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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환생-80화 (80/171)

# 80

학사환생 080화

무신은 자신에게 모여든 수많은 시선에 전혀 개의치 않으며 걸음을 옮겼다.

뒷짐을 지고서 산책하듯 유유자적하게.

그런 무신의 모습에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물론 무신을 몰라봐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들은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 어떻게……!’

‘무신이 이곳에 무슨 일로!’

심지어 무신 곁엔 손녀 채은수도 함께였다.

그녀는 무복 대신 연회에 어울리는 화려한 색감의 옷을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땋아 올린 머리에서부터 걸음걸이에 이르기까지 우아함이 물씬 풍겼다.

하지만 채은수의 눈부신 미모조차 무신의 압도적인 존재감 앞에선 빛이 바랬다.

그렇게 모두가 충격과 혼란에 빠진 그때, 천신우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심지어 전혀 긴장한 모습이 아니었다.

마침내 대연회장 중앙에서 무신과 당당히 마주 선 천신우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오셨습니까, 어르신.”

“그래. 오랜만이구나.”

사람들은 또다시 놀랐다.

“……!”

무신이 오대세가 무림대회에 참석한 것만 해도 충격이다.

그런데 천씨세가 소가주와 구면이라니?

심지어 둘은 아주 가까운 사이처럼 보였다.

‘설마 소문이 사실이었던 건가?’

‘무신의 손녀와 천씨세가의 소가주가 아주 가까운 사이라더니.’

‘이건 완전히 장인이 사위 얼굴을 빛나게 해주려는 모양새인데…….’

무림대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저마다 머릿속으로 계산하기 바빴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세력을 급속히 확장한 천씨세가다.

그런데 거기에 무신이라는 든든한 배경까지 생긴 상황.

‘이렇게 된 이상 반드시 천씨세가에 줄을 대야 한다!’

‘천씨세가를 적으로 돌렸다간 무신궁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 선택의 여지가 없군.’

여태까지도 천씨세가를 향해 적개심을 품고 있던 하북팽가 가주 팽산월조차 눈을 질끈 감았다.

‘무신이라니…….’

사실 하북팽가 입장에선 부지부장 공덕도 까다로운 상대다.

하물며 무신은 무림맹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할 정도의 거물.

이제 천씨세가와 균형을 맞추려면 하북팽가는 도제를 끌어들여야 한다.

한 마디로 불가능.

지금 팽산월의 심정을 대변해 주는 말이었다.

물론 이번 일의 가장 큰 수혜자인 천씨세가 가주 천무흔인들, 혼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가 가장 놀랐다.

‘이건 도대체…….’

매번 자신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던 큰아들 천신우다.

문파 대전에서의 활약, 대홍수 당시 보여준 통찰력과 담대함, 무림맹 시험에서 수석에 이어 구왕도 임무까지 성공적으로 수행까지.

그렇기에 앞으로 천신우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놀라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허허. 무신이라니…….’

예전에 무림맹 행사에 참석했다가 먼발치에서 봤던 무신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이다.

심지어 무신은 천무흔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천 가주. 초대해 줘서 고맙네.”

심장이 내려앉을 만큼 당황했지만 이어진 천무흔의 대응은 일가의 수장다웠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정중히 고개를 숙인 것이다.

“저야말로 방문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무신까지 상석에 앉자 전례에 따라 지부장의 연설이 이어졌다.

과시욕이 강하고 청중 앞에서 연설하기 좋아하는 지부장이다.

다른 자리였다면 연설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을 터.

“크흠.”

하지만 무신이 헛기침을 내뱉는 순간.

“……!”

움찔한 지부장이 말을 끊었다.

다른 사람들도 무신의 눈치를 보는 바람에 장내엔 갑작스러운 정적이 흘렀다.

무신이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아무 일도 아닐세. 계속하게.”

그러나 지부장으로선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신이었다.

결국,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연설을 끝마친 지부장이었다.

* * *

식전행사가 마무리되고 이어진 연회.

천신우는 무신과 마주했다.

“고마운 줄 알거라.”

“당연히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곳까지 찾아와주셔서.”

“그게 아니라.”

무신이 지부장을 돌아보며 껄껄 웃었다.

“내가 눈치 안 줬으면 해 넘어갈 때까지 떠들었을 게다.”

아까의 헛기침이 고의였다고 고백하는 무신이었다.

“그건 그렇고 생각 이상이구나.”

웅장한 대연회장과 진귀한 음식들은 무신의 안중에 없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오직 하나.

