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학사환생 073화
구오오오!
발밑에 어두운 심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쳐다보는 것만으로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였다.
그러나 거기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가 아니었다.
바닥뿐만 아니라 천장도 붕괴하며 돌덩어리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천신우는 자운검으로 돌덩어리를 닥치는 대로 쪼갰다.
평평하게 만든 바위를 발판 삼아 위로 도약하기를 수십 차례.
마침내 기나긴 통로가 끝나고 출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풍뢰권이야 진작 여유 있게 통로를 빠져나간 상황.
권왕과 채은수와 고진성도 출구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우려했던 장윤호까지 출구를 향해 몸을 날리는 순간.
콰콰쾅!
재차 폭발이 일어났다.
아예 쑥대밭으로 변해버린 통로를 바라보며 장윤호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
거의 넋이 나간 모습.
하지만 확실히 장윤호도 여간내기는 아니었다.
“괜찮아요?”
천신우의 질문에 장윤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벌떡 일어났다.
“그럼. 괜찮고말고.”
평소처럼 호들갑을 떨지도 지레 겁부터 먹지도 않았다.
진지한 눈빛.
장윤호도 깨달은 것이다.
출구 저편에서 기다리는 존재들을.
천신우는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발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사방이 고요하다.
그러나 긴장감만큼은 극에 달했다.
숨마저 멈추며 천신우는 감각을 곤두세웠다.
‘이곳이 바로 구왕들의 본거지군.’
양쪽 벽으론 기괴한 장식들이 가득했다.
뱀들이 휘감고 올라간 기둥이 받치는 천장은 결코 닿기 힘들 만큼 높았다.
바닥에 깔린 비단 위엔 원목으로 만들어진 탁자가 있었다.
구왕을 의미하는 아홉 개의 의자가 위치한 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은 4명뿐이었다.
‘이상하군. 나머지 둘은 어디 있지?’
이곳으로 오는 동안 3명의 구왕을 처단한 천신우다.
그럼 이곳에는 6명의 구왕이 남아 있어야 했다.
그런데 4명뿐이라니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물론 의문을 해결하려면 눈앞의 놈들부터 쓰러뜨릴 필요가 있었다.
상석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던 중년인이 천신우를 돌아보았다.
“결국, 여기까지 왔군.”
그를 바라보는 천신우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불살왕…….”
“그래. 내가 바로 불살왕이네.”
대화를 주도하는 불살왕의 태도는 온화하기 그지없었다.
구왕들 중에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살인마라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을 만큼.
그러나 천신우는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같은 구왕들이라 해도 서열에 따라 실력 차이가 어마어마하다.
‘저기 온몸이 털로 뒤덮인 사내가 서열 3위 야수왕. 그리고 상석에 앉은 남자가 서열 1위 광마왕.’
거기에 지금 대화를 나누는 불살왕까지.
그들은 다른 구왕들과는 격이 다른 고수들이었다.
‘물론 이쪽에도 풍뢰권이 있긴 하지만 처음부터 나서준다는 보장은 없다.’
천신우는 머릿속으로 전투 구도를 그렸다.
모든 경우의 수를 미리 계산해두고 싸움에 임하면 당황할 일이 적다.
“분명 다섯 놈이라는 보고를 들었는데. 지금 보니 하나가 늘었군?”
불살왕이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하긴 그게 중요하진 않지. 그보다.”
불살왕은 곧장 천신우를 바라보았다.
천신우가 일행 중에 주도적인 위치임을 단번에 간파한 것이다.
“계집년이야 무신의 손녀라지만. 나머지 놈들은 알아봐도 별다른 정보가 없던데.”
최근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천신우지만 구왕들의 악명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풍뢰권과 권왕 역시 마찬가지.
장윤호조차 무림맹에서 요주의 인물이라고 보긴 힘들었다.
“그런데도 여기까지 왔다면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거겠지.”
불살왕은 천신우 일행을 무림맹 비밀조직의 일원이라 판단했다.
‘신비각 소속인가? 그것도 아니면 무신이 만든 사조직?’
천신우 일행에 채은수가 포함됐기에 가능한 추측이었다.
어느 쪽이든 무림맹에서 작정하고 구왕도를 쳤다는 결론이 나온다.
‘어쩌면 무림맹에서 처음부터 구왕들을 치우기 위해 개수작을 부린 건지도 모르겠군.’
