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학사환생 075화
천신우는 반사적으로 풍뢰권을 돌아보았다.
풍뢰권이 전음을 사용한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았다.
그는 그럴 만한 실력을 지닌 고수였으니까.
문제는 전음의 내용이었다.
‘어디까지 알아차린 거지?’
그리고 어디까지 말해야 한단 말인가.
사실 이런 고민이 처음은 아니었다.
언젠가는 이런 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게 오늘일 줄이야.’
물론 당장 대화를 시작하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보는 눈도 많거니와 무엇보다 승천단의 부작용으로 의식이 혼미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 * *
결국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난 천신우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채은수였다. 옆에 장윤호와 고진성의 모습도 보였다.
“괜찮은가?”
천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보다 이제 슬슬.”
천신우가 잠시 말을 멈추고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무림맹 실종자들을 찾아보지요.”
장윤호와 채은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실종자들이 살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만큼은 모두가 같았다.
복수를 끝마쳐서일까. 고진성 역시 조금은 후련해진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구왕도에서 사람들을 가둬두는 장소가 있네. 일단 그곳부터 찾아보도록 하지.”
고진성 덕에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왕도의 뇌옥에 도착한 천신우 일행이다.
지하의 암반을 파고 들어간 그곳은 외부의 도움 없이는 절대 탈출할 수 없는 구조였다.
“멈춰라! 구왕께서 허락하지 않은 자는 절대 이곳을 지나지 못한다.”
뇌옥을 지키던 구왕도 무인들의 경고.
물론 구왕들의 죽음을 눈앞에서 확인한 장윤호는 코웃음만 쳤다.
“감히 웃어?”
장윤호를 향해 위협적으로 다가서는 무인들을 막아선 것은 천신우였다.
“어쩌지? 구왕들은 우리가 이미 죽였는데.”
무인들이 술렁였다.
“설마 그럴 리가…….”
“어리석은 놈들! 저놈들의 허언에 넘어가다니. 말로는 뭘 못하겠느냐!”
푸아악!
동요하는 부하들의 목을 날려 버린 간수장이 천신우를 노려보았다.
“무림맹의 개잡놈들이 구왕도에 침입했다는 소식은 들었지. 우리한테까지 공을 세울 기회가 넘어올 거라 기대는 안 했다만.”
간수장이 외쳤다.
“죽여라! 공을 세워서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벗어나는 거다!”
간수장의 외침에 감화된 적들이 파상공세를 퍼부었다.
천신우가 어깨를 으쓱였다.
“고맙군. 수고를 덜어줘서.”
사실 간수장이 부하 한둘 죽였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전혀 없었다.
눈앞의 적들을 제압하는데 한 번의 공격이면 충분했다.
쏴아아앙!
적들을 시원하게 쓸어버린 천신우가 뇌옥 안으로 들어섰다.
수감자 중에 무림맹 실종자들을 구별하긴 어렵지 않았다.
장윤호가 실종자들의 얼굴을 알아봤으니까.
그렇다고 무림맹의 실종자가 아니라 해서 방치하진 않았다.
무림맹에서 재수사를 거쳐 무고한 사람은 풀어주고 범죄자에겐 정당한 처벌을 내릴 예정이었다.
다른 일행들이 인질구출에 힘쓰는 동안 천신우는 뒤처져서 걸었다.
바로 풍뢰권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이미 짐작은 하셨겠지만 저는 승천단을 복용한 상태입니다.”
“그깟 영약 먹든지 말든지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스스로를 구왕이라 칭하던 버러지들 역시 마찬가지.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따로 있다.”
풍뢰권이 천신우를 돌아보았다.
“네놈이 상대한 그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상황이 오면 어떻게 대응할지 생각해둔 천신우였다.
믿을 만한 사람이라면 마교 관련 정보를 털어놓고, 그게 아니라면 끝까지 발뺌할 생각이었다.
풍뢰권은 명백히 전자에 속했다.
“무림맹과 적대하는 세력에 속한 자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자가 속한 세력이 이런 표식을 사용한다는 것까지도.”
마존의 표식을 확인한 풍뢰권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이야기가 길어질 듯하구나.”
풍뢰권이 털어놓은 이야기는 천신우에게도 충격적이었다.
‘무신뿐만 아니라 무명 모임에 속한 인물들이 마교의 존재를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었다니.’
단순히 자존심 대결인 줄로만 알았던 제자 찾기 역시 마교에 대항할 인재를 키우기 위함이었다.
