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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환생-72화 (72/171)

# 72

학사환생 072화

한때 중견문파 고검장의 장주로서 무림에서 명성을 떨쳤던 고진성이다.

가족의 복수를 위해 구왕도에 잠입한 후로는 사람들 기억에서 거의 사라졌지만, 그와 별개로 고진성의 무공은 오히려 그때보다 발전한 상태였다.

그런 그가 지금은 풍뢰권의 어깨를 주무르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공손한 태도로.

“쯧쯧. 그리 힘이 없어서야.”

고진성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난생처음 당하는 굴욕.

하지만 대들 수도 없었다.

풍뢰권이 연장자라서가 아니다.

구왕의 살수들이 어떻게 됐는지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풍뢰권이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을 바라보았다.

“네놈은 어떻게 보느냐?”

고진성의 시선이 천신우와 권왕을 향했다.

뼛속부터 무인인 그는 채은수의 눈부신 미모보다도 천신우와 권왕의 무공에 관심이 갔다.

“멈추라고 한 기억은 없다만?”

움찔한 고진성이 서둘러 풍뢰권의 어깨를 안마했다.

그러면서도 눈길은 천신우와 권왕의 싸움을 쫓기 바빴다.

검과 주먹.

사용하는 무기만큼이나 둘의 싸움방식은 차이가 있었다.

천신우의 검법이 기본을 지키면서도 기교를 섞어주며 상대의 의표를 찌른다면, 권왕은 그야말로 막무가내였다.

돌진해서 주먹을 내지르는 것이 전부.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그게 먹힌다는 사실이다.

권왕의 주먹은 피할 수 없을 만큼 빨랐고, 견뎌낼 수 없을 만큼 위력적이었다.

“어떠냐. 너라면 상대할 수 있겠느냐?”

풍뢰권의 물음에 고진성은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권왕의 공격을 미리 예상해 피하고 허점을 노리는 자신의 모습을.

그 순간.

거짓말처럼 고진성의 상상과 똑같은 일이 현실에서도 벌어졌다.

“뻔해!”

구왕도 고수 하나가 예상했다는 듯이 권왕의 주먹을 피해낸 것이다.

하지만 더 충격적인 일은 그 직후에 벌어졌다.

구왕도 고수가 권왕을 향해 발길질하는 순간.

우두둑!

거짓말처럼 구왕도 고수의 발목이 기이한 각도로 꺾였다.

“크아아악!”

비명을 지르는 그의 면상에 권왕의 주먹이 꽂혔다.

“……!”

고진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체 몸을 얼마나 단련시켰으면 공격한 상대가 오히려 다치는 것인가.’

그러나 풍뢰권은 혀만 찼다.

“아직 한참 멀었구나. 반면에…….”

풍뢰권의 눈길이 천신우를 향했다.

권왕처럼 천부적인 육체를 타고난 것은 아니다.

천신우가 아무리 단련하더라도 권왕같이 적의 공격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내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천신우는 권왕에겐 없는 능력들을 가지고 있었다.

“저놈은 전장 전체를 한눈에 들여다보고 있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천신우의 싸움을 지켜보면 답이 나왔다.

대치한 상대와 검을 섞다가도 장윤호나 채은수가 위험에 처하면 곧바로 비수를 날렸다.

그뿐만 아니라 아무리 멀리 있는 상대라 하더라도 허점을 드러내는 순간을 절대 놓치지 않았다.

“게다가 저놈은 머리를 써서 싸우는 방법을 알지. 어떤 놈과는 다르게.”

그걸 듣기라도 한 걸까, 그 순간 권왕이 눈앞에 있는 상대를 머리로 들이박았다.

쾅!

상대의 얼굴을 박살 내버린 권왕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머리가 지끈거리는 풍뢰권이었다.

“쯧쯧. 항상 저런 식이지. 저놈 보고 배우기라도 해라. 자고로 머리를 쓴다는 것은.”

어느새 달려든 구왕도 무인들을 쓸어버린 천신우가 채은수와 장윤호에게 가세했다.

“뒤다!”

동료의 외침에 구왕도 고수가 뒤돌며 검을 휘둘렀다.

쏴앙!

간결하면서도 위력적인 공격!

하지만 천신우는 마치 상대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 알고 있는 것처럼 여유 있게 피해냈다.

전장 전체를 조망하면서 다른 적들의 무공과 전투방식을 기억해둔 천신우였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정보를 십분 활용했다.

그야말로 경악할 정도의 학습능력이었다.

“굉장하군요.”

고진성은 침을 꿀꺽 삼켰다.

권왕이 육체 능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면, 천신우는 육체와 두뇌가 완벽히 조화를 이룬 천재였다.

어느 쪽이 상대하기 어려울지는 분명했다.

천신우의 가공할 무력 앞에서 그토록 많던 구왕도의 무인들도 눈에 띄게 수가 줄어들었다.

