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학사환생 070화
“이런 미친……!”
커다란 바위를 쌓아 올린 성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무공수준이 낮은 구왕의 부하들은 휘청거리다 성벽 아래로 추락했다.
“으아악!”
다리가 부러진 정도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머리가 터지거나 목이 꺾인 자들도 허다했다.
물론 구왕들은 확실히 남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여유롭게 신형을 날려 바닥에 착지한 비열왕.
심지어 소검왕은 바위를 검으로 깨부숴 파편들을 만들어 천신우에게 날려 보냈다.
“위험해!”
채은수의 경고가 무색하게 천신우의 자운검이 춤을 췄다.
따다다다당!
날아드는 파편을 모조리 쳐낸 천신우의 집중력은 보는 사람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별호에 어울리게 암습을 준비하던 비열왕조차 눈을 가늘게 떴다.
‘확실히 보통 놈은 아니군.’
천신우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비열왕이 뒤로 물러났다.
굳이 부하들을 내보낼 필요도 없었다.
흥분한 폭군왕이 먼저 날뛰어줄 테니까.
예상대로 폭군왕이 전장에 뛰어들었다.
하늘 높이 솟구쳤던 폭군왕이 진각으로 바닥을 내리찍었다.
쿠우웅!
격렬한 진동과 함께 땅거죽이 뒤집히며 먼지구름을 일으켰다.
동시에 폭군왕의 부하들이 기마대처럼 전장으로 빠르게 합류했다.
천신우를 뒤덮은 먼지구름. 그리고 사방에서 그를 향해 달려드는 적들.
“후우.”
천신우가 숨을 길게 내뱉었다.
쏴아아앙!
천신우가 휘두른 자운검이 해일처럼 사방을 휩쓸었다.
먼지구름이 걷힌 자리.
피로 물든 대지 위에 폭군왕의 부하들이 시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그러나 천신우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놈! 어디 숨었느냐!”
부하들을 잃은 폭군왕이 천신우를 찾으며 고함을 내질렀지만, 천신우는 숨은 것이 아니었다.
“……!”
천신우의 기척을 가장 먼저 느낀 것은 후방으로 물러나 있던 비열왕이었다.
비열왕이 몸을 틀며 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암기를 날렸다.
쉭쉭쉭!
이어진 것은 강렬한 타격음!
그러나 비열왕은 오히려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까지 보여준 천신우의 모습이라면 암기를 전부 맞아줄 리가 없었다.
과연 비열왕의 암기를 받아낸 것은 천신우가 아니라 구왕도 무인의 시체였다.
그럼 천신우는?
‘후방 아니면 측면.’
시선을 끌고 사각을 노리는 전투방식은 비열왕도 자주 애용하는 방식이었다.
그렇다고 한쪽 방향만을 선택할 필요는 없었다.
비열왕은 후방과 측면 모두 대응할 수단을 갖고 있었다.
쉭쉭쉭! 솨사삭!
비열왕은 마치 자신의 몸이 발사장치라도 되는 것처럼 암기를 쏟아냈다.
하지만 이번엔 타격음이 아예 들려오지 않았다.
‘전부 빗나갔다고? 그럴 리가!’
시간 차까지 둬가며 암기를 날린 비열왕이다.
아무리 천신우라 해도 전부 피해내기란 불가능했다.
하다못해 검으로 암기를 쳐내는 소리라도 났어야 했는데.
‘……설마!’
비열왕의 눈동자가 자연스레 아까 암기를 받아낸 시체를 향했다.
촤아악!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된 시체 너머로 천신우의 모습이 보였다.
비열왕의 예상과 달리 천신우가 택한 방향은 정면이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간격을 좁히며 달려드는 천신우를 향해 비열왕이 다급히 암기를 뿌렸다.
그러나 천신우는 날아드는 암기를 쳐내는 수준에 그치지 않았다.
차차창!
방향을 바꿔 오히려 비열왕에게 날아드는 암기들!
비열왕의 눈이 커졌다.
급히 암기들을 쳐냈지만 천신우의 접근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천신우의 검이 수직으로 내리그어졌다.
촤아악!
부릅떠진 비열왕의 두 눈동자가 양쪽으로 흩어졌다.
얼굴이 반으로 쪼개진 것이다.
자운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천신우는 비열왕의 시신을 응시했다.
‘전생에선 그렇게도 명이 질긴 놈이었는데.’
비열왕은 별호에 어울리게 불리한 싸움엔 절대 나서지 않았다.
때문에, 전생에선 구왕도가 무너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생존했다.
