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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환생-71화 (71/171)

# 71

학사환생 071화

언덕처럼 거대한 원형의 건축물이 천신우 눈앞에 서 있었다.

고개를 빳빳이 들어야 간신히 천장이 올려다보이는 입구 앞에서 여인은 천신우 일행을 건축물 안으로 인도했다.

“들어가시지요.”

“오오!”

유난 떨기 좋아하는 장윤호는 물론.

천신우조차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과연……. 이게 구왕도로군.’

구왕도는 하나의 도시인 동시에 하나의 건축물이기도 했다.

전체 규모야 당연히 무림맹이 크지만, 단일건축물로는 구왕도가 단연 으뜸이었다.

‘정말이지 미로가 따로 없군.’

동물의 창자처럼 구불구불 굽어진 통로는 집중하고 있어도 길을 잃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머릿속의 지식을 필요할 때마다 꺼내서 사용하는 천신우에겐 별다른 문제가 아니었다.

전생에선 무공에 재능이 없어 검을 놓았던 천신우지만 두뇌만큼은 누구보다 뛰어났다.

그 재능을 이용해 천신우는 전생의 기억을 완벽에 가까운 형태로 떠올렸다.

이윽고 머릿속에 구왕도의 내부구조를 구현해 낸 천신우는 실재와 대조해 가기 시작했다.

‘기억과 다르지 않아.’

물론 천신우도 구왕도의 내부구조를 전부 알고 있진 못했다.

특히 핵심부의 구조를 알기 위해선 조력자의 존재가 필수적이었다.

‘이름이…… 고진성이었나.’

다행히 천신우는 조력자로 써먹을 만한 인물을 알고 있었다.

고진성.

그는 전생에서 구왕도 대참사의 진상을 밝혀내는 데 일조했던 인물이었다.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없다지만 고진성처럼 기구한 운명도 드물지.’

고진성은 제18영역과 인접한 제6영역에서 명성을 날리던 고수였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일생일대의 위기가 닥치고 만다.

그가 집을 비운 사이 가족이 납치당한 것이다.

가족의 행방을 수소문하던 고진성이 뒤늦게 마주한 현실은 너무도 참담했다.

아내와 딸은 구왕도에서 노리개로 농락당하다가 병으로 죽었고, 아들은 가족을 지키려다 구왕도의 무인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했던 것이다.

당시 고진성은 충격으로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인맥을 총동원해 복수를 꿈꿨지만 무림맹은 구왕도 개입에 소극적이었다.

결국, 고진성은 직접 복수하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고진성은 뛰어난 고수이긴 해도 구왕도를 혼자서 쓸어버릴 정도까진 아니었지.’

현실에 부딪혔음에도 고진성은 좌절하지 않았다.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지나도 늦지 않는다는 격언처럼.

고진성은 구왕도에 잠입해 복수할 기회를 엿봤다. 구왕도의 구조와 방비 체계를 몸소 익혀가며.

그러던 고진성에게 구왕도 대참사는 기회였다.

무림맹에서 보낸 토벌대에게 결정적인 제보를 건넸고 비록 남의 손으로나마 복수하는 데 성공했다.

여기까지가 천신우가 기억하는 전생의 고진성.

‘고진성을 찾아낸다면 일이 훨씬 쉽게 풀릴 텐데.’

천신우가 구왕도를 방문한 가장 중요한 목적은 마교의 계획을 무위로 돌리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무림맹 실종자들을 구출하려는 의도도 분명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고진성의 도움이 필요하다.’

전생에서 실종자들을 구출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도 바로 고진성이었다.

물론 드넓은 구왕도에서 그를 찾아내기란 쉽지만은 않을 터였다.

‘그렇다고 짚이는 구석이 없진 않아.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은 역시…….’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구왕도 내부로 들어선 천신우였다.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든 그곳은 지금까지 천신우가 경험한 세상과 같은 곳이라 믿기 힘들었다.

손이 닿는 곳마다 술이 있었고 몽롱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숨을 내뱉을 때마다 새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왔는데, 불쾌하기보다 몸이 나른해지는 기분이었다.

천신우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미혹향이군.’

구왕도를 방문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미혹향에 대해선 들어본 적이 있다.

‘더없는 쾌락을 선사하지만, 인간의 이지를 갉아먹어 끝내는 폐인으로 만든다지.’

천신우에게도 반라의 여인이 다가와 향초를 건넸다.

“한번 맡아보세요.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드린답니다.”

천신우는 향초를 밀어냄과 동시에 장윤호를 제지했다.

“미혹향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헉!”

향초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던 장윤호가 화들짝 놀랐다.

“설마 내가 아는 그 미혹향 말인가?”

천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게 바로 그 미혹향입니다.”

“어쩐지!”

정보조직에서 활동하는 장윤호이니만큼 미혹향의 무서움을 잘 알았다.

와장창!

장윤호가 바닥에 향초를 내팽개치며 물었다.

“그런데 미혹향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건가?”

당연히 무림맹은 미혹향의 사용을 철저히 금했다.

