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환생-65화 (65/171)

# 65

학사환생 065화

응경대인은 천신우와 바닥에 수북이 쌓인 전표들을 번갈아 보았다.

무림 최대의 전장인 만수전장에서 발행한 전표.

눈대중으로도 100만 냥은 되어 보였다.

저만한 거액을 손에 쥐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여야 할까.

수십 명의 목숨과 바꿔도 얻기 힘든 돈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눈앞의 천신우 하나만 죽이면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애초에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스스로 무덤을 파는군. 그래도 무림맹 소속이니 좋게 넘어가려 했더니만.”

응경대인이 탐욕과 살기가 넘실거리는 눈으로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놈의 목을 가져와라.”

응경대인의 명령에 방마다 잠복해 있던 부하들까지 복도로 뛰쳐나왔다.

그러나 천신우는 이미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벽을 타고 내달리며 놈들에게 비수를 날렸다.

파바바바박!

정확히 이마에 비수가 꽂힌 무인들은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군더더기 없는 천신우의 솜씨에 응경대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곱게 죽을 생각은 없어 보이는군.”

기습이 실패했음에도 여전히 응경대인의 표정엔 여유가 있었다.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스윽.

응경대인이 신호를 보내자 천장이 소리 없이 열렸다.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 것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사내였다.

“……!”

지금까지 사태를 관망하던 중년 무인이 깜짝 놀랐다.

설향의 무인들이 수준 높은 것은 알았지만 눈앞의 사내는 느낌이 달랐다.

정말이지, 이런 곳에서 경비나 서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후회해 봐야 늦었네.”

응경대인의 눈빛은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무림인을 손님으로 받다 보니 지금껏 크고 작은 분쟁이 많았다.

권력을 앞세우는 이들이야 무림맹 연줄로 해결했지만, 현장에서 난동을 피우는 놈들은 직접 무력을 동원해야 했다.

그때마다 눈앞의 사내는 응경대인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응경대인은 오늘도 그럴 것이라 굳게 믿었다.

“자네가 지금까지 쓰러뜨린 녀석들 몸값을 전부 합쳐도, 이 친구가 받는 돈의 절반이 되지 않는다네.”

천신우가 보기에도 확실히 그럴 만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축하해. 그 돈 굳었네.”

응경대인이 코웃음을 쳤다.

“허세도 적당히 부려야지.”

여유만만하게 외치던 응경대인이 순간 흠칫했다.

“……설마?”

어째서 눈치채지 못했을까.

자신이 고용한 사내가 언젠가부터 움직임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천신우가 응경대인을 향해 걸음을 내딛자, 거짓말처럼 사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 순간, 응경대인과 중년 무인의 머릿속엔 같은 의문이 떠올랐다.

‘언제? 어떻게?’

물론 천신우는 대답해 줄 생각이 없었다.

저벅.

천신우의 발소리가 저승사자의 그것처럼 섬뜩하게 들렸다.

“자, 잠깐!”

응경대인이 뒷걸음질 쳤다.

이렇게 죽기엔 삶에 대한 집착이 너무나 컸다.

‘어떻게든 지금 상황만 넘기면.’

“내 돈 전부를 주마! 내가 평생 모은 재산 모두를!”

그러나 천신우의 입가에 떠오른 것은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네가 돈이 어디 있어.”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얼마나 부자인지…….”

응경대인은 뒤늦게 천신우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설마…….”

응경대인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바닥에 쌓인 전표를 향했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저 많은 돈이 어디서 났나 했는데.’

“이런 개자식! 나를 가지고 놀았구나! 감히 내 돈으로!”

천신우가 말을 잘랐다.

“네 돈 아니잖아.”

바닥에 엎드리다시피 허겁지겁 전표를 끌어안던 응경대인이 눈을 벌겋게 떴다.

“내 돈이 아니면! 대체 누구 돈이란 말이냐!”

“당연히.”

천신우의 눈동자가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떠는 여인에게 향했다.

“강제로 여기 끌려온 사람들 돈이지.”

응경대인이 실소를 흘렸다.

“이제 보니 영웅 놀이에 빠진 놈이었구나.”

당연히 천신우 입장에선 놀이 따위가 아니었다.

전생에서 하지 못한 일을 이제 하는 것뿐.

물론, 그 사실을 응경대인에게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면 네 말대로 놀이는 끝내도록 하지.”

천신우가 검을 들어 올리던 그때, 중년 무인이 그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는 응경대인이 죽으면 여러모로 곤란한 입장이었다.

“그쯤 해두게. 그러지 않으면…….”

