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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환생-64화 (64/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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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환생 064화

천신우는 손을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천신우입니다만.”

사나운 인상의 사내가 천신우를 위아래로 훑었다.

“이번 시험에서 전투전형 1위를 했다고 들었는데. 굳이 우리 멸악전단을 지원한 이유가 있는 것이냐?”

“……!”

합격자들이 술렁였다.

천신우가 멸악전단에 지원할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는 얼굴.

그도 그럴 것이 멸악전단은 합격자들이 기피하는 조직 1순위였던 것이다.

뭔가 착오가 있을 거라 수군거리는 합격자들도 여럿이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천신우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드리도록 하지요.”

“알겠다. 능력 있는 인재를 마다할 이유는 없지.”

사내가 천신우 외에 여럿을 호명했다.

이름이 불린 합격자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어두웠다.

사전에 희망하는 조직을 10순위까지 적어낸 상황. 당연하게도 그들 모두 멸악전단은 최하위로 적어내거나 아예 지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멸악전단에 배정받았다는 것은 그들이 다른 조직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다들 표정이 좋지 않군. 내키지 않는다면 지금이라도 포기해라. 내가 책임지고 제9지부로 보내줄 테니.”

“…….”

무림맹 지부라고 해서 중앙보다 무조건 열악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편한 곳도 있었다. 승진이 어려워서 문제지.

하지만 제9지부만큼은 예외였다.

그곳은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였으니까.

얼음으로 뒤덮인 제23지부만큼이나 기피대상일 수밖에.

“그럼 포기하는 인간은 없는 걸로 알겠다. 나를 따라오도록.”

멸악전단 관계자를 뒤따르는 합격자들의 표정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우울했다.

천신우만 제외하고.

덤덤하게 태화전을 나서는 천신우를 향해 모용비가 손을 흔들었다.

모용비는 무림맹 전투조직의 꽃이라 불리는 천검단에 지원했다.

전생대로라면 모용비가 잠재력을 폭발시키는 것은 천검단에 배속된 후부터다.

고개를 끄덕여 보이던 천신우가 순간 멈칫했다.

합격자들 사이에서 혀로 핥는 것처럼 기분 나쁜 시선이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시선이 사라진 후였다.

* * *

무림맹의 다른 조직들과 마찬가지로 멸악전단에도 별도의 건물과 숙소가 존재했다.

멸악전단 관계자는 천신우와 신입들을 건물 내의 대기실에 데려다주었다.

“긴말 하지 않겠다. 너희가 멸악전단을 꺼리는 것 이상으로, 우리 역시 무능한 놈들은 질색이다. 그러니 부디 최선을 다해라.”

“알겠습니다.”

천신우를 제외한 신입들은 하나같이 힘없는 목소리였다.

아직도 그들은 멸악전단에 배정받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그럼 잠시 이곳에서 대기하도록!”

관계자는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덩그러니 남겨진 신입들의 관심은 당연히 천신우에게로 옮겨갔다.

“정말 멸악전단에 자원한 거야?”

친하지도 않은데 물어오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 궁금했던 모양.

“그래.”

“어째서?”

멸악전단의 악명을 익히 들은 그들이었다.

멸악전단은 무림맹 소속이지만 무림 전역이 작전구역이다.

당연히 무림맹 외부에서 보내는 시간도 다른 조직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다.

심지어 멸악전단에 배정되는 작전은 대개 다른 조직들이 꺼리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무림맹의 궂은 작전을 도맡아 하는 전투조직이 바로 멸악전단이었다.

“혹시 한곳에 틀어박혀 있으면 좀이 쑤시는 성격인가? 설령 그렇다 해도 청룡단이나 주작단 같은 선택지가 있는데 굳이?”

청룡, 주작, 백호, 현무.

무림맹 외의 지역을 동서남북으로 나눠 각각 작전구역으로 삼는 4개의 전투조직.

모용비가 지원한 천검단만큼은 아니어도 충분히 고려할 만한 대상이었다.

“그러게. 나도 궁금한데?”

거듭되는 질문에도 천신우는 침묵했다.

굳이 이들에게까지 설명해 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에.

* * *

“임무가 많아서 우리 멸악전단에 지원했다?”

멸악전단 단주 심인기는 무인답지 않게 매우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신입들을 대상으로 조직의 수장이 면담을 갖는 것은 무림맹의 오래된 관례.

하지만 다른 조직의 수장들과 달리 심인기의 면담방식은 형식에 그치지 않았다.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군.”

신입들이 특히 까다로워하는 성격.

하지만 천신우는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지금 멸악전단 단주 심인기의 모습은 전생에서 기억하는 그대로였기에.

“임무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허송세월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심인기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건 다른 신입들이 우리 멸악전단을 기피하는 이유이기도 하네만.”

