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학사환생 084화
천신우에게 치명상을 입었음에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숨이 붙어 있던 천산도객이다.
그런 그의 귀에 들려온 천신우의 말은 정말이지 충격 그 자체였다.
‘건방진 놈 같으니라고! 저토록 기고만장하다니!’
사실 할 말이 없긴 했다.
죽은 귀검과 합공했음에도 천신우에게 처참하게 박살 났으니까.
그렇다고 순순히 천신우를 인정할 천산도객이 아니었다.
그는 죽어가는 와중에도 저주를 퍼부었다.
‘두고 보자. 괜히 사람들이 월풍 그놈을 건드리지 않은 줄 아느냐?’
사람들이 월풍에게 봉변을 당하고도 입을 다무는 것은 후환이 두려워서다.
도제는 은혜는 몰라도 원한만큼은 확실히 갚아주는 위인이니까.
‘이번 한 번으로 끝나리라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결국엔 네놈은 물론, 천씨세가까지 멸망하게 될 것이다.’
그 순간, 천산도객이 눈을 부릅떴다.
천신우가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도를 쥐는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천신우는 천산도객의 도를 휘둘러 폭노군의 몸에 상처를 남기기 시작했다.
그 수법은 놀랄 정도로 교묘해서 마치 천산도객이 직접 폭노군에게 살수를 쓴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천신우는 마찬가지로 귀검의 시체에도 같은 흔적을 남겼다.
마지막으로 천신우가 귀검의 검과 폭노군의 봉을 양손에 쥐었다.
솨아아악! 파바바박!
천산도객의 등에 서로 다른 상처가 새겨졌다.
하지만 천산도객은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저 감탄했다.
자신의 등에 새겨지는 상처가 얼마나 정교한 수법에 의한 것인지 깨달았기에.
‘이런 놈을 쉽게 생각했다니…….’
그것이 천산도객이 살아서 마지막으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죽었군.”
이제는 천신우도 놀라지 않았다.
“이제야 알겠군. 저들이 약한 게 아니라.”
천신우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가 강해진 거다.”
새롭게 깨달은 사실을 머릿속에 새기며 천신우는 마인강의 시체에도 흔적을 남겼다.
언뜻 봐서는 마인강과 상대하던 천산도객을 폭노군과 귀검이 기습한 것으로 오인하게끔.
‘물론 이런다고 모두를 속일 수는 없겠지.’
천신우는 월풍이 살수를 보낸 거라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월풍이라면 이 모든 정황이 조작됐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천신우를 죽이라고 보낸 해결사들이 뜬금없이 마인강 때문에 서로 충돌할 리가 없으니까.
그런데도 굳이 이런 복잡한 방법을 택한 것은 순전히 월풍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서였다.
‘생각이 많아질 거야. 정확한 내막을 파악하기 전까진 후속 조치를 미룰 수밖에 없겠지.’
천신우 입장에선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있다는 의미였다.
‘나는 내 할 일을 하마. 월풍 네놈은 혼자 끙끙 앓도록.’
* * *
뒤늦게 비밀통로를 통해 갈대밭에 들이닥친 멸악전단 무인들은 끔찍한 참상을 확인했다.
“이건…….”
마인강의 죽음이라 그렇다 쳐도 천산도객이나 폭노군의 죽음은 정말이지 뜻밖이었다.
도제 휘하의 고수들로 알려진 그들이 어째서 이곳에서 죽어 있단 말인가?
게다가 더 충격적인 사실이 있었다.
“확인해 보니 서로 양패구상한 듯합니다.”
“그들이 어째서?”
“잘은 모르겠지만 사전에 마인강과 모종의 합의가 있었던 게 아닐까요? 하지만 끝내는 재물이 탐나 서로 배신했다면요? 대충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조장이 주위를 돌아보며 주의를 줬다.
“어허! 말조심하게! 혹시라도 도제 쪽에서 알게 되면 자네나 나나 끝장이야!”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천산도객과 폭노군이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건 조장도 동의하는 바였다.
백번 양보해 천산도객과 폭노군이 이곳을 우연히 지나던 중이었다고 치자.
그러다 무림맹 수배명단에 오른 마인강을 보고 직접 나섰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들이 마인강과 함께 시체가 되어 이곳에 나뒹굴 확률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이렇게 하지. 일단 이번 일은 불문에 부치게. 보고서는 마인강을 생포하려 했지만, 저항이 강렬해 제거했다고 작성하고.”
“천산도객과 폭노군은 어떻게 하려고 그러십니까?”
“그건 내가 직접 단주님을 찾아뵙고 보고 드리겠네.”
“알겠습니다.”