하지만 중년 무인은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가슴에 묵직한 충격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가슴뼈가 박살 나며 그의 몸이 일순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다음 순간!

콰앙!

그대로 날아가 문을 박살 내고 방구석에 처박힌 중년 무인이었다.

“끼어들어도 된다고 허락한 적 없다만.”

중년 무인은 천신우의 목소리를 미처 듣지도 못하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 틈을 타서 전표를 챙겨 끌어안고 달아나려던 응경대인의 발목에 비수가 싸늘하게 날아와 박혔다.

“끄아아악!”

비명을 지르면서 앞으로 고꾸라진 그의 나머지 발목과 양손에 비수가 연달아 꽂혔다.

파바박!

사지가 제압당한 응경대인을 향해 천신우가 다가섰다.

처음부터 죽일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은 것은 놈이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죽음의 공포 정도는 느끼게 해줘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었다.

“사, 살려줘…….”

사지를 꿈틀거리며 목숨을 구걸하는 응경대인의 정수리에 천신우의 검이 내리꽂혔다.

푸우욱!

비대한 몸이 한 차례 꿈틀거리다 이내 축 늘어졌다.

검을 뽑아 피를 털어버린 천신우는 복도를 돌며 닫혀 있던 방문을 모조리 열었다.

방 안에, 여인과 뒤엉켜있는 손님은 없었다.

오히려 문이 열리자마자 천신우를 급습하기까지 했다.

“……!”

그러나 놀란 것은 천신우가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이었다.

천신우는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날아드는 주먹을 손바닥으로 움켜쥐었던 것이다

우두둑!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아아악!”

물론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천신우는 설향의 손님들을 차례로 제압해 한군데에 몰아넣었다.

어떤 놈은 속옷 차림으로 창문 아래로 뛰어내렸지만, 그렇다고 천신우의 추격을 피할 수는 없었다.

바닥에 착지하기도 전에 천신우의 손에 목덜미를 붙들렸기 때문이다.

그대로 방에 처박힌 놈은 욕지거리를 내뱉다가 움찔했다.

“이런 개자식이! 내가 누군지 알고!”

방에 갇혀 있는 자들의 면면을 뒤늦게 확인한 것이다.

그들 대부분이 근방에 이름을 날리는 고수들. 하지만 그들마저 제압당한 상황에 천신우에게 대든다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다들 천신우의 시선을 회피하는 가운데, 중견 상단의 자금담당자인 중년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릴 어쩔 생각이시오?”

“그건 무림맹 집법전에서 결정하겠지.”

다행히 당장 죽을 일은 없다는 확신이 들자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천신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돌아섰다. 마음 같아선 모조리 목을 날려 버리고 싶지만 단지 이곳의 손님이란 이유로 그럴 수는 없었다.

여전히 붉은 등이 너울거리는 복도.

천신우가 구해낸 여인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다.

여전히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힌 여인들이 있는가 하면, 죽은 응경대인의 시체에 침을 뱉는 당찬 여인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에 누구도 바닥에 떨어진 돈에 손을 대는 사람은 없었다.

천신우가 전표를 주워 여인들에게 건넸다.

“가져가. 하나씩 가지고 떠나.”

“……!”

여인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껏 탈출을 시도했던 여인들은 모두 붙잡혀왔다. 그리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응경대인의 부하들에게 강간당하고 갈기갈기 찢겨 죽었다.

그걸 보며 평생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이렇듯 갑작스럽게 자유를 되찾을 기회가 생긴 것이다.

심지어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돈까지 함께 주어졌다.

너무 기뻤지만 동시에 믿어지지 않았다.

여인 하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공자님…… 저희가…….”

“그래도 되냐고? 당연히.”

애써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했지만 천신우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사실, 전생에서도 모든 진상이 밝혀진 후에 이곳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피해자들을 조금이라도 돕고 싶다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생기 없는 눈동자를 보는 순간 깨달았다.

그녀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음을.

다행히 지금은 그때보다 시기가 빨라서인지 여인들의 눈빛이 달랐다.

‘응경대인이 죽은 광경을 직접 목격한 것도 이유라면 이유겠지. 지금이라면 그녀들도 아픔을 딛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천신우의 진심 어린 바람이었다.

“어서 가래도?”

하지만 여인들은 선뜻 떠나지 못했다.

앞서 말을 꺼냈던 여인이 전표를 천신우에게 내민다.

“그래도 이 돈은 공자께서 가지세요. 저희를 구해준 보답이라고 생각하시고.”

“대가라면 이미 충분히 챙겼어.”

