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
학사환생 067화
어젯밤의 기억을 떠올리며 천신우는 자운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형태 자체는 전과 다르지 않다.
손잡이도, 칼집 안에 들어 있는 칼날도.
하지만 손잡이만 잡아도 손끝을 타고 섬뜩한 기운이 전해진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고 감각이 극대화되는 기분.
폭풍비를 흡수했을 때와는 느낌이 또 달랐다.
‘확실히 알겠군. 검성이 자운검만 완성됐다면 천마도 베어버렸을 거라 호언장담한 이유를.’
정말이지 가능만 하다면 세상에 있는 모든 병장기를 먹이고 싶을 정도다.
‘물론 그건 불가능하겠지. 자운검은 입맛이 까다로운 녀석이니까.’
자운검은 어지간한 무기엔 반응도 하지 않는다. 폭풍비와 무신의 검처럼 명검만 먹어치우는 아주 비싼 몸이다.
‘이럼 구왕도에 가는 목적이 하나 늘겠는걸.’
천신우는 구왕을 대표하는 아홉 개의 병장기들을 떠올렸다.
‘전부 독점하진 못하겠지만 그중 하나라도 자운검에 먹인다면 나쁘지 않겠지.’
물론 구왕을 제압하고 보물을 빼앗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구왕들은 여느 흑도방파의 수장들과는 격이 다른 고수들이니까.’
사실, 구왕들이 처음부터 제18영역에 자리 잡았던 것은 아니다.
그들도 한때는 다른 지역에서 패권을 놓고 다투었다.
그러나 세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무림인들의 공분을 사고 말았다.
잔혹하고 비열한 술수를 서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무림맹의 개입을 피해 제18영역으로 달아났다.
‘그렇게 모여든 세력들에 의해 탄생한 도시가 바로 구왕도.’
따라서 구왕 개개인은 지금까지 천신우가 상대한 황보세가나 백가장 이상의 힘을 갖고 있다고 봐야 했다.
‘게다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놈들이니 상대하긴 훨씬 까다롭지.’
그런데도 걱정보다 기대가 앞선다.
이날을 위해 쉬지 않고 달려왔으니까.
충분히 준비한 사람은 큰일을 앞두더라도 두려움이 없는 법이다.
마차에 오른 천신우는 눈을 감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생각했다.
앉자마자 코를 골며 잠든 장윤호.
결연한 표정으로 명상에 잠긴 채은수.
군것질거리를 쉬지 않고 먹어대는 권왕.
시빗거리를 찾기 바쁜 풍뢰권.
저마다의 시간을 보내는 가운데 마차는 구왕도를 향해 가까워져 갔다.
* * *
두두두!
마차가 흙먼지와 함께 목적지에 멈춰 섰다.
풍뢰권이 답답하다며 가장 먼저 내렸고, 천신우와 채은수가 뒤따랐다.
“벌써 도착한 건가?”
마지막으로 내린 장윤호가 졸린 눈을 비비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동안에 일행을 내려놓은 마차는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이곳으로부터 하루 떨어진 곳에서 일행이 돌아올 때까지 대기할 예정이었다.
“일단 식사부터 준비하겠습니다.”
하품을 하며 장윤호가 주변의 시내에서 물을 길어왔다.
나무를 패는 일은 권왕이 맡았다.
쿠우웅!
도끼가 따로 필요 없었다.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아름드리나무들이 쓰러졌으니까.
그동안 천신우와 채은수는 불을 피우고 요리를 준비했다.
마침내 완성된 요리 앞으로 모여든 일행이다.
풍뢰권이 국물 요리를 떠먹더니 고개를 끄덕였고, 그걸 신호로 식사가 시작됐다.
국물을 맛본 장윤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맛있는데?”
“그러게요.”
천신우는 내심 채은수의 요리 실력에 감탄했다.
동시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전생엔 그녀에게 제대로 말도 붙여보지 못했는데, 지금은 그녀가 직접 요리한 음식을 먹게 되다니.’
물론 크게 의미를 부여할 일은 아니었다.
식사를 마치고 뒷정리까지 끝낸 일행은 모닥불 앞에 모여들었다.