그로 인해 미혹향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채은수 역시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기에 천신우를 의아한 얼굴로 쳐다봤다.

“전에 들은 적이 있습니다.”

천신우는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갔다.

‘사실 구왕도의 무서운 점은 미혹향만이 아니지.’

눈을 녹인 물에 온갖 진귀한 과일을 숙성시켜 만들었다는 빙과주.

가진 돈을 모두 잃기 전까진 절대 자리를 뜨지 못한다는 도박장.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은 이곳에 상주하는 기녀들이었다.

그들은 일반적인 기녀들과는 달랐다.

아름다운 외모는 기본.

애교와 기교로 사내들의 애간장을 녹일 뿐만 아니라, 쾌락을 극대화하는 비법까지 익힌 그녀들이었다.

지금도 구왕도 곳곳에선 웃음소리와 신음성이 끊이질 않았다.

“하아…… 하아…….”

보통의 기루처럼 별도의 방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탁 트인 곳에서 대낮부터 남녀가 뒤엉켜 나뒹굴고 있었다.

“남사스럽게…….”

얼굴을 붉히면서도 힐끔힐끔 훔쳐보는 장윤호.

그때였다.

천신우가 갑자기 낯 뜨거운 행위가 벌어지는 그곳으로 발걸음을 틀었다.

“허어…… 얌전한 고양이가 가장 먼저 부뚜막에 오른다더니. 너도 남자였구나.”

중얼거리던 장윤호가 채은수의 따가운 눈길에 입을 다물었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요.”

당연하게도 천신우가 기녀들에게 관심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찾았다.’

쟁반을 받쳐 들고 손님들에게 술과 안주를 가져다주는 사내를 발견한 천신우였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새하얗게 변해버린 머리카락. 사연이 담긴 눈동자.

틀림없었다.

바로 천신우가 찾던 고진성이었다.

‘이렇게 금방 찾을 줄은 몰랐는데.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물론 찾았다고 끝이 아니었다.

고진성을 설득하는 것은 다른 문제.

“빙과주.”

고진성에게 술을 주문한 천신우가 넌지시 운을 띄웠다.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지나도 늦지 않는다던데.”

사실 이곳엔 안내자를 비롯해 보는 눈이 많았다.

심지어 이곳을 지키는 구룡도 무인들은 관문을 지키던 자들보다 훨씬 강했다.

하지만 천신우는 망설이지 않았다.

어차피 정식으로 초대받은 손님이 아니다. 결국은 싸움으로 귀결될 수밖에.

지금이 아니면 고진성을 끌어들일 기회가 없는 것이다.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도무지…….”

고진성은 어수룩한 표정으로 대답했지만, 그 눈빛만큼은 날카로웠다.

이런 곳에서 술이나 내오는 종업원으론 보이지 않았다.

천신우가 그를 불렀다.

“장주님.”

일순 고진성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천신우는 놓치지 않았다.

“고검장의 고진성 장주님 맞지요?”

거듭된 천신우의 물음.

고진성은 대답 대신 주위를 돌아보았다.

정체를 숨기고 구왕도에 잠입한 그였다.

오직 복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이곳에서 인고의 세월을 견뎌왔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했건만, 눈앞의 천신우는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고진성은 반쯤은 체념하고 반쯤은 그리운 얼굴로 대꾸했다.

“오랜만이군. 그렇게 불리는 것도.”

방금까지와 달리 멍청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표정과 눈빛 역시 살아 있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물론 궁금하겠지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잖습니까.”

천신우가 빙과주를 단숨에 비워냈다.

달콤한 향과 함께 밀려드는 술기운을 단숨에 떨쳐낸 천신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복수, 하고 싶지 않습니까?”

고진성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천신우의 물음은 그의 오래된 과거를 떠올리게 했다.

아름다운 아내와 귀여운 아들딸과 함께 단란한 가정을 꾸렸던 나날들.

아직도 눈만 감으면 아내의 화사한 미소가 아른거렸다. 귓가에선 아들딸의 웃음소리가 떠나질 않았다.

그러나 언제나 회상은 결국엔 비극으로 끝났다.

5년 전에 벌어진 비극이 남긴 것은 새하얗게 변한 머리카락만이 아니었다.

뼛속 깊이 끓어오르는 증오를 느끼며 고진성이 입술을 깨물었다.

“너는 누구지? 대체 누군데 내게 그런 제안을 하는 것인가.”

“천씨세가의 천신우라고 합니다.”

고진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당연히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구문이 뚫렸다는 소식은 들었을 겁니다.”

비로소 고진성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설마…….”

“바로 우리가 그랬습니다. 명목은 무림맹의 실종자들을 구출하기 위함. 하지만 진정한 목적은 따로 있지요.”

천신우가 더없이 진지한 눈빛으로 고진성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구왕을 제거하고 구왕도를 해방시킬 겁니다.”

“……!”

고진성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쿵쾅거려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외면할 고진성이 아니었다.

“무림맹에서 조사대를 파견했다는 소문은 들었다. 하지만 구왕도를 해방시킨다니? 무림맹이 그런 결정을 내릴 리가 없다.”