심인기가 나직이 덧붙였다.

“진정 그런 이유라면 다른 조직에 가도 전혀 문제없어. 자네 정도 되는 인재가 원한다면 없는 임무라도 만들어줄 테니.”

어느 조직이든 유능한 인재를 필요로 한다.

수석을 차지한 천신우를 박대할 조직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저는 단주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멸악전단에 지원했습니다.”

“나에 대한 소문이라면?”

“단주님께서는 연차나 직급에 상관없이 오직 실력 본위로 재량권을 부여해 주신다고 들었습니다.”

심인기는 부정하지 않았다.

“사실일세.”

실력만 있다면 신입에게도 무한재량권을 주는 유일무이한 조직.

그것이 바로 천신우가 멸악전단을 선택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였다.

물론 무의미한 파벌싸움에 얽힐 일이 없다는 것도 하나의 요인.

심인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내가 만나본 신입 중에 가장 흥미롭군. 가장 당차기도 하고.”

심인기가 서랍장을 열자 임무명령서가 쏟아져 나왔다.

다른 조직이라면 1분기 동안 처리할 업무량. 그러나 멸악전단에선 고작 1개월 업무량에 불과했다.

“이 중에 골라보게. 자네의 첫 임무로 뭐가 좋을지.”

과연 심인기다운 결정.

“물론 최하급 난이도네. 아무리 이번 차수 최고의 신입이라지만 처음부터 중급 난이도 이상을 맡길 수는 없지.”

천신우의 눈길이 임무명령서들을 차례로 훑고 지나갔다.

무림맹 문서양식이라면 누구보다 빠삭한 천신우였다.

임무명령서 겉면에 표기된 분류번호만 봐도 대충 어떤 임무인지 예상이 됐다.

“이걸로 하겠습니다.”

“무슨 임무이든 상관없다는 건가. 대단한 자신감이군.”

심인기는 천신우의 행동을 자신감의 표현으로 받아들였다.

“좋다. 그 임무는 자네가 임시로 배정될 조에 맡기도록 하지. 여길 나가면 숙소로 안내해 줄 거다. 그곳에서 개인보급품을 받고 임무가 시작될 때까지 대기하도록.”

문을 열고 나가려는 천신우에게 심인기가 덧붙였다.

“한 가지 더. 첫 임무 결과에 따라 적합한 부서에 배치해 주지. 혹시 원하는 곳이 있나?”

“일대로 갔으면 합니다.”

멸악전단은 다섯 개의 대로 나뉘었다.

일부터 오까지.

숫자가 낮을수록 실력이 뛰어났고 당연히 맡는 임무도 중요했다.

“일대일조라면 몰라도 일대의 다른 조는 고려해 보지.”

일대일조는 멸악전단의 최정예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실력과 경력 모두 굉장했고 자부심도 뛰어났다.

아무리 천신우라 하더라도 고작 임무 하나를 마치고 일대일조에 편성될 수는 없었다.

이미 예상한 바였기에 천신우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문이 닫힌 후에도 심인기는 한동안 천신우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차수마다 새로운 인재들이 들어오고 금세 나가지만 천신우만큼은 특별한 느낌이었다.

단지 시험순위를 떠나 무인으로서의 자세 자체가 다른 것이다.

“궁금하군. 과연 얼마나 버틸지.”

나직이 중얼거린 심인기가 외쳤다.

“다음!”

* * *

천신우는 개인보급품 상자를 열어보았다.

‘익숙한 느낌이군.’

무림맹의 어느 조직이나 신입에게 주어지는 개인보급품은 똑같았다.

하다못해 학사로 처음 무림맹에 발을 디뎠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출입증과 필기구. 비수와 구급약.

개인보급품을 확인한 천신우가 상자를 옆으로 밀었다.

방금 전에 천신우를 숙소로 안내한 멸악전단 무인은 개인보급품을 지급하고는 사라졌다.

다소 쌀쌀맞은 태도에는 이유가 있었다.

신입 중에 상당수가 현실이 상상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조기에 그만두기 때문.

‘사실 선배들 입장에선 굳이 신입에게 정을 붙일 필요가 없지.’

물론 천신우가 조직에 적응하고 나면 그때는 모두의 시선도 달라질 것이다.

조직생활이 힘든 만큼 동료애도 더욱 커지게 마련이니까.

‘그나저나 당장 내일부터 임무 시작이라. 일 처리 하난 빨라서 좋군.’

바로 내일이 천신우의 첫 임무가 시작되는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 * *

반쯤 부서진 장원 문으로 천신우가 나왔다.

피는커녕 먼지 하나 묻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천신우의 뒤에 펼쳐진 광경은 그야말로 지옥도가 따로 없었다.