이번에도 천신우가 나서지 않았다면 놈은 상황이 불리해지는 즉시 달아났을 것이다.
‘그나저나.’
천신우는 비열왕이 죽으면서 바닥에 떨어뜨린 비수를 주워들었다.
‘이게 바로 비열왕의 보물인 창천비도인가. 거창한 이름에 비해 성능 자체는 폭풍비보다 떨어진다고 봐야겠군.’
원래 미인을 보고 나면 어지간한 여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고 하던가. 워낙 명검들을 많이 접해온 천신우에게 비열왕의 창천비도는 실망만 안겼다.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는 자운검의 반응이었다.
‘전혀 반응하지 않는군. 이만한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거겠지.’
그렇다고 아예 가치가 없다곤 보기 힘들었다.
당장 경매에만 내다 팔아도 두둑한 목돈이 들어올 터였다.
창천비도를 챙긴 천신우가 주위를 돌아보았다.
‘다른 쪽은?’
천신우로부터 조금 떨어진 지점.
폭군왕은 권왕에게 안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결코 행복한 표정은 아니었다.
이마의 핏줄이 곤두서고 낯빛은 벌겋게 달아오른 폭군왕이다.
설마 힘에서 권왕에게 밀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사실 폭군왕도 어디 가서 힘으로 꿀릴 인간은 아니다.
하지만 권왕은 그야말로 괴물이었다.
권왕이 팔에 힘을 주자 폭군왕의 근육과 뼈가 비명을 지르며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우두두둑!
결국, 연체동물처럼 늘어진 폭군왕은 다시는 눈을 뜨지 못했다.
폭군왕의 시체를 내던져버린 권왕과 천신우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권왕의 이글거리는 눈동자에 담긴 것은 경쟁심이었다.
물론 천신우 입장에선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천하의 권왕이 나를 경쟁상대로 생각하다니.’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때 나지막한 신음성이 들려왔다.
천신우와 권왕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채은수가 소검왕과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장윤호는 소검왕의 부하들을 상대로 나름 분전하는 중이었다.
물론 소검왕의 부하들은 천신우와 권왕의 관심대상이 아니었다.
서로를 돌아본 천신우와 권왕이 경쟁이라도 하듯 몸을 날렸다.
때마침 절호의 기회를 포착한 소검왕이 외쳤다.
“이년! 이제 끝이다!”
검으로 이름을 날린 고수답게 채은수와의 검법대결에서 시종일관 우위를 점한 소검왕이다.
끝내는 절호의 기회를 잡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승부를 내려는 순간, 소검왕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서늘한 감각에 채은수를 베려던 검을 옆으로 휘둘렀다.
쩌엉!
가까스로 천신우의 검을 쳐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배에 묵직한 충격이 전해졌다.
“컥!”
정말이지 당장 정신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강한 충격이었다.
게다가 검을 쳐낸 손목은 끊어질 듯이 아팠다.
도망치듯 뒤로 물러난 소검왕이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소검왕의 부하들은 이미 바람 앞의 낙엽처럼 쓸려나간 후였다.
머릿수 이기는 장사 없다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수준이 비슷할 경우.
지금처럼 압도적으로 차이가 나버리면 머릿수는 무의미한 것이다.
‘그렇다곤 해도 아직…….’
폭군왕과 비열왕을 찾던 소검왕의 눈이 커졌다.
바닥에 너부러진 그들의 시체를 발견한 것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폭군왕과 비열왕 모두 당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소검왕조차 상대하기 까다로운 그들이었는데.
“도대체 네놈들은 누구냐?”
“어리석은 질문이군.”
천신우가 대꾸했다.
“너는 태풍이 불거나 홍수가 나면 이름을 묻나 보지?”
압도적인 자연재해 앞에서 인간은 원망조차 할 수 없다.
그저 태풍이 지나가고 물난리가 끝나길 기다릴 뿐.
“건방진! 네놈들이 하늘이라도 된다는 말이더냐!”
소검왕이 버럭 고함을 지르며 기세를 끌어올렸다.
채은수가 입술을 악물었다.
소검왕이 그녀와의 싸움에서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천신우와 권왕이 다시금 시선을 주고받았다.
대화는 필요 없었다.
파아아앗!
빛처럼 쏘아져 나가는 천신우와 권왕.
“와라! 잡것들아!”
소검왕은 기세 좋게 외쳤지만 직감했다.
천신우와 권왕 모두를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선택해야 했다.
누구를 저승길 동무로 데려갈지.
소검왕이 결단을 내린 순간!
