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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환생-66화 (66/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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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환생 066화

국밥을 그릇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은 무신이 입가를 스윽 닦으며 물었다.

“무슨 일인가.”

부하가 입에 담아둔 말을 토해냈다.

“구왕도에서 사고가 터졌습니다! 구왕들의 동향을 감시하던 무림맹 무인들이 대거 실종됐다고 합니다!”

“그렇군. 구왕 가운데 누구 소행인지는 알아냈는가?”

바다는 어지간한 풍랑으론 흔들리지 않는다. 무신 역시 구왕도의 상황이 급변했음에도 담담한 반응이었다.

“죄송하지만 현재 들어온 급보는 이게 전부입니다.”

무신이 응경대인의 장부를 챙기며 일어났다.

“들었다시피 일이 조금 생겼다. 네놈이 부탁한 일은 시간이 필요할 듯싶구나.”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무림맹 무인들이 한꺼번에 실종됐다면 보통 일이 아니군요.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천신우는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했지만 실은 확신에 가까웠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은 그가 알고 있는 미래와 일치했기에.

“최악의 상황이라면? 구왕 가운데 누군가 반기를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냐?”

“최악은 구왕들이 힘을 합쳤을 경우 아니겠습니까.”

“흐음.”

무신은 반박하지 않았다.

서로 반목하는 구왕들이 손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항상 최악의 상황까지도 염두에 두고 움직여야 실패할 가능성이 줄어든다.

“주제넘은 소리지만 최대한 신중히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확실히 무림맹의 의사결정은 안일하기 짝이 없다. 지금까지야 별다른 문제가 없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경각심을 가져야겠지.”

무신이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이 자리에서 보자. 혹시 내가 여기 없거든 숟가락과 젓가락을 국밥 그릇에 거꾸로 꽂고 기다려라.”

무신이 부하와 함께 사라지자 천신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시작됐군.’

무림맹에서 흑도방파의 활동을 묵인한 제18영역 구왕도.

전생에서도 이맘때쯤 그곳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구왕도에 잠입해 흑도방파들의 동향을 살피던 무림맹 무인들이 한꺼번에 실종된 것이다.

무림맹에서 급파한 조사대 역시 구왕들의 부하들과 충돌해 전멸한다.

나중에 구왕도 대참사라 불리는 사건의 시작이었다.

‘표면적으론 구왕도의 지배자인 구왕들이 무림맹의 통제에 반기를 들었다고 알려졌지만.’

나중에 밝혀진 내막에 따르면 마교에서 구왕들을 움직인 것이었다.

‘심지어 구왕들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마교에 농락당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지.’

물론 그 사실을 곧이곧대로 밝힐 수는 없는 노릇.

차선책으로 무신에게 경고를 보낸 천신우였다.

무신의 입지를 생각해 보면 무림맹 의사결정에도 어느 정도는 반영될 가능성이 컸다.

‘일단 최악은 면한 셈이군. 이제 내가 직접 움직여야겠지.’

무림맹 3급 출입 권한은 이미 얻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처리한 설향 사건이 마무리되면, 2급 출입 권한 획득이 기정사실화되는 상황.

하지만 그때까지 무작정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만상서고의 세 번째 단서를 찾기 위해.

그리고 구왕도에서 죽어나갈 무인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 * *

다음 날.

천신우는 수미관을 다시 찾았다.

‘구왕도 사건 때문에 다른 임무를 맡지 않았더니 좀이 쑤시는걸.’

남들이 알았다면 기절초풍할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식사시간인데도 무신은 보이지 않았다.

‘국밥 그릇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거꾸로 꽂으라 했었지.’

천신우가 무신의 당부대로 하자 과연 식당 종업원이 다가왔다.

그러더니 새로운 숟가락과 젓가락을 갖다 주는 것이었다.

물론 무신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기다리다 못한 천신우가 넌지시 물었다.

“항상 여기서 식사하던 어르신 기억하십니까?”