이번 사건을 일으킨 주범들이 사지가 잘려 나간 채로 바닥에 너부러져 있었다.

“……대단하군.”

첫 번째 임무 때와는 천신우를 바라보는 동료들의 시선이 사뭇 달랐다.

무림맹 내에서도 살인적인 일정으로 악명이 높은 멸악전단이다.

그러나 천신우는 그 멸악전단 무인들이 혀를 내두를 만큼, 엄청난 속도로 임무를 수행해 나갔다.

멸악전단에 배속되고 불과 한 달 만에, 열 건이 넘는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한 천신우였다.

처음엔 최하급 난이도 임무로 시작했지만, 어느새 중급 난이도 임무까지 거뜬히 처리했다.

그럼에도 천신우는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으로 물었다.

“설향 임무는 언제입니까?”

“내일 출발한다더군. 물론 우리 조가 아닌 다른 조가 주도할 거다. 너도 원한다면 휴식해도 된다만.”

“그렇군요. 복귀하는 즉시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동료가 질린 얼굴로 대답했다.

멸악전단 일대 소속으로 자부심이 강한 그였지만 천신우 앞에선 한 수 접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하루 이틀 저러는 것은 객기지만 그게 계속 반복되면 실력이다.

“그나저나.”

천신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동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은 특히 독기 어린 눈빛인데. 착각인가?”

착각이 아니었다.

천신우는 지금 어느 때보다 날이 서 있는 상태였다.

설향이라는 기루에서 벌어진 천인공노할 사건.

전생에 그 내막을 알고서 얼마나 분노했던지.

물론 그때는 이미 너무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일 수가 있는 것이다.

‘드디어 바로잡을 기회가 왔군.’

천신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 * *

사흘 후.

천신우는 멸악전단 일대육조 무인들과 함께 설향을 급습했다.

이곳에서 인신매매가 이뤄진다는 제보가 들어왔기 때문.

하지만 마당을 파헤치고 건물바닥까지 뜯어봤음에도 아무런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

조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허위제보였나.”

천신우는 고개를 저었다.

‘허위제보가 아니야. 미리 단속정보가 새어나간 것뿐.’

물론 그 사실을 모르는 조장은 정중하게 사과했다.

“미안하게 됐소. 복구비용은 무림맹에서 지불할 거요.”

“별말씀을요.”

“돌아간다.”

철수하는 조장을 넉넉한 살집의 설향 주인이 잡아 세웠다.

“멀리서 힘들게 오셨는데 그러지 말고 안으로 드시지요. 참한 아이들을 준비해놨습니다.”

흔한 일이었다.

무림맹 무인들에게 줄을 대려고 극진히 접대하는 것은.

하지만 조장은 칼처럼 잘랐다.

“일없소.”

함께 돌아서는 멸악전단의 무인들도 전혀 아쉬운 기색이 없었다.

천신우가 지금까지 지켜봐 온 모습과 일치했다.

‘고된 임무에도 불구하고 절대 뇌물과 향응을 받지 않는다.’

무림맹 조직들은 비교적 도덕성을 갖춘 편이지만 멸악전단처럼 아예 흠이 없진 않았다.

대가성 없는 접대 정도는 그냥 눈감아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멸악전단이 부패의 온상으로 낙인찍혀 단주와 심복들이 파면당했다니. 웃기지도 않지.’

그 또한 칠객의 일인인 감찰각주의 작품이었다.

놈은 증거를 조작해 마교의 걸림돌인 멸악전단 단주를 제거했던 것이다.

감찰각주를 반드시 처단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였다.

‘물론 지금은 설향 사건부터 처리해야겠지.’

천신우는 설향 사건의 정확한 내막을 똑똑히 기억했다.

설향에서 인신매매가 이뤄지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무림맹에 제보가 들어온 것도 여러 차례. 그런데도 지금껏 혐의가 입증된 적은 없다.

무림맹 고위급 인사가 향응을 받는 대가로 뒤를 봐주고 있기 때문.

고위급 인사는 권력을 남용해 무림맹 수사를 무마하고 단속정보를 미리 흘리기까지 했다.

‘결국 정상적인 방법으로 설향에서 벌어지는 범죄행각을 밝혀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천신우는 이미 방법을 생각해둔 후였다.

지금껏 쌓아온 성과를 토대로 멸악전단 단주 심인기로부터 받아낸 단독작전권한.

급여인상이나 처우개선을 마다하고 천신우가 택한 보상이었다.

원래도 최정예 무인들에겐 단독작전권한이 주어지곤 했기에 이례적인 일까진 아니었다.

‘동료들이 무림맹으로 복귀하면 다시 평소처럼 영업하겠지. 그때를 노린다.’

* * *

다음 날 저녁.

설향 내부.