낯선 방문자. 그리고 명부객.
모든 일이 처음부터 무림맹에 의해 철저히 계획된 것이었다면?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엔 걸리는 부분이 많다. 구왕도를 쓸어버리기로 마음먹었다면 일을 복잡하게 진행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이미 명부객의 뒷조사를 진행했던 불살왕이다.
명부객이 무림맹과 아무런 연고도 없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그런데 지금에야 와서 모든 것이 무림맹의 계획이었다고 한다면, 불살왕 스스로 무능을 인정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군.’
마교의 개입.
거기에 천신우라는 변수까지.
불살왕의 정보력만으론 지금 상황을 파악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때였다.
콰직!
구왕 가운데 서열 3위 야수왕이 손에 쥐고 있던 술잔을 우그러뜨렸다.
가공할 악력에 권왕이 눈을 빛냈다.
쾅!
야수왕이 탁자를 내려치며 일어났다.
“그놈의 시시한 잡담은 끝나려면 아직 멀었나.”
명백히 불살왕을 겨냥한 빈정거림이었다.
야수왕은 이런 방식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적이 쳐들어오면 싸우면 그만이다.
생각할 필요도 고민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마침 권왕 역시 길어지는 대화가 마음에 들지 않던 참이었다.
우지끈!
바닥에 고정된 탁자를 통째로 뽑아버린 권왕이다.
거대한 탁자를 부채처럼 휘두르자 다른 구왕들도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크하하하! 아주 마음에 드는 놈이구나!”
야수왕이 호탕하게 웃으며 권왕에게 달려들었다.
꽈앙!
일격에 탁자가 박살 났다.
권왕은 전혀 당황하는 기색 없이 주먹을 쥐었다.
야수왕 역시 털을 휘날리며 같은 자세로 맞섰다.
“사내라면 자고로 주먹이지.”
다음 순간 권왕과 야수왕의 주먹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콰앙!
주먹과 주먹이 부딪혔는데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권왕과 야수왕이 거울을 보듯 동시에 고개를 까닥거렸다.
뒤로 물러났던 권왕과 야수왕이 멧돼지처럼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어깨와 어깨가 부딪치며 충격이 사방을 뒤흔들었다.
지켜보던 천신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군. 권왕과 야수왕이 만나면 이럴 거라 예상은 했지만…….’
여전히 구왕 둘이 사라진 사실이 마음에 걸리는 천신우였다.
만일 그들이 인질들을 처리하기 위해 따로 움직인 거라면 낭패였다.
하지만 불살왕을 떠보기도 전에 싸움이 벌어졌고 이제는 돌이키기 어려웠다.
‘최대한 빨리 싸움을 끝내고 인질들을 찾는다.’
결단을 내린 천신우가 자운검을 고쳐잡은 순간이었다.
“……!”
반대편 통로에서 심상찮은 기척이 느껴졌다.
야수왕과 불살왕은 물론, 구왕 가운데 최강자인 광마왕마저 능가하는.
그리고 새로운 기척을 알아차린 것은 천신우만이 아니었다.
“가봐라.”
천신우가 돌아보자 풍뢰권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물론 천신우가 그냥 지나가게 내버려 둘 구왕들이 아니었다.
“아직 대화는 끝나지 않은 거로 기억하네만.”
천신우를 막아서는 불살왕에 맞선 것은 채은수였다.
광마왕은 옆으로 물러난 채로 움직임이 없었고.
구왕 서열 6위 미소왕은 고진성이 나섰다.
“이놈은 내게 맡겨주게.”
단순히 천신우를 도우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고진성의 눈빛에 강렬한 살기가 깃들었다.
“드디어 네놈과 이렇게 마주 서게 됐구나.”
5년 전에 구왕도에 잠입한 고진성은 가족을 구왕도로 납치한 범인들이 누군지 알아냈다.
바로 눈앞의 미소왕과 놈의 부하들이 저지른 일이었다.
그러나 범인을 알아냈음에도 복수하기란 쉽지 않았다.
미소왕은 어딜 가든 항상 호위를 대동하는 데다 다른 구왕들과 함께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어렵게 잡은 기회다. 오늘 반드시 네놈을 죽이고 아내와 딸의 원한을 갚겠다.”
“그렇게 말한들 도통 누군지 모르겠는걸.”
미소왕이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죽인 년들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반쯤 눈을 감고 입맛을 다시는 미소왕이었다.