“물론이지요.”

“혹시 어디 계신지도 아십니까?”

“아하. 철옹 어르신을 찾으러 오셨군요. 저는 국밥 드시러 오신 줄로만 알고.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천신우는 비로소 깨달았다.

무신의 장난에 당했음을.

과연 뒤늦게 나타난 무신은 천신우의 표정을 보고 껄껄 웃었다.

“설마 그걸 믿었더냐? 으허허.”

“…….”

“농담은 이쯤 해두고.”

무신의 눈빛이 다시 진지해졌다.

“구왕도 이야기를 하자면 무림맹 차원에서 조사대를 파견하기로 결정이 났다. 규모는 통상적인 수준이다.”

“그렇군요.”

분명 무림맹에서 직접 조사대를 파견하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근처 지부에서 무인들을 동원해도 그만이었다.

그만큼 무림맹에서 이번 사안을 쉽게 보지는 않는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천신우로선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였다.

‘이래선 전생과 다를 바가 없다.’

무신은 천신우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얼굴이었다.

“역시 실망스러운 게로구나.”

천신우는 굳이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불안해서요. 모집시험만 하더라도 무림맹에서 충분히 대비를 했음에도 사달이 나지 않았습니까.”

“끌끌. 그렇게 불안하면 네놈이 직접 조사하면 되지 않느냐. 듣자 하니 설향 사건도 혼자 움직였다면서.”

무신은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는 듯했다.

“물론 구왕도는 혼자서 부딪치기엔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네놈이 주도해서 조사대를 꾸려봐라.”

“아직 제가 그럴 경력은 아닙니다만.”

“언제부터 네놈이 경력을 따졌다고. 혹시 마땅한 사람이 부족하면 내가 한둘 정도 추천해 주마.”

무신이 사람을 시켜 데려온 것은 일남일녀였다.

“하하! 이렇게 다시 보는군! 역시 인연이란!”

웃으며 천신우에게 아는 척을 한 남자는 장윤호였다. 무림맹 시험에 잠입했다가 천신우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장윤호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북적거리자 무신은 혀를 찼다.

“기껏 쓸 만한 놈으로 뽑아달라고 했더니만 입만 살아 있는 놈을…….”

“무슨 말씀! 저야말로 앞으로 무림맹을 이끌어나갈 인재입니다. 채 소저도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장윤호가 옆에 다소곳이 서 있는 여인을 돌아보며 웃었다.

“물론이에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예의 바르게 장윤호의 장난을 받아주는 여인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천신우의 정혼자였던 남궁세미나 무신의 둘째 손녀 채은영과는 비교조차 하기 힘들 만큼.

게다가 유설화와 달리 여인의 미소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매력이 있었다.

“저놈과는 이미 구면인 모양이니 소개는 생략하고.”

장윤호를 옆으로 제쳐놓은 무신이 여인을 가리켰다.

“내 첫째 손녀다. 이름 정도는 들어봤을 거다.”

어찌 모르겠는가. 사룡의 일인인 채은수를.

채은영의 언니지만 성격은 전혀 다른 인물.

“천신우라고 합니다.”

“채은수에요.”

활짝 웃는 그녀를 바라보는 천신우의 감회가 새로웠다.

전생에서 동생인 채은영으로 인해 인생의 내리막길을 걸었던 천신우다.

그때 그를 구원한 것은 장서각의 수많은 책. 그리고 눈앞의 채은수였다.

가끔 장서각에 들러 읽을 책을 고르는 그녀를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채은영과의 악연 때문에 먼저 말을 붙여본 적은 없지만.’

오히려 채은수가 먼저 말을 걸어왔었다.

기껏해야 읽을 책을 추천해달라는 정도였지만.

“아직 부족하지만 그래도 검을 조금 다룰 줄 아니 도움은 될 게다. 그리고 저 입만 살아 있는 놈도 화향루주가 직접 추천했으니 밥값은 하겠지.”

