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학사환생 076화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천신우가 자운검을 내질렀다.
쐐애애액!
물살처럼 경쾌한 소리를 내며 자운검이 정확히 월풍의 목을 노렸다.
“……!”
공격을 가까스로 피해낸 월풍이 전력을 다해 도를 휘둘렀다.
어지간한 후기지수들은 물론이고 같은 사룡끼리도 쉽게 피하지 못했던 월풍의 공격이었다.
그만큼 빨랐고 정교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월풍은 눈을 부릅떴다.
야심 차게 휘두른 도가 허공을 갈랐던 것이다.
‘절대 피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심지어 월풍은 천신우가 어떤 식으로 피해냈는지 보지도 못했다.
월풍은 지금이라도 그만둬야 한다는 생각을 억지로 떨쳐내며 도를 날렸다.
쉬이이익!
천신우의 심장으로 날아가던 도가 마지막 순간 급선회하며 목으로 향했다.
“헉!”
지켜보던 이들이 깜짝 놀랄 만큼 절묘한 공격이었다.
채은수조차 눈앞이 아찔해졌다.
‘나라면 저걸 받아낼 수 있었을까?’
고개를 젓는 채은수였다. 하지만 천신우는 그녀와는 달랐다.
천신우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목으로 날아드는 도를 피해냈다. 마치 월풍이 처음부터 실수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흐아압!”
월풍이 기합을 내지르며 도를 회수했다.
이어질 역공에 대비한 것이었는데 의외로 천신우는 반격하지 않았다.
월풍의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누구나 빈틈은 있게 마련. 결국승패는 상대의 허점을 파고드는 순간 갈린다.
하지만 방금 천신우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잡지 못한 것이다.
‘벌레답지 않게 실력은 괜찮다만 경험이 부족하군.’
물론 월풍의 생각과 달리 천신우는 기회를 놓친 것이 아니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것뿐.
‘관점을 달리하면 눈에 보이는 것도 달라진다더니.’
천무검법과 월풍의 도법.
명백히 다른 무공임에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을 발견한 천신우였다.
‘시험해 볼까.’
손에 쥐고 있는 것은 검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모든 무공이 하나의 뿌리로 연결된다면 검과 도의 구분도 무의미하기에.
물론 검으로 도법을 펼치기란 생각 이상으로 어려웠다.
‘하긴 당연하겠지. 도는 속도보다는 위력에 중점을 두는 무기니까.’
그래도 천신우는 포기하지 않고 어설프게나마 도법을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당연히 맞상대인 월풍 입장에선 만만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움직임이 굼떠졌군. 벌써 지친 것이냐. 후후.’
자신감을 되찾은 월풍이 기세를 끌어올렸다.
줄곧 밀리던 월풍의 반격이 시작되자 지켜보던 사람들도 그럼 그렇지 싶었다.
애초에 천신우가 사룡의 일인인 월풍을 압도한다는 것은 그들의 상식으론 말이 되지 않았다.
사실 천신우 일행이 구왕들을 제압한 일을 두고도 뒷말이 많던 참이었다.
“후후. 고작 이 정도냐?”
파상공세를 이어가는 와중에도 월풍은 도발을 멈추지 않았다.
“이따위 실력으로 구왕들을 해치웠다니 믿기지 않는군. 아무리 구왕들이 변방으로 쫓겨난 떨거지들이라지만.”
까아앙!
천신우의 검을 튕겨내는 월풍의 표정에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고 보니 네놈이 천씨세가의 후계자라지? 후계자가 이 모양이면 그 집구석 수준도 알 만하군. 손을 섞었다는 게 수치스러울 정도다.”
마지막 공격을 준비하며 월풍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번 구왕도 사건을 해결해서 입지를 확고히 하려던 그다.
그런데 어찌 된 내막인지 채은수가 한발 앞서 구왕도를 궤멸시켰다.
이대로 빈손으로 돌아갔다간 조부인 도제에게 질책당할 것이 분명하다.
짜증이 나서 다짜고짜 시비를 걸었는데 의외로 그게 주효했다.
‘여기서 채은수 저년까지 제압한다면 구왕도 건은 만회하고도 남겠지. 어차피 우리 노인네는 다른 어떤 것보다 무신과의 경쟁 구도를 중시하는 인간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월풍은 도를 내려쳤다.
하지만 이어진 결과는 그의 예상과는 정반대였다.
천신우의 검이 월풍의 도를 밀어낸 것이다.
“……!”
이어진 것은 머리 높이로 날아드는 날카로운 베기였다.
마치 파도가 덮쳐오는 느낌에 월풍은 넘어지듯 몸을 뒤로 젖혔다.
고통이 느껴지지 않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찰나.
꽈아아앙!
월풍 뒤쪽의 벽이 무너져 내렸다.
“맙소사!”
주위의 탄성을 뒤로하며 월풍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박살 난 벽을 보는 순간, 간담이 서늘해지고 이마와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멀리 떨어져 있는 멀쩡한 벽을 아예 가루로 만들어버릴 정도의 위력!
저걸 정통으로 맞았다면? 절대 다치는 정도론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대체 이게 무슨……?”