살아남은 이들의 얼굴에서도 자신감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젠장! 죽어!”

악에 받쳐 목숨을 내던지는 놈들은 극소수.

나머지는 서로 눈치를 보기 바빴다.

심지어 등을 돌려 달아나는 놈들도 보였다.

물론 그런다고 목숨을 건지진 못했다.

“이놈들! 어딜 도망가느냐!”

장윤호가 기어이 쫓아가서 응징했으니까.

마침내.

서걱!

천신우가 마지막 남은 무인의 목을 베어냈다.

“일단 여긴 정리됐군요.”

천신우가 주위를 돌아보며 물었다.

“다들 괜찮습니까?”

권왕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고진성은 민망한 상황이었다. 남들이 죽어라 싸우는 동안 고진성이 한 것은 풍뢰권의 어깨를 주무른 것이 전부였다.

천신우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채은수에게 다가갔다.

구급약품을 건네자 채은수가 손사래를 쳤다.

“저는 괜찮아요.”

“어깨에 바르세요. 금방 아물 겁니다.”

채은수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민폐 끼칠까 일부러 내색하지 않았는데, 천신우가 그녀의 상처 부위를 정확히 파악한 것이다.

그러나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구급약품을 받아드는 채은수였다.

벌어진 상처에 약을 바르는 동안에도 그녀는 얼굴 하나 찡그리지 않았다.

이윽고 붕대까지 질끈 묶은 채은수가 몸을 일으켰다.

“그럼 다시 출발할까요.”

씩씩한 목소리의 채은수와 달리 장윤호가 앓는 소리를 냈다.

“잠깐만! 나도 다쳤다고!”

천신우가 장윤호의 상처를 확인한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긁혔군요.”

“살짝 긁히다니! 얼마나 아픈데!”

천신우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약을 건넸다.

약을 받아들려던 장윤호가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정말이지 엄살 하나는 무림 최고인 장윤호였다.

천신우는 피식 웃으며 직접 약을 발라줬다.

“아이고! 나 죽네!”

상처 부위가 따가운지 비명을 질러대는 장윤호.

풍뢰권이 뭐가 재밌는지 껄껄 웃었다.

“으허허. 그놈 아주 전부 몰려오라고 고사를 지내는구나.”

장윤호가 움찔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더없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묻는다.

“그런데 정말 이대로 구왕의 본거지로 들이닥칠 셈인가?”

“물론입니다. 그러고 보니 소개가 늦었군요. 이쪽은 고검장의 장주이신 고진성 대협이십니다. 구왕들의 본거지로 안내해 주실 겁니다.”

고진성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고진성이라고 합니다.”

간단하게 통성명을 하는 채은수와 권왕이었다.

물론 장윤호의 반응은 달랐다.

“고검장의 장주님이셨군요! 어쩐지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곳에 계셨던 겁니까?”

“그건.”

고진성이 대답하려는 순간. 풍뢰권이 장윤호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으악! 갑자기 때리시면 어떡합니까!”

“엄살 그만 피우고 일어나라.”

풍뢰권의 배려에 고진성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감사합니다.”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젓는 풍뢰권이었다.

“설명이나 퍼뜩해라. 나머지 놈들이 어디 숨어 있는지.”

“이곳에서 구왕들의 본거지까지는 멀지 않습니다. 다만 비밀통로로만 진입할 수 있습니다.”

평상시엔 호위 무인들이 교대로 경계를 선다.

하지만 비상시엔 기관이 작동되도록 설계됐다는 것이 고진성의 설명이었다.

“흠, 좀 무서운데…….”

힘없이 중얼거리던 것도 잠시. 다른 일행들이 움직이자 황급히 뒤따르는 장윤호였다.

“같이 가세!”

* * *

구왕도의 정예들이 당했다는 소식은 곧바로 살아남은 구왕들에게 전해졌다.

바로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긴급회의가 소집됐지만, 모두가 참석한 것은 아니었다.

구왕들 가운데 서열 4위 독존왕과 서열 5위 황금왕은 불참했다.

서로 다른 구실을 대긴 했지만 그들의 목적은 같았다.

“저런 고수들을 선봉에 세우다니. 무림맹에서 구왕도를 쓸어버리려고 작정한 것이 틀림없다.”

지금까지 구왕도 문제에 대해 소극적이었던 무림맹이다.

물론 무림맹이 구왕도를 쓸어버릴 힘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구왕도를 쓸어버린들 흑도방파 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무림맹은 구왕들이 죽더라도 어차피 다른 흑도방파들이 그들의 자리를 대신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던 무림맹이기에 이번에도 소극적으로 대응하리라 생각했건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천신우 일행은 구왕도를 그야말로 휩쓰는 중이었다.

“설령 저들을 막아내더라도 무림맹은 더욱 강한 자들을 보내겠지. 어차피 결말이 정해져 있다면 차라리 지금이라도 몸을 빼는 것이 최선이다.”