무신이 천신우를 바라보았다.

“나머지 인원은 네가 알아서 채우면 될 것이야. 혹시 이미 생각해둔 사람이 있느냐?”

“물론입니다.”

천신우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사룡의 일인이자 훗날 검후로까지 불리는 채은수.

무공은 조금 떨어지지만 화향루 소속으로 정보수집에 일가견을 지닌 장윤호.

거기에 중심을 잡아줄 풍뢰권과 숨겨둔 패인 권왕까지.

이만하면 무림맹에서 파견할 조사대를 능가하는 전력이었다.

“그럼 다행이고. 그래. 언제 떠날 생각이냐?”

기다렸다는 듯이 천신우가 대답했다.

“내일 바로 출발할 생각입니다.”

무림맹 조사대보다 빠르게 움직여야 피해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 * *

무림맹에서 구왕도로 가려면 천씨세가가 위치한 제16영역을 거쳐야 한다.

어차피 풍뢰권과 권왕과도 합류할 예정이기에 천신우가 천씨세가에 들른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곳입니다.”

천씨세가 내부를 돌아본 장윤호가 입을 쩍 벌렸다.

“굉장하군! 이거 앞으로 잘 보여야겠는걸.”

채은수 역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천씨세가는 오대세가에서조차 밀려난 가문.

당연히 변변찮으리라 생각했는데 막상 직접 방문해 보니 그게 아니었다.

곡물 파동 이후로 급속도로 발전한 천씨세가의 풍경은 어디 내놓아도 부족함이 없었다.

게다가 천씨세가의 변화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흐아압!”

연무장에서 들려오는 함성에 채은수의 고개가 돌아갔다.

“연무장도 둘러봐도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천신우의 안내를 받아 연무장에 도착한 채은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열과 오를 맞추어 수련 중인 천씨세가 무인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살아 있었다.

‘설마 이 정도일 줄은…….’

아직 무신궁에 비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오대세가에 복귀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감탄하며 연무장을 돌아보는데 아는 얼굴이 눈에 띄었다.

“저분은 설마?”

무인들을 지도하느라 여념이 없는 조충헌을 발견한 그녀였다.

“혹시 아는 분입니까?”

천신우의 물음에 채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한때 무림맹에서 저를 지도해 주셨던 교관이세요. 고향으로 돌아가셨다고 알았는데 이곳에 계실 줄은 몰랐네요.”

채은수는 내심 섭섭한 표정이었다.

무신궁의 영입제안도 거절했던 조충헌이 어째서 천씨세가에 와 있는 것일까?

때마침 오후 훈련이 끝났다.

뒤늦게 천신우를 발견한 천씨세가 무인들이 우렁차게 외쳤다.

“대공자를 뵙습니다!”

“깜짝이야!”

장윤호가 호들갑을 떠는 것도 당연했다.

그만큼 천신우를 대하는 천씨세가 무인들의 자세는 남달랐다.

채은수의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단지 대공자라는 지위 때문이 아니야. 다들 진심으로 천 공자를 존경하고 있어.’

채은수조차도 무신궁의 무인들의 충성심을 얻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을 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때였다.

“형님!”

연무장을 가로지르며 천신혁이 달려왔다.

천신혁의 움직임은 채은수가 보기에도 가벼웠다. 천신우가 무림맹에 가 있는 동안 쉬지 않고 정진한 성과였다.

‘맞다. 동생이 있다고 했었지.’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천신우 형제를 바라보는 채은수의 눈동자에 부러움이 스쳤다.

그녀와 동생 채은영은 사이가 틀어진 지 오래였기에.

언젠가부터 채은영이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고, 지금에 와선 얼굴 보기도 힘들어진 것.

그때 천신혁이 채은수를 보더니 물었다.

“형님! 이분은 누구십니까?”

“소개가 늦었구나. 인사드려. 무신궁의 채은수 소저시다.”