날이 쌀쌀했다.
어느새 가을을 지나 겨울로 접어들고 있었다.
‘시간 한번 빠르군. 쉬지 않고 달려온 세월이 벌써 1년이라니.’
감상에 빠진 것도 잠시.
천신우는 마차 안에서 생각해둔 이야기를 꺼냈다.
“아시다시피 구왕도가 위치한 제18영역의 진입로는 여러 곳이 있습니다. 그중에 태청고개를 경유하는 길을 택했으면 합니다만.”
“태청고개? 거긴 만두로 유명한 객점이 있는 곳인데. 거기서 파는 만두가 얼마나 크냐면…….”
과장되게 양손을 펼쳐 보이던 장윤호가 실수를 깨닫고 입을 틀어막았다.
“아차차! 놀러 가는 게 아니었지. 어디 보자. 확실히 태청고개라면 가장 일반적인 진입로이긴 한데.”
제18영역으로 가는 경로 중에 가장 빠르면서도 편한 길이니까.
“문제는 그리로 가면 무조건 발각당한다는 거야. 소수 인원으로 잠입하는 건데, 무림맹에서 정식으로 파견된 조사대처럼 움직이면 곤란하지 않겠어?”
장윤호와 마찬가지로 채은수의 표정도 조심스러웠다.
“무슨 의도라도 있나요?”
“물론입니다. 만일 이번 일이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라면. 처음부터 구왕들이 계획적으로 일으킨 사건이라면. 가장 유력한 경로인 태청고개에 살수들을 매복시켜놨을 겁니다.”
“헉!”
장윤호가 헛바람을 삼켰다.
“그럼 더더욱 태청고개는 피해야지!”
채은수 역시 의외란 얼굴이었다.
“상대의 허를 찌르려는 생각인가요?”
“아니요. 정공법입니다.”
사실 천신우의 의견은 추측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웠다.
전생에서 무림맹 조사대가 습격을 받은 장소가 바로 태청고개였으니까.
당시 피해가 얼마나 컸으면 사람들이 태청고개를 적혈고개라 바꿔 부를 정도였다.
붉은 피가 흘러내리는 언덕…….
‘이번 생에선 절대 그렇게 되게 놔두지 않아.’
천신우의 비장한 눈빛을 지켜보던 풍뢰권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네놈 말대로 하자. 대신 아무도 없으면 각오해라.”
풍뢰권의 말에 장윤호만이 들리지 않게 중얼거렸다.
“아무도 없으면 좋은 거 아닌가.”
* * *
멀리 완만한 언덕이 보였다.
험하진 않지만, 주변에 나무들이 많아 매복하기에 좋은 지형.
“확실히 불안한데…….”
불안을 감추지 못하던 장윤호가 갑자기 코를 킁킁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언덕 너머에서 만두 냄새가 솔솔 풍겨오고 있었다.
꼴깍.
침을 삼킨 장윤호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크게 한입 베어 물면 육즙이 그냥…… 아냐! 그래도 여긴 위험하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가는 것도 우습지 않습니까.”
“하긴 그렇지?”
반색하는 장윤호를 바라보며 천신우는 미소 지었다.
잔망스럽지만 싫지는 않은 성격.
그게 바로 장윤호였다.
‘잠입과 정보수집에 어울리는 성격이기도 하지.’
첩자라고 은밀하게 적진에 잠입하여 정보를 빼내오는 유형만 있는 건 아니다.
장윤호처럼 넉살 좋게 상대방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유형도 존재하는 것이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자신만만하게 나선 장윤호.
그렇다고 경거망동하진 않았다.
신중하게 적들이 매복했을 위치를 점검했다.
“안전합니다. 어서 가시지요. 여기 객점 만두 드셔보시면 정말 만족하실 겁니다!”
장윤호가 풍뢰권을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다 입 찢어지겠다. 이놈아.”
풍뢰권이 뒷짐을 지고 언덕을 넘었다.
아무리 험한 지형은 아니라지만 언덕을 오르는 풍뢰권의 걸음걸이는 마치 평지를 걷는 것처럼 편안했다.
정말이지. 성격만 빼면 보고 배울 것이 많은 풍뢰권이었다.