고진성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무림맹을 향한 불신을 천신우도 느꼈다.

“무림맹이 내린 결정이 아닙니다.”

“그럼?”

고진성은 진심으로 궁금한 표정이었다.

“제가. 그리고 일행들이 내린 결정입니다. 물론 지금 당장 믿어달라곤 하진 않겠습니다.”

천신우가 구왕도의 핵심부로 가는 통로를 바라보며 나직이 덧붙였다.

“하지만 곧 믿게 될 겁니다. 믿기 싫으셔도.”

천신우는 그대로 걸음을 내디뎠다.

핵심부로 연결되는 통로 양쪽을 지키던 무인들이 그를 막아섰다.

안내자가 설명하려는 순간.

천신우가 양팔을 옆으로 뻗었다.

콰아아앙!

엄청난 충격음과 함께 구왕도 무인들이 벽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벽에 처박힌 구왕도 무인들 주위로 실금이 쩌저저적 생겨나더니 급기야, 벽과 천장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으아악!”

미혹향에 취해 있던 사람들이 야단법석을 떨었다.

안내자의 눈빛 역시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요?”

“뭐긴. 어차피 우리가 화기애애하게 술잔 부딪힐 사이는 아니잖아.”

천신우가 통로 저편을 내다보며 덧붙였다.

“나오라고 해. 대기시킨 놈들 전부.”

안내를 맡은 여인이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정말이지 상식을 뛰어넘는 분이군요.”

여인이 짝짝 손뼉을 쳤다.

그러자 통로마다 드리워졌던 휘장이 걷히며 살벌한 기세를 뿜어내는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신우 곁에 있던 고진성이 이를 악물었다.

“구왕의 최정예들…….”

이미 3명의 구왕을 죽이고 구문을 돌파한 천신우 일행이다.

당연히 구왕들은 그들을 살려 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저 피해를 최소화하고 효율적으로 천신우 일행을 제거하기 위해 중심부로 불러들인 것뿐.

“이제 믿으시겠습니까?”

한참을 침묵하던 고진성이 결국 대답했다.

“그래.”

사실 지금이라도 천신우를 외면하면 그만이었다.

조금 전 천신우와 나눈 대화를 엿들은 사람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고진성은 무려 5년 만에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일을 벌이는 능력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군.”

고진성이 천신우를 돌아보았다.

“천신우라고 했나. 말해. 내가 무엇을 하면 되는지.”

“길 안내를 해주시면 됩니다. 우리를 이곳으로 안내해 준 사람은 이미 죽었거든요.”

안내를 맡았던 여인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뒤늦게 목에 그어진 실선을 발견한 그녀다.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여인의 머리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고진성의 눈동자가 커졌다.

안내자라곤 해도 그녀는 엄청난 실력을 지닌 고수였다.

개개인의 실력만 놓고 보면 지금 사방을 포위한 무인들보다도 나았다.

천신우는 그런 여인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목을 날려버린 것이다.

“알겠네. 길 안내 정도야 일도 아니지. 하지만 그럼 여기 있는 놈들은 누가 처리하지?”

고진성의 물음에 천신우가 어깨를 으쓱였다.

“보시다시피.”

채은수가 면사를 내리며 앞으로 나섰다.

만두를 삼켜버린 권왕에 이어 장윤호도 호들갑을 떨며 검을 뽑아 들었다.

“자자! 한 명씩만 덤비라고!”

다음 순간.

천신우를 필두로 일행은 빛처럼 쏘아져 나갔다.

“죽여! 절대 살아서 구왕도를 나가게 놔두지 마라!”

누군가의 외침에 구왕도 무인들도 일제히 병장기를 뽑아 들고 맞섰다.

차아아앙!

붉은 등불 아래 살육전이 벌어지던 그때.

스르륵.

천장이 열리더니 그림자들이 소리 없이 떨어져 내렸다.

구왕들이 특별히 길러낸 살수들이었다.

은신만큼이나 무공도 뛰어난 그들이었다.

그들의 실력을 알아본 고진성이 침음을 삼켰다.

이미 천신우 일행은 격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

지금 저들이 뒤에서 급습한다면 위험해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상대해야 한다.’

고진성이 내공을 끌어올리던 그때.

풍뢰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놈이 고검장주라고?”

왠지 모를 위압감에 눌린 고진성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그렇습니다만.”

“할 짓 없으면 이리 와서 어깨나 주물러라.”

고진성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다 죽게 생겼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어깨를 주무르라는 풍뢰권을 무시하고 살수를 향해 고진성이 돌아서는 그 순간이었다.

빠직!

고진성에게 다가오던 살수의 얼굴이 터져나갔다.

“……이게 무슨?”

물론 놀라기는 일렀다.

사방에서 폭죽이 터지듯 살수들의 머리통이 동시에 터져나간다.

퍼퍼퍼펑!

“이런 미친!”

경악하는 고진성에게 풍뢰권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뭘 어물쩍거리는 거냐. 너도 저리되고 싶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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