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환생-82화 (82/171)

# 82

학사환생 082화

책장에서 책을 꺼내 드는 순간, 천신우는 보고 말았다.

책장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서 있는 청년의 모습을.

“……!”

천신우와 청년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수려한 외모. 속을 헤아리기 힘든 눈빛.

‘분명히 어디서 봤는데.’

찰나의 순간 천신우는 청년의 이름을 기억해 냈다.

‘……진사명?’

틀림없었다.

전생에서 천신우에 밀려 무림맹 모집시험 지원 전형 차석을 차지한 수재.

이번 생에선 천신우가 전투 전형에 응시했기에 지원 전형 수석은 진사명의 몫이었다.

그런 그가 장서각에 있다고 해서 이상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없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진사명도 전생에서 내가 죽기 전까지 살아남았지. 딱히 두각을 드러낸 적은 없지만.’

이미 천신우는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전생에서 실체가 밝혀진 자들 말고도 마교의 끄나풀들이 존재할 거라고.

구왕도 임무 당시 조사대에서 정보가 새어나간 것을 확인했었기에.

‘물론 심증일 뿐이다. 전생에서 끝까지 살아남았다고 해서 마교와 결탁했다고 보긴 힘들어.’

그래도 지켜볼 가치는 충분했다.

‘진사명을 비롯해 전생의 생존자들을 지켜보면 뭔가 나올지도 모르겠군. 물론 지금은 만상서고의 세 번째 단서에 집중해야겠지.’

천신우는 밖으로 나가는 진사명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두툼한 가죽표지에 금박으로 새겨진 제목의 책.

‘무극신서?’

제목은 거창하지만, 막상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장서각에 이런 책이 있었나? 장서각의 거의 모든 책을 읽었다고 자부했건만.’

괜히 머쓱해진 천신우가 내용을 확인했지만 특이할 것은 없었다.

그야말로 무공의 기초만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물론 실망하긴 일렀다.

‘어차피 내용이 중요하진 않으니까.’

두루마리의 단서에 따르면 무극신서를 시작으로 순서대로 다섯 권의 책을 꺼내야 했다.

이번 생에서 장서각에 출입한 것은 처음이었지만, 전생에서만큼은 이곳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던 천신우다.

장서각의 구조와 배치야 훤했다.

눈을 감고 원하는 책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낼 정도였다.

그렇게 장서각 안을 안방처럼 돌아다니며 다섯 권의 책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일단 찾기는 했는데.’

별달리 눈에 보이는 변화는 없었다.

심지어 무극신서를 제외한 나머지 책들은 천신우가 이미 읽어본 것들이었다.

‘이제 무극신서의 첫 장을 펼쳐보라고?’

두루마리의 지시에 따라 다시 무극신서를 펼친 천신우가 눈을 빛냈다.

경악스럽게도 무극신서의 내용이 바뀌어 있었다.

곧바로 다른 책들도 살펴봤지만, 변화가 일어난 것은 무극신서가 유일했다.

천신우는 무극신서의 첫 장에 새롭게 나타난 문자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건…… 고어로군.’

아주 오래전에 쓰이다가 이제는 사용되지 않는 문자.

일반인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학사들도 해석 못 할 난이도였지만, 당대 최고의 학사였던 천신우에겐 아무런 문제가 되지 못했다.

‘방위를 가리키고 있어.’

어떤 원리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다섯 권의 책을 차례대로 꺼내면서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

그리고 그 변화가 가리키는 곳은…….

‘여기군.’

장서각 한복판.

책장 사이에 둘러싸인 그곳은 위치가 아주 절묘했다.

‘여기라면 어디서도 보이지 않겠어.’

실제로 장서각을 관리하는 학사들 모두 천신우의 움직임을 보지 못했다.

‘여기서 무극신서의 마지막 장을 펼치라고 했었지.’

천신우는 두루마리의 지시대로 무극신서의 마지막 장을 펼쳤다.