* * *
현장을 수습한 멸악전단 무인들은 작전지역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천신우와 합류했다.
“마인강은 어떻게 됐습니까?”
천연덕스럽게 묻는 천신우의 어깨를 조장이 두드렸다.
“비밀통로를 통해 달아나는 것을 뒤쫓아 제거했네. 기다리느라 고생 많았어. 복귀하는 대로 가볍게 술자리나 하자고.”
조장은 굳이 천산도객과 폭노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지키기 쉽기에.
천신우 입장에서도 그게 편했다.
‘멸악전단 단주에게 따로 보고할 생각이겠지.’
멸악전단 단주 심인기는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은 인물.
그가 이번 일을 어떤 식으로 처리할지도 내심 궁금해지는 천신우였다.
물론 공론화하든 은밀하게 처리하든 천신우로선 아무 상관 없었다.
강해진 자신을 확인했고 마인강을 제거해 추가피해를 막은 데다, 월풍의 의도까지 무산시켰으니까.
지금은 그걸로 족했다.
* * *
무림맹 내부에 위치한 고급술집 춘풍.
그곳에서 해결사들이 천신우를 붙잡아 오기만을 기다리던 월풍은 기어코 분통을 터뜨렸다.
“어째서 오지 않는 거냐!”
분을 이기지 못한 월풍은 술 시중을 들던 기녀의 머리를 술병으로 내려쳤다.
퍼억!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쓰러진 기녀를 발로 걷어차기까지 했다.
“쓰레기 같은 놈들! 고작 그깟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나를 기다리게 하다니!”
무림맹에서 소속 무인들의 편의를 위해 편의시설을 조성했다지만 매춘만큼은 엄격히 금했다.
하지만 월풍은 무림맹 내부에서 기녀를 끼고 노는 것으로도 모자라 폭행까지 저지른 것이다.
그러나 월풍은 일말의 죄책감조차 전혀 느끼지 않았다.
“……살려주세요.”
“오냐! 살려는 주마!”
흐느끼는 여인의 머리채를 잡아채려던 월풍이 순간 멈칫했다.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숙부님들?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월풍이 세상에서 숙부라 부르는 사람은 두 명뿐이었다.
도제의 측근인 흑백쌍선이 바로 그들이었다.
흑백쌍선은 쌍둥이 형제였는데 얼굴은 똑같았지만, 신기하게도 머리카락 색이 전혀 달랐다.
형인 흑선은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칠흑처럼 검은 머리칼을 유지하는 반면.
동생인 백선은 태어났을 때부터 머리카락이 희었다.
물론 머리카락 색이 특이하다고 해서 그들이 유명세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
뛰어난 무공에 과감한 손속까지 지닌 그들이었다.
젊어서부터 도제가 시키는 궂은일을 수행해 왔고 덕분에 측근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하지만 흑백쌍선의 욕심은 끝을 몰랐다.
월풍을 도제의 후계자로 밀어서 지금보다 더 많은 권력을 차지하려는 그들이었다.
그런 흑백쌍선이었기에 바닥에 쓰러진 기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탐탁지 않았다.
무안해진 월풍은 사람을 시켜 기녀를 돌려보내라고 지시했다.
흑백쌍선 중에 형인 흑선이 입을 열었다.
“소천주. 이 늙은이가 분명히 당부했던 거로 기억하오만.”
무신의 기반세력이 무신궁이라면 도제의 기반세력은 도천.
후계자로 지목된 월풍이 소천주라 불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백선도 흑선을 거들었다.
“무릇 영웅이라면 호색은 당연하오. 하지만 그렇다고 여색에 정신이 팔려 소천주의 앞길을 그르쳐야 되겠소이까?”
“면목이 없습니다.”
월풍의 정중한 사과에 흑백쌍선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됐소. 지난 일은 그만 이야기하고 앞으로의 일을 논의합시다.”
“알아보니 천산도객과 폭노군을 움직였다고 들었소.”
과연 흑백쌍선은 도제의 측근들답게 정보수집이 빨랐다.
“안 그래도 그들을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천신우라는 자를 제거하라고 지시한 거요?”
“일단 데려오라고 했습니다만 무슨 일이신지?”
“소천주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구려.”
흑백쌍선이 동시에 혀를 찼다.
마땅한 경쟁자가 없어서인지 월풍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는 데 공을 들이지 않았다.
필요할 때마다 도제에게 잘 보이려는 이들을 끌어들이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니 천산도객과 폭노군의 죽음도 아직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이미 죽었소.”
월풍은 깜짝 놀랐다. 그는 그들의 죽음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게 정말입니까?”