월풍의 반응을 보며 천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군.”
월풍의 경지가 지금보다 높았다면 분명 천신우의 무공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천신우가 펼친 무공은 천무검법이 아니라 월풍의 도법이었으니까.
만류귀종의 이치에 따라 천신우는 월풍의 도법을 재해석했던 것이다.
월풍이 우습게 여겼던 초반부의 공격들은 시행착오였을 뿐이었다.
이 짧은 순간에 월풍보다 높은 수준의 도법을 구현해 낸 천신우였다.
‘확실히 다르지만 흡사하다.’
천무검법과 월풍의 도법을 같다고 보긴 힘들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완전히 다르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천무검법이나 월풍 저놈이 익힌 도법이나 최종목적지는 같을지도 모르겠군.’
10성 너머의 경지.
거기에 도달할 실마리를 어렴풋하게나마 잡은 천신우였다.
물론 그건 앞으로 차츰 나아갈 길이었다.
당장은 눈앞의 월풍을 제압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미 압도적인 실력 차이를 보여줬음에도 월풍의 반응은 지금까지 천신우가 상대한 자들과는 달랐다.
당황했던 것도 잠시, 이내 얼굴에 비릿한 미소를 지은 월풍은 오히려 천신우에게 다가섰다.
“뭐, 인정해 주지. 벌레치고는 괜찮았어. 그런데 말이야. 너, 감당할 수 있겠냐?”
월풍의 뒤끝은 이미 무림맹 후기지수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월풍과 시비가 붙었다가 불이익을 당한 후기지수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도제는 손자의 잘못된 행동을 묵인했기에 문제가 공론화되지 못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네놈은 물론이고 천씨세가 따위 날려버리는 건 일도 아니거든?”
월풍은 도제의 후광을 등에 업고 본격적으로 천신우를 협박하기 시작했다.
“긴말 안 한다. 무릎 꿇어!”
이미 월풍의 귀엔 채은수나 장윤호의 목소리 따윈 들리지도 않았다.
“무릎 꿇고 빌어! 이 새끼야!”
잠자코 듣던 천신우가 자운검을 칼집에 도로 집어넣었다.
천신우가 굴복했다고 생각한 월풍은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그래도 머리가 아주 안 돌아가는 새끼는 아니네. 그래,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빌면 용서해 주마.”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다.
월풍은 천신우가 무릎 꿇는 순간 바로 머리를 발로 짓밟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천신우가 무릎 꿇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애초에 천신우가 검을 집어넣은 이유도 월풍이 생각하는 것과 달랐다.
‘이렇게 유망한 후기지수 하나가 또 망가지겠군.’
지켜보던 조사대 무인들이 안타까운 표정을 짓던 찰나,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빠아악!
천신우가 주먹으로 월풍의 얼굴을 날려 버린 것이다.
“……!”
지켜보던 사람들은 경악한 나머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고개가 왼쪽으로 돌아간 월풍 역시 이 상황이 현실성이 없게 느껴지긴 마찬가지였다.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다시 앞을 바라보려던 월풍의 얼굴이 이번엔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퍼어어억!
동시에 파열음이 월풍의 고막을 뒤흔들었다.
의식이 날아갈 정도의 충격에 월풍이 휘청거렸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그가 뒷걸음질 치며 삿대질했다.
“뭐해! 버러지들아! 저 새끼 죽여! 구경만 하고 있으면 너희들 가문부터 끝장낸다!”
결국, 모두를 대신해 조사대 책임자가 나섰다.
도제에게 잘못 보였다간 출셋길이 막히기에 더는 좌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쯤 해두게.”
조사대 책임자에 이어 월풍의 비밀호위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 호위들보다 월풍 개인의 무력이 워낙 뛰어났기에 그들이 직접 나설 일은 거의 없었다.
원래 임무인 호위보다 오히려 월풍의 사적인 심부름을 하는 시간이 많은 그들이었다.
오늘도 평소처럼 나설 일이 없을 거라 판단했지만 사태가 심각해지자 개입한 것이다.
“다들 빠지시오. 여긴 우리가 정리하겠소.”
이 4명의 비밀호위는 월풍이 직접 선택한 고수들이었다.
특히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춰왔기에 합공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들이 합공한다면 월풍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천 공자라 했소?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는 있는 거요?”
“물론.”
천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앞으로 무슨 짓을 할지도 잘 알고 있지.”
천신우의 눈빛에서 심상찮은 분위기를 읽은 호위책임자가 외쳤다.
“막아!”
그러나 비밀호위들의 반응속도는 천신우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했다.
퍼어억!
천신우에게 걷어차인 월풍이 뒤로 날아갔다.
월풍만이 아니었다.
월풍을 부축하려던 비밀호위들까지 파도에 휩쓸리듯 쓸려나갔다.
콰아앙!
건물 벽에 처박힌 비밀호위들이 신음을 내뱉었다.
그들 모두 어디 한두 군데는 부러졌음을 직감했다.
그나마 그들이 완충재 역할을 한 덕에 월풍이 무사한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했다.