천신우와 권왕이 소검왕을 사이에 두고 교차했다.
소검왕은 들었다.
바람에 실려 오는 소리를.
칼날이 잘려 나가고 살이 찢기는 소리를.
그리고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완벽한 정적 속에서 소검왕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어깨부터 허리까지 사선이 그어져 있었다.
구멍 뚫린 배에선 핏물이 꿀렁꿀렁 쏟아졌다.
“……바보 같은 고민이었군.”
소검왕은 천신우든 권왕이든 혼자 덤볐더라도 패배를 면치 못했을 것임을 깨달았다.
“네놈들이 내게는 하늘이었구나.”
소검왕이 숨을 거두기 직전 마지막 힘을 쥐어짜 냈다.
“나는…… 소검왕.”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기에 천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신우.”
경쟁하듯 곧바로 권왕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운경.”
“기억했다…… 너희도 명심…… 해라…… 하늘 위에 하늘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 말을 끝으로 소검왕은 숨을 거두었다.
‘아쉽군.’
천신우의 솔직한 생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검왕은 나머지 구왕들과는 달랐다.
누명을 쓰고 구왕도로 흘러든 인물이었으니까.
전생에선 소검왕이 죽기 전에 무고함이 밝혀졌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소검왕은 구왕도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미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만일 소검왕이 누명을 쓰지 않았다면. 혹은 누군가 누명을 벗겨줬다면 그의 운명은 달라졌을까?’
영원히 풀리지 않을 의문이었다.
천신우가 권왕을 돌아보았다.
“고생했다.”
“흥.”
콧방귀를 뀌는 권왕이었지만 천신우를 바라보는 눈빛은 분명 예전과는 달랐다.
‘그러고 보니 전생에선 구왕들을 쓰러뜨리면서 권왕으로 불리게 됐지.’
공교롭게도 운경이 권왕이란 칭호를 얻은 장소가 바로 이곳 구왕도였다.
‘지금보다 시기는 훨씬 늦었지만.’
전생엔 구왕도가 이처럼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마교의 끊임없는 공작 때문이었다.
‘나중엔 무림맹에서도 토벌대를 파견하지만, 그때는 이미 엄청난 피해가 발생한 후였지.’
이번 생엔 이미 많은 것이 달라졌다.
태청고개 습격사건이 실패로 돌아갔으며.
무림맹 조사대는 건재한데 구왕 가운데 3명이 이미 목숨을 잃었다.
‘그렇다고 결과까지 달라질 거라 확신해선 곤란해.’
지금까지 천신우가 수많은 미래를 바꿨음에도 굵직굵직한 사건들은 예정대로 일어났다.
구왕도 대참사 역시 그러지 말란 법이 없는 것이다.
다행히 천신우에겐 믿는 구석이 있었다.
풍뢰권.
마교에서 누가 개입하든 풍뢰권이라면 결코 쉽게 무너지진 않으리라.
“이제 구문도 여섯 개만이 남았군요.”
천신우의 담담한 목소리에 채은수는 몸에 힘이 들어감을 느꼈다.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구왕도 정면돌파.
하지만 천신우 일행과 함께라면 결코 꿈이 아니었다.
“후후후. 나머지 구왕들에게 목이라도 씻고 기다리라고 전해야겠어.”
물론 가장 신난 것은 장윤호였다.
* * *
뱀처럼 꾸불꾸불 이어진 구왕도의 관문들.
제6관문은 뱀의 몸통 부분에 위치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천신우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관문을 지키는 수문장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구왕이 마중 나온 것도 아니었다.
“구왕도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면사로도 가려지지 않는 미모의 여인이 천신우 일행을 맞이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구왕들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얇은 옷을 입고 앞장서는 여인.
귀신에 홀린 것처럼 뒤따르던 장윤호가 자신의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정신 차려! 함정이라고!”
채은수도 장윤호의 생각에 동의했다.
“제가 생각해도 함정 같네요. 지금 와서 우리를 반길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신우가 풍뢰권과 권왕을 돌아보았다.
“응하지 않을 이유는 없을 듯싶군요.”
채은수가 어깨를 으쓱였다.
“충분히 예상한 대답이네요.”
이젠 천신우와 풍뢰권의 사고방식에 익숙해진 그녀였다.
“나는 진짜 무슨 일이 생겨도 몰라.”
콧김을 뿜으며 여인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장윤호까지.
천신우 일행은 여섯 개의 관문을 아무 방해 없이 통과했다.
그렇게 도착한 구왕도.
천신우 눈에 들어온 것은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