아까는 분명히 여백이었던 무극신서 마지막 장에 글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늘과 땅의 도는…….’

모든 글자를 읽어 내려간 순간.

스르륵.

바닥이 열리며 칠흑 같은 어둠이 모습을 드러냈다.

구오오오!

심연 속을 꿰뚫어 본 천신우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장서각 지하에 이런 공간이 존재했을 줄이야!’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재차 확인한 천신우가 심연 속으로 몸을 날렸다.

심연이 천신우를 집어삼킨 즉시 소리 없이 바닥이 닫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 * *

스윽.

천신우가 바닥에 내려앉자 주변이 삽시간에 밝아졌다.

주위를 돌아보는 순간 천신우는 신음을 토해냈다.

‘이런 미친!’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엄청난 규모의 서고였다.

마치 거대한 장벽처럼 책들이 사방에 쌓여 있었다.

‘이 정도 규모면 장서각 그 이상…….’

장서각 지하에 오히려 장서각보다도 거대한 서고가 존재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심지어 이곳에 쌓여 있는 책들은 천신우조차 보지 못한 제목들이 대부분이었다.

천신우는 뭔가에 홀린 것처럼 책의 탑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에 잡힌 것은 월하기담이라는 제목의 소설책이었다.

속독은 천신우의 주특기 가운데 하나.

책을 잡은 천신우는 엄청난 속도로 책을 읽어 내려갔다.

마치 책을 흡수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

마침내 책을 덮은 천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월하만담과 흡사한 내용이군.’

분야와 계열을 가리지 않고 세상에 존재하는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어온 천신우다.

당연히 소설에 관한 지식도 방대했다.

‘비슷하지만 똑같진 않아. 굳이 따지자면 월하기담이 월하만담의 무삭제판 같군.’

월하기담의 내용은 천신우가 전에 읽었던 월하만담보다 훨씬 자극적이었다. 강렬한 묘사와 선정적인 장면이 주를 이뤘다.

심지어 월하기담에 나오는 내용 중엔 월하만담에 없는 것도 많았다.

‘어쩐지 전개가 어색하다 싶었는데 내용을 삭제한 것이었어.’

월하기담뿐만이 아니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책을 꺼내본 천신우가 눈을 반짝였다.

‘맙소사! 신비경 원본이라니!’

전설적인 대학자의 저술이 담긴 신비경은 학사들 사이에서 경전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현재 세상에 전해지는 것은 주석이 따로 달린 필사본들뿐.

정작 대학사의 학문세계가 고스란히 담긴 원본은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가 없었다.

바로 그 신비경의 원본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천신우는 떨리는 손으로 신비경을 한 장, 한 장 넘기기 시작했다.

‘아아…… 이게 이런 뜻이었구나.’

그 진의를 두고 논란이 많았던 문장들을 볼 때마다 벅찬 감동이 솟구쳤다.

세월이 흐르고 많은 사람을 거치면서 왜곡됐던 대학자의 저술을 원본 그대로 확인하는 감동!

천생 학사였던 천신우에겐, 그 어떤 쾌감과도 바꿀 수 없는 강렬한 자극이었다.

신비경만이 아니었다.

이곳의 책들은 대부분이 아예 처음 보는 것이거나, 전에 읽었더라도 내용이 조금씩 달랐다.

연대 역시 훨씬 앞서 있었다.

‘모두 원본 내지는 최초 필사본이다.’

학사들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이곳에 있는 서책들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심지어 무림맹이 생기기 전에 출간된 책들도 존재하는군.’

천신우는 반쯤 확신했다.

‘아무래도 이곳 비밀서고는 장서각이 건립되기 전에 만들어졌겠어.’

그 반대라면 지금까지 비밀서고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두근두근.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무림맹 이전의 역사.

사실상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사라진 과거.

그 발자취를 거슬러 올라갈 기회가 눈앞에 찾아온 것이다.

‘마음 같아선 이곳에서 평생 머무르고 싶지만…….’