조사대 책임자가 황급히 월풍에게 달려갔다.
“괜찮은가!”
“저리 비켜!”
조사대 책임자를 밀쳐낸 월풍이 천신우를 노려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벌레 자식! 두고 보자!”
그대로 몸을 돌려 대열을 이탈하는 월풍이었다.
조사대 책임자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월풍의 뒷모습만 바라보던 그때, 천신우가 입을 열었다.
“가도 된다고 허락한 적은 없다만.”
“이 개자식이 정말!”
욕설을 내뱉으며 뒤돌던 월풍이 흠칫했다.
‘대체 어느 틈에!’
자신의 등 뒤에 있던 천신우가 바로 코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월풍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천신우의 주먹이 바람을 갈랐다.
빠아악!
턱주가리를 얻어맞고 허공에 반쯤 떠올랐던 월풍이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당연히 의식 역시 날아간 상태.
비밀호위들이 다친 몸을 이끌고 월풍을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물론 대답은 없었다.
비밀호위들이 서로를 돌아보더니 이를 악물고 그곳을 벗어났다.
명백한 무단이탈.
그러나 그걸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천신우가 보여준 모습이 워낙 충격적이었기에 다들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천신우를 바라볼 뿐이었다.
정작 천신우는 무덤덤한 얼굴로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인수인계도 끝났으니 이만 어르신께 합류하지요.”
걸음을 옮기려던 천신우가 멈칫했다.
‘이건……!’
틀림없었다.
무림맹 모집시험 당시 느꼈던 시선과 일치했다.
천신우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시선은 이미 어디론가 흩어진 후였다.
물론 이번만큼은 천신우도 의구심을 거두지 않았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 단지 우연일까?’
두 번의 생에 걸쳐 경험했다.
삶에 우연은 없다는 것을.
오직 필연만이 존재한다.
‘그러고 보니 전생에선 무림맹 조사대가 허무할 정도로 쉽게 당했지.’
명색이 무림맹에서 파견한 조사대다.
아무리 방심했더라도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없었다.
‘설마 무림맹 조사대에도 마교의 끄나풀이 숨어 있는 건가? 무림맹 시험에서와 마찬가지로?’
가능성 없는 추측은 아니었다.
당장 무림맹 감찰각주만 하더라도 마교를 추종하는 칠객의 일인이니까.
사실 같은 칠객이더라도 감찰각주의 무공은 명부객보다 훨씬 뛰어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감찰각주 말고도 무림맹엔 마교의 첩자들이 수두룩하다.’
물론 무림맹이라고 손을 놓고 있진 않았다.
천신우는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마교와의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대규모 색출작업이 진행됐지. 그 결과 마교와 관련된 자들이 대거 축출됐고.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면? 내가 아는 것 외에도 무림맹에 잠입한 마교의 첩자들이 존재한다면?’
천신우의 눈빛이 깊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따로 알아봐야겠어.’
* * *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 있던 마교 후기지수 화사 역시 천신우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역시 지난번 그 일이 우연이 아니었단 말이지?’
화사는 혀로 선홍빛 입술을 핥았다.
‘어쩌지. 당장 잡아먹고 싶어 견딜 수가 없는걸.’
자꾸만 몸이 달아오르는 화사였다.
* * *
무림맹 조사대를 떠난 천신우는 풍뢰권과 합류했다.
그때까지도 채은수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않았다.
사실 불필요했다.
천신우는 자신의 명예를 위해 싸운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채은수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본인의 명예를 스스로 지키지 못했다는 무력감에 그녀는 고심했다. 그리고 결단을 내렸다. 오랫동안 망설인 일을 하기로.
풍뢰권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천신우에게 물었다.
“그럼 이대로 천씨세가로 돌아갈 생각이냐?”
“무림맹에서 지원을 추가로 파견한답니다. 그들이 구왕도를 안정화시킬 테니 더는 이곳에 머무를 이유가 없지요.”
“죽 쒀서 개 준다더니. 딱 그 꼴이구나.”
천신우가 얻게 된 것은 명성이 전부였다.
물론 고진성이 천씨세가에 합류할 의중을 내비치긴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들인 노력에 비해 성과가 적은 것이 사실이었다.
“설마 제가 대가도 없이 일할 놈으로 보이십니까?”
“으허허! 그랬으면 묻지도 않았다. 이놈아! 그래, 뭘 챙긴 게냐?”
“우리 사이에 이러긴가? 콩 한 쪽이라도 나눠 먹어야지!”
장윤호의 말에 권왕도 관심을 보였다.
먹는 얘기에는 그야말로 환장하는 권왕이었기에.
“사실 아무것도 챙기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구왕들의 보물조차 따로 챙기지 않은 천신우였다.
자운검에게 먹이지 못할 수준의 병장기라면 굳이 욕심낼 필요가 없는 물건들이었다.
그리고 현재 시점에선 아무것도 챙기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앞으로도 챙기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지만 말이야.’
전생에 무림맹도 환수하지 못했던 구왕의 막대한 은닉재산들.
그걸 떠올리니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조금만 기다려. 다 내 걸로 만들어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