그렇게 생각한 황금왕은 긴급소집에 응하지 않고 도주할 채비를 했다.

물론 몸만 달아날 수는 없다. 그동안 모아둔 재물을 챙겨야 하지 않겠는가.

황금왕이라는 별호만큼이나 누구보다 황금에 집착하는 그였다.

멀쩡한 이빨을 전부 뽑아버리고 번쩍거리는 금니를 박았다.

거울에 비치는 금니를 보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일과가 되었을 정도였다.

당연히 그가 모아둔 재물 대부분은 황금이었다.

눈부신 황금들을 바라보는 황금왕의 눈가에 탐욕이 떠올랐다.

“전부 상자에 담아라!”

믿을 만한 심복들만 데리고 멀리 떠날 생각이었다.

‘잠잠해질 때까지 숨어 있으면 되겠지.’

그러나 거처를 나서려는 순간.

황금왕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벅저벅.

저쪽에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황금왕은 상대의 얼굴을 바로 알아보았다.

“명부객? 당신이 어째서 이곳에?”

명부객의 눈빛은 싸늘했다. 마치 벌레를 보는 눈빛이었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한 황금왕이 피눈물을 머금고 심복에게 지시했다.

심복이 황금이 가득 들어찬 상자를 명부객에게 건넸다.

명부객이 황금왕을 돌아봤다.

황금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의를 봐서라도 눈감아주시구려.”

명부객은 대답하지 않았다.

행동으로 보여주었을 뿐이다.

서걱!

황금왕의 심복 목이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차아앙!

일제히 검을 뽑아 드는 부하들을 제지하며 황금왕이 물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배신자에겐 죽음뿐이다.”

“어처구니가 없구려.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은 당신들이잖소! 무림맹의 개입을 원천봉쇄 해주겠다더니 이게 무슨 꼴이오!”

오히려 목소리를 높이는 황금왕이었다.

“하긴 항의해 봐야 소용없겠지. 네놈들의 속셈이야 훤히 보이니까.”

황금왕이 비웃음을 잔뜩 머금었다.

“구왕들을 부추겨 자멸하게 만들고 재물을 챙길 생각이었겠지. 차라리 잘됐다. 황금을 네놈에게 내주려니 속이 쓰렸거든.”

손을 까딱하자 황금왕의 부하들이 명부객을 에워쌌다.

“죽이기 전에 하나 알려주지. 네놈이 두려워서 지금까지 더러운 꼴을 참아준 게 아니야. 그자가 두려웠을 뿐이다.”

구왕도에 찾아왔던 마교 고수를 떠올린 황금왕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 네놈은 그것도 모르고 혼자 찾아왔으니 스스로 무덤을 판 것이나 다름없지.”

황금왕이 부하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저승으로 보내줘라.”

황금왕의 심복들은 천신우 일행을 상대하기 위해 내보낸 무인들 이상이었다.

당연히 황금왕은 부하들이 명부객의 목을 가져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직접 나설 필요도 없을 거라고.

하지만 믿음이 깨지기까진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서걱! 서걱!

그야말로 눈 깜빡할 사이에 황금왕 부하들이 베어져 나갔다.

여차하면 직접 나설 준비를 하던 황금왕이 눈을 부릅떴다. 개입할 시점을 놓친 것이다.

“……!”

“너무 억울해하진 말도록.”

명부객이 가죽포대 하나를 던졌다.

끌러진 가죽포대에서 빠져나온 것은 사람의 머리였다.

황금왕은 단번에 그가 누군지 알아봤다.

“독존왕!”

지독하게 이기적인 독존왕 역시 재물을 빼돌려 달아날 거라고 예상한 그였다.

하지만 독존왕이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인사는 저승에 가서 하도록.”

서걱!

명부객의 검이 황금왕의 목을 베어냈다.

반응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빠른 공격!

그러나 당사자인 명부객은 전혀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이미 죽은 황금왕은 그의 관심 밖이었다.

“이제 무림맹의 개들을 정리하러 가야겠군.”

명부객의 목소리에 진한 살기가 묻어났다.

* * *

구왕도의 기관은 오차 하나 없이 작동했다.

촤라라라라락!

천신우 일행이 비밀통로로 들어서기 무섭게 엄청난 양의 암기가 쏟아졌다.

발판이 무너지고 벽에서 쇠못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천신우 일행에겐 위협이 되지 못했다.

“여기부턴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천신우가 날아드는 암기를 모조리 튕겨내며 질주했다.

“어이쿠!”

가끔 튕겨 나간 암기에 장윤호가 펄쩍펄쩍 뛰긴 했지만.

그것 말고는 문제가 없었다.

“이제 거의 도착했네. 조금만 가면…….”

하지만 고진성이 입을 여는 순간.

쿠우웅!

엄청난 충격음과 함께 통로 전체가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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