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학사환생 077화
천신우는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전생에서 구왕도가 함락된 직후, 많은 사람이 구왕들의 재산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예전부터 구왕들이 구왕도에서 악랄한 수법으로 모은 재산이 어마어마하다는 소문이 돌았기에.
하지만 막상 무림맹에서 환수한 금액은 기대 이하였다.
구왕들이 많은 재산을 무림 곳곳에 숨겨놓았기 때문이었다.
‘구왕들은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지만,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
그리고 전생에서 그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낸 것은 바로 금와전장의 장주 만금소였다.
만금소는 무림맹의 손이 닿기 전에 구왕들의 은닉재산을 독차지해 더 큰 부를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자금이 고스란히 마교로 흘러 들어갔지. 따라서 지금 내가 구왕의 재산을 선점하면 일석이조인 셈.’
천씨세가의 힘을 키움과 동시에 마교의 미래전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 첫걸음을 내딛기에 앞서 천신우는 구왕도와 하루 떨어진 곳에 대기하던 천씨세가 무인들과 합류했다.
“대공자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천신우를 맞이하는 천씨세가 무인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무신궁 무인들도 이에 질세라 채은수의 상태를 확인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가씨!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일단 들어가서 쉬시지요.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아니.”
채은수가 고개를 저었다.
“바로 무림맹으로 복귀할 거야.”
“알겠습니다. 당장 떠날 채비를 하지요.”
이미 채은수의 머릿속엔 무림맹으로 복귀해 무신에게 가르침을 받을 생각뿐이었다.
지금까진 최대한 조부에게 의지하지 않으려 했지만, 이번 사건을 통해 한계를 깨달은 것이다.
이대로는 힘들다고.
그런 채은수를 바라보며 천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에서도 그녀는 구왕도 임무 이후 무신에게 본격적으로 가르침을 받기 시작하면서 비약적으로 성장했지.’
이번 생엔 그 시기가 앞당겨진 셈이다.
“나도 복귀해야겠네. 된통 깨지기 전에 보고서를 제출하려면.”
채은수 일행과 동행해 무림맹으로 복귀하기로 결정한 장윤호였다.
천신우가 고진성을 쳐다보며 물었다.
“장주님께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먼저 들를 곳이 있네.”
고진성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가족들의 위령비가 세워진 곳이겠지.’
가족에게 구왕들의 죽음을 알려야 비로소 복수가 마무리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고진성이 천신우를 뜨거운 눈빛으로 응시했다.
“남은 생은 천씨세가에서 보내고자 하네. 허락해 주겠는가?”
“물론입니다.”
천신우도 바라던 바였다.
고진성 같은 고수의 합류는 언제나 반갑다.
“이놈은 잠시 내가 데려가마.”
권왕을 물건처럼 낚아챈 풍뢰권이 천신우를 돌아보았다.
“잠깐, 그럴 필요 없이 네놈도 같이 가면 되겠구나.”
“죄송하지만 저는 먼저 들를 곳이 있습니다.”
“바쁜 척하기는.”
천신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시간을 지체했다간 구왕들의 은닉재산이 만금소의 손에 넘어가고 말 것이다.
“구왕들의 재산과 관련된 일입니다.”
이미 다른 일행들과는 작별한 후였기에 천신우는 부담 없이 내막을 털어놓았다.
구왕들이 재산을 빼돌린 경위뿐만 아니라 정확한 위치까지도.
풍뢰권은 별다른 의심 없이 천신우의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물론 천신우의 의견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깟 돈 몇 푼이 대수라고.”
과연 풍뢰권다운 반응이었다.
구왕들의 은닉재산은 한 영역을 좌지우지하고도 남을 규모인데도 전혀 욕심을 내지 않는 것이다.
“단지 천씨세가의 힘을 키우기 위함만이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구왕들의 만행으로 인해 희생당한 이들이 많잖습니까.”
구왕들에 의해 납치당하거나 죽은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
그들 모두가 피해자였다.
“물론 어떤 것으로도 그들의 상처를 치유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이 다시 살아갈 기반을 마련해 줄 수는 있겠지요.”
“청승맞기는.”
풍뢰권이 실소를 흘렸다.
“그래도 네놈이 지껄인 말 중엔 가장 그럴듯하구나.”
“그럼 도와주시는 겁니까?”
천신우가 반색했다.
물론 혼자서도 불가능하진 않다. 하지만 풍뢰권이 도와준다면 일이 배는 수월해질 것이다.
“귀찮기는 하다만 네놈에게 맡겨두고 천년만년 기다리는 것보다야 낫겠지.”
풍뢰권이 물었다.
“그나저나 그곳을 지키는 놈들이야 전부 해치우면 된다지만 재산 처분은 어찌할 생각이냐.”
구왕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재산을 축적해두었다.
현금이나 전표가 가장 많았지만, 금은보석 같은 현물로 모아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아무리 네놈의 수족들이라 해도 이런 일을 맡겼다간 필시 이야기가 밖으로 새어나갈 것이야.”
