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학사환생 078화
이른 저녁이었다.
하루의 마지막을 불태우듯 거리는 불빛들로 반짝이고 있었다.
천신우는 마차를 몰며 스쳐 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여느 때처럼 평화로운 모습.
그러나 천신우는 안다.
이런 평화로운 나날은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전에 반드시 만상서고 건을 마무리해야 한다.’
머릿속으로 차근차근 계획들을 정리하는 사이 마차는 교외로 접어들었다.
“여기다. 이놈아.”
풍뢰권의 외침에 천신우가 마차를 세웠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권왕과 번갈아 가며 마차를 몰아온 천신우다.
“수고했어.”
말에게 당근을 물려준 천신우가 주위를 돌아보았다.
작은 호수 주변에 정자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인 적막한 곳이었다.
그나마 호수 위로 떠오른 달빛이 밝아 사위를 분간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작은 유등이 걸린 정자 안에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의 모습은 제각각이었다.
애꾸눈이 특징인 노인.
정자세로 앉아 있는 무신.
문사 차림으로 난간에 몸을 기대 술병을 기울이는 장년인.
“쯧쯧. 시간도 남아도는 놈이 항상 늦는구나.”
무신이 고개를 돌리며 풍뢰권에게 핀잔을 줬다.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비수처럼 날아와 천신우에게 꽂혔다.
“저놈이?”
애꾸눈의 물음에 무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뇌전검일세.”
뇌전검.
구왕도 사건 이후로 천신우에게 붙은 별호였다.
벼락처럼 검이 빠르고 치명적이라 하여 장윤호가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천신우를 대표하는 별호가 되었다.
‘소문을 퍼뜨리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겠지. 어떤 의미에선 정말 대단한 인간이야.’
얼떨결에 뇌전검이 되어버린 천신우를 샅샅이 훑어본 애꾸눈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가문 위세만 업고 허울뿐인 명성에 연연하는 놈들보다 훨씬 낫군. 그럼 저기 실하게 생긴 놈은?”
“권왕.”
운명이란 정해져 있는 것일까.
이번 생에서도 권왕은 권왕이었다.
역시 장윤호가 지어준 별호다.
“권왕이라…….”
애꾸눈이 다가오더니 권왕의 몸을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정말 좋은 몸이군. 키울 맛이 나겠어. 잠깐. 그러고 보니…….”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의기소침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애꾸눈이었다.
“오늘 모인 사람 중엔 나만 제자가 없군.”
“헛소리 그만하고 부른 이유나 지껄여봐.”
풍뢰권다운 반응.
심지어 풍뢰권은 무명의 지인들을 천신우나 권왕에게 소개해 주지도 않았다.
그들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무신은 고개를 까닥거렸다.
“늦은 놈이 극성이구나. 오냐. 이 몸께서 친절히 설명해 줄 테니 잠자코 듣기나 해라.”
그들의 대화에 천신우와 권왕이 낄 자리는 없었다.
“우린 빠져주자고.”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권왕과 함께 천신우는 찰싹거리는 물소리를 들으며 호숫가로 걸어갔다.
호숫가엔 한 여인이 서 있었다.
문득 불어온 바람에 여인의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며 옆얼굴이 드러났다.
조각처럼 수려한 옆선. 그리고 추위 탓인지 살짝 상기된 뺨이 눈에 들어왔다.
찰랑거리는 머리를 질끈 묶던 그녀가 천신우를 돌아보았다.
“천 공자?”
설마 천신우를 이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는 반응.
“채 소저. 오랜만이군요.”
물론 천신우는 채은수를 보고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무신을 따라온 거겠지.’
구왕도 임무로부터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기 때문일까. 채은수는 그때보다 한층 성숙해진 모습이었다.
전생에 천신우가 흠모하던 모습에 더욱 가까워진 느낌.
“오랜만이네요.”
이 순간 채은수 역시 묘한 기분이었다.
구왕도에서 천신우의 활약을 지켜보면서도. 그리고 이후 천신우와 헤어지고 나서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그녀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우연히 마주치니 없던 감정마저 생겨난다.
흔히들 운명의 이끌림이라 하지 않던가.
하지만 묘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저벅저벅.
호수 저편에서 또 다른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장신의 젊은 청년이었는데 품에 검을 들고 있었다.
보통 검은 등에 메거나 허리에 차게 마련.
그러니 마치 신주단지처럼 검을 모시고 있는 청년이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건 채은수의 감상.
천신우는 달랐다.
그와 직접 마주한 것은 처음이다.
하지만 아까 정자에서 술을 마시던 장년인을 보고 예상은 했다.
