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학사환생 085화
장윤호의 설명이 이어졌다.
“서류상으로는 완벽하네. 아무런 결점이 없어. 하지만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오히려 뒤가 구린 자들일수록 서류는 깨끗하더군.”
“그럼 서류를 조작했다는 뜻입니까?”
“그래. 그가 무림맹에 들어와 수행한 임무들을 살펴보니 재미있는 사실이 나오더라고.”
장윤호가 물었다.
“혹시 월성 상단 사건이라고 들어봤나?”
“물론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천신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전생에 내가 담당한 사건인데 당연히 기억하지.’
월성 상단은 규모가 그리 크진 않지만 견실한 사업체로 인정을 받았다.
무림맹과도 주기적으로 거래하며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그러던 월성 상단이 흔들린 것은 총관의 개인 비리 때문이었다.
총관이 거래처와 짜고 허위장부를 작성해 거래대금을 횡령한 것이다.
엄청난 충격에 빠진 월성 상단 소유주는 결국 무림맹에 수사를 의뢰했다.
당시 무림맹 수사대의 협조요청을 받아 월성 상단의 장부를 들여다봤던 천신우다.
물론 이번 생에선 전투 전형으로 무림맹에 들어왔기에 월성 상단과 인연을 맺을 일이 없었다.
“사실 월성 상단 사건 뒷조사를 내가 맡았다네. 비리를 저지른 총관이 뇌물을 써서 수사망을 빠져나가려 한다는 제보가 들어왔거든.”
“그 과정에 진사명이 연루된 겁니까?”
“아니. 그 반대일세. 진사명은 이름만 올렸을 뿐, 정작 임무를 수행한 적이 없다네.”
천신우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그럼 허위로 실적을 쌓았다는 건데.”
“바로 그거야. 분명 내가 확인한 사건 말고도 추가혐의가 있을 거네. 지금 시점에서 3급 출입증을 얻기란 정상적인 방법으론 불가능하거든.”
장윤호가 눈을 빛냈다.
“심지어 내부감찰에서도 아무 문제 없이 넘어갔어. 이건 분명히 누군가 뒤를 봐주고 있는 걸세.”
천신우는 그게 누구일지 짐작이 갔다.
진사명은 감찰각주의 비호를 받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배경이 든든한지는 몰라도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지. 당장 감찰각에 투서를……!”
정의감에 불타오르는 장윤호를 막아 세우는 천신우였다.
“일단은 지켜보지요.”
“어째서? 진사명에 대해 조사해 달라고 부탁한 것은 자네였잖아.”
“기본정보 열람하는 것이야 문제가 되지 않지요. 하지만 진사명에게 수상한 점이 발견된 이상, 대놓고 파고드는 것은 위험합니다.”
“지금 자네가 나를 걱정해 주는 건가? 감동일세. 하하.”
장윤호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천신우는 진지했다.
만일 진사명이 마교와 연관되어 있다면? 그렇다면 감찰각에 투서를 넣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일단 진사명이 감찰각주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은 확인했다. 그렇다면 서둘러서 놈의 실체를 폭로할 필요는 없겠지.’
섣불리 놈들을 자극했다가 증거를 인멸하기라도 하면 피곤해지니까.
‘감찰각주와 함께 한꺼번에 잡아넣는 거다.’
장윤호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구경만 하고 있긴 몸이 근질근질한데.”
“그럼 진사명과 같은 사례가 있는지 조사해 주십시오. 너무 깊게 파고들진 말고.”
“알겠네. 후후후. 가슴이 두근거리는군. 무림맹의 숨겨진 비리를 파헤친다고 생각하니 말이야.”
주먹까지 불끈 쥐던 장윤호가 문득 천신우를 돌아봤다.
“그럼 그동안 자네는 지금까지처럼 임무를 수행할 생각인가?”
“아니요. 개인적으로 처리할 일이 있습니다.”
천신우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금와전장 장주 만금소.
이제 그와의 거래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 * *
갈대숲이 울창한 강가.
느리게 흐르는 강물 위로 낚싯대를 드리운 노인에게 누군가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장주님.”
그러나 노인은 부하에겐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저 평온한 눈길로 찌를 응시할 뿐이었다.
“천씨세가에서 광물을 넘겨받았다고 합니다. 언제쯤 무인들을 보내 회수하면 되겠습니까?”
바로 그때.
찌가 부르르 떨렸다.
노인은 능숙한 솜씨로 낚싯대를 잡아당겼다.
방금까지 그의 모습이 마치 바위처럼 정적이었다면 지금은 바람처럼 날랬다.
이윽고 펄떡거리는 물고기가 딸려왔다.
마침내 낚싯바늘을 빼내고 물고기를 어망에 넣고 나서야 노인이 부하를 돌아보았다.
“세상사도 낚시와 다를 바가 없지. 조용히 기다리다가 미끼를 무는 순간 벼락처럼 낚아채야 하거든. 그게 끝이 아니야. 어망에 넣기 전까진 절대 방심하지 말아야 하네. 물고기가 언제 낚싯줄을 끊고 달아날지 모르니까.”