“알고 있습니다. 천가의 무인들에게 맡기진 않을 겁니다.”
일전에 단심회주 석무해의 비밀금고를 털었을 때와는 경우가 다르다.
이번 일은 결국 언젠가는 세상에 드러날 수밖에 없다.
천씨세가를 전면에 내세웠다간 문제가 생길 것이다.
다행히 천신우는 이런 일을 은밀하게 처리할 조직을 갖고 있었다.
바로 단심회.
“그림자처럼 움직여줄 자들이 있습니다. 이번 일은 그자들에게 맡길 겁니다.”
지금의 단심회는 석무해가 회주일 때보다 오히려 내실이 튼튼해진 상태였다.
천신우의 지시에 따라 자금세탁과 운용에만 집중한 결과다.
“그럼 뭐 하고 있느냐. 당장 시작하지 않고.”
풍뢰권이 재촉하는 이유를 대충은 짐작하는 천신우였다.
* * *
첨벙-
뜨거운 목욕물에 몸을 담근 여인의 나신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녀는 바로 마교 후기지수 화사였다.
구왕도 임무를 마치고 복귀한 것이다.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원래 무림맹에서 조사대를 파견한 목적은 진상 조사였다.
하지만 조사대는 구왕들의 혐의를 밝혀내고 실종자들을 구출했을 뿐만 아니라, 구왕들의 세력을 궤멸시키기까지 했다.
사실 대부분이 천신우 일행의 업적이었지만 조사대 전원에게도 포상이 내려질 예정이었다.
물론 화사 입장에선 완전히 실패한 임무였다.
마교의 목적은 무림맹 조사대를 전멸시키는 것이었으니까.
“역시 내가 나서는 한이 있더라도 전부 쓸어버렸어야 했는데.”
화사가 손톱을 오도독 깨무는데 누군가 기척도 없이 욕탕 안으로 들어왔다.
“그건 아니라고 보는데.”
그는 바로 마교 최고의 후기지수 진사명이었다.
“보고는 받았다. 보기 좋게 실패했다며.”
화사가 가슴을 가리며 분한 표정을 지었다.
“놀리려고 찾아온 거야?”
“그럴 리가.”
진사명이 욕조에 손을 담그며 대꾸했다.
“감상을 들어볼까 해서.”
“월풍? 아니면 채은수 그년? 어느 쪽이든 대답은 같아. 솔직히 사룡 중에 진천 말고는 인정할 만한 인간이 없어. 만일 상부의 지시가 아니었다면 전부 죽였을 거야.”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니다.”
“알아.”
화사의 눈이 빛났다.
“천신우. 그놈에 관해 묻는 거잖아.”
진사명이 대꾸하는 대신 화사를 바라보았다.
화사가 가슴을 가렸던 손을 내렸다.
“질투 나는데. 자존심도 상하고. 나보다 천신우 그놈에게 관심을 보이다니.”
“그럴 수밖에. 지금 무림맹이 그놈 때문에 온통 난리잖나.”
원래라면 월풍이 천신우의 공을 가로챘을 것이다. 하지만 월풍은 현재 무단이탈로 인해 지탄의 대상이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덕분에 천신우 일행의 공적은 고스란히 무림맹에 전해졌고, 거기에 월풍을 쓰러뜨린 소문까지 더해져서 지금 천신우의 명성은 하늘을 찌르는 상황이었다.
천신우를 월풍 대신 사룡의 대열에 올리자는 이들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물론 월풍의 조부인 도제 때문에라도 공론화시키진 못했지만.
“계획대로라면 조사대가 궤멸하고 무림맹의 시선이 온통 구왕도에 쏠렸어야 하는데, 오히려 구왕도가 무너지고 사람들의 이목 역시 천신우에게 집중되는 중이다.”
“역시 살생부에 올렸어야 했다는 생각이 드네. 물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내게 맡겨둬.”
화사의 표정엔 자신감이 넘쳤다.
하지만 진사명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놈에게 모든 이목이 몰린 상황이다. 이런 시기에 놈을 암살했다간 문제가 커진다.”
“젠장! 그래서 지켜보자고? 이대로 천신우 그놈이 우리 계획을 망치는 꼴을 구경만 하라는 거야?”
진사명이 싸늘한 눈빛으로 화사를 쳐다보았다.
화사가 어깨를 으쓱였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아줘. 당신한테만큼은 미움받고 싶지 않으니까.”
진사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월풍이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중이다. 일단 지켜보지.”
월풍은 무림맹으로 돌아오자마자 수모를 갚기 위해 해결사들을 만나고 다니는 중이었다.
굳이 살수조직에 청부를 넣을 필요도 없었다.
도제에게 줄을 대기 위해 월풍의 부탁을 들어주려는 사람들은 무림맹에 널리고 널렸다.
하지만 화사는 부정적이었다.
“월풍 그놈은 천신우를 절대 저지하지 못해.”
눈앞에서 천신우의 무공을 지켜봤기에 나온 결론이었다.
“안다. 하지만 이번에도 실패하면 월풍의 뜻과는 무관하게 도제가 나서게 되겠지.”