솔직히 학사로서 욕심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랬다간 세상은 또다시 마교에 의해 멸망하고 말 것이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 천신우는 책들을 제자리에 꽂았다.

‘어차피 내용은 전부 외웠다. 이런 지하에 비밀서고를 만들고 책을 보관한 뜻이 존재할 터. 굳이 내 욕심으로 그 깊은 뜻을 망칠 수야 없지.’

천신우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디에 있지? 세 번째 단서는.’

책에서 미련을 버렸기 때문일까.

단서를 찾기란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

비밀서고를 환하게 비추는 빛의 정체.

어디선가 스며드는 햇빛을 발견했다.

‘저기서 시작된 빛이…….’

빛을 따라 천신우의 시선이 움직였다.

벽에 반사된 빛은 비밀서고의 구석진 곳으로 천신우를 이끌었다.

그곳엔 뿌연 연기로 이뤄진 구슬이 놓여 있었다.

‘처음엔 불타는 구슬. 그다음엔 모래처럼 바스러지는 구슬. 이번엔 연기로 만들어진 구슬이라니.’

천신우는 심호흡한 후에 구슬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연기가 사라지며 한 권의 서책이 그 자리에 나타났다.

‘이게 세 번째 보상인가?’

지금까지와 같았다.

단서를 찾아내면 보상이 주어지고 두루마리가 갱신되는 것.

천신우는 책을 주워들고 제목을 확인했다.

‘무극신서? 이것도 무극신서라고?’

장서각에서 이곳 비밀서고로 들어오는 열쇠가 됐던 서책의 제목 역시 무극신서였다.

‘하긴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제목만 같고 내용은 다르겠지.’

천신우는 기대감을 안고 책을 펼쳤다.

“아!”

절로 탄성이 튀어나왔다.

첫 장을 펼치는 순간 직감할 수 있었다.

이게 무극신서의 진본임을.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무극신서를 어떤 특정한 무공비급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모든 무공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 비급이기도 했다.

‘무신과 풍뢰권이 말했던 벽을 넘는다는 표현이 바로 이런 의미였군.’

천씨세가의 천무검법.

풍뢰권으로부터 사사한 권법.

독학으로 익힌 비도술.

경신법과 심법들.

그 모두가 무극신서에 기술된 깨달음과 일맥상통했다.

‘이것만 있으면……!’

천신우는 가슴이 쿵쾅거림을 느꼈다.

지금까지 익힌 모든 종류의 무공을 한 단계씩 발전시킬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굳이 그 가치를 따지자면 예전에 얻은 승천단과 폭풍비 이상의 보상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 비밀서고에 무공비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나마 무공과 관련된 서책이라곤 이 무극신서뿐.’

공교롭게도 무극신서는 모든 무공을 새로운 경지로 이끄는 연결고리 역할이었다.

‘그렇다면 이 비밀서고 역시 만상서고로 통하는 전환점일지도.’

만상서고의 단서가 몇 개나 존재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왠지 감이 왔다.

이제 만상서고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고.

그렇다고 서두르다간 일을 그르치고 만다.

‘먼저 이것부터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지.’

천신우는 무극신서의 내용을 완전히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물론 이론을 알았다고 단숨에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아직 그 이론을 몸으로 직접 익히는 단계가 남아 있었다.

‘당분간은 정말 눈 붙일 시간도 없이 바쁘겠어.’

기분 좋은 설렘을 느끼며 천신우는 두루마리를 펼쳤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따르면 두루마리는 새로운 보상을 얻을 때마다 저절로 갱신됐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두루마리엔 만상서고의 새로운 단서가 나타나 있었다.

그 정보를 확인한 천신우가 난색을 표했다.

‘……난감하군.’

지금까지도 만상서고의 단서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유독 정도가 심했다.

얼음으로 뒤덮인 제23영역.

두루마리는 그곳의 중심인 북해빙궁에 만상서고의 네 번째 단서가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북해빙궁은 무림맹과 협정을 맺었지만 다른 세력들과는 입지가 분명 달랐다.