“물론이오. 얼마 전에 발생한 오가장 살인사건의 범인인 마인강과 함께 죽어 있었다고 하더이다.”
월풍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럴 수가…….”
월풍의 애초의 계획은 천신우를 죽이고 임무 중의 사고로 위장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천신우가 죽기는커녕 오히려 천산도객과 폭노군이 죽은 것이다.
“그럼 천신우 그놈은 어찌 되었습니까?”
“무사하오.”
“그럼 천신우 그놈이 천산도객과 폭노군을 죽였단 말입니까?”
“그것까진 확실치 않소. 시체를 확인한 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서로 죽고 죽였다는데…….”
흑선이 늘어뜨린 말꼬리를 백선이 이었다.
“솔직히 믿기 힘드오. 아무래도 누군가 개입하여 사인을 위장한 듯싶소.”
“누군가라 하심은?”
“소천주도 천신우 그놈이 무신과 가깝게 지낸다는 소문을 들었을 거요.”
월풍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신이 개입했다면 자신의 힘으론 도저히 천신우를 응징할 방법이 없었다.
유일한 방법은 도제를 끌어들이는 것이었지만 그거야말로 안 될 일이었다.
도제가 실패를 용납하지 않음을 알기에.
“조부님께서도 이 일을 알고 계십니까?”
“물론이오. 어르신께서 모르시는 일은 없소이다.”
월풍의 안색이 창백해지자 흑선이 고개를 저었다.
“너무 걱정할 필요 없소. 어르신께선 지금까지 이번 일에 대해 아무 언급이 없으셨소이다.”
“그럼…….”
“아직 소천주에게 기회를 주신다는 뜻이오.”
월풍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도제가 직접 나서면 천신우를 응징하는 것쯤이야 아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자신조차 입지를 장담할 수 없었다.
월풍의 아버지가 후계자에서 밀려난 과정 역시 비슷했으니까.
“소천주. 잘 들으시오. 아마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거요.”
“이렇게 된 이상 소천주는 반드시 천신우 그놈을 응징해야 한다는 뜻이오.”
흑백쌍선의 말대로였다.
이제 천신우와의 개인적인 원한 따위는 무의미했다.
도제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월풍은 이번 일을 성공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진 마시오. 이 늙은이들이 있는 힘껏 도와줄 테니.”
“두 분 말씀을 들으니 안심이 됩니다. 그럼 언제쯤 천신우 그놈을 처리해 주실 건지?”
“일단 어르신의 존함이 입방아에 오르는 일부터 막고 봅시다. 그러고 나서 천신우 그놈을 응징해도 늦지 않소.”
오가장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비난받아온 마인강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도제의 이름이 놈과 함께 오르내리는 것만은 막아야 하는 흑백쌍선이었다.
“두 분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월풍으로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월풍의 대응에 혼선을 주려는 천신우의 의도가 적중한 것이다.
* * *
마인강 사건을 처리하고 무림맹으로 복귀한 천신우는 곧장 장윤호를 찾았다.
“흐흐흐. 마침 잘 왔네. 안 그래도 일하기 싫어서 어떻게 빠져나갈지 고심 중이었는데.”
언제나 그렇듯 유쾌한 장윤호였다.
“뒷조사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하지만 천신우가 용건을 꺼내자 장윤호의 표정은 삽시간에 진지해졌다.
“누구 뒤를 캐달라는 건가?”
원래는 전생에 끝까지 살아남았던 명단을 전부 조사해 볼 계획이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진사명. 이번에 무림맹 모집시험 지원 전형 수석으로 합격한 자입니다.”
“설마 경쟁의식 때문은 아닐 테고. 이유가 뭔지 궁금한데?”
“그 친구, 벌써 3급 출입증을 얻었더군요.”
“뭐라고? 벌써?”
장윤호 역시 놀랐다.
무림맹 1년 차에 3급 출입증을 얻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좋아. 자네 부탁인데 못 들어줄 것도 없지. 어디까지 조사해 줄까? 원한다면 집에 숟가락 개수가 몇 개인지까지 알아봐 줄 수도 있다네.”
“일단 무림맹에 들어와 수행한 임무 정도만 조사해 주시면 됩니다. 물론 증거를 남기지 않는 선에서.”
“당연하지. 그거야 내 전문이야.”
“그럼.”
일어나려는 천신우를 장윤호가 불러 세웠다.
“어딜 가나?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게. 그 정도 뒷조사쯤은 얼마 걸리지도 않을 걸세.”
호언장담한 것과 달리 장윤호는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하지만 천신우는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장윤호의 표정은 아까와는 완전히 달랐으니까.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문을 닫은 장윤호가 크게 심호흡했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 진사명 그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