“도제라. 역시 도제를 움직여 무신의 세력을 약화시킬 생각이야?”
“그래.”
진사명은 무림맹의 권력 구도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현재 무림맹은 크게 세 파벌로 나누어져 있다.
우선 무림맹주의 친위세력.
그리고 다수를 차지하며 적당히 부패해, 마교가 이용하기 좋은 도제의 추종세력.
마지막으로 소수지만 기득권보다 무림의 평화를 실현하고자 뭉친 무신의 세력.
“알다시피 무림맹 전체를 상대하는 것은 우리로서도 쉽지 않다. 하지만 그들끼리 충돌하게 만든다면 일은 훨씬 쉬워져.”
사실 이미 무신과 도제를 충돌시키기 위해 여러 계략을 실행에 옮겨온 진사명이다.
하지만 아직 그 둘의 직접적인 충돌은 없었다.
무신은 도제와의 충돌로 무림맹이 분열되는 것을 경계했고 도제는 주도권을 완벽하게 잡기 전까진 전면전을 꺼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마침 무신과 긴밀한 관계인 천신우가 도제의 손자를 박살 냈다. 의심 많은 도제는 분명히 무신이 천신우를 사주했다고 생각하겠지. 우린 도제의 의심을 확신으로 만들어주기만 하면 된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던 화사가 문득 생각났는지 물었다.
“그러고 보니 구왕들이 은닉한 재산은? 제법 많다고 들었는데 직접 챙기지 않아도 괜찮아?”
“그거라면 만금소가 거둬들일 예정이다.”
“만금소라면 금와전장의 늙은 돼지? 욕심이 너무 많지 않아?”
“욕심이 많아야 이용하기 좋은 법이지.”
만금소의 얼굴을 떠올린 진사명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 * *
천신우는 작은 언덕 위에서 멀리 떨어진 장원을 내려다보았다.
겉보기엔 평범해 보이지만 실은 죽은 구왕 가운데 서열 6위였던 미소왕이 재산을 숨겨둔 장소였다.
‘여기가 마지막이군.’
이미 다른 구왕들이 은닉한 재산은 모조리 빼돌린 천신우였다.
‘……가볼까.’
천신우가 그대로 바닥을 박차며 하늘 높이 솟구쳤다.
파아앗!
순식간에 장원 근처까지 날아간 천신우가 담장을 사뿐하게 넘었다.
소리 없이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장원을 지키던 무인들이 거의 동시에 쓰러졌다.
미소왕이 선별한 그들이었지만 죽는 순간까지 천신우의 침입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일이 술술 풀림에도 천신우의 표정은 어두웠다.
장원의 건물 내부로 들어선 그가 이윽고 철문과 두꺼운 벽으로 막힌 방들을 발견했다.
그곳엔 여러 사람이 감금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누구도 천신우를 보지 못했다. 천신우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천신우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미소왕이 그들의 모든 감각을 망가뜨렸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사지 근맥을 모두 끊어 달아날 수조차 없었다.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는군.’
때로는 소설보다 잔혹한 현실이 존재하는 법이다.
천신우는 미소왕의 악랄함에 진절머리를 떨었다.
‘미소왕은 이곳에 재산을 은닉했다. 그리고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감금해 뇌옥으로 위장했지. 심지어 이곳을 지키는 무인들조차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들의 임무가 은닉재산을 지키는 것임을 알게 되면 다른 마음을 품을 거라 우려해서였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들을 폐인으로 만들 필요는 없었을 터.’
천신우는 이를 악물며 건물 내부를 수색했다.
보고서 내용대로 비밀공간을 발견하는 데 성공한 천신우다.
물론 그곳엔 위험천만한 기관이 겹겹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천신우는 기관을 보이는 족족 파괴하며 전진했고 마침내 미소왕의 재산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미소왕의 은닉재산은 대부분 전표여서 혼자서도 운반하기 어렵지 않았다.
천신우는 빼돌린 재산을 단심회를 통해 처분하는 한편, 구왕도의 피해자들에게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자금을 기부할 예정이었다.
물론 천씨세가 이름으로.
‘천씨세가의 명성이 더욱 높아지겠군.’
계획한 일을 착실히 실행에 옮기는 가운데.
드디어 풍뢰권이 예고한 만남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 * *
천신우가 떠나간 장원에 뒤늦게 허연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바로 금와전장의 주인 만금소였다.
천신우와 마찬가지로 미소왕의 은닉재산을 찾고자 이곳을 방문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장원 내부는 쑥대밭으로 변한 후였다.
“…….”
무표정한 얼굴의 만금소에게 다른 부하가 달려와 보고했다.
“장주님…… 안 좋은 소식입니다.”
폭군왕의 비밀금고로 추정되는 건물이 털렸다는 보고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만금소의 표정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구왕들이 재산을 은닉한 장소로 추정되는 모든 곳이 탈탈 털렸다는 보고를 받는 순간, 만금소는 그만 평정심을 잃고 말았다. 그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대체 어떤 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