“나나 무명의 다른 늙은이들조차 그들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네놈은 어찌 알고 있는 것이냐?”
아무리 풍뢰권을 믿는다 해도 과거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믿어줄지도 의문이고.’
“대답하기 껄끄러우면 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누구에게나 말 못 할 사정이 하나씩은 있는 법이니.”
풍뢰권이 높다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풍뢰권의 질문이 이어졌다.
“네놈은 그들과 맞서 싸울 생각이더냐?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천신우는 당연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알다시피 놈들은 강대하다. 어쩌면 무림맹의 힘을 하나로 합쳐도 상대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풍뢰권은 현실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실제로 전생에서 무림맹은 마교의 침공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런데도 맞서려 한다면 네놈은 지금보다 훨씬 강해져야 한다. 물론 지금도 뭣도 모르는 놈들이야 네놈을 치켜세워준다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알고 있습니다.”
“네놈이 익힌 검법. 대성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천신우도 천무검법의 10성에 도달한 이후 막연하게 생각했던 부분이다.
10성 너머에 새로운 경지가 존재한다고.
“만류귀종이라고 들어봤느냐?”
“모든 것은 하나로 통한다는 뜻이 아닙니까?”
“무공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으니 결국은 하나로 이어질 수밖에.”
천신우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나저나 철옹, 그놈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느냐?”
“아닙니다. 아직 무신 어르신께는 말씀드린 적이 없습니다.”
왠지 모르게 풍뢰권의 어깨가 조금 올라간 기분이었다.
“끌끌. 나한테 먼저 얘기하길 잘한 거다. 작은 사건도 막지 못해서 빌빌대는 철옹 그놈한테는 말해봐야 입만 아프지.”
무림맹 시험에 무영을 잠입시켜놓고도 사고를 막지 못했던 일을 비난하는 것이었다.
“네놈도 마찬가지다. 가뜩이나 이번 일로 적들도 네놈을 주목하기 시작했을 터. 괜히 설치지 말고 수련이나 더해라.”
물론 풍뢰권이 말은 저렇게 해도 결국 무신과 상의할 것임을 알고 있는 천신우였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걱정은 무슨! 네놈이 길바닥에서 죽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괜히 민망한지 역정을 내며 성큼성큼 가버리는 풍뢰권.
천신우는 그런 풍뢰권을 바라보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 * *
“이럴 수가…….”
뒤늦게 도착한 무림맹 조사대 앞에 펼쳐진 것은 폐허로 변한 구왕도였다.
모든 관문이 무력화되고 모든 기관장치가 파괴된 구왕도에서 예전의 영광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구왕도를 다스리는 구왕들은 이미 싸늘한 주검으로 변한 데다, 무림맹 실종자들 역시 사망자를 제외하곤 모두 구출된 상황.
무림맹 조사대는 당초 목적과 달리 뒷수습만을 수행하게 됐다.
조사대의 일원으로 이번 임무에 참가한 마교 후기지수 화사의 표정이 굳어진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상황을 설명해 줄 명부객의 시체를 뒤늦게 발견한 그녀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뭐야? 뒈진 거였어? 한심한 벌레 같으니라고!’
급기야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명부객의 시체를 마구 짓밟는 화사였다.
“구왕도에 원한이 얼마나 큰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사체를 훼손시키는 것은 곤란해.”
사정을 오해한 조사대 무인이 주의를 줬지만 화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냥 전부 엎어버려?’
심지어 그런 생각까지 하던 찰나.
“벌레들 밟는다는데, 말릴 필요가 있을까?”
누군가 화사를 두둔하고 나섰다.
찢어진 눈매가 인상적인 청년은 바로 사룡의 일인인 월풍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이 있었지.’
월풍은 마교 윗선에서 이용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인물.
화사 마음대로 제거해선 곤란했다.
“그나저나.”
월풍이 조사대 책임자와 인수인계 중인 천신우 일행을 돌아봤다.
“무슨 대단한 일을 했다고 저리 으스대는 건지 모르겠군.”
급기야 천신우 일행에게 다가가 시비를 거는 월풍이었다.
“적당히 하고들 빠지지? 낄 곳 안 낄 곳 구분 못 하지 말고.”
장윤호가 월풍의 얼굴을 알아보고 헛바람을 들이켰다.
“헙!”
그가 사룡의 일인이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월풍의 조부는 도제.