“그래도 너무 원망은 하지 말라고. 모녀나 자매들은 내가 사이좋게 귀여워해 줬으니까.”
“개자식!”
눈이 뒤집힌 고진성이 미소왕에게 달려드는 모습을 바라보던 천신우가 이내 몸을 돌렸다.
직접 나선다면 미소왕 정도 상대하기란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래선 고진성 본인의 복수가 아니게 된다.
전생에도 직접 복수해 주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무림을 등진 고진성이다.
‘꼬인 매듭은 직접 풀어야 하는 법이지.’
천신우는 진심으로 기원했다.
고진성이 가족의 원수를 갚기를.
무림맹 인질들을 구하고 천씨세가에 합류하는 것은 이후의 문제였다.
그러나 구왕들을 지나쳐 뒤편의 통로로 들어서는 순간, 천신우는 감상에서 벗어났다.
통로 반대편에서 박자를 맞추듯 발소리가 들려왔다.
뚜벅뚜벅.
마침내 통로 한복판에서 천신우와 상대는 약속한 것처럼 멈춰 섰다.
상대의 몸에서 풍겨져 나오는 진한 피비린내.
천신우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역시 명부객이었군.’
칠객의 일인이자 구왕도 사건을 주도한 장본인.
지금까지 상대해 온 마교 추종자들과는 격이 다른 거물.
천신우는 예전부터 생각해둔 바를 떠올렸다.
‘칠객 정도면 시도해 볼 만하겠어. 마침 혼자이기도 하고.’
그 순간 명부객 역시 천신우를 알아보았다.
“네놈은?”
마교의 정보망을 통해 천신우 일행에 대한 정보를 뒤늦게나마 입수한 명부객이다.
“그렇군. 네놈이 바로 천씨세가의 천신우군.”
명부객은 명색이 칠객.
여느 마교 추종자들보다 천신우에 대한 정보 역시 많이 알았다.
“절명곡. 무림맹 시험. 알고 보니 전부 네놈이 훼방을 놓았더군.”
그리고 이번 구왕도까지.
천신우의 행보는 분명 우연이라 넘기기엔 미심쩍은 구석이 많았다.
물론 천신우가 밝히지 않는 이상 명부객이 내막을 알아낼 방법은 없었다.
“무신의 소행이라고 봐도 되겠지?”
앞서 다른 사건에서 무신의 개입으로 계획을 철회했던 마교다.
게다가 천신우가 무신의 손녀와 함께 움직이고 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좋을 대로 생각하도록. 그보다.”
천신우는 굳이 명부객의 정체에 대해 묻지 않았다.
“인질들은 어디에 있지?”
“그건 독존왕과 황금왕에게 물어봐라.”
천신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하필 독존왕과 황금왕이 보이지 않았지.’
그 둘은 구왕들 중에서도 특히나 이기적인 작자들.
놈들이라면 이런 긴급상황에서 인질이나 처리하기보다 오히려 달아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뒤늦게 등장한 명부객이 굳이 그들을 언급한 것이다.
냄새가 났다.
“설마 네놈이 죽였나?”
물론 명부객이 순순히 대답해 줄 리는 없었다.
그는 남을 곤란하게 만드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인간이었으니까.
“침묵한다고 능사가 아닐 텐데. 명부객.”
구왕들 앞에서도 항상 평정을 유지하던 명부객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네놈이 어떻게!”
당연히 명부객의 정체를 까발린 것은 실수가 아니라 다분히 의도한 행동이었다.
‘지금까지야 굳이 마교 추종자들의 정체를 알고도 밝히지 않았지만 칠객은 달라. 놈들은 상당한 수준의 정보를 갖고 있다.’
물론 천신우는 미래를 안다.
따라서 칠객들이 가진 정보 역시 대부분 알고 있다.
하지만 천신우가 알지 못하는 사실도 있다.
천신우는 지금 그것에 대해 알아볼 생각이었다.
“더 놀라게 해줄까? 나는 네놈들이 사용하는 표식도 알고 있다.”
천신우가 표식이 그려진 종이를 꺼내 보였다.
바로 전생에서 천신우를 죽인 마교 고수가 가슴에 달고 있던 표식이었다.
그걸 보는 순간 명부객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네놈이 어떻게 마존의 표식을!”
천신우의 눈빛 역시 가라앉았다.
마존이라고? 나를 죽였던 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