“무신궁? 그렇다면 사룡의 일인인 그분이군요!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주위 반응도 폭발적이었다.

그러나 채은수에게 무례를 범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 모두 마음속으로나마 천신우와 채은수가 심상치 않은 관계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파혼 이후, 천신우가 여자를 가문에 데려온 것은 처음이었기에.

묘해지는 분위기를 잠재운 것은 천신우였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요. 식사하러 가지요. 가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천신우의 제안에 장윤호가 히죽 웃었다.

“기대해도 되겠지? 며칠 동안 육포만 먹었더니 속이 더부룩하더라고.”

“물론입니다.”

천신우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 * *

무신의 손녀 채은수의 방문에 천씨세가 전체가 들썩였다.

총관은 상에 오르는 요리를 하나하나 손수 점검했고, 가주 천무흔은 일전에 천신우와 함께 마셨던 최고의 명주를 일행에게 대접했다.

덕분에 모처럼 푸짐한 식사를 마친 천신우는 풍뢰권과 재회했다.

예상대로 풍뢰권은 구왕도로 가자는 천신우의 제안을 거부하지 않았다.

손을 휘휘 저으며 긍정의 의사를 표한 풍뢰권이 채은수를 보더니 눈을 부릅떴다.

“너는 분명히…….”

“기억하시네요. 오랜만에 뵈어요. 풍뢰권 어르신.”

동생인 채은영과 달리 풍뢰권과 안면이 있는 채은수였다.

“무림맹에 가더니 쓸데없는 혹들을 붙여왔구나.”

그렇다고 풍뢰권이 채은수의 합류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보나 마나 그 망할 늙은이 소행이겠지. 그래. 그 늙은이에게 물건은 전해줬느냐?”

“그게 말입니다. 이미 어르신께 주신 거라면서 받지 않으시더군요.”

“허! 그래서 그 쓸모없는 쇳덩이를 다시 갖고 왔단 말이냐?”

“그럼 어떻게 할까요?”

“너나 가져라. 필요 없으면 녹여서 요강이나 만들던가.”

무신의 검으로 요강이나 만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풍뢰권 말고 또 있을까?

“나중에 다른 말씀 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혹시 몰라 쐐기를 박는 천신우였다.

“내가 뭐가 아쉬워서. 됐고. 이만 가보마.”

언제 출발할지 묻지도 않고 휑하니 사라져 버린 풍뢰권.

‘괜찮을까.’

솔직히 조금은 걱정이 되는 천신우였다.

채은수야 조부의 지인이니 그러려니 하겠지만…….

과연 장윤호가 적응할지는 미지수였다.

* * *

물론 천신우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장윤호는 첫날부터 엄청난 친화력을 보여줬다.

풍뢰권이 턱을 긁는 모습을 보자마자 바로 물을 갖다 바친 것이다.

“내가 목마른지는 어떻게 알고.”

“하하하. 척하면 척이지요. 언제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만 하십시오.”

사회생활만큼은 천신우보다 뛰어난 장윤호였다.

“고놈, 어디 가서 굶어 죽을 일은 없겠구나.”

목을 축인 풍뢰권이 느닷없이 권왕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나를 처음 보는 놈도 저리 지극정성인데 너는 제자란 놈이!”

물론 권왕도 예전처럼 무기력하게 나가떨어지진 않았다.

옷을 툭툭 털며 풍뢰권을 힐끔 노려보며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망할 노인네 같으니라고.”

“…….”

오히려 지켜보던 채은수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이제 걱정은 천신우가 아닌 그녀 몫이었다.

오히려 천신우는 어젯밤 있었던 일을 생각하느라 바빴다.

어젯밤, 무신의 검을 자운검에 가까이 가져가자 엄청난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빛이 모두 사라지고 나자, 그곳엔 건드리기만 해도 베일 것만 같은 예기를 뿜어내는 한 자루의 검만이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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