무신과는 반대파벌인 무림맹의 고수였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채은수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런 변방에 웅크려 지내던 벌레들 잡아놓고 대단한 전공을 세웠다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천신우가 피식 웃었다.
월풍의 비뚤어진 성격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대놓고 시비를 걸어오다니.
‘아마도 무신의 손녀인 채은수 때문이겠지. 게다가 기껏 구왕도까지 와서 주목받지 못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을 테고.’
물론 천신우로선 그런 사정을 이해해 줄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쪽은 떠들 시간에 뒷정리나 하지.”
“뭐? 지금 뭐라고 지껄였냐?”
갑자기 분위기가 험악해졌지만, 누구도 먼저 나서지 못했다.
조사대 책임자라 하더라도 도제의 손자인 월풍의 심기를 거스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채은수가 중재를 자처했다.
“그만하지?”
“뭐야?”
월풍이 눈을 찢으며 채은수와 천신우를 번갈아 봤다.
“그새 정이라도 들었냐?”
“네가 무슨 상관이지?”
“크크큭. 상관있지. 아무와나 뒹굴고 다니면 사룡의 품격이 떨어지니까.”
사룡답지 않은 무례한 언행에 주변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는 찰나,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채은수가 월풍의 뺨을 후려친 것이다.
쫘악!
뺨을 얻어맞고도 월풍은 격분하는 대신 혀로 입술을 핥았다.
“발끈하는 거 보니 진짜 둘이 잔 모양이네? 무신 어르신은 네가 이러고 다니는지 아시나 모르겠군.”
“닥치라고 했을 텐데!”
급기야 칼자루에 손까지 가져간 채은수였다.
그러나 선뜻 뽑진 못했다.
월풍은 경박한 언행과 달리 실력만큼은 뛰어난 고수.
채은수로서도 이긴다는 확신이 없었다.
오히려 패배할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사룡들 사이에도 실력 차이가 엄연히 존재하기에.
훌륭한 인품에 과묵한 성격의 진천이 단연 최고였고, 음침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소붕과 눈앞의 월풍이 다음을 다퉜다.
그리고 채은수가 사룡 중엔 가장 실력이 떨어졌다.
‘내가 지면 조부님의 명예를 더럽히고 말아.’
채은수가 망설이는 이유였다.
‘이럴 때 풍뢰권 어르신이 계셨더라면…….’
귀찮은 일은 질색이라며 무림맹 조사대가 도착하기 전부터 숙소에 틀어박힌 풍뢰권이다.
만일 풍뢰권이 지금 상황을 목격했더라면 월풍을 가만두지 않았을 텐데.
“왜? 막상 뽑진 못하겠어?”
월풍이 저렇게 도발하지도 못했을 테고 말이다.
그러나 채은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언제까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할 수는 없다.
무신의 손녀라는 사실이 자랑스럽지만 동시에 무신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은 그녀였다.
결국 채은수가 검을 뽑기로 마음먹은 순간, 그녀의 앞으로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천신우였다.
월풍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너 같은 벌레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만? 아까도 관대하게 넘어가 줬더니만 아주 눈에 뵈는 게 없군.”
그나마 채은수는 무신의 손녀이기에 사람대접을 해준 월풍이다.
자신보다 떨어진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벌레로 깔아뭉개는 그였다.
“그럼 처음부터 나와 채 소저를 모욕하지 말았어야지.”
“오호라. 그래서 대신 네가 나서겠다는 건가? 뭘 믿고?”
월풍이 파리를 쫓듯 손을 내저었다.
“아서라. 너 같은 벌레 새끼랑 손 섞어봐야 나만 망신이지.”
“그래?”
천신우의 입가가 올라갔다.
“과연 그럴까?”
의미심장한 반응에 월풍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 이 새끼 봐라?”
후기지수의 최고봉이라는 사룡 중에서도 상위권인 자신이다.
거기에 도제라는 막강한 후광까지.
그렇기에 지금껏 월풍에게 이런 식으로 대하는 사람은 사실상 천신우가 처음이었다.
“너,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냐?”
“넌 내가 누군지 알고?”
“푸하하하!”
월풍이 손으로 이마를 젖히고 웃었다.
그러나 다시 천신우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 그렇게 소원이면 밟아주마.”
차아앙!
기세 좋게 도를 뽑아 드는 월풍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천신우도 검을 뽑았다.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파아아앗!
천신우의 신형이 빛살처럼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