바로 천씨세가 무인들의 기세였다.

“어디 내놓아도 손색이 없겠어.”

부쩍 늘어난 빈객들의 면면 역시 무신을 감탄하게 했다.

그들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평판에도 별다른 흠이 없는 고수들이었다.

천신우는 그런 점까지도 염두에 두고 빈객들을 영입한 것이다.

“기왕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나중에 조용한 분위기에서 한잔하자꾸나.”

무신이 천신우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지부장에게 갔다.

그제야 어정쩡하게 주위를 맴돌던 사람들이 천신우에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보게! 아우!”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역시나 모용비였다.

제갈휘와 함께 오대세가 무림회의에 참석한 것이다.

천신우가 활짝 웃었다.

“형님. 음식은 입에 맞으십니까?”

“지금 그게 중요한가!”

모용비는 잔뜩 흥분한 모습이었다.

“방금까지 아우와 대화 나눈 저분, 무신 어르신이지? 맞지?”

무신이 아무리 유명하다고 하나 모두가 무신의 얼굴을 아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다른 사람들의 반응으로 미루어 추측한 것뿐이었다.

“그렇습니다만.”

“역시!”

감탄사를 내뱉은 모용비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런데 아우는 어떻게 무신 어르신을 알고 있는 건가?”

천신우의 대답이 궁금한 것은 모용비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도 몸을 천신우 쪽으로 기울이거나 귀를 쫑긋하는 모습.

그도 그럴 것이 천신우가 아무리 최근 명성을 날렸다고는 하나 일개 후기지수다.

그런 천신우에게 무신이 아는 척을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술까지 한잔하잔다.

다들 직접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들 수밖에 없었다.

사실 천신우로서도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다리 하나 건너서 아는 분입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풍뢰권 덕에 무신과 알게 됐으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론 모용비를 비롯한 사람들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지 못했다.

“무슨 금으로 만든 다리라도 되나? 대체 어떤 인맥이 있으면 바로 무신 어르신과 통하는 거지?”

모용비의 적극적인 질문 공세에 용기를 얻었는지 몇몇 후기지수들도 천신우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러게. 그런 인맥 있으면 우리도 소개시켜 주지 않고.”

사실 천신우 입장에선 실소가 나오는 상황이었다.

불과 1년 전쯤에 세가지연에 참석했을 때만 해도 거의 아는 척을 하지 않았던 그들이다.

형식적인 인사말 정도나 건네는가 하면 아예 무시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랬던 그들이 지금은 천신우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어쩌지. 내가 먼저 소개해 줄 만큼 가까운 관계가 아니라.”

“가까운 관계도 아닌데 먼저 술자리를 제안한다고?”

아무리 세상 경험이 부족한 후기지수들이라도 눈치가 있다.

의례적으로 하는 인사말과 친분에서 나오는 말은 엄연히 다르다.

그들이 보기에 무신의 말은 절대 인사치레 따위가 아니었다.

자세히 캐묻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무림맹 제16지부 고위관계자들과 다른 영역의 실력자들이 천신우에게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그들조차 무신에게 직접 다가갈 입장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천신우라도 알아두려는 속셈이었다.

혹시 아는가?

천신우가 무신의 손녀와 혼인해 후계자로 낙점받을지.

심지어 지부장까지 천신우에게 다가와 덕담을 건넸다.

부지부장 공덕이야 원래부터 천신우와 안면이 있었으니 화기애애한 분위기일 수밖에 없었다.

“용 부지부장님은 잘 지내고 계십니까?”

“물론이네. 자네 덕에 다리 쭉 뻗고 잔다더군. 사실 오늘 이 자리에도 참석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네.”

천신우 주변에서 쭈뼛쭈뼛 맴돌던 후기지수들이 멈칫했다.

‘용 부지부장? 설마 제13지부 부지부장 용천세를 말하는 건가?’

‘고속승진을 거듭해 온 그가 천신우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천신우는 나이로 보나 출신으로 보나 자신들과 다를 바가 없건만, 어째서 이렇게나 차이가 나는 것인지.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고 간신히 천신우가 숨을 돌릴 때였다.

하지만 이번엔 여자 후기지수들이 천신우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천 공자, 오랜만에 뵈어요.”

콧소리를 내는 여인에 이어 세가연합에 속한 여자 후기지수들은 물론.

다른 영역의 거대 문파 여식들까지 천신우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녀들의 부모 역시 가주 천무흔과 어떻게든 친분을 쌓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상황.