그렇게 무사히 태청고개를 넘은 천신우 일행.
노상에 천막을 쳐놓고 탁자를 내다 놓은 객점이 보였다.
손님들도 여럿 보였지만 무림인으로 생각되는 이들은 없었다.
장윤호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쪼르르 달려가서 음식을 주문했다.
“여기 왕만두 10인분!”
의자까지 뒤로 빼주는 모습에 풍뢰권도 불만 없이 자리에 앉았다.
“주문하신 왕만두 10인분 나왔습니다!”
이윽고 만두가 나왔다.
장윤호는 독이 들었는지까지 꼼꼼히 확인한 후에 모두에게 만두를 권했다.
“그럼 먹어볼까요.”
천신우도 큼직한 만두를 베어 물었다.
만두피가 터지며 고소한 육즙이 입안에 가득 퍼져 나간다.
“맛있는데요?”
“와아…….”
채은수는 아예 눈을 반짝이며 만두를 바라보았다.
물론 그러는 동안에도 권왕은 말도 하지 않고 왕만두를 마구 먹어치우는 중이었다.
“그러다 체한다네. 육수도 같이 먹어야 탈이 없지.”
장윤호의 세심한 배려 덕분에 천신우는 오직 태청고개 사건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전생에서 조사대가 습격당한 곳은 엄밀히 따지면 태청고개가 아니었다.’
무림맹 조사대라고 장윤호처럼 매복을 염두에 두지 않았겠는가.
그런데도 그들은 태청고개에서 아무런 이상한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게 긴장이 풀린 상태로 객점에 들러 만두로 허기를 채웠지.’
그게 바로 마교와 구왕의 부하들이 노린 바였다.
매복이 의심되는 태청고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병력을 배치해 두었다가, 긴장이 느슨해진 조사대가 객점에서 식사하는 사이 습격한 것이다.
물론 갑작스러운 습격에도 무림맹 조사대는 바로 전열을 정비하며 필사적으로 대항했다.
‘하지만 마교는 조사대의 전력을 사전에 파악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에 걸맞은 병력을 준비시켰지.’
결과는 천신우가 기억하는 대로 처참 그 자체.
천신우는 그 미래를 바꿀 생각이었다.
‘조사대가 도착하기 전에 마교의 추종자와 구왕의 부하들을 처단해야겠지. 그러려면 놈들을 끌어내는 것부터.’
천신우는 허리띠와 함께 무림맹 출입증을 끌러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지금 뭐하는 겐가!”
“배가 너무 불러서요.”
“그래도 그렇지! 누가 보기라도 했다간…….”
장윤호가 황급히 출입증을 치웠지만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출입증을 확인한 것이다.
손님들은 그러려니 넘어갔지만, 객점 종업원의 눈빛은 순간 달라졌다.
그걸 알아차린 장윤호가 목소리를 낮췄다.
“젠장. 아무래도 알아본 모양이네. 지금이라도 손을 써야.”
풍뢰권이 고개를 저었다.
“가만 놔둬라. 이제야 재밌어지려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자 장윤호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만두를 집어 들었다.
“에라. 모르겠다.”
이유가 가관이었다.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이라도 곱다니까.”
그렇게 주문한 만두를 전부 먹어치우고 추가 주문까지 했을 때였다.
사방에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착각이 아니었다.
어느새 수십 명의 무인이 객점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눈앞이 아찔해진 장윤호가 탄식을 토했다.
“주문한 만두는 나오지 않고 엄한 놈들이…….”
험상궂은 인상의 무인들 가운데 비교적 점잖아 보이는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무림맹에서 나오신 분들이오?”
“무슨 소리요.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올시다.”
장윤호가 시치미를 떼려 했지만 천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우리 모두 무림맹에서 나왔다.”
사내가 천신우 일행을 스윽 훑었다.
“당신들이 전부요?”
“일단은.”
전달받은 정보와는 달랐지만, 사내 입장에선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이미 그가 모시는 구왕으로부터 무림맹 소속은 모두 죽이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만나서 반가웠소. 그럼.”
사내가 손을 올리자 무인들이 병장기를 뽑아 들었다.