노인은 만금소.
무림에서 둘째가는 금와전장의 주인이었다.
“천씨세가란 물고기도 마찬가지. 미끼는 이미 던져놨으니 기다리자고.”
만금소는 느긋했다.
이미 천씨세가는 금와전장과의 거래를 받아들인 상황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낚아채서 어망에 넣는 일뿐이었다.
“천씨세가의 배가 놈들의 영역을 벗어나더라도 건드리지 말게. 놈들이 긴장을 풀고 방심할 때까지 내버려 둬.”
그렇다고 만금소가 이번 일을 위해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온갖 더럽고 추악한 일을 해온 해결사들을 한데 불러 모았다.
다른 곳도 아닌 금와전장의 청부를 도맡아온 그들이었다.
아무리 천씨세가의 세력이 강대해졌다지만 그들 전부를 상대해 내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거기에 더해 만금소는 최후의 안전장치까지 마련해뒀다.
부하가 물러가는 순간. 만금소 뒤의 갈대밭이 술렁이며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오랜만이야.”
상대가 입을 열자 주변의 갈대밭마저 불길함을 느끼고 이리저리 흩어졌다.
“……왔구려.”
원래 만금소는 누군가 뒤에 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하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감히 누가 만금소를 하대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 나타난 상대만큼은 예외였다.
이유는 분명했다.
‘놈의 배후가 어디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엄청난 힘을 가진 것만은 확실하다.’
상인에게 정보력은 곧 돈.
당연히 만금소도 엄청난 정보력을 갖고 있었다.
무림맹 고위인사들의 약점까지 틀어쥐고 있는 그였다.
하지만 그런 만금소조차 상대의 배후에 어떤 세력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그들이 무림맹에 필적하는 힘을 갖고 있다는 사실만을 깨달았을 뿐이다.
그렇기에 만금소로선 상대를 어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표적이 천씨세가지?”
“그렇소.”
“자신은 있고? 구왕들의 은닉재산도 자신 있다더니 결국 제대로 환수 못 했잖아.”
만금소의 뼈를 때리는 말이었다.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그때의 실수를 만회하고도 남을 거요.”
“그거야 까보면 알겠지. 그보다 정말 자신 있는 거야?”
만금소가 입술을 깨물었다.
천씨세가 자체의 힘은 두렵지 않다.
하지만 천씨세가 소가주 천신우는 무신과 가까운 사이다.
오대세가 무림대회에서 직접 자리해 친분을 과시할 정도였다.
그러니만큼 만금소로서는 무신의 개입을 극도로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무신! 그자가 문제요.”
“도제한테 두둑하게 찔러주면 무신의 개입을 막아주지 않을까? 현금이 부족하다면 태평 표국 지분을 추가로 넘기는 방법도 있지. 마침 구실도 있잖아. 도제 칠순 잔치.”
“…….”
만금소는 침음을 삼켰다.
그들의 세력이 강대함을 새삼 느낀다.
자신과 도제의 관계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을 줄이야.
“그건 그렇고 궁금하지 않아? 굳이 우리가 왜 널 선택했는지? 기왕이면 규모가 더 큰 만수 전장과 접촉하지 않고?”
이유야 많을 것이다.
일단 만수 전장은 무림 최대 전장이지만 금와 전장처럼 개인사업체가 아니었다.
얽히고 얽힌 이해관계가 거미줄처럼 복잡했다.
당연히 만수 전장을 장악하는 것은 금와 전장보다 몇 배는 더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만금소였다.
‘만수 전장은 무림맹주가 깊숙이 관여해 있으니 저들로서도 쉽사리 건드리기 힘들겠지.’
결국, 저들은 만금소를 꼭두각시 삼아 자금을 끌어모을 생각일 것이다.
‘오냐. 마음껏 이용해라. 하지만 나를 영원히 꼭두각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내 언젠가는 재물의 힘으로 네놈들을 집어삼켜 줄 것이다. 그때는 건방진 네놈 입부터 찢어주지.’
속마음과 달리 만금소의 표정은 평소처럼 온화했다.
하지만 마교 후기지수 백린은 이미 그런 만금소의 속내를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 그 끝을 모르는 탐욕. 그게 바로 우리가 너를 선택한 이유지.’
탐욕스러운 자일수록 이용하기 쉬운 법.
돼지 살을 찌워 잡아먹듯, 만금소를 살찌워 통째로 집어삼키는 것이 마교의 계획이었다.
‘그나저나 무신의 개입 정도는 진사명이 알아서 처리했겠지?’
같은 후기지수라도 진사명은 확실히 수준이 달랐다.
좀처럼 실수가 없고, 실수하더라도 반드시 훨씬 더 큰 성공으로 만회해 내는 천재이다.
‘반면에 화사 그년은 능력도 없는 년이 왜 이렇게 중용 받는 건지.’
마교 후기지수들은 팔마존 가운데 한 사람을 스승으로 모신다.
당연히 팔마존끼리의 관계에 따라 후기지수들의 관계도 달라졌다.
스승들이 서로 앙숙이기에 그들의 제자인 백린과 화사도 사이가 틀어질 수밖에 없었다.
