매우 좁습니다. 만일 정박한 상태에서 수적들이 입구를 막기라도 하면 빠져나가기 어려울 겁니다.”
천신우도 예상하는 바였다.
‘아마 그게 만금소의 전략이겠지.’
만금소는 부하들을 시켜 천씨세가 선단을 백산도로 몰아넣고 총공세를 펼칠 것이다.
물론 천신우의 대응책은 언제나 그렇듯 한결같았다.
‘정면으로 돌파한다.’
우회하는 방법이 없진 않다.
아예 다른 항로를 이용한다면 시간은 오래 걸리더라도 백산도를 경유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피해 다니다간 기한을 맞추지 못한다.
만금소 입장에선 계약을 이행하지 못하게만 만들어도 절반의 성공이었다.
그러나 천신우는 절대 그렇게 만금소의 계획에 끌려다닐 생각이 없었다.
이윽고 일렬로 줄을 세워 백산도로 진입한 천씨세가의 선단이었다.
“상륙한다!”
백산도는 자체적으로 식량 생산이 가능할 만큼 커다란 섬이었다.
당연히 섬 안에 숙박시설과 상점가가 두루두루 갖춰져 있었고 섬을 통치하는 도주도 존재했다.
“백산도의 주민들은 천씨세가의 방문을 환영하는 바요.”
구릿빛 피부에 수염을 풍성하게 기른 도주가 직접 나와 천신우 일행을 맞이했다.
수적 출신의 도주는 일당과 함께 백산도에 정착한 인물이었다.
한때 뱃사람 출신이었던 외당주 경총이 귓속말로 보고했다.
“백산도 도주는 예전부터 악명이 높은 수적입니다. 지금이야 웃는 낯을 하고 있지만 언제 돌변할지 모릅니다.”
경총뿐만 아니라 천씨세가 무인들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모습이었다.
물론 백산도 도주라고 선뜻 본색을 드러내진 않았다.
그는 수평선이 내다보이는 해안가에 천막을 치고 천신우 일행을 극진히 대접했다.
밀려드는 파도를 보며 신선한 해산물 요리를 맛보는 경험은 분명 색달랐다.
천신우의 허락하에 가볍게 술잔까지 기울인 천씨세가 무인들이었지만 기강이 흐트러지는 모습은 전혀 없었다.
“한잔하시지요.”
백산도 도주는 천신우에게도 술을 권했다.
천신우도 사양하지 않고 술잔을 받았다.
그렇게 연거푸 잔을 비웠을 무렵. 취기가 오른 백산도 도주가 입을 열었다.
“일개 수적 출신인 본인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아시오?”
천신우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백산도 도주는 자문자답했다.
“무공이 강해서? 운이 좋아서? 아니. 전부 틀렸소. 내가 살아남은 이유는.”
백산도 도주의 눈이 번뜩였다.
“선택을 잘했기 때문이라오.”
“그래서.”
천신우가 술잔을 단숨에 비워냈다.
“오늘 천씨세가를 선택하지 않은 건가.”
“으하하! 역시 듣던 대로 눈치가 빠르군.”
백산도 도주는 대접만 한 술잔을 벌컥벌컥 들이켜더니 손등으로 수염을 훔쳤다.
“강한 쪽을 선택하는 것이 무림의 이치 아니겠나. 그러니 원망하지 말게.”
백산도 도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평선 너머에서 검은 깃발이 펄럭였다.
그걸 시작으로 수십 척의 배가 일제히 출현했다.
수평선을 가득 메운 배들이 빠르게 해안절벽으로 접근하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백산도 도주가 의기양양하게 천신우의 술잔을 채웠다.
“후후후. 죽기 전에 마음껏 마셔두게.”
물론 천신우는 술잔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역시 이렇게 나오는군.’
백산도 도주는 앞에서는 천씨세가를 반기는 척하며 뒤로는 만금소의 부하들을 끌어들인 것이다.
당연히 우발적인 행동이 아니라 사전에 만금소와 합의를 마쳤을 가능성이 컸다.
어쩌면 처음부터 만금소의 수족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어느 쪽이든 현재 천씨세가의 전력이면 해볼 만하다는 것이 천신우의 생각이었다.
앞으로 일어날 마교와의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라도 실전이 필요하다는 판단도 포함되어 있었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천신우가 지시했다.
“전원 전투 준비! 적들이 절벽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막아라!”
차아아앙!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천씨세가 무인들이 병장기를 뽑아 들고 절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적들도 거침없이 움직였다.
“모조리 쓸어버려라!”
만금소의 부하들은 백산도의 입구로 진입해 상륙을 시도하는 한편, 나머지 배들은 근해에 닻을 내렸다.
그리고 작은 배에 나눠 타고 해안절벽에 직접 상륙했다.
해안절벽과 만의 입구를 동시에 점거하려는 양동작전.
천씨세가 외당주 경총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놈들이 상륙하지 못하게 막아라!”