멀찍이 떨어져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남궁세가 무인들은 입맛이 쓰고 배가 아팠다.

원래 천신우는 남궁세가의 차녀 남궁세미와 혼인을 약속한 사이였다.

만일 남궁세가에서 나서서 혼담을 깨지 않았다면?

남궁세가도 천씨세가와 함께 비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아.”

천신우와도 안면이 있는 남궁세가 외당주 남궁인 역시 깊은 한숨으로 심정을 드러냈다.

물론 다른 세가 사람들이라고 심정이 다르지 않았다.

천신우를 망나니라 비난하고 무능하다 헐뜯던 그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이 명백히 잘못됐음이 오늘 이 자리에서 여실히 밝혀졌다.

패배자라 생각했던 천신우는 알고 보니 완벽한 승리자였다.

제갈휘와 모용비를 제외한 세가연합 후기지수들이 어색한 침묵 속에서 자괴감과 후회에 빠져 있던 그때.

사박사박.

발소리와 함께 갑자기 주위가 환해졌다.

물론 갑자기 달이 뜨거나 등불을 밝힌 것은 아니다.

채은수.

그녀가 등장하면서 분위기가 바뀐 것뿐이었다.

무신의 손녀라는 사실 때문에 차마 말은 걸지 못하고 힐긋힐긋 훔쳐보는 후기지수들을 지나쳐 천신우에게 다가온 채은수가 입을 열었다.

“천 공자.”

천신우가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손짓했다.

“조부님이 찾으세요.”

천신우가 채은수와 함께 사라지자 후기지수들은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세상 참 불공평하지.”

“누가 아니래. 무신 어르신이 먼저 말을 걸고 한잔하자고 하질 않나.”

“내로라하는 실력자들이 앞다투어 친분을 쌓으려고 하고.”

“게다가 무림 제일 미녀인 무신의 손녀까지…….”

말할수록 입맛만 썼다.

차라리 처음부터 넘볼 수 없는 위치였다면 순순히 수긍이라도 할 텐데…….

하필이면 1년 전까지만 해도 그들보다 못한 처지의 천신우였기에, 시기심이 더했다.

* * *

천신우는 채은수를 따라 연회장 밖으로 나왔다.

한적한 그곳에서 채은수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분명히 여기서 기다린다고 하셨는데…….”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바람 쐬러 나온 사람들이 한둘쯤은 있을 법한데도 아무도 없었다.

천신우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무슨 상황인지 알겠군.’

대놓고 내색은 하지 않아도 은근히 천신우와 채은수를 엮어주려 했던 무신이다.

‘구왕도 임무만 해도 그래.’

단지 손녀의 경험을 쌓게 해주려는 의도였다면 무림맹 공식 조사대에 집어넣었으면 됐을 텐데.

굳이 천신우와 채은수를 동행시킨 무신이었다.

그때 채은수가 어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조부님이 일부러 이러신 듯싶네요. 그렇지 않아도 구왕도 임무가 끝난 후에 물어보셨거든요. 천 공자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래서요?”

“훌륭한 무인인 동시에 본받을 만한 동료라고 대답했죠. 조부님 생각은 조금 다르신 거 같지만.”

* * *

천신우와 채은수의 대화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무신이 혀를 찼다.

“누굴 닮아서 그런지 몰라도 판을 깔아줘도 진전이 없구나. 아예 등이라도 떠밀든지 해야지.”

바로 그때였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네놈의 음흉한 속셈을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풍뢰권의 등장에 무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크흠. 네놈이 여긴 어쩐 일이냐. 다 된 밥에 재 뿌릴 생각은 아니겠지?”

“다 된 밥은 무슨. 누가 봐도 아직 물도 안 끓은 것처럼 보이는데.”

“됐다. 혼인도 안 한 네놈이 뭘 알겠느냐.”

“으허허. 그러는 네놈은 그리 잘나서 나한테 연 소저 마음을 어떻게 얻을지 물어봤더냐?”

“어허! 수십 년도 더 지난 얘기를!”

풍뢰권과 서로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이던 무신이 일순 멈칫했다.

대연회장을 빠져나오는 노인을 발견한 것이다.

“저놈은 분명히…….”

풍뢰권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생각하는 그자가 맞을 게다.”

* * *

그 순간, 천신우 역시 불청객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 공자. 여기 있었구먼. 한참을 찾았다네.”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네는 백발의 노인.

그는 바로 금와전장의 장주 만금소였다.

‘뭐지? 설마 벌써 냄새를 맡은 건가?’

천신우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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