차아앙!
곳곳에서 들려오는 금속성에 장윤호가 체념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죽는구나. 아아. 그렇다고 아우를 원망하는 것은 아니야. 이미 한 번 목숨을 구해줬잖은가. 덕분에 맛있는 만두도 먹고 정말 즐거운 날들이었어.”
“체념이 너무 빠른데요.”
천신우의 물음에 장윤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우는 저놈들이 누군지 몰라서 그러는 걸세.”
사내가 물었다.
“그러는 네놈은 내가 누군지 아나 보군.”
장윤호는 움찔했지만 그렇다고 입을 다물진 않았다.
“구왕 가운데 막내 폭군왕의 심복 독중호…….”
화향루 소속다운 정보력이었다.
사내도 놀랐는지 눈에 이채를 띠었다.
“호오. 나를 알아보는 자가 있을 줄이야. 좋다! 기념으로 네놈은 가장 나중에 죽여주지.”
“전혀 고맙지 않다고! 젠장! 다들 가만히 있을 겁니까?”
장윤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호응하는 사람은 없었다.
풍뢰권은 이쑤시개로 이빨을 쑤시느라 바빴고, 권왕은 비어 있는 만두접시를 보며 입맛만 다셨다.
채은수만이 진지한 눈으로 천신우를 바라보았다.
위험을 감수하고 이곳으로 오자고 제안한 사람이 바로 천신우였기에.
덩달아 쏟아지는 장윤호의 따가운 시선까지.
결국, 천신우가 나섰다.
“만두 먹을 시간 정도는 기다려줬으면 좋겠는데.”
“뭐?”
폭군왕의 심복 독중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
독중호의 부하들도 덩달아 웃었다.
“푸하하하!”
이윽고 웃음을 멈춘 독중호가 물었다.
“배짱 하난 두둑한 놈이군. 이런 상황에서 만두라니. 굶어 죽은 귀신이라도 붙어 있는 게냐?”
“그건 아니고. 이제 너희들 전부 죽을 텐데. 시체 보면서 만두 먹을 만큼 비위가 좋진 못하거든.”
독중호의 눈이 차가워졌다.
점잖은 외모와 달리 구왕의 수많은 부하 중에서도 잔인하기로 유명한 그였다.
“이제 보니 겁을 상실한 놈이었군. 저놈 빼고 전부 죽여! 저놈은 내가 직접 혀를 뽑아주지! 여자는 네놈들 마음대로 해도 좋다!”
채은수는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에, 독중호는 그녀가 무신의 손녀란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말씀만 기다렸습니다!”
독중호의 부하들이 굶주린 늑대무리처럼 달려들던 바로 그때!
누구도 예상치 못 한 일이 일어났다.
풍뢰권이 느닷없이 권왕이 앉아 있는 의자를 걷어찬 것이다.
뻐엉!
엉덩이를 걷어차인 권왕은 그대로 독중호의 부하들 한복판에 나가떨어졌다.
“어어?”
어리둥절한 장윤호와 달리 독중호의 판단은 빨랐다.
“뭐해! 병신들아! 그놈부터 죽여!”
천신우의 대응만을 기다리던 채은수가 결국 참지 못하고 일어나려 했지만.
천신우가 그녀를 자리에 도로 앉혔다.
“지켜봐요.”
“하지만…….”
“괜찮으니까.”
그 순간!
꽈아아앙!
엄청난 충격음과 함께 권왕을 에워쌌던 독중호의 부하들이 모조리 튕겨 나왔다.
“이런 미친!”
그대로 권왕은 독중호를 향해 성난 들소처럼 달려들었다. 마치 풍뢰권에게 당한 화풀이를 독중호에게 하겠다는 듯이.
“막아! 막으라고!”
독중호의 악에 받친 외침도 소용없었다.
권왕은 그야말로 막아서는 모든 것을 모조리 날려 버리며 전진했다.
“……!”
부하들이 휩쓸려 나가는 광경을 눈앞에서 지켜본 독중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확장된 동공을 통해 권왕의 주먹이 들어왔다.
그게 독중호가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목격한 광경이었다.
퍼어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