이곳의 주인 응경대인은 손님들을 맞이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멸악전단 무인들이 뜯어낸 바닥은 이미 복구가 끝난 상태.

단속을 피해 다른 장소에 옮겨뒀던 기녀들도 다시 데려왔기에 영업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

“흐흐흐흑.”

납치당해 이곳에서 원치 않는 기녀 생활을 하는 여인이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기본적인 무공까지 익힌 문파의 후기지수였지만 이곳에서 탈출할 방법은 없었다.

설향 소속 무인들뿐만 아니라 이곳을 찾는 손님들조차 그녀보다 고수였기에.

방마다 돌아다니며 분위기를 점검하던 응경대인이 역정을 냈다.

“어허! 어디서 울먹여! 손님들 술맛 떨어지게!”

하지만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중년무인은 음흉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흐흐흐. 울게 놔두게.”

정상적인 기루도 많다.

그런데도 굳이 인신매매가 자행되는 기루를 찾는다면 이유가 있을 수밖에.

중년무인의 경우 가학적인 성적 취향을 지닌 인물이었다.

“이리 와봐라.”

손목을 잡힌 여인이 저항했지만 중년무인의 미소는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

“확실히 무가의 여식들은 꺾는 맛이 있단 말이지.”

여인을 눕히고 머리를 바닥에 처박은 채로 곧장 바지춤을 내리던 중년무인이 멈칫했다.

설향 주인인 응경대인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약속한 것처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붉은 등이 벽마다 걸린 복도를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뚜벅뚜벅.

상대는 발소리를 숨길 생각도 정체를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님은 아니었다.

이곳을 찾는 손님 중에 저렇게 눈빛이 살아 있는 인간은 없었으니까.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체면을 벗어던지고 본능에 몸을 맡기는 그들이었다.

“당신은…….”

응경대인은 상당히 눈썰미가 좋은 편이었다.

그는 며칠 전에 이곳을 뒤엎었던 무림맹 멸악전단 무인들을 기억했다.

분명 그들 중에 천신우의 얼굴을 봤던 기억이 난다.

“그날 접대를 받지 못해 아쉬우셨나보오. 미리 연락을 주셨으면 제대로 자리를 마련했을 텐데.”

천신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찾아온 용건은 그게 아닌데.”

설향 소속 무인들이 응경대인을 스윽 바라봤다. 천신우를 제압해도 되는지 묻는 것이다.

응경대인은 고개를 저었다.

상대가 무림맹 소속이니만큼 섣불리 손을 썼다간 뒷수습이 어려워질 수도 있었다.

“그럼 무슨 일로?”

“진실을 밝히려는 것뿐이야.”

“밝히려는 진실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영업방해는 곤란하오. 오늘은 이만 돌아가고 정식으로 절차를 밟아…….”

천신우가 멸악전단 단주의 직인이 찍힌 임무명령서를 펼쳐보였다.

설향 무인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임무명령서에 내용이 없었기 때문.

하지만 응경대인 옆의 중년무인은 그게 뭔지 알아보았다.

“어린 나이에 단독작전권한이라. 보통 실력이 아니군. 그래.”

어느새 깔고 뭉개던 여인을 밀쳐내며 자세를 바로잡은 그가 물었다.

“어쩔 셈인가? 설마 혼자서 이곳에 있는 모두를 쓸어버리고 원하는 바를 얻어낼 생각은 아니겠지?”

천신우는 대답 대신 행동으로 보여줬다.

서걱! 서걱!

순식간에 팔이 잘려 나간 설향 무인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크아악!”

“……!”

중년무인이 미간을 좁혔지만 응경대인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러니 혼자서도 그리 위풍당당하셨던 거군. 좋소. 얼마면 되오?”

응경대인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의 그 투철한 정의감, 그 확고한 신념. 얼마면 살 수 있소?”

그는 돈으로 뭐든지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지금까지 수많은 무인들이 응경대인에게 돈을 받고 신념을 내팽개쳤다.

물론 거절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상대는 확실히 싹을 잘랐다.

다시는 설치지 못하도록.

하지만 천신우의 반응은 정말이지 예상 밖이었다.

“나도 하나만 묻지.”

품에서 꺼낸 가죽주머니를 마치 암기처럼 던지는 천신우였다.

“피하십시오!”

응경대인의 호위가 가죽주머니를 쳐냈다.

촤아악!

가죽주머니가 찢어지며 안에 들어 있던 전표들이 쏟아져 나왔다.

“……!”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려 1만냥짜리 전표들이 눈송이처럼 이리저리 휘날리고 있었다.

근방에서 떵떵거리는 부자인 응경대인조차 침을 꿀꺽 삼키는 가운데.

천신우의 낮은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어때? 이거면 네 목숨 값으로 충분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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