아무리 무림맹이라도 좌지우지하기 힘든 세력이 바로 북해빙궁이었다.

특정 시기에 특정 인원만을 대상으로 출입을 허가하기에 평상시엔 드나들기조차 어렵다.

‘그러고 보니 북해빙궁도 이맘때쯤 사건 사고가 많았지.’

북해빙궁은 궁주를 정하는 방식이 남달랐다.

궁주의 제자들끼리 경쟁을 시켜 차기 궁주를 낙점하는 식이었다.

때문에 유혈 다툼이 비일비재했는데 이따금 외부세력을 끌어들여 궁주가 되려는 작자들이 있었다.

‘기억을 정리할 필요가 있겠어. 물론 그전에 수련부터 마쳐야겠지.’

천신우가 두루마리에 남아 있던 방법을 이용해 비밀서고를 빠져나오는 순간.

거짓말처럼 무극신서는 재가 되어 사라졌다.

다시 장서각 한복판에서 모습을 드러낸 천신우는 허탈하게 웃었다.

‘마치 꿈을 꾼 것 같군.’

물론 꿈은 아니다.

머릿속에 무극신서의 내용이 선명히 남아 있었으니까.

그길로 장서각을 나선 천신우는 임무도 미뤄두고 곧장 무공수련에 돌입했다.

* * *

무림맹 외곽엔 상주하는 무인들을 위한 수많은 편의시설이 존재한다.

춘풍이라는 이름의 주루 역시 그중에 하나였다.

고급스러운 분위기에 걸맞게 아주 값비싼 술만 취급하기에 아무나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바로 그곳에서 찢어진 눈매의 청년이 대낮부터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대체 언제 천신우 그놈의 이름이 내 귀에 들려오지 않게 만든단 말이냐!”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청년이 술잔을 집어 던졌다.

쨍그랑!

술잔이 깨지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지만, 누구 하나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그는 월풍.

도제의 손자인 그를 함부로 대할 사람은 무림에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보고 드린 대로 천신우는 무림맹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젠장! 그래서? 언제까지 기다리자고!”

구왕도에서 천신우에게 굴욕당한 이후 원한을 품은 월풍이다.

설욕을 위해 해결사들을 불러 모았고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오대세가 무림대회 이후 무림맹으로 복귀한 천신우가 수련에 돌입하면서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아무리 도제의 파벌에 속한 고수들이 해결사 역할을 자처했다지만, 무림맹에서 천신우를 제거했다간 뒷감당이 어렵다.

이번 일의 해결사를 자처한 고수 하나가 그 점을 지적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천신우가 수련을 마치고 복귀하는 즉시 임무에 동원되도록 손을 써두었으니…….”

바로 그때였다.

무인 하나가 안으로 들어와 보고했다.

“보고 드립니다! 조금 전에 천신우가 폐관 수련을 마치고 멸악전단 본대로 복귀했다고 합니다.”

월풍의 눈매가 양쪽으로 찢어졌다.

“들었지? 최대한 빨리 잡아 와. 내 손으로 직접 놈의 사지를 찢어발길 테니까.”

“명을 받듭니다!”

고개를 숙여 보이고 물러나는 고수들의 눈빛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 * *

콰앙!

문을 열어젖힌 천신우가 손으로 그늘을 만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햇빛은 더할 나위 없이 눈부셨다.

“드디어…….”

천무검법의 10성을 뛰어넘어 새로운 경지에 도달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천무검법이 어린아이 장난처럼 느껴질 정도로 강해진 천신우였다.

생각 같아선 상대가 누구라도 단칼에 벨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

“일단은 그동안 미뤄둔 임무들부터 해결해야겠군.”

이미 멸악전단 단주의 신임을 얻은 천신우다.

굳이 서둘러 복귀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강해진 스스로를 실전에서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기왕이면 강한 상대였으면 좋겠는데…….”

미소와 함께 떠올린 작은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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