백린이 갈대밭 위로 쏟아지는 저녁노을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하지만 뭐, 이번 일만 끝나면 모든 게 달라지겠지.’
화사는 구왕도 계획에서 헛걸음만 한 상황. 그런데 백린이 그 계획의 연장선인 이번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다면?
마교 내에서 두 사람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뒤바뀔 터였다.
* * *
무림맹을 떠난 천신우는 약속지점인 월천항에 도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항구에 도착한 동생 천신혁이 갑판 위에서부터 손을 흔들었다.
“형님!”
언뜻 보기에도 부쩍 성장한 모습. 그걸 본 천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보다 훨씬 성장 속도가 빠르군. 하긴 주변에 워낙 괴물들이 많아야지.’
풍뢰권과 권왕의 얼굴을 떠올린 천신우다.
‘그나저나 이번엔 합류하지 않는다고 했지.’
구왕도 임무 이후 다시 권왕의 담금질에 들어간 풍뢰권이다.
‘무신의 도움도 받기 어렵게 됐고.’
물론 처음부터 크게 기대는 하지 않았다.
만금소는 마교뿐만 아니라 도제와도 연줄을 갖고 있는 거물.
당연히 무신이 천씨세가를 돕지 못하게 수작을 부릴 것쯤은 예상한 바였다.
하지만 천신우는 걱정하지 않았다.
‘충분히 준비했으니까.’
천신우의 시선이 항구에 정박하는 선단을 향했다.
광물을 가득 실은 운반선 10척.
그리고 2척의 호위선에 나눠 탑승한 천씨세가 무인들.
조충헌 교관에게 맹훈련을 받은 그들은 예전과 비교조차 하기 힘들 만큼 강렬한 기세를 뿜어냈다.
거기에 그간 초빙해온 천씨세가의 빈객들도 대거 합류한 상태였다.
“이번에야말로 구왕도에서의 빚을 갚겠네.”
구왕도에서 길잡이로 도움을 주었던 고진성의 각오였다.
가족의 원수 구왕에게 복수한 그는 전보다 한결 편안한 얼굴이었다.
거기에 더해 고진성을 믿고 합류한 과거 고검장의 무인들도 든든한 전력이다.
그밖에도 천신우가 직접 영입했거나 인맥을 통해 천씨세가에 합류한 빈객들이 자리했다.
“이렇게 천씨세가를 위해 나서주시다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천신우는 천씨세가를 대표해 진심으로 그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천신우를 바라보는 그들의 얼굴에도 신뢰가 가득했다.
오대세가에서 밀려났던 천씨세가를 단기간에 여기까지 끌어올린 천신우다.
그런 그와 앞으로의 행보를 함께한다는 사실에 다들 가슴이 벅찼다.
“일단 항구에 정박해서 여독을 푸시지요. 강행군을 계속하기에는 남은 여정이 깁니다.”
천신우의 제안에 최소한의 경비 인원을 남겨두고 다들 배에서 내렸다.
그렇지 않아도 그들 모두 계속되는 항해에 여독이 쌓인 상태였다.
“주문하신 요리 나왔습니다!”
“오오! 다들 먹자고!”
일반 무인들이 항구의 객잔에서 먹고 마시는 동안 천신우는 책임자들과 대화를 나눴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별다른 문제는 없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소가주님의 지시대로 철저히 경계했지만 아직 수상한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았습니다.”
이번 일의 총책임자인 외당주 경총이었다.
천씨세가 기존 무인들 가운데 감찰단주로 임명된 진충과 더불어 주축인 그였다.
“조심스럽게 말씀을 올리자면 습격이 시작되는 지점은 이곳 월천항 이후일 가능성이 큽니다.”
천신우의 의견 역시 동일했다.
월천항 이후의 항로는 물살이 거칠기로 유명했으니까.
“소가주님의 지시에 따라 한수 교역로를 개척했지만, 이곳의 상황은 훨씬 열악합니다. 근방을 주름잡고 있는 수적들은 어지간한 중견 문파들 못지않은 세력을 갖추고 있지요.”
물론 천신우가 우려하는 것은 수적들의 습격이 아니었다.
단지 수적들이 상대였다면 직접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마교에 관한 사실을 밝힐 수는 없기에 천신우는 화제를 바꿨다.
“수상전에 대비한 훈련은 어떻게 됐습니까?”
“그거라면 걱정 마십시오. 육지에서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실력을 발휘할 겁니다.”
수상전은 분명 지상전과 다르다.
무엇보다 거친 물살로 인해 갑판 위에서도 몸을 가누기가 쉽지 않았다.
때문에 충분히 대비하지 않으면 적이 아니라 물에 빠져 죽기 십상이었다.
“외당주만 믿겠습니다.”
그렇게 보급물자를 싣고 출항한 천씨세가의 선단.
의외로 출항하고 나서 한동안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다음 정박지에 가까워지는 순간.
모두가 신음을 토해냈다.
“……이럴 수가!”
천신우도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바다 너머를 응시했다.
멀리 내다보이는 항구는 시뻘건 불길로 뒤덮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