한발 먼저 해안절벽을 점거하는 데 성공한 천씨세가 무인들이다.
하지만 그곳을 빼앗으려는 적들의 기세 역시 만만치 않았다.
절벽 위에서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차차차창!
곳곳에서 검이 부딪치고 화살 비가 쏟아졌다.
첨벙!
배에 구멍이 뚫린 무인들이 아래로 떨어지며 순식간에 바닷물이 피로 물들었다.
쇄도해 오는 적을 막아서던 천씨세가 무인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크허헉!”
비명과 함께 쓰러지는 와중에도 적을 붙잡고 늘어지는 투혼을 보여주는 그였다.
“찰거머리 같은 새끼!”
그를 떼어내기 위해 적이 검을 내려치려는 순간.
푸우욱!
옆에서 달려든 천씨세가 무인이 놈의 옆구리에 칼을 쑤셔 박았다.
“죽어!”
연거푸 칼을 쑤셔 박는 그를 향해 적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천씨세가 무인은 뒤로 물러나기는커녕 오히려 앞으로 뛰어들었다.
“이런 미친 새끼가!”
다섯 자루의 검이 동시에 휘둘러졌지만, 그는 방어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죽어도 네놈 하나는 데려가 주마!”
다섯 자루의 검이 그의 몸에 날아드는 순간이었다.
차차차차창!
단숨에 검들을 튕겨낸 고진성이 적들 한복판에 내려섰다.
“고작 이런 곳에 아까운 목숨 버리지 말게.”
고진성을 필두로 고검장의 고수들이 전선에 합류했다.
천신우의 동생 천신혁도 함성과 함께 검을 휘둘렀다.
“자아! 천씨세가의 힘을 보여주는 거다!”
적들 사이를 헤집는 천신혁의 움직임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지난 수련의 성과를 보여주겠다는 듯이 천신혁은 전장을 헤집었다.
“우리도 밥값들 하자고!”
천씨세가의 다른 빈객들도 질세라 전장에 합류해 활약하기 시작했다.
물론 만금소의 부하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저놈들부터 해치우도록.”
만금소의 심복인 자성이 전장을 주시하며 지시했다.
“존명!”
만금소 진영에서도 정예들이 전장에 가세하며 균형이 맞춰졌다.
채채채챙!
만금소의 부하들이 수도 없이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숫자가 절벽 위로 올라서는 데 성공했다.
“절대 고지를 내주면 안 된다!”
경총의 외침이 무색하게 천씨세가 무인들이 조금씩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적들 뒤편에서 나타난 천신우가 빛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입구를 막고 있던 배를 반파시켜 적들의 진입을 봉쇄한 후에 합류한 것이다.
쏴아아앙!
순식간에 십여 명의 적을 베어 넘기는 천신우의 무위에 백산도 도주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게 무슨……!”
만금소 휘하 고수와 격전을 벌이던 천신혁 역시 탄성을 토해냈다.
“형님!”
“어디서 한눈을 팔아!”
천신혁의 상대가 검을 내질렀지만, 천신혁은 마치 예상한 것처럼 자세를 낮춰 피한 다음 곧장 검을 찔러 넣었다.
푸욱!
그러는 사이 천신우는 맞은편 절벽으로 움직였다.
“뒈져!”
만금소의 부하가 천씨세가 무인의 목을 날리려는 찰나.
놈의 몸통에 실선이 그어졌다.
촤아아악!
몸통이 반으로 쪼개지며 핏물이 쏟아져 나왔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천씨세가 무인이 감사를 표하는 동안에도 천신우의 검은 쉬지 않았다.
절벽 위를 점거하던 만금소의 부하들이 낙엽처럼 쓸려나갔다.
파앗!
공중으로 솟아오른 천신우가 자운검을 내려쳤다.
콰아아앙!
절벽이 쪼개지며 그 위에 있던 만금소의 부하들이 아래로 추락했다.
“크아악!”
깔끔하게 잘려나간 절단면이 배 위로 떨어졌다.
그러나 떨어진 바위에 의해 배가 박살 나는 일은 없었다.
꽈아앙!
쌍검을 사선으로 교차시키며 바위를 쪼개버린 사내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추락하던 자신의 부하들마저 가차 없이 썰어버린 그의 이름은 자성.
만금소의 심복이자 이번 백산도 작전의 총책임자였다.
마침내 절벽에 올라선 자성이 오만한 시선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런 자성을 향해 천신우가 천천히 검을 내려쳤다.
아무런 기세도 실리지 않은 평범한 공격처럼 보였다.
지켜보던 백산도 도주는 코웃음을 쳤지만, 반면 위험을 감지한 자성은 본능적으로 쌍검을 교차시켜 천신우의 검을 막아냈다.
‘하마터면……!’
가까스로 천신우의 일격을 막아낸 자성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바로 그 순간.
그의 무릎이 수직으로 꺾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압도적인 힘의 차이 앞에서 자성의 무릎은 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쿠구구궁!
굉음과 함께 발밑의 절벽이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