천신우는 품에 숨긴 책자를 만지작거렸다.

응경대인의 금고에서 전표와 함께 취한 그것은 장부였다.

응경대인은 만일을 대비해 지금까지 뇌물을 바친 내역을 낱낱이 기록해두었다.

“그러니까.”

천신우가 여인들을 돌아보며 미소를 보였다.

“저놈들 보란 듯이 행복하게 살아.”

전생에 해주지 못했던 그 한마디.

천신우는 조금이나마 홀가분해진 기분이었다.

물론 이제 시작임을 안다.

응경대인은 무림맹의 부패한 단면에 불과하다.

‘여기 적힌 놈들조차 마찬가지.’

무림맹의 고위급 인사들이 허술하게 이런 장부에 이름을 남길 리가 없다.

그 정도 되는 거물들은 뇌물 하나를 받더라도 아랫사람을 통해 은밀하게 받는다. 여러 경로를 거쳐 자금을 세탁하는 것은 물론이다.

‘결국, 여기 개입한 놈들의 실체를 밝혀내려면 보다 고강도의 조사가 필요하다.’

물론 천신우 혼자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조력자가 필요했다.

감찰각주의 눈치를 보지 않고 조사를 진행할 정도의 힘을 지녔으며, 동시에 믿을 만한.

떠오르는 얼굴은 하나뿐이었다.

‘이건 역시 무신에게 가져갈 수밖에.’

* * *

설향에 다시 멸악전단 무인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이 사건을 수습하는 사이, 무림맹으로 복귀한 천신우는 멸악전단 단주 심인기에게 보고를 마쳤다.

물론 장부에 관한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심인기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다.

단지 심인기가 감당하기 힘든 내용이었기 때문.

그길로 수미관을 찾아간 천신우였다.

국밥을 먹던 무신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요즘 무림맹에 네놈의 명성이 자자하더구나.”

“소문이 과장된 것뿐입니다.”

“겸손 떨기는. 수하에게 들었다. 시험에 잠입한 정체불명의 침입자를 제압한 것이 네놈이라며.”

“정말 모르시는 겁니까?”

천신우는 자리에 앉으며 무신을 떠봤다.

“손녀를 돕고자 시험에 사람을 잠입시킬 분은 아니신 거로 압니다만. 혹시 정체불명의 침입자에 대해 아는 것이 있으시다면 귀띔이라도 해주시지요.”

“으허허! 다짜고짜 추궁부터 하는 게냐? 알고 싶은 것이 있다면 네놈도 뭔가를 내놓아야지. 그게 거래 아니겠느냐.”

천신우가 탁자 위에 응경대인의 장부를 올렸다.

“이건?”

장부를 펼쳐보던 무신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이걸 어디서 얻었느냐?”

“설향이란 기루에서 확보한 증거입니다.”

“얼마 전에 네놈이 해결했다던?”

“알고 계셨군요.”

무신이 헛기침을 내뱉었다.

“어쩌다 들었을 뿐이다. 아무튼!”

이내 진지하게 묻는 무신이었다.

“이걸 나 말고 또 누구에게 보여주었느냐?”

“어르신이 처음입니다. 설마 저를 죽여 입을 막으시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농담 한번 살벌하게 하는구나. 이놈아, 걱정돼서 그런다. 네놈이야 여기 적힌 명단만 보고 쉽게 생각했겠지만, 이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야.”

천신우는 무릎에 올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과연 무신을 찾아온 보람이 있었다.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과연 무신이 가진 것은 강력한 무공만이 아니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통찰력.

그 또한 무신이 가진 힘이었다.

“이걸 파고 들어가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엄청난 거물들이 나올 거다. 물론 시간은 걸리겠지. 조사과정에서 살해위협도 있을 거고.”

“두려우십니까?”

“으하하하!”

무신이 호탕하게 웃었다.

“이젠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헛소리 그만하고 내게 맡겨라. 책임지고 이번 일에 연루된 놈들이 죗값을 치르게 만들어주마.”

“감사합니다. 이제 시험에 잠입한 놈에 대한 언질만 해주시면 됩니다.”

천연덕스러운 천신우의 태도가 싫지는 않은지 무신이 껄껄 웃었다.

“지금 보니 뻔뻔한 것도 그 망할 늙은이를 닮았구나. 오냐! 네놈 덕에 영이가 위험을 피했으니 말해주마. 내가 사람을 풀어 확인한 바에 따르면 얼마 전부터 무림에…….”

갑자기 무신이 고개를 돌렸다.

헐레벌떡 달려온 부하가 다급히 외쳤다.

“큰일 났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