‘아까 그는 바로 검신. 그렇다면 이 자가 바로 검신의 제자 검귀겠군.’
검귀.
스승인 검신이 검을 평생의 벗으로 삼은 데 반해 검귀는 그야말로 검에 미친 인물이었다.
그의 검에 쓰러진 무인들의 숫자만 해도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워낙 어려서부터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일까.
지금 이 순간에도 검귀에게선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베일 것만 같은 느낌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쿵.
권왕이 바닥에 다리를 고정시키는 소리였다.
구왕들을 상대로도 전혀 긴장하지 않았던 권왕이 검귀 앞에선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채은수도 적잖이 긴장한 모습.
그러나 검귀가 관심을 보인 대상은 권왕도 채은수도 아니었다.
성큼성큼 걸어온 검귀는 천신우 앞에 섰다.
차가우면서도 날카로운 눈빛에 채은수가 입을 열려 했다.
“당신은.”
“미안하지만.”
검귀는 채은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쪽엔 관심이 없다.”
검귀의 시선은 처음부터 올곧이 천신우를 향했다.
“네가 바로.”
검귀는 또박또박 천신우의 이름을 불렀다.
“사부가 말하던 뇌전검 천신우로군.”
가는 목소리임에도 귀에 또렷이 들려온다.
“사부는 조만간 자리를 만들어준다고 했지만.”
검귀의 눈가에 서늘한 바람이 스쳤다.
“그때까지 기다리고 싶지 않군. 어떤가.”
검귀가 천신우의 의사를 물었다.
“그쪽 생각은.”
천신우라고 강자와의 대결이 반갑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검귀의 소문을 기억하기에 조심스러웠다.
검에 미친 검귀는 일단 싸움을 시작하면 절대 뒤를 보지 않는다.
오직 생과 사가 엇갈리는 승부를 위해 태어난 괴물.
그게 바로 검귀인 것이다.
‘권왕과 검귀라.’
전설적인 두 고수를 눈앞에 마주한 감회도 남달랐지만, 무엇보다 이 자리에 주인공으로 섰다는 사실이 천신우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전생에는 권왕과 자웅을 겨뤘던 검귀였다.
그래서일까. 이성과는 별개로 본능이 천신우의 손을 자운검으로 이끌었다.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코끝을 스쳐 가는 가운데.
차아앙!
천신우와 검귀의 검이 동시에 뽑혀져 나왔다.
권왕과 채은수조차 눈에 담기 힘들 만큼 빠른 움직임!
달빛 아래 교차한 천신우와 검귀가 각자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파르르 떨리는 칼날.
그것만으로도 서로에 대한 평가를 높이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다음은 없었다.
철컥.
약속한 것처럼 검을 집어넣는 천신우와 검귀.
이어진 것은 투덜거리는 목소리였다.
“쯧쯧. 싱거운 놈들 같으니라고.”
풍뢰권의 등장이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천신우와 검귀의 격돌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천신우는 조용히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칼날에 베인 곳에서 핏물이 흘러나온다.
검귀는 단 한 번의 격돌만으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것이다.
심지어 이 시점의 검귀는 권왕과 마찬가지로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이건만.
‘과연 검귀…….’
강해질 필요성을 다시금 느끼는 천신우였다.
* * *
천신우와의 격돌 이후.
풍뢰권을 지나쳐 정자 뒤편의 숲으로 들어간 검귀가 문득 멈춰 섰다.
“사부.”
흔들리는 수풀 사이에서 나온 것은 검귀의 스승인 검신이었다.
스승은 반쯤 남아 있는 술병을 제자에게 건넸다.
“아시지 않습니까.”
검귀가 고개를 저었다.
“마시지 않는다는 것을.”
“마시라고 주는 것이 아니다.”
그제야 검귀는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잘려나간 옷깃 사이로 새어 나오는 핏물이 보였다.
천신우와의 대결에서 입은 상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정도 상처는.”
검신은 허언이 아님을 알았다.
처음 만났을 때의 검귀는 지금과는 비교조차 하지 못할 만큼 참혹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으니까.
물론 검신의 기억에 강렬히 남은 것은 상처 입은 제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검귀 주위에 흩어져 있던 수많은 시체.
채 열 살도 되지 않은 아이의 소행으로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걸 보는 순간 검신은 아이를 제자로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고,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곤 해도 오랜만이군요.”
검귀는 손가락으로 상처를 쓸었다.
검신의 제자가 되어 본격적으로 검을 익힌 이후, 이런 느낌을 주는 상대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많은 사람이 무공의 끝을 10성이라 알고 있다.
하지만 진짜 고수들은 안다.
10성은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검귀 역시 스승을 통해 그 사실을 배웠고, 얼마 전 10성의 벽을 넘어 새로운 경지에 도달했다.
“아직 벽을 넘진 못했더군요.”
다만 천신우와의 대결에선 그 경지를 보여주지 않았다.
굳이 보여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직접 맞붙은 결과, 천신우는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렇게 보았느냐?”
남아 있는 술병을 단숨에 비워버린 검신이 입가를 스윽 닦았다.
“나는 조만간 녀석이 벽을 뛰어넘을 거라 생각한다만.”
검귀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스승이 누군가를 인정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기에.
맏손녀를 제자로 거두라는 무신의 제안도 단칼에 거절했던 스승이 아니던가.
재능이 부족하다면서.
“어쨌거나.”
검신이 뒷짐을 지고 걷기 시작했다.
“이만 가자꾸나.”
풍뢰권이 늦는 바람에 본격적인 모임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은 상황.
의문이 생길 법도 하건만 검귀는 토를 달지 않았다.
대신 미련이 남은 얼굴로 한곳을 응시했다.
그곳은 무명에 속한 절대고수들이 있는 곳도, 눈부신 미모의 채은수가 있는 곳도 아니었다.
천신우가 서 있던 방향.
그곳을 바라보던 검귀가 이내 스승을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이놈의 모임은 맹주놈 집구석처럼 콩가루가 따로 없군. 두 놈은 코빼기도 안 비추고. 그나마도 한 놈은 내가 온 지 얼마나 됐다고 가버리고.”
풍뢰권의 투덜거림에 무신이 어깨를 으쓱였다.
“적어도 이틀 늦은 네놈이 할 말은 아닌 것 같다만.”
잠시 천신우를 노려본 풍뢰권이 오히려 역정을 냈다.
“알게 뭐냐.”
“으하하! 그렇게 나와야 네놈답지. 그래. 구왕들을 배후에서 사주하던 놈이 있었다고?”
“그 얘기는.”
풍뢰권이 천신우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저놈이 해줄 거다.”
무신의 손녀 채은수도 초대받지 못한 자리에 동석하게 된 천신우였다.
무신, 풍뢰권, 그리고…….
‘누구지?’
애꾸눈 노인의 정체는 천신우조차 알지 못했다.
물론 천신우라고 무림의 모든 고수를 아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무명에 속한 고수들만큼은 기억하고 있다고 자부했다.
심지어 가장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편인 풍뢰권조차 권왕을 미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천신우니까.
하지만 애꾸눈 노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에 없었다.
‘원래 무명에 속한 인물이었는데 내가 몰랐던 건가? 그게 아니면…….’
천신우는 과거로 돌아온 이후 1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굵직굵직한 사건들은 그대로 일어났지만 분명 전생과 달라진 일들도 존재했다.
대표적으로 천신우가 자운검을 선점한 일.
그로 인해 자운검의 원래 주인이었던 검성의 운명에도 변화가 생겼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무명 모임에도 내가 알지 못하는 변화가 생긴 건 아니겠지?’
물론 당장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무엇보다 구왕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논의할 때였다.
“무림맹과의 일전을 포기하고 달아나려던 구왕들을 제거한 것도 바로 그자였습니다.”
무림맹엔 명부객의 존재를 보고하지 않았던 천신우였다.
하지만 무신과 풍뢰권에게까지 그 사실을 숨길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것.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그자는 무림맹 시험에 잠입한 자들과 같은 세력으로 보였습니다.”
무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거다. 무림맹의 정보망에 걸리지 않고 일을 꾸밀 만한 세력은 정말 드무니까.”
“반대로 무림맹의 정보망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정곡을 파고드는 천신우의 질문에 풍뢰권이 껄껄 웃었다.
“내가 뭐랬나. 이놈이 보통은 아니라니까?”
“실없는 늙은이 같으니라고. 이건 웃을 일이 아니야.”
무신의 표정은 진지했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의견이야. 하지만 섣불리 파고들기도 어렵다.”
무신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가 됐다.
자칫하면 파벌싸움으로 오인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무림맹 내부에 문제가 있는 것을 뻔히 알고서 그냥 넘어갈 수도 없는 노릇.”
“그럼 이렇게 하자고. 도제 그놈부터 치우는 거다.”
풍뢰권다운 의견.
당연히 무신은 역정을 냈다.
“멍청한 늙은이야!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면 무림맹이 남아나질 않아! 생살은 내버려 두고 정확히 환부만 잘라내야 하네. 그중에서도 가장 시급한 문제는…….”
무신이 언급한 이름을 듣